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그’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기존 무료 회차였습니다) >
18, ‘그’가 있었다.
회귀 전 이훤은 온천을 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낙엽이 온수와 함께 흘러내리자 청소를 마음먹었다. 자칫 주인의 눈에 뜨였다가는 매질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병약한 몸을 이끌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절벽에 올랐다.
그러다 저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창 배고픔에 몸부림치던 시절이 아닌가.
과실의 액이거나 젖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핥아마셨다. 배가 불렀고, 힘이 났다. 그 후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위를 핥았다.
당시에는 노비였지만, 한 때 화산파에서 기초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몸이 좋아졌으며, 활력이 샘솟았다.
평범한 액(液)이 아님을 확신했다.
전설의 공청석유가 존재한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공청석유(空靑石乳)라면 한 방울을 먹으면 심신에 활력이 돋고, 한 모금을 마시면 임독맥이 뚫린다는 희대의 영약이 아닌가.
하여 이훤은 그냥 저것을 공청석유라 칭했다.
공청석유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그렇기에 날을 잡아 근원을 수색했고, 지금과 같이 두 손바닥을 채울 정도의 공청석유를 찾았다. 당시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그것이 통한의 결정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당시 이훤은 노비로 끌려오면서 단전을 금제당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공청석유를 흡입했지만, 단전에 쌓이는 대신 사지백해로 자취를 감췄다.
기연을 얻었지만, 너무나 허망했다.
하나 사지백해로 흩어진 기운만 해도 어지간한 악인은 손쉽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맨손으로 바위를 쪼개고, 바위를 으깰 정도였으니 소림의 고승이 보았다면 다짜고짜 제자로 삼았을 만큼 육신의 단련이 극대화됐다.
이훤은 그 날 이후 은밀하게 수련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이훤을 관리하던 만력당의 당도가 늦은 밤 처소에 들이닥쳤다. 평소 남색을 하며 노비들을 괴롭히던 자가 달려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짱돌로 놈의 머리를 뭉갠 후 탈출했다.
오층의 철문을 여닫는 방법이야 수년 간 지켜보면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개미굴의 거미줄처럼 얽힌 동굴은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오층부터 거슬러 올라가 기적처럼 개미굴을 벗어났다. 하나 인왕의 명령을 받은 살왕과 혼왕의 수하들은 끈질기게 이훤을 추격했다.
그러다 괴노인을 만났다.
죽어가던 그는 천공혈륜겁을 전했다.
이훤은 강호인에게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공청석유를 복용했지만, 단전이 금제 당했기에 사지백해에 퍼져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돌이켜보면 괴노인이 천공혈륜겁을 전한 건 통한의 결정 때문이었다.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한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더라. 그 후 이훤은 괴노인이 부탁한 세 명을 죽인 후 취마의 삶을 살게 됐다.
이훤은 잠시 옛일을 떠올린 후 히죽 웃었다.
“그 때도 좋았지만, 더 좋은 길이 있다면 가줘야지.”
이미 천공혈륜겁에 입문하여 오 성의 성취를 이루지 않았던가. 그러니 공청석유를 복용한다고 해도 천공혈륜겁의 성취와는 무관했다. 이제는 자연적으로 성장할 때였고, 깨달음으로 인해 육신을 관조할 때였다.
하나 이훤이 그것을 알면서도 개미굴까지 찾았다.
‘그때는 단전에 담지 못했지만, 지금이야 말로 단전을 제대로 채울 때다.’
회귀 전에는 천공혈륜겁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별개의 내공도 존재했다. 하나 잡다하게 이것저것 익히며 쌓은 내공은 정순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쌓을 셈이다.
자연지기의 집합체인 공청석유라면 명가의 심법보다 나을 터였다.
이훤은 그대로 팔을 집어넣어 손으로 공청석유를 떴다.
회귀 전 그가 공청석유를 얻은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삼 년 후다. 그러니 공청석유의 양은 회귀 전보다 많았다. 하나 한 방울도 흘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아.’
입에 넣는 순간 마치 바람처럼 흩어진다.
