< 22, 살(殺). >
22, 살(殺).
‘삼문협에서 절명이라면 절명곡이겠지.’
이훤은 무암자가 살해당했다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 사문의 비급까지 훔쳤다. 그런 사람이 딸을 살릴 수 있는 해약을 얻었음에도 자결할 리 만무했다.
‘죽였다면 누가 죽였을까?’
이훤은 슬퍼하는 무당파의 문도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인간은 세 가지 삶을 지녔다고 하지 않던가.
모두에게 보이는 삶과 친인에게만 보여주는 삶.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삶이다.
그렇기에 이훤은 사람을 대할 때 불신(不信)을 당연시했고, 거래를 전제로 관계를 설정했다. 그런 그가 회귀 이후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믿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망아취자와 노군뿐이다.
‘며칠 동안 곡기를 끊어서 허약한 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접근했다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으리라.’
무당쌍선과 무당십학이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애도하는 순간에도 이훤은 그들의 표정과 행동, 버릇을 살폈다.
‘물론 외부에서 살수가 왔을 수도 있겠지.’
어용협에 오기 전 만났던 개방도의 말에 의하면 백암진인과 청암진인은 모두 이른 아침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그러니 살수가 무암자를 죽였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된다면 혐의는 외부에서 찾아야 했다.
종초홍이나 고천락도 소마의 배후와 연결될 수 있으리라.
그것을 깨달았지만,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호탕하고 누구나 사귀고 싶어 하는 종초홍도, 회귀 전 큰 인연이 있던 고천락도, 그리고 회귀를 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는 반덕구조차 여전히 불신의 단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초홍에게 연락을 맡기고, 고천락에게 인왕부 보고를 비우게 했으며, 반덕구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이유는 간단했다.
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닌 말로 천문진인의 비급이 사라진다고 해도 이훤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인왕부의 보고보다 더 많은 미래의 지식을 지녔다. 반덕구가 그를 방해하려면 술을 몇만 병은 마셔야 할 것이다.
아닌 말로 술을 마시는데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보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술이나 마시면 족하지만······.’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 소마였다.
그 새끼만은 반드시 찢어 죽여야 했다.
이훤이 생각에 잠긴 사이 배가 도착했다.
“자네로 인해 무사히 돌아가게 되었네. 이번 빚도 언제고 꼭 갚겠네.”
“그 때 함께 보세.”
백암진인에 이어 청암진인도 인사를 했지만, 전과 같이 장난을 치지 않았다. 이훤은 헤어짐을 고하기 전 작은 제안을 했다.
“천문진인의 비급을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내용을 보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백암진인은 품안의 비급을 서슴치않고 내밀었다.
청암진인은 자신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사문의 비급을 내밀었음에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네 덕에 돌아온 것이야. 그 정도 자격은 있네.”
이훤은 조심스럽게 비급을 건네받은 후 말릴 틈도 없이 절반으로 찢었다.
촤악!
“이게 무슨 짓이냐?”
청암진인의 일갈과 함께 무당십학이 검을 뽑았다.
하나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 비급을 백암진인과 청암진인에게 건넸다.
“강 건너 하남성에 이르면 소림의 영역이겠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나눠 놓으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누군가 읊조렸다.
“사숙조의 유진을 훼손하다니!”
이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러니 백암진인께서 술 한 잔 사주시겠다고 하셨던 말은 지키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술자리를 취소하는 건 정마대전 후 정전협정을 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것을 알 리 없는 백암진인은 한참 동안 쪼개진 비급과 이훤을 번갈아봤다.
“후우, 지금까지의 빚은 없던 걸로 치겠네. 돌아가자.”
청암진인은 후반부를 받아들고, 침음을 흘렸다.
“서로 비슷할 거라고 봤지만, 아니었어. 자네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배는 무당의 문도들을 태우고, 강을 건넜다. 잠시 후 무사히 도착했다는 의미의 호각이 울렸다.
이훤은 그제야 헛웃음을 지었다.
“흥! 쌍선씩이나 되는 자가 남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다니. 무당파의 꼴도 가관이로군.”
그는 일부로 비급을 찢으며 쌍선의 표정을 살폈다.
갑작스런 기행에 쌍선 정도 되는 고수들도 잠시나마 속내를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문진인의 비급은 내용이야 어찌됐든 사문의 보물이 아니던가.
한 명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한 명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후자도 뒤늦게 노발대발했으나, 이훤의 눈썰미를 피할 수 없었다.
이훤은 무암자의 시신이 자리했던 마차에서 술병을 찾아냈다. 아마 청암진인이 마시려고 쟁여뒀던 것이리라. 마개를 따고 술병을 기울이는 순간 알싸한 향과 함께 속을 편안하게 만드는 술기운이 휘몰아쳤다.
“하아! 역시 이 세상에 믿을 건 너밖에 없구나.”
술 한 병을 비운 후에야 강 건너를 바라봤다.
“쯧.”
