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48화 (48/226)

< 18, '그'가 있었다. (2) >

회귀 이후 대부분의 사건은 예상 범주 내였다.

노군과 망아취자를 만나면서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회귀 전에는 모르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너.’

이훤은 문후라 불린 자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뒤통수를 꿰뚫고 얼굴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덟 명 중에서 다섯 명이 아는 자다.

네 명은 얼굴로 확인했고, 한 명은 목소리였다.

‘그 때도 그랬지.’

항상 웃는 낯이어서 소마(笑魔)라 불린 놈이 있었다.

이훤이 회귀 전 육대괴마의 수장이라 불릴 때 의제였던 소마가 저렇게 이야기했다.

- 야!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 형님, 저는 웃는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겁니다.

마지막 순간 이훤을 배신하고, 정사마를 결집해 죽음으로 몰아넣은 놈의 목소리를 어찌 잊을까. 언젠가 예전의 무위를 되찾게 되면 강호를 뒤집어서라도 찾으려 했다. 한데 놈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장소에서 만난 게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흥분되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소마는 의미 없는 곳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축낼 위인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그랬다. 육대괴마라고 묶여서 불렸지만, 애초에 서로 면식이 없었다. 한데 어쩌다보니 하나둘 씩 모여서 육대괴마라 불렸다. 회귀 이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모든 관계의 중심에 소마가 있었다. 그는 어린 자신에게 동생을 자처했고, 다른 괴마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줬다.

죽는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소마는 심심풀이로 육대괴마를 모은 것이 아니었다. 그간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당사자들은 모르게 무언가가 진행됐을 터였다. 그런 놈이었으니 목적을 이룬 후 육대괴마를 버렸으리라.

한데 그런 놈을 개미굴 오층에서 다시 만났다.

이미 오층에 들어설 때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가.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리는 듯했다.

‘넌 개미굴을 통해 뭘 노리는 거냐?’

그리고 놈의 배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마에게서 답을 얻을 수 없었기에 다른 쪽을 살폈다.

이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명룡사우(明龍四友)라 불린 네 명의 중년인들 쪽으로 돌아갔다.

저들 또한 익숙했다.

한 명의 도움을 받았고, 세 명을 죽인 사이였다.

‘당신은 또 왜 여기 있는 거고?’

명룡사우 중 가장 표정을 굳히고 있는 자.

그는 이훤에게 천공혈륜겁을 전해준 괴노인이었다.

머리를 곱게 빗어 올렸고, 화려한 의복을 걸쳤지만 한 눈에 알아봤다. 비록 무공을 받고, 원수를 죽여주는 거래였지만, 그 때를 기점으로 삶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다른 세 명의 얼굴 또한 낯이 익었다.

괴노인이 죽여 달라고 부탁했던 세 명.

저들이었다.

한때 명룡사우라 불리며 개미굴을 함께 드나들던 사이가 어째서 그렇게 됐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기에 이훤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인왕을 보고 있자니 마치 회귀 전 자신을 보는 듯했다.

자유분방하게 모든 걸 뜻대로 행하는 것 같지만, 암중에서는 소마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저놈은 칼이다. 소마의 의지를 행할 칼.’

여덟 명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했다.

소마와 괴노인이 지닌 무언가.

개미굴은 그 자체로 강호에서 유명한 흑점처럼 장물을 사고팔았다. 하지만 흑점은 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십대금용병기나 무림공적의 신병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존폐를 무릅쓸 정도의 거래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반면 개미굴은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 말인즉슨 괴노인이 가져온 무언가는 흑점에서도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일 터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당연하게도 천공혈륜겁이다.

하나 그건 아닐 터였다.

회귀 전 이훤이 공청석유를 얻는 게 삼 년 후다. 그리고 탈출하면서 괴노인을 만나지 않았던가. 만약 괴노인이 팔려는 물건이 천공혈륜겁이라면 삼 년이나 지나서 자신에게 맡길 리가 없을 터였다.

‘무당의 장로들이 무림맹을 움직여서까지 찾아야 하는 물건이라면······.’

불현 듯 한 사람이 뇌리를 스쳐갔다.

망아취자(忘我醉子)다.

그는 화산의 존립을 위해 죽는 그 날까지 비사(秘事)에 대하여 함구를 하려 했다. 하나 마음이 통하는 자신을 만나 비사를 전하지 않았던가. 다른 여섯 명 중 누구라도 망아취자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애초에 생사여부조차 불투명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화산이 있었다면 무당도 있을 수 있다.’

