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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51화 (51/226)

< 20, 인정받고, 인정하다. >

20, 인정받고, 인정하다.

이훤은 종초홍을 먼저 맞이했다.

“호칭을 보니 기회를 잡은 것 같군.”

종초홍과 처음 만났을 때 망아취자의 주도를 논한 적이 있다. 그 때 종초홍은 깊이 감읍하여 만나고 싶다 했지만, 동생을 시켜주겠다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한데 내가 서너 살은 윗줄일 것 같은데 동생으로 부리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구만.”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술주정뱅이에게 나이는 의미 없잖아. 이 관계를 뒤집으려면 주량, 또는 좋은 술이지.”

“하하하! 주당을 자처하며 불사주귀라 칭했지만, 진정한 술 귀신이 여기에 있었군. 좋아! 형님의 말처럼 좋은 술을 구할 때까지는 예의를 다하겠습니다. 오늘 형님의 도움으로 아주 큰일이 잘 끝났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

종초홍은 품에서 한 움큼의 조매(早梅)를 꺼냈다.

“돌려드리지요. 소중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은근슬쩍 화산의 제자임을 질문한 것이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조매를 받아들었다.

하나 대답 대신 조매를 허공에 흩뿌렸다.

꽃비가 비산하는 가운데 술병을 꺼냈다.

“하아, 산서 북부에서 만든 분주라네. 물이 차고, 영글어서 왜인지 모르게 씹는 맛이 있지. 싸우느라 고생했을 텐데 입이나 헹궈둬.”

종초홍은 이훤이 대답을 피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분주를 재빨리 마시며 침음을 흘렸다.

턱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이훤의 말을 실천하는 듯했다.

“으음, 좋군요. 공을 들여 만든 맛입니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나도 줘요.”

고천락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하나 종초홍이 짐짓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허, 형님들 대화하는데 어디 막내가 끼어들어.”

닳고 닳은 고천락이 어깃장에 무너질 리 없다.

“형님 동생이면 내 동생이기도 한데. 이런 식으로 장유유서가 무너지면 곤란해.”

“하아, 이 녀석 보게. 형님을 언제 알았느냐?”

“조금 전.”

종초홍은 득의의 미소를 보였다.

“훗, 난 한참 됐지.”

“하지만 아까 하는 걸 보니 이제 와서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나는 형님과 인왕전에서 생사를 함께 한 사이라고. 인왕하고 누가 있었는지 알기나 해?”

“하하하! 어린 녀석아, 나는 형님과 술도 마시고, 시도 읊고 그랬어!”

두 사람의 나이 차가 무색할 만큼 유치한 대화를 이어갔다. 대승에 감격하고, 흥취에 젖어 있던 자들이 힐끔거릴 정도였다.

“술 잘 마시면 형이야.”

이훤의 말에 종초홍과 고천락의 눈빛이 변했다.

형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언제나 이유가 있는 게다.

“날을 잡아서 겨루자.”

“흥! 몸보신이나 하고 오시지.”

“어린놈아, 젖이나 더 먹고 와라. 뼈 튼튼해지게.”

“흥! 그쪽이야 말로 염소 고기라도 드시지. 보양식 찾을 나이잖아?”

이훤은 윗사람으로서 명쾌한 해답을 내려준 것에 만족했다. 하나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더욱 심난하게 변한 것만은 알지 못했고, 설령 알았다고 해도 의미는 없으리라. 주변을 정리하던 무인들이 길을 열었다.

무림맹 외단의 부단주인 위태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청수한 인상과 달리 편협한 성격이며 명예욕이 강한 자였다. 평소였다면 무당의 장로들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현장에는 나오지 않을 사람이다. 한데 그가 시신과 피 냄새가 자욱한 전장에 나타난 게다.

“종 부각주! 저쪽의 소형제가 오늘의 대업을 성사시킨 사람인가?”

위태교는 잔뜩 고양된 상태로 이훤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 내부에서도 이번 작전의 대승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적당히 양민을 구출하고, 악인을 징치하는 것으로 무림맹의 위상을 높일 생각이었다. 한데 오층까지 점령한 것은 물론이고, 개미굴의 주인이라는 인왕의 시신까지 확보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은인을 대하듯 부드러웠다.

“아.”

종초홍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이훤을 화산의 제자인 것처럼 포장하지 않았던가. 물론 직접적으로 화산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떠올릴 만큼 노골적으로 신뢰를 부여하기는 했다.

그저 화산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종초홍은 이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위태교는 애병인 부채를 살랑이며 웃었다.

“강호 동도들이 과분하게도 탈명선협이라 불러주었네. 무림맹 외단의 부단주인 위태교일세. 소형제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느 고인에게 사사하였는가?”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이미 화산파의 문하라고 여기고 있으니 누구의 제자인지가 중요했다. 명문거파일수록 모든 제자가 비슷한 무위를 지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배분이 같으면 자연스럽게 장로의 자리에 앉기도 했다. 무당파의 무암자가 그런 경우였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술 안 좋아하게 생겼네.’