이훤은 잽싸게 손을 밀어 넣었고, 세 번에 걸쳐서 공청석유를 흡입했다. 천공혈륜겁을 극성으로 펼치는 순간 두 눈이 새빨갛게 번들거렸다.
지금 공청석유의 기운은 몸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임맥에서 멈췄다. 혈륜의 힘으로 기운을 뭉쳐놓고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 게다. 그도 그럴 것이 적진의 한복판인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늦을수록 기운이 흩어진다.’
예전과 달리 사지백해로 흩어져봤자 좋을 것이 없다.
이훤은 재빨리 동굴 밖으로 몸을 날린 후 미리 눈여겨보았던 장소로 향했다.
파팟!
공청석유를 단전으로 인도할 심법은 이미 정해놓은 후였다. 능가아발다라보경에서 비롯된 소림의 혼원일기공이야 말로 정순한 기운을 그대로 저장하기에 제격이다.
이훤은 큰 나무와 나무 사이에 위치한 작은 수풀에 자리를 잡았다.
목표는 하나였다.
천공혈륜겁이라는 명검 외에 이 갑자의 내공이 담긴 단전이라는 두 번째 무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인왕부에서 나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
*
무림맹의 분전은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다.
혼왕이 다스리던 삼층이 쓸려나갔고, 살왕이 점거했던 사층마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특히 사층에 머물던 악인들은 죄다 사술을 사용하거나, 살수였다. 동굴 사이에서 목숨을 노리고, 어둠 속에서 상대를 노리기에 최적화된 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무당파와 무림맹 외단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먼지처럼 쓸려나갔다.
구파오가로 대표되는 정파의 힘.
그것을 각성제에 취한 자들과 기습만을 노리는 자들은 배겨낼 수 없었다.
한데 놀랍게도 오층은 여전히 조용했다.
“온천이라고?”
인왕의 수족은 좌우사자를 비롯해 문후(文侯)라 불리는 세 명이다. 그 중 문후가 인왕의 머리 역할을 하며 인왕부의 대소사를 관리했다. 삼십 대 초반의 백면서생처럼 생긴 문후는 선한 웃음을 내비친 채 공사장을 내려다봤다.
“하하, 진짜 온천이네요.”
“원래 정자를 지으려 했다가 지반이 약해서 공사를 미뤘습니다. 한데 열기가 느껴져서 찾아와봤더니 온천이 흘러내리던 군요.”
문후는 온천에 손을 담갔다가 말했다.
“좋군요. 인왕께서 소일거리를 찾으시던데 온천이라면 좋아하실 겁니다.”
만력당의 당주는 상관인 문후가 존대하는 모습에 공손히 손을 모았다. 백면서생처럼 보이지만, 저 자의 말 한 마디에 쓸려나간 악인의 숫자만 해도 세 자리는 될 터였다.
“그렇다면 조경을 해놓겠습니다.”
“잠시 만요.”
문후는 온수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절벽을 바라봤다. 그러자 만력당주가 수하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당도들이 첨벙거리며 온천에 들어섰고, 허리를 굽혀 다리를 만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절벽 앞에서 올려다보니 온수가 쏟아지는 구멍이 참으로 특이했다.
“저절로 된 것 치고는 너무 깔끔한데요.”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다리 역할을 하던 당도 중 체구가 작은 자들이 절벽을 올랐다.
“빈 동굴입니다. 출입구는 따로 없습니다. 바닥에서 샘이 솟구치는데 제법 수량이 많습니다.”
“특이한 부분은 없나요?”
문후는 밖에서 보고를 듣는 입장이고, 당도는 안에서 직접 확인하는 중이다. 그러니 후자의 입장에서 꽉 막힌 동굴을 얼마나 제대로 확인했을까.
“별다른 건 없습니다.”
“출입구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세요.”
이번에는 만력당주가 직접 살폈다.
“동굴 내에 작은 구멍이 있긴 한데 팔을 넣으면 꽉 찰 정도입니다. 직접 만져보고 두들겨봤지만, 출입구는 없었습니다.”