무당의 그는 망아취자처럼 비사만 전한 것이 아니라 신마의 깨달음 자체를 남겼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회귀 전의 기억과 회귀 후의 기억이 뒤섞이면서 점차 상상하지도 못했던 진실의 파편을 드러냈다.

‘소마, 여기서 네 역할은 뭐지?’

중원 전역에서 흘러들어오는 장물을 선별하거나, 개미굴을 통해 인재를 영입할 수도 있다. 회귀 전에 비해서 어린 소마였으니 지금은 수뇌부가 아닐 수도 있을 터였다. 하나 그것을 감안하다더라도 이훤이 알고 있는 소마라면 그런 하찮을 일에 매진할 재능이 아니었다.

이훤의 눈매는 감은 것처럼 가늘어졌다.

‘이제 반대가 되었네.’

그는 소마를 알지만, 소마는 그를 알지 못한다.

회귀 전과 다른 관계가 되었으니 결말 또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죽는 건 너다.’

*

이훤은 몰랐지만, 명룡사우는 꽤 명성을 떨치는 자들이다.

천탑거왕(天塔巨王) 우패와 파산룡(破山龍) 우작은 형제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외공의 성취가 뛰어났다. 팔검기객(八劍機客) 소우륜은 단선문의 후예로 정파의 호협으로 명룡사우의 대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무당의 동량지재라 불리다가 장로의 자리에 오른 유선검(柳仙劍) 무암자가 분명했다.

이들이 의기투합하여 강호를 떠돈 게 벌써 십 년이다.

그간의 공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많았고, 명룡사우라면 어느 지역에 가도 유지들의 환대를 받을 만큼 명성이 대단했다. 한데 그런 그들이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개미굴의 최하층을 찾아온 것이다.

“흐음, 명성은 많이 들었네.”

정마(正魔)는 오랫동안 대립했지만, 개미굴에 들어선 이상 누구도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왕은 배분을 들어 자연스럽게 명룡사우에게 하대를 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인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룡사우 중 대형이라 불리는 소우륜이 대표로 손을 모았다.

“반갑군. 예정대로라면 자네들과의 면담은 열흘 후였네. 하지만 자네들도 소식은 들었을 테지?”

저들은 이미 오층의 객잔이나 주루에서 무림맹의 진입을 전해들은 후였다. 그렇기에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무암자의 표정은 극히 어두웠다.

“다른 일은 관심 없습니다. 역탑지대의 명성처럼 무슨 물건이든 제값을 치러주기만 하면 됩니다.”

인왕은 어깨를 으쓱거린 후 말했다.

“좋네. 물건이 뭔가?”

무암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비급.”

인왕의 두 눈에 번쩍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당파가 무림맹까지 움직여서 찾는 물건이라기에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게다.

“클클, 비급 좋지. 그래 무엇인가? 양의심공? 태극검? 혜검?”

“아닙니다.”

“흐음, 이 소란을 떨 정도면 제운종이나 면장, 하다못해 북두천강검진 정도는 되겠지?”

무암자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소우륜은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무암자를 채근했다.

“이보게, 동생. 인왕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는가. 어서 말해보게. 자네가 엄청난 비급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곳까지 오기로 결정을 했다면 돌이킬 수 없네. 빨리 거래를 마무리하고 이곳을 떠야 해. 돌아가는 길에 자네가 좋아하는 소흥주라도 마시면서 아쉬움을 달래는 게 어떻겠는가?”

인왕은 그 사이 문후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지금은 저들에게 맡기고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잠시 후 무암자는 장탄식을 흘린 후 입을 열었다.

“무명비급입니다.”

인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당파의 비급 중 저런 이름을 가진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정말 이름 없는 비급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뭐라?”

무암자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걸 만든 분은 본 파의 전대 고인이신 천문진인이십니다. 당대 장문인의 사부이자, 무당제일이라고 평가받는 분이지요.”

인왕은 한 숨을 내쉬었다.

“글쎄다. 나는 처음 듣는데.”

그 때 문후가 개입했다.

그의 입꼬리는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길게 찢어져 있었다.

“천문진인이라면 제가 알지요. 무당은 물론이고, 구파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입니다. 오래 전에 은거하여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지만, 정파 내에서는 정평이 나 있지요.”

“올 봄에 귀천하셨소이다.”

무암자의 말에 문후는 탄성을 흘렸다.

“아! 강호의 큰 별이 지셨군요. 그래도 그분의 비전이 남아서 이렇게 좋은 분께 이어졌다니 참으로 강호의 홍복입니다.”

이것은 인왕에게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신호와 같았다.