이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만에 하나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칠 성, 아니 육 성에만 이르렀어도 범인을 그냥 보내지 않았으리라. 무당의 문도들이 방해한다면 모조리 쓰러트리면 될 일이 아닌가. 육 성에만 이르러도 무당십학의 검진이 우스웠고, 쌍선의 합격술도 감당할 수 있었으리라.
하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이훤은 느낄 수 있었다.
육 성이 멀지 않았음을 말이다.
본래 전생에서는 수많은 고초로 겪은 후에나 닿았던 경지가 아니던가. 한데 회귀 후에는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마치 기분 좋게 마시면 술에 취하지 않는 것처럼 기분 좋게 생활하니 무위가 저절로 증가하는 듯했다.
이훤은 건배를 하듯 술병을 들어 강 건너를 가리켰다.
“조만간 다시 봅시다.”
제일 독한 술을 골랐기에 마시는 순간 온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한데 술병을 기울이니 시선은 절로 어용협 정상을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마가 기습을 하기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생각해서 뭐하나. 눈으로 보면 되지.”
이훤은 이내 절벽에 손가락을 박아 넣고 오르기 시작했다.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시작된 기행이었지만, 정상에 오르고 난 후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 새끼. 있긴 있었네.”
정상에 남은 흔적을 살펴봤지만, 수백 명이 대기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명확하게 소마의 퇴각을 인지하는 순간 흩어졌던 정보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오랫동안 준비한 방법도 망설임 없이 버리는 게 너였지.’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소마는 천문진인의 무명비급을 확인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 아쉬울 것이 없으니 기습을 준비했다가 물렸으리라.
“후우.”
이훤은 허리춤에 매단 또 한 병의 술을 땄다.
눈앞의 풍광과 이런 감정이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는 술 한 병을 한 모금에 비운 후 개방도에게 받은 지도를 펼쳤다. 삼문협의 지형도는 다른 곳과 달리 완벽하지 않았지만, 목적했던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처럼 천문진인의 비급에 목을 맸던 녀석이라면 그곳을 그냥 지나쳤을 리 없겠지.’
쨍그랑-
이훤은 결의를 하듯 술병을 깨고, 몸을 날렸다.
물론 빈병이다.
*
절명곡(絶命谷)의 지형은 한 마디로 절벽 위의 절벽이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 위로 두 개의 봉우리가 더 솟구쳤다. 봉우리 사이의 공간을 가리켜 절명곡이라 했다. 그러니 절명곡에 들어서면 앞은 절벽이고, 뒤는 협곡인 셈이다.
신마(神魔)는 정마의 합공을 받으면서 유격전을 펼쳤고, 마지막 전장으로 절명곡을 선택했다.
그는 천장단애로 몸을 던지면서 강호를 분열시킬 씨앗을 심었다.
그렇게 혈사 이후 수십 년이 흘렀다.
지금의 절명곡은 그 때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황량함만이 남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오늘은 절명곡을 관리하는 토지신도 기분 좋게 술을 한 잔 마실 수 있으리라.
“야!”
이훤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소마를 향해 마음껏 소리쳤다. 어차피 날개가 없는 한 절벽 앞에서 도망칠 곳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유일한 출구인 협곡 내에서 일갈을 내지르니 울림은 마치 육합전성을 펼친 것처럼 사방에서 이어졌다.
소마는 돌아서서 이훤을 확인했다.
한 순간 그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지나갔다.
하지만 늘 그랬듯 눈과 입이 자연스럽게 휘어지며 보기 좋은 인상이 만들어졌다.
“당신을 다시 만난 줄은 몰랐네요.”
“그게 네가 오늘 죽는 이유겠지.”
이훤의 이죽거림도 소마는 흔들리지 않았다.
“글쎄요. 저는 앞으로도 강호를 위해 할 일이 참 많답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는 걸요.”
그렇겠지.
그렇게 됐을 것이다.
하나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된다.
우두둑-
이훤은 저자의 왈패처럼 몸을 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는 오늘 죽어. 그것이 네 운명이다.”
“제 운명을 손에 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아니야. 나야. 네 생사는 내가 결정한다. 그리고 오늘 널 찢어 죽이기로 결정했어.”
소마는 입꼬리를 올리며 헤죽 웃었다.
놈이 진정 기쁜 일이 있을 때만 보여주던 웃음으로 마치 누군가 입을 양쪽으로 찢은 것처럼 휘어졌다.
“그럼 누구의 말이 옳은지 한 번 보지요.”
그는 멀쩡한 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협곡의 끝에서 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던 듯 저마다 술병을 들거나, 안주를 씹고 있었다. 적을 맞이했음에도 느긋한 표정으로 보아 노회함이 엿보였다.
“혈륜오웅이라고 합니다.”
다섯 명의 노인은 소마의 소개에 키득거리며 말했다.
“되었다. 영웅은 개뿔, 공적 주제에 과분하다. 그냥 오괴라 불러.”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섯 명의 노인은 인상도 체형도 달랐다. 다만 다섯 명 모두 똑같은 병기를 사용했다. 마차 바퀴를 떼어낸 후 반으로 쪼갠 듯한 월륜(月輪)이다.
