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내가 곧 운명이다. >
21, 내가 곧 운명이다.
여산(驪山), 옛 지명은 회창산(會昌山)이며 온천으로 유명했다. 천하명산이나 오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널리 알린 건 진시황이 온천을 활용하기 위해 길을 뚫었고, 당태종이 온천만을 위한 궁을 지었기 때문이다. 하여 중원의 부호나 명사, 또는 고관대작들이 북적이는 장소였다.
강호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세상.
돈과 향락이 끊임없이 샘솟지만, 어지간한 왈패들은 손도 못 내미는 곳이 바로 여산이었다.
하나 이훤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산의 위치는 섬서성이며 화산과 이틀 거리였다.
그리고 화산의 산세는 여산과 종남산까지 이어졌기에 고수가 경공을 펼친다면 하루에도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그래서 언제 가실 겁니까?”
종초홍은 주충이 활동을 시작한 것처럼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향락의 중심지는 소주와 항주가 아닌가. 한데 그곳은 수천 리 밖에 있으니 가까운 곳에서 가장 좋은 놀이터라면 여산이 으뜸일 터였다.
“여산 좋지.”
이훤은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술은 맛있었고, 여인은 친절했으며, 분위기는 화려했다.
그야말로 돈 있는 술꾼들에게는 천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훤은 탈마가 도둑질한 돈으로 한껏 즐겼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관음동은 뭐야? 거기는 화청궁이 유명하지 않아?”
화청궁(華淸宮)은 여인들만 드나들 수 있는 온천으로 부잣집 마나님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과 같았다. 사내들도 화청궁의 존재를 반겼다. 정인이나 부인을 화청궁에 넣어놓고, 마음껏 여산을 즐겼기 때문이다.
한데 종초홍은 관음동을 거론하자 이훤을 흘겨봤다.
“제가 회창산과 관음동을 연관 짓지 못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화청궁에서도 진짜 잘 나가는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욕탕이 관음동이랍니다.”
이번만은 이훤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응? 여탕.”
“크흠, 어차피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온천이라는 것이 추울 때 들어가야 효과를 보잖아요. 그래서 화청궁은 일 년 내내 개관하지만, 관음동 자체는 겨울에만 운용한다더군요. 아마 두세 달은 지나야 할 겁니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두세 달 후라고?’
소마가 남긴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 종초홍이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형님을 따르기로 했지만, 명색이 무당의 제자이면서 무림맹의 중진입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은 아무래도 함께 하기 어렵겠네요.”
“이거나 마셔.”
이훤은 술병을 내밀어 종초홍을 침묵시켰다.
개미굴에 남아 있는 술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온 녀석이다. 종초홍은 술병을 받자마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희희낙락이다.
하나 이훤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 놈은 괜한 일을 하지 않아. 왜 화산 근처일까? 그리고 왜 시간을 줬을까?’
소마는 자신을 모른다.
‘나에 대하여 알 시간을 벌려고?’
지금의 이훤은 화산에서만 머물다가 곧장 개미굴에 들어왔다. 게다가 이훤의 무공을 견식 했다고 해도 화산과 관련짓기란 요원했다. 무림맹 내에 간자가 있다고 해도 이훤과 접점은 없지 않은가.
이훤은 슬쩍 종초홍을 바라봤다.
‘그건 아니지.’
개미굴 일층에서 보낸 시간은 한 시진 남짓. 그 이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층까지 내려왔다. 종초홍은 무림맹과 함께 움직였으니 설령 간자라고 해도 이훤보다 빠르게 소마를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놈이 나를 모르는 건 확실해. 여산의 일은 나와 상관없이 개미굴처럼 원래 존재하던 것이겠지. 한데 굳이 시간을 준 이유가 뭘까? 이유 없는 짓을 할 놈이 아니야!’
단순한 요행이나 운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 과정을 행할 수 있고, 원하는 결말에 이를 터였다.
눈에 띄는 장면을 떠올려봤다.
아무래도 소마와 관련된 건 인왕과 우사자였다.
두 사람 모두 이훤과 싸웠고, 무공을 접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낯설고, 괴이했으리라.
‘천공혈륜겁이라면 그럴 만 하지.’
화산의 최고수인 망아취자조차 이훤을 마주하는 순간 호기심을 보였다. 무당의 고수인 백암진인 또한 무암자의 일과 별개로 무공에 관심을 드러냈었다.
그렇다면 소마도 그랬으리라.
‘그래, 놈이 내게 말을 남긴 건 내 무공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야.’
불현 듯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훤은 술을 머금고, 옛 기억과 함께 음미했다.