평가라기보다 희망사항이다.

위태교와 같은 사람이 술을 좋아한다면 술을 안쓰러웠고, 저런 사람과 술을 마셔야 하는 누군가가 불쌍했다. 술이란 본래 요대를 풀어놓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마셔야 즐거운 법이 아니던가.

“저는······.”

화산의 문도가 아님을 밝히려 했다.

진위를 논하기보다 위태교의 뜨거운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한데 위태교의 배후에서 묘한 기운이 일렁였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것이 무당의 힘인가?’

백암진인과 청암진인이 다가왔다.

한쪽은 바위 같고, 한쪽은 바람 같다.

하나 어느 쪽도 만만치 않았다.

“부단주.”

위태교는 백암진인의 진중한 한 마디에 환하게 웃었다.

당금 무당파는 구파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거대방파가 아니던가. 소림이 봉문을 한 것처럼 하산하지 않고, 화산이 쇠락한 이상 구파의 수장은 누가 뭐라고 해도 무당일 터였다. 그런 무당파의 장로 중 백암진인은 가장 활발하게 강호를 오가는 고수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과의 대화라면 돈을 내고서라도 시간을 낼 용의가 충분했다.

“천양검선과 풍음검선께서 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천양검선(天陽劍仙) 백암과 풍음검선(風陰劍仙) 청암은 강호에 무당쌍선(武當雙仙)이라 불릴 만큼 위명이 자자한 고수였다.

“허허, 아는 사람끼리 그러지 맙시다. 늙었다고 붙여준 별호를 듣는 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지 않겠는가.”

청암진인의 너스레에 위태교는 방긋 웃었다.

친인에게 하듯 농을 건네는 모습에 감격한 것이 분명했다.

“부단주도 고생 많으셨소. 무당의 필요로 시작된 싸움이지만, 강호동도들에게 의기가 살아 있음을 알렸으니 맹의 입장에서도 큰 성과가 될 것이오. 그 중심에 부단주가 있었으니 그 공은 잊지 않겠소이다.”

무림맹에 좋은 말을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위태교는 신선을 만난 것처럼 좋아했고,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에 흔쾌히 돌아섰다.

‘클클, 화산의 누구를 갖다놔도 무당쌍선에게는 안 되는 것이야.’

백암진인은 미간을 좁혔다.

“또 술을 마셨구나.”

종초홍은 머쓱함에 뒤통수를 긁적였고, 청암진인은 뒤에서 양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제자를 격려했다.

“좋은 날이지 않습니까?”

“강호에 도움이 되고 싶다 하여 맹으로 보내줬건만, 좋지 않은 버릇만 잔뜩 생겼구나.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수련했을 리 없으니 조만간 날을 잡아야겠다.”

종초홍은 지난날의 기억 중 ‘삼일 비무’와 같은 혹독한 수련을 떠올리며 사색이 됐다. 반면 고천락은 옆에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가렸다.

“그리고 자네는······.”

백암진인의 시선이 이훤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화산의 제자가 아닌 듯해. 하나 화산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군. 자네를 누구라고 기억해야 할까?”

이훤은 빙긋 웃었다.

위태교보다 백배는 딱딱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진중함에 마음이 편해졌다. 하여 지극히 어려운 상대지만, 평소처럼 농이 흘러나왔다.

“관상가를 하셔도 되겠네요.”

“형님.”

형님이라는 말에 청암진인은 입술을 오므리며 소리 없는 탄성을 흘렸다. 하나 백암진인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이훤을 바라볼 뿐이다.

“화산파의 제자는 아니지만, 화산에 살았습니다.”

“흐음, 대전 내부는 자네가 정리한 것인가?”

“네.”

“저기 못난 사질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성취가 대단하군.”

이훤은 히죽 웃었다.

“그래서 형이 된 건 아니고요.”

“사정을 들었네. 강호의 은원과 인연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못난 사질이 자네와 인연을 맺었다면 그것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 언제고 무당을 지나는 일이 있다면 올라오시게. 내가 술은 줄 수 없지만, 차는 얼마든지 나눠주지.”

“글쎄요. 무당산 아래서 저는 술을 마시고, 진인께서는 차를 마시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지 않을까요?”

종초홍은 아예 죽은 사람을 본 것처럼 사색이 됐다.

백암과 청암은 쌍선이라 불리지만, 성향이 정반대였다. 청암진인이라면 모를까, 백암진인이라면 말학후배의 경박한 언행을 받아줄 리 만무했다.

한데 경악할 만한 일이 이어졌다.

“한 번쯤은 그리 하겠네.”

이훤은 소리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흐음, 외강내강에 중용을 이뤘고, 그럼에도 양기가 충천하니 초절정의 반열에 오른 지도 꽤 되셨겠네.’