기형, 변칙, 합공, 차륜.
그것만으로도 저들의 싸움 방식을 알 것 같았다.
“아이야, 겁을 먹지 말고 한 번 어우러져 보자꾸나.”
“그래, 술에는 여흥이 있어야지.”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감함의 표현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좌우사자를 비롯해 개미굴 전체를 운용하던 작자들이 아닌가. 한데 열흘 후 수백 명을 어용협에 불러들였고, 이제는 저마다 좌우사자와 동격으로 보이는 노괴가 무려 다섯이다.
‘어디서 저런 것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걸까?’
소마의 배후는 예상 이상으로 큰 덩어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참 고맙다.
저런 놈이 백 명, 천 명 있다고 치자.
모조리 튀어나왔다면 제아무리 이훤이라고 해도 꽁무니를 빼야 했다. 한데 이렇듯 상대하기 편하도록 맞춰주니 술이라도 한 잔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일단 젊고, 팔팔한 놈부터 와봐.”
이훤이 협곡 안에서 손짓을 하자, 혈륜오괴는 박장대소를 했다.
“재밌는 놈이잖아. 제법 흥취를 아는 걸?”
“아! 좁은 곳에서 싸우면 유리하지. 머리가 좋네. 그런데 어쩌지? 우리도 좋은데 말이야!”
삼괴와 사괴가 동시에 내달렸다.
그리고 제일 자그마한 체구였던 오괴가 훌쩍 뛰어오르더니 협곡의 벽을 좌우로 박차며 접근했다. 말로만 경박한 척하더니 제법 이훤을 경계하는 듯하지 않은가.
꽈드득-
이훤은 주먹을 말아 쥐고, 슬쩍 자세를 낮췄다.
“다섯이 동시에 덤벼도.”
쾅!
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그의 신형은 사선으로 솟구쳤다. 한순간에 삼괴와 사괴를 뛰어넘었고, 절벽을 박차며 공중에서 접근하던 오괴의 지척에 이르렀다.
“안 돼!”
이훤이 일갈과 함께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회오리가 이는 듯했다. 오괴가 황급히 청록빛의 기운을 담아 월륜을 팔방으로 휘둘렀다. 하나 파륜권의 묘의가 고스란히 담긴 주먹은 월륜을 튕겨내는 것도 모자라 오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콰직!
얼굴이 절반이나 뭉개진 것으로 보다 즉사다.
“헛! 막내야!”
술잔을 나누던 일괴와 이괴가 벌떡 일어났다.
그보다 빨리 아래에서 삼괴와 사괴가 빠르게 짓쳐들었다.
이훤은 솟구친 기세를 그대로 활용해 낙뢰처럼 내리꽂혔다. 엄청난 기세에 삼괴와 사괴조차 한순간 거리를 내어줘야 했다.
쿵!
이훤은 삼괴와 사괴를 지나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재차 군림보를 펼쳤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소마에게 향했다.
‘저 새끼는 머리가 좋아.’
그렇기에 상황판단도 빨랐다.
회귀 전에도 승패의 예측은 완벽하다시피 했다.
그런 놈에게 이런 무위를 보여줬으니 이미 혈륜오괴의 죽음을 예상했으리라. 그렇다면 놈의 선택은 도주였다. 하나 날개가 있지 않는 한 절명곡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최후의 선택은 이미 예상한 후였다.
자살(自殺).
스스로 목숨을 끊어 배후를 숨기려 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소마가 웃는 낯을 한 채로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안 되지. 이번에도 또 빠져나가면 곤란하다.
회귀 이후 꼭 놈에게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쾅! 쾅! 쾅!
군림보를 연이어 펼쳤다.
이제 이훤의 속도는 어지간한 경공을 펼치는 것보다 빠르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에는 절름발이였고, 양 발을 번갈아 쓴 적이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군림보를 펼친다고 해도 연이어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회귀 전보다 몸상태는 좋았다.
아닌 말로 숨 쉬고, 밥 먹고, 술 마시는 것만으로도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그렇게 최고의 몸상태로 군림보의 숨겨진 능력을 선보였다.
압도와 쾌속.
이 두 가지를 결합한 것이 바로 군림보(君臨步)다.
- 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모든 공간에 군림하라.
군림보의 첫 장에 적혔던 당부였다.
이훤은 무명자가 남긴 유언을 실행하듯 절명곡 전체를 장악했다. 소마는 황급히 신마가 그랬듯 천장단애에서 몸을 날렸다
하나 이훤이 더 빨랐다.
“죽는 것도 내 허락을 받아라!”
소마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무를 뽑듯 들어올렸다.
“크흑!”
놈은 이 상황에서도 웃는 낯이다.
이훤은 코가 닿을 것처럼 가깝게 얼굴을 가져다 댄 후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언제까지 웃는 지 한 번 보자.”
< 22, 살(殺).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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