“크흠! 비록 마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런 고수라면 존중받아 마땅하지. 그래, 그 비급의 대가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무암자를 대신해 소우륜이 나섰다.

눈빛이 번들거림은 욕망의 크기를 드러냈다.

“보고에 직접 들어가서 저희가 한 가지씩 고르기를 원합니다.”

“그 전에 물건부터 봤으면 좋겠네.”

“그건 불가합니다.”

인왕과 무암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래를 할 때 빠지지 않는 대화였다. 저렇게 조금씩 원하는 것을 조율하면서 거래를 이어가는 것이 상식이다. 하나 비급의 특성 상 공개를 하는 순간 값어치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흥! 내가 뭘 믿고 너희들을 보고에 들여보낸단 말인가. 차라리 원하는 것을 말하라. 그렇다면 나 또한 가져오겠다. 동시에 교환하면 되지 않겠는가?”

“보고 안의 뭐가 있을지는 들어가 봐야 아는 법. 그저 오랜 시간 이어져온 개미굴의 명성을 믿을 뿐이외다.”

“자네는 욕심이 너무 많군.”

인왕이 미간을 좁혔다.

한데 예기치 못한 지원군이 등장했다.

소우륜이 무암자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생, 우리가 개미굴 오층까지 내려온 건 인왕의 명성을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이제 와서 물건을 보여주지 않고, 원하는 것만 요구하는 건 떼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그 아이를 살리고 싶다 한 건 자네였어. 나는 자네에게 방법을 알려줬고. 이제 와서 물건이 아까워진 건가? 그 아이가 한낱 종이보다 중요하다는 건가?”

“대형!”

인왕은 입꼬리를 올렸고, 무암자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무명비급을 넘기고, 의형제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중이다. 한데 감사히 받기만 해도 모자랄 사람이 자신의 비밀까지 폭로하니 어처구니가 없을 터였다.

“무당파가 사층을 지나 오층에 이를 걸세.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텐가?”

“하지만······.”

천장에 숨어 있던 이훤은 명룡사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회귀 전 죽어가던 무암자는 천공혈륜겁을 전하며 세 명의 죽음을 원했다. 그중 팔검기객 소우륜에 대한 원한이 가장 깊었다. 사지를 자르고, 나무에 매달아 천천히 죽여 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결말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과정도 비슷했네.’

이훤이 소마에게 배신당했던 것처럼 무암자 또한 소우륜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죽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걸고 생면부지의 이훤과 거래를 하지 않았으리라.

‘신경이 쓰이네.’

인왕과 소마, 그리고 명룡사우.

좌우를 번갈아보며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이훤에게 있어서 명룡사우의 생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과 얽혔던 사연은 회귀 전 모두 끝내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무암자에게 소우륜의 흉계를 알려주거나, 대신 죽여줄 의리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니 명룡사우는 내버려두고, 소마에 대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데 문제는 역시 무명비급이다.

지금까지 이훤이 알게 된 사실만 종합해도 무명비급과 천공혈륜겁은 관련이 없다. 무명자는 죽는 순간 천공혈륜겁이 마교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천문진인의 유진이 천공혈륜겁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애초에 신마의 무학이 천공혈륜겁이었다면 망아취자가 먼저 알아차렸으리라.

- 신마의 깨달음이 강호에 흘러나간다면 큰 혈겁이 일어날 것이야.

망아취자는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하나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이훤이 알고, 겪은 강호라면 몇 번을 뒤집혀도 상관 없지 않은가. 아닌 말로 다 죽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

- 그리고 화산에도 큰 화가 미치겠지.

이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망아취자와 노군의 말년만은 좋은 일로 채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양쪽 다 해결할 수가 없어.’

비급에 집중하는 순간 소마는 도망칠 것이고, 소마에 집중했다가는 명룡사우가 사라질 터였다. 무엇보다 여덟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기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훤의 고심은 깊어졌다.

한데 그 순간 묘한 기척에 느껴졌다.

초절정을 넘어선 고수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훤이 감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같은 걸 익혔기 때문이다.

‘귀호영체술.’

이훤은 눈을 부릅뜬 채 천장 주변을 살폈다.

안력을 극도로 증폭시킨 끝에 발견할 수 있었다.

기둥 뒤에서 한쪽 눈만 내민 채 아래를 살피고 있는 청년을 말이다.

‘아!’

마치 회귀 이후 온 세상의 운이 집약된 듯했다.

이훤은 청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해결책을 찾았으니 더 이상 고심할 필요가 없다.

‘이러다 육대괴마가 다 모이는 건 아니겠지?’

< 18, '그'가 있었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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