“알았습니다. 공사가 완료되면 말씀해주세요.”
문후는 개미굴의 총군사라 할 수 있다.
하나 그는 사층이 무너지기 직전임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발걸음을 가볍게 하여 인왕전으로 향했다.
“슬슬 여기도 정리해야 하려나.”
*
이훤은 목적을 이뤘다.
천공혈륜겁은 여전히 오 성이었지만, 단전에는 이 갑자의 정순한 내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제 두 개의 내공을 번갈아가면서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심지어 단전의 내공을 사용하면 눈이 빨개지지도 않았고, 두 사람처럼 흔적을 남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를 죽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지.’
이훤은 인왕전의 지붕 아래 숨어서 내부를 살폈다.
자신을 노비로 삼고, 개미굴이라는 추악한 공간을 지배하는 인왕이 한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인왕전 내에 사내는 한 명뿐이다. 그는 십여 명의 여인들 사이에서 호색한처럼 손을 놀렸고, 간간히 여인들이 건네는 술을 마셨다.
‘제일 행복할 때 죽여주마.’
이훤이 슬그머니 내부로 진입하려는 순간이었다.
인왕전의 문이 열렸고, 서생의 복장을 한 자가 나타났다.
그는 인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인왕, 문후입니다.”
인왕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키득거렸다.
“자네를 몰라볼 리 있나. 자네의 웃는 얼굴을 벌써 몇 년째 보고 있지 않은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웃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을 뿐입니다.”
인왕은 한쪽에 치워놓은 대도를 잡았다.
“알았네. 그게 뭐 중요한가? 그나저나 정파가 사층을 뚫으려 한다고?”
문후는 입꼬리를 올린 상태로 말했다.
“네, 아무래도 꽤 뛰어난 간자가 있었나 봅니다.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아하니 조만간 오층의 입구도 뚫리겠지요.”
“클클, 그렇다면 내가 직접 힘을 써야겠군.”
인왕은 본래 마교의 팔대가문 중 혈도가(血刀家)의 장로였다. 혈도가의 여식을 건드리고,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개미굴에 정착한 게다. 그렇기에 무림맹이 지척에 이르렀다고 해도 크게 괘념치 않았다.
“마룡대와 사룡대는 이미 준비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인왕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겠지요.”
문후의 말에 인왕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도를 챙겼다.
“자네의 말대로 해서 이뤄지지 않은 적이 없어. 그러니 내가 나서야 할 때가 오면 말하게.”
“지금 무림맹보다 더 급하게 처리하실 일이 있습니다.”
인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무림맹을 움직인 건 무당파입니다. 그리고 무당의 장로 두 명이 하산했지요. 그들은 무당의 반도를 잡으려 합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인왕을 뵙겠다고 찾아온 무리 중에도 무당 출신이 있지 않습니까.”
문후는 입꼬리가 귀에 닿을 것처럼 웃었다.
저것이야 말로 인상과 별개로 진짜 웃는 행위였다.
“무당의 장로들이 찾는 무당의 반도가 무엇을 가져왔을까요?”
인왕의 얼굴에서 한순간 취기가 자취를 감췄다.
그는 내공으로 술기운을 날려 보낸 후 여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좌우사자를 불러. 그리고 그, 그 새끼들 이름이 뭐지?”
문후는 고개를 조아렸다.
“저들끼리 명룡사우라고 하더군요.”
“그래, 다른 놈들은 뒤로 미루고, 그것들부터 불러. 무당이 무림맹을 움직여서까지 찾으려는 이유가 뭘까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잠시 후 인왕이 의관을 정제한 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옆을 좌우사자가 채웠고, 한 단 아래 문후가 손을 모은 채 시립했다.
끼이이익-
인왕전의 문이 열리고 네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하.’
이훤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침음을 흘렸다
인왕전 내에 존재하는 여덟 명.
그는 그 중 다섯 명을 알고 있었다.
‘저것들이 왜 저기서 나오지?’
< 18, ‘그’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기존 무료 회차였습니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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