확실히 백암진인은 노군보다 윗줄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자네의 강호행이 무탈하길 기원하겠네.”

이훤이 포권을 하자, 백암진인은 종초홍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무당의 힘은 말과 행동, 의지에서 비롯된다. 네가 어떠한 이유로 그런 결심을 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하나 한 번 내뱉고, 실행하기로 한 이상 예(禮)를 지키되 친(親)을 키워라. 협(俠)을 논하되 정(情)을 잊지 마라. 알겠느냐?”

두 사람의 연(緣)이 형제로 이어졌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말인즉슨 무당파가 이훤을 종초홍의 의형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백암진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청암진인은 사질인 종초홍을 향해 손을 흔든 후 이훤에게 말을 건넸다.

“못난 녀석을 무당의 품으로 돌려줘서 고맙네.”

무암자의 처우에 대한 의미였다.

“응당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사형은 감정 표현을 잘 못해. 하나 나보다 더 자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야.”

“느껴집니다.”

멀리서 백암진인의 호통이 들려왔다.

“사제! 돌아갈 시간이야.”

청암진인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한 마디를 남겼다.

“나랑은 한 잔 하자고.”

*

“이제 어쩌시렵니까?”

인왕부는 무림맹의 맹도들로 북적거렸다.

애초에 역탑지대라 불리는 개미굴의 마지막 층이 지상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기에 작전에 투입된 비검대와 비적대, 그리고 백호대는 인왕부를 샅샅히 수색하여 잔당을 색출했다. 그리고 절벽 위 암자와 연결되는 통로를 통해 무림맹 산서지부와 개방의 방도들을 불러들였다.

종초홍은 이훤이 따라주는 술을 홀짝이며 한 번 더 물었다.

“가실 곳은 있습니까?”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다. 화산으로 돌아가기에는 조금 이르고, 술 냄새가 섞인 바람도 없으니 생각해 봐야지. 너는?”

“무당은 오늘 돌아갑니다. 아무래도 그분과 그것의 복귀가 시급하니까요. 저는 뒷정리를 해야 하니 개방과 합류할 때까지는 있어야 할 듯합니다.”

이훤은 넌지시 물었다.

“회창산 관음동이 그렇게 풍광이 좋다던데······.”

종초홍은 무당의 일대제자지만, 무림맹 비선각의 부단주이기도 했다. 비선각이라면 개방과 하오문은 물론이고, 자체적으로도 정보를 수집하는 대단위 조직이 아니던가. 그러니 소마가 남기고 간 단서를 묻기에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회창산이오?”

종초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원에 회창산이라는 지명이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관음동도 흔한 명칭이고요. 그래도 두 개를 섞어보면 어딘지 나오지 않겠어도. 알아 올까요?”

이훤은 피식 웃었다.

“이야, 내가 의제를 참 잘 얻었네.”

“크큭, 그곳의 술이 얼마나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마시는 겁니다.”

“일단 알아봐봐.”

종초홍은 몇 잔을 더 마신 후 더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인왕전 쪽으로 향했다.

이훤은 말 없이 술을 홀짝이고 있는 고천락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부럽냐?”

“뭐가요?”

녀석의 시큰둥한 목소리만 들어도 감정이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그만큼 회귀 전 녀석과 나눴던 시간은 좋은 의미로 대단했다.

“강호의 고수인 백암진인이 나와 종초홍을 연결시켜줬는데 너는 그렇지 않아서 부러운 거잖아.”

고천락은 말문을 닫았다.

천애고아에 도둑질이나 일삼는 그가 의형제를 공증해줄 명사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내가 공증해주마.”

고천락은 눈을 끔뻑였다.

이훤은 그런 고천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와 의형제임을 공증하마. 자부심 가져도 돼. 그쪽하고 붙어도 밀리지 않아. 그리고 장담하마. 내가 취마이듯, 너는 언젠가 탈마가 될 것이다.”

“탈마.”

“그래. 탈마.”

고천락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헤죽 웃었다.

“나쁘지 않네요.”

“네가 익힐 무공은 내가 직접 골라줄 테니 당분간 나와 함께 다니자.”

“어차피 그러려고 했어요.”

이훤은 고천락에게 귀엣말을 했다.

“그 전에 네가 할 일이 있어.”

고천락은 그 이후 매일 같이 자리를 비웠다.

종초홍이 삐쳐서 도망갔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하나 고천락이 자취를 감출 때마다 인왕전 내의 보고는 빈자리를 넓혀갔다. 그렇게 십여 일 정도를 보냈을 때 종초홍이 웃으며 찾아왔다.

“아! 형님, 장난치신 겁니까?”

“무슨 소리야?”

“형님이 회창산을 모를 리 없잖습니까? 괜히 밑의 아이들만 고생시켰네요.”

이훤은 종초홍에게서 회창산의 현재 지명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소마, 이 새끼 봐라.’

< 20, 인정받고, 인정하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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