육대괴마는 참 많은 일을 함께 저질렀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시비를 걸었으며 은거한 고수를 찾아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소마는 육대괴마의 욕망을 해소시켜줬기 때문이다. 이훤의 술이나 탈마의 도벽을 위해 수많은 정보를 물어왔다. 그 결과 목적을 이루는 것 외에도 엄청난 비급과 보물을 얻었다. 육대괴마 또한 무인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비급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소마에게 휘둘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도 그럴 것이 소마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제아무리 훌륭한 비급이라고 해도 한 번 훑어본 후 자신은 익힐 수 없다며 포기했다. 그러니 육대괴마를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죽했으면 다른 괴마들이 소마에게 비급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놈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놈에게 필요한 건 평범한 무공이 아니다.
정공(正功), 사공(邪功), 마공(魔功).
그 중에서도 특별하고, 괴이한 무공을 원했으리라. 육대괴마를 암중에서 움직인 것도 목적했던 것을 찾는 과정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마는 무암자가 가져온 천문진인의 무명비급을 얻기 위해 애쓰지 않았던가.
그 순간 이훤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알았다! 그 새끼가 시간을 준 이유!”
소마는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
그런 그가 최대 세 달 후를 기약했다.
그 말인즉슨 이훤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시간을 준 것이 아니라 놈이 시간을 번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야! 너네 다 돌아갔어?”
“무당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종초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사 일 전에 떠났습니다.”
이훤의 얼굴이 구겨졌다.
“무슨 소리야? 열흘 전에 떠났잖아.”
종초홍은 이훤의 변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려고 했지요. 한데 맹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분과 그것의 소중함을 감안했을 때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요. 하여 위 부단주와 산서지부장이 막아서는 바람에 이삼 일 지체되었습니다.”
그 뿐이라면 사 일 전에 떠났을 리 없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은 술잔을 내려놨다.
종초홍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요즘 건기잖아요. 하여 오태산 아래 큰불이 났습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하여 양민들이 몰려와 위령제와 축원을 해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이훤은 몸을 일으켰다.
“그런 일이 연이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종초홍 역시 뒤늦게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무림맹은 수많은 방파의 집합체다. 그렇기에 합리보다 불합리한 경우가 많았고, 어느덧 그런 시류에 휩쓸려 방심한 게다.
“하지만 개미굴은 모두 소탕했습니다.”
“한 놈이 도망쳤다. 그리고 그 놈이 핵심이야.”
“그렇다면 배후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훤의 눈동자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지금껏 외인 앞에서는 자제했으나, 사안이 너무 급박했다.
“그 새끼 어디 있어?”
“인왕부 안쪽에 있는 별관입니다.”
이훤은 뒤따르려는 종초홍에게 급히 말을 덧붙였다.
“믿을 만한 사람 있지?”
“네.”
“천락이한테 지금 당장 매화주 한 병 사서 화산으로 가라고 해. 노군동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나를 기다리면 돼.”
고천락의 귀호영체술이라면 화산파 본산은 힘들어도, 사대동천 정도는 숨어들 수 있으리라.
이훤은 황급히 인왕부로 달려갔다.
“소형제, 오랜만일세. 며칠 동안 술 한 잔 하자고 인편을 보냈는데 소식이 없어서 서운했다네.”
탈명선협 위태교가 이훤의 등장을 반겼다.
하나 귀화가 일렁이는 가운데 기세가 찌를 듯했다.
그가 슬그머니 부채를 꺼내는 순간 굉음과 함께 이훤이 뛰어올랐다.
쾅!
“헙! 눈깔이!”
위태교는 완숙한 절정의 고수답게 한순간 평정심을 회복했다. 부채를 살랑이며 거리를 벌렸고, 부챗살에 숨긴 철심을 날렸다.
하나 이훤은 삼초나락수를 펼치는 것만으로 위태교의 모든 공세를 무력화했다. 그리고 달려드는 기세 그대로 멱살을 잡고 뒤로 밀쳤다.
꽈당-
값비싼 탁자와 의자가 통째로 산산조각 났다.
하나 이훤은 먼지 구름 속에서도 양 손으로 위태교의 멱살을 잡은 채 추궁했다.
“누구야? 누가 시켰어?”
“크헉! 무슨 소리냐?”
위태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훤은 위태교의 멱살을 들었다가 내리찍었다. 몇 번이나 반복되자, 위태교의 눈동자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뇌가 흔들리면서 정신이 혼미해진 게다.
“누가 무당파를 막으라고 했냐?”
“그냥 다른 부단주 놈이 비아냥거리기에······.”
무림맹 외단의 부단주는 여섯 명이다.
위태교는 그 중에서 연줄도 없고, 무공도 약한 편이다. 그렇기에 출세욕이 강했는데 동료가 자극을 했다는 게다. 소문이 자자한 인왕의 보고도 찾지 못한 상태로 무당파마저 보내면 얻는 것이 뭐냐고 비웃었단다.
