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이마일체(二魔一體). >
19, 이마일체(二魔一體).
탈마 고천락(高千樂)의 부모는 아들이 천 가지 즐거움을 누리며 살기를 원했으리라. 하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고, 일평생 음지(陰地)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빈곤했기 때문이다.
뺏고, 훔치다 보니 재주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그는 대도(大盜)가 되었다.
중간 과정이 생략된 이유는 과거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훤조차 그와 수천 병의 술을 나눠마셨지만,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도둑질을 했고, 소년의 시기에 중견 방파의 신물을 훔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단다.
‘일이 이렇게도 되는구나.’
이훤은 고천락의 나이와 과거사를 비교한 후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쯤 고천락은 귀호영체술에 한계를 느끼고, 제대로 된 무공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때였다.
훔치기 쉬운 비급은 성에 차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구파오가의 비전을 건드릴 수도 없지 않은가.
무림공적의 삶은 도벽을 이겨낼 만큼 험난했다.
그러니 결국 고천락의 선택은 사마외도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산서성 내에서만은 흑점을 뛰어넘은 개미굴은 명성에 비해 도둑질하기에 좋은 장소였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시기에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야 그림이 좀 그려지는군.’
회귀 전 이훤이 일층의 전왕 밑에서 노비생활을 할 때 고천락은 이미 오층에서 도둑질을 준비했다. 그리고 무당파와 무림맹의 기습을 좋은 기회라고 여겼으리라. 하나 무림맹은 일층을 점거한 후 명분만 얻고 퇴각하지 않았던가. 결국 고천락은 홀로 인왕전을 털 자신이 없었기에 개미굴을 떠났으리라.
‘그리고 산동성에서 홍천기공을 얻었다고 했지.’
이훤이 알기로 고천락이 제대로 된 무공을 얻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일 년 후였다. 산동성 태산에 기문진이 풀리며 등장한 보물 쟁탈전 때 홍천기공(弘闡氣功)을 얻어 탈마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 회귀 이후 상황이 변했다.
이훤의 존재로 인해 전왕이 죽었고, 일층에서 퇴각했어야 할 무림맹은 사층을 뚫고, 오층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러니 고천락의 성향 상 이런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이훤은 반가움을 뒤로 하고 전음을 펼쳤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오성에 이르렀다는 건 이미 절정의 반열을 지나 초절정을 코앞에 뒀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리면 전음을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고천락.]
맞은편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고천락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는 고향을 떠나 도둑질을 시작한 이후 자신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었다. 스승도, 친구도, 가족도 없이 독보강호하는 존재였다. 한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니 경악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천하제일의 대도가 될 동량답게 실수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몸을 감출 뿐이다.
지금의 고천락은 전음을 펼칠 수 없다.
그렇기에 이훤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교류를 이어갔다.
[나는 너를 볼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없지. 이 차이가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겠지?]
살수가 도둑질까지 잘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 도둑은 대도라 불리는 순간 어지간한 살수보다 위협적이다. 그렇기에 고천락은 더 숨거나, 피하는 대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늘 저 밑에 있는 놈 중 하나를 죽일 거야.]
이훤은 소마를 힐끔 본 후 전음을 이어갔다.
[너는 그 사이에 무암자가 지닌 비급을 훔쳐라.]
고천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목적까지 파악하고 있는 듯한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이 물씬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비급을 익히면 안 돼. 무당파가 지척에 있다. 그들에게 비급을 건넨다면 살 길이 열릴 거다.]
이번에는 인상을 쓴다.
아마 속으로는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으리라.
[고천락. 머리 굴리지 마.]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귀여운 녀석. 그래도 이때의 탈마는 건방지던 시절보다 놀리는 맛이 충분했다.
[귀호영체술이 지금까지는 잘 먹혔겠지만, 진짜 고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야. 너도 그 한계를 알기에 여기까지 숨어든 거잖아.]
이번에는 고천락의 눈과 코,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이름이야 과거를 캐내다보면 어쩌다 알 수도 있으리라. 하나 귀호영체술이야 말로 세상에서 고천락에게만 해당되는 기예가 아니던가.
[무공은 내가 알려준다. 그리고 네 앞길도 내가 책임진다. 못 믿겠지?]
고천락이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삐죽였다.
불만이 있을 때마다 녀석이 하던 버릇이다.
[믿어. 그 수밖에 없어. 너는 비급만 챙겨.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이훤은 전음을 보내면서도 인왕전 내부에서 감각을 돌리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줄다리기도 어느덧 끝이 보이고 있었다.
고천락도 그걸 알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가 살심을 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훤은 기척을 더욱 숨겼다.
‘일단 저 녀석은 됐고.’
회귀 전의 탈마에 대한 신뢰가 십 할이라면 지금의 고천락은 삼 할도 채 되지 않았다. 도둑질을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이용하는 녀석이 아니던가.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훤은 대전을 내려다봤다.
“무당파가 지척에 이를 것이야. 자네 정말 하나뿐인 딸아이를 내버려둘 셈인가? 삼 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어. 지금이라도 보고에서 약을 찾아서 먹여야 하네.”
무암자의 약점이 밝혀졌다.
한데 그걸 약점으로 삼아 파고드는 자는 다름 아닌 의형인 소우륜이다. 무암자는 괴로운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믿고 의지했던 의형제에 대한 실망과 딸을 살려야 한다는 결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무당파는 화산파와 달리 정통 도가방파였다. 그렇기에 혼인은 물론이고, 자식을 부양하는 것마저 금기시했다.
‘딸을 살리려고 천문진인의 비급을 훔쳤군.’
무암자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때 인왕의 좌우사자 중 좌사자가 슬쩍 인왕전 밖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오층의 문이 열렸습니다.”
인왕은 미간을 좁혔다.
“뭐라? 세 번 이상 철문을 열지 못하면 동굴 자체가 붕괴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데 놈들이 어떻게 벌써, 아니 애초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다는 거야!”
문후는 허리를 숙이며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간자가 문을 여는 방법까지 알린 듯합니다.”
“크흠! 이걸 어쩔 셈인가?”
“마룡대와 사룡대를 믿으세요. 이곳 지리에 익숙한 건 우리입니다. 놈들은 숲에서 절반이 죽을 것이고, 인왕부에 들어선 후 전멸할 겁니다.”
“흥! 그래야만 할 것이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테니 말이야.”
인왕은 문후를 흘겨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자방처럼 대하더니 이제는 하인을 대하듯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문후는 여전히 공손하게 손을 모을 뿐이다.
“웃지 마! 거슬리니까.”
인왕의 호통에 문후는 소매로 입을 가렸다.
“주의하겠습니다.”
다시 칼자루는 무암자에게 넘어왔다.
하나 무딘 날에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거미줄처럼 금이 간 검이었다.
“거래를 할 것인가?”
무암자는 눈을 감았다.
딸을 살리겠다는 결의와 무당파가 지척에 이르렀다는 공포가 그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하겠습니다.”
인왕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좋군. 우사자. 보고를 열게. 자! 비급을 보지.”
무암자의 손이 품안으로 향했다.
대전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인해 번들거렸다. 반면 문후의 눈빛은 북해의 빙정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것이 천문진인께서 남기신······.”
비급의 상태는 최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반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남긴 것이 아닌가. 비급의 앞장에는 회한부전(悔恨不傳)이라는 네 글자가 갓 새긴 것처럼 반짝였다. 하나 ‘뉘우치고, 한탄하기에 전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은 묵향(墨香)이 처연하게 대전을 맴도는 듯했다.
하나 인왕은 열흘을 굶은 사람처럼 탐욕스런 눈빛을 내비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단상을 다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손을 내밀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줘 봐.”
그 순간 허공에서 빛이 번뜩였다.
쇄애애액!
“적이다!”
비급에 눈이 먼 인왕보다 좌우사자가 먼저 반응했다.
하나 한 자루 검은 빛살처럼 인왕과 무암자 사이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이훤이 천공혈륜겁을 극성으로 운용하면서 무암자에게 접근했다.
“비급을 노린다!”