“쳇!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병신 같은 놈이네.”
이훤은 위태교를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위태교는 뒤통수를 감싼 채 처소를 나가려던 이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저 새끼.”
그 때 종초홍이 달려 들어왔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부각주, 저 눈, 저 눈깔, 일단 저 놈 잡아.”
위태교가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종초홍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형님이 술을 많이 자셨어요. 만취 상태이니 이해를 좀······.”
그 말만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종초홍은 경공까지 펼치며 이훤을 따라잡았다.
“죽었냐?”
“그건 아니고요. 그래도 심하셨습니다.”
“무당파가 전멸하고, 물건을 빼앗기면 저 놈은 파멸이야. 무당은 어느 쪽으로 갔어?”
이훤은 개미굴의 사층이 아니라 절벽을 통해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종초홍은 벽호공을 펼치듯 손가락을 절벽에 박으며 등반하는 이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몸뚱이인 거야.’
그는 무당의 제운종을 펼치며 뒤따랐다.
“형님! 관도를 통해 하남성을 지나서 호북성에 이를 겁니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쯧, 빌어먹을 대도무문이로구나.”
명분을 목숨처럼 여기는 정파인에게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자신감의 발로였다. 도리와 정도를 따르면 거칠 것이 없으니 관도로 이동하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너무 고지식하잖아.’
무암자는 그렇다손 치자. 하나 천문진인의 비급은 분명 망아취자의 그것과 같은 내용일 터였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지닌 채 관도를 지나는 건 습격해달라고 간청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초홍! 산서지부에서 가용 가능한 인원을 모조리 끌고 남하하라고 해.”
“네! 개방과 연계해서 무당의 경로를 파악하겠습니다. 형님, 이거 받으세요!”
종초홍은 절벽 위에 오른 후 반대편으로 향하며 철패를 던졌다. 앞에는 맹, 뒤에는 선이 새겨져 있다. 맹의 선택을 의미하니 곧 비선각의 증표일 것이 분명했다.
“나도 관도로 간다! 나를 찾으라고 해.”
못 찾으면 개방은 간판을 내려야지.
이훤은 천공혈륜겁을 극성으로 휘돌리며 군림보를 펼쳤다.
지금이야 말로 경공의 부재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제대로 된 경공을 익히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뒤로 미뤘건만, 아무래도 일을 끝낸 후 뭐라도 하나 익혀놔야겠다.
“너를 찢어 죽인 후 기념으로 익히면 딱 좋네.”
이훤은 소마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놈의 속내를 알 것 같다.
길게 봐도 세 달 안에 일을 마무리 짓고 자신을 상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나 그쪽은 이제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고, 자신은 상대를 십 년 넘게 함께 하지 않았던가.
“너라면······.”
이훤이 산을 내려오는 순간 누군가 접근했다.
허리춤의 묶음만 봐도 개방도였다. 평소와 달리 저들도 급한 김에 복장을 숨기지 않았다. 이훤이 철패를 꺼내는 순간 개방의 사결 제자가 종이뭉치와 술병을 던졌다.
“혼주! 태원! 평요! 령석! 홍동까지 확인됐소.”
무당의 이동 경로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후 종이뭉치를 확인했다.
지도다.
본래 국법으로 지도의 제작은 금지되었고, 역모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된다. 하나 암암리에 지도는 존재했고, 개방이라면 군부에 버금갈 만큼 상세한 지도일 터였다.
펼치는 순간 산서성의 전도가 나타났다.
곳곳에 자리 잡은 중견 방파들의 성향이 적혀 있었고, 관도와 지름길,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까지 존재했다.
‘흠, 초홍이 개방도와 깊은 관계네.’
이 정도의 정보 제공은 비선각의 부각주라는 자리만으로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자! 이제 소마처럼 생각할 시간이다.
그가 알던 소마라면 절대로 위험을 자처하지 않는다. 개미굴의 패배 또한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인 이훤 때문에 겪은 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안정적이면서 확실한 장소를 노릴 터였다.
이훤의 시선은 관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산서성 남부에서 멈췄다. 이훤에게도, 망아취자에게도, 천문진인에게도, 심지어 무암자에게도 뜻 깊은 장소였다.
술병을 한 번에 비우며 이를 갈았다.
“삼문협.”
이쯤 되면 운명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하나 이훤은 운명을 믿지 않았다.
이제 두 눈은 불덩이처럼 타올랐고, 군림보가 연이어 펼쳐질 때마다 꼬리처럼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네놈의 운명은 내가 결정해주마.’
< 21, 내가 곧 운명이다. > 끝
ⓒ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