소우륜의 양 팔이 어깨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순간 두 자루의 검이 번뜩였다. 하나 이훤은 미꾸라지처럼 몸을 비틀더니 그대로 무암자의 지척에 이르렀다.
삼초나락수를 펼치는 순간 무암자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비급을 든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반대편 손으로 검을 뽑았다. 하나 이훤의 절혼지는 처음부터 심장이 아니라 손목을 노렸다.
“크흑!”
이훤은 무암자가 놓친 비급을 차올리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쉽게?’
무당의 장로라기에 몇 수의 공방이 더 이어질 것이라 여겼다. 한데 불과 이 초식 만에 비급을 빼앗으니 당사자만큼이나 놀란 것이 당연했다.
“잡아!”
인왕의 외침에 좌우사자는 물론이고, 소우륜과 우씨 형제까지 몸을 날렸다.
쿵!
이훤이 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그의 신형은 포탄처럼 솟구쳤고, 가장 늦었음에도 가장 빠르게 공간을 점했다.
“놈!”
소우륜의 검이 두 개에서 네 개로 변하며 전신을 옥죄었다. 하나 이훤은 이미 회귀 전 오랫동안 소우륜을 지켜봤고, 몇 번이나 무공을 겨뤘으며, 끝내 승리했다. 그렇기에 허초를 무시하고, 그대로 진초를 걷어내며 일권을 먹였다.
“크헉!”
이훤의 파륜권을 막은 검이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천탑거왕 우패와 파산룡 우작이 좌우에서 소우륜을 돕기 위해 짓쳐들었다. 외공을 사용하는 자과의 싸움은 언제나 즐거웠다. 제아무리 몸을 단련했다고 해도 혈륜으로 인해 최적화된 육신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화아-
이훤의 두 눈이 귀화처럼 불타오르는 순간 내부에서만 머물던 혈륜이 양 주먹에 깃들었다. 두 주먹이 가슴 어림에서 모였다가 좌우로 떨치듯 뻗어나갔다.
“흥!”
“죽어라!”
우패와 우작이 기세 좋게 주먹으로 맞받아쳤다.
하나 결과는 참혹했다.
꽈드드득-
우패는 주먹이 산산이 으깨졌고, 우작은 뼈가 팔꿈치 뒤로 튀어나왔다. 이훤은 비급을 한 번 더 차올린 후 미끄러지듯 우패의 배후를 점했다.
혈도를 찍어서 잠시 움직임을 금제했고, 무릎 뒤를 찍은 후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놈의 고개가 뒤로 꺾이는 순간 팔꿈치로 인중을 내리찍었다.
콰직!
“형님!”
“어, 너도 같이 가라.”
이훤은 우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작은 황망한 와중에도 양 발을 축으로 삼아 정권을 내질렀다. 하나 이훤은 애초부터 우작이 아닌 다른 상대를 노렸다. 비급에 가장 가까이 있는 건 좌사자였기에 놈을 향해 부러진 소우륜의 검을 던졌다.
쇄애애액!
투검도 몇 번 하다 보니 손에 붙는 듯했다.
하나 여전히 효과는 별로였다.
강맹한 위력에 좌사자는 허리를 뒤로 숙인 채 검을 피했다. 군림보가 한 번 더 펼쳐지는 순간 이훤은 배를 보인 채 드러누운 좌사자의 위에 나타났다. 좌사자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지는 순간 이훤의 두 발이 아랫배를 후려쳤다.
콰직!
군림보에 얻어맞은 이상 단전과 척추가 통째로 쓸려나갔으리라. 좌사자는 생사지경임에도 우사자가 있는 쪽으로 비급을 쳐냈다.
촤라라락!
비급이 흩날리다가 땅에 떨어졌다.
인왕과 우사자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한데 그 순간 기둥 뒤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고천락이 기둥과 기둥 사이를 오가며 자리를 잡고 있다가 낚아챈 것이다.
“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훤은 고천락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가 도망칠 방향을 선점한 상태로 돌아서서 웃었다.
“이제 네 차례다. 소마.”
< 19, 이마일체(二魔一體).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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