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미래를 안다는 건. (2) >
17, 미래를 안다는 건. (2)
“누구냐?”
이훤이 파륜권을 펼치는 순간 주먹에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그것은 적의 검을 두 동강 낸 후 얼굴까지 찍어 눌렀다.
콰직!
그대로 돌아서며 손끝에 혈륜을 집중했다.
팟!
절혼지가 발출되는 순간 희미한 기파가 공간을 일렁이며 퍼져나갔고, 바위 뒤에서 뛰쳐나오던 적은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후우.”
이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흙과 모래가 비산하며 바닥에서 살수들이 솟구쳤다. 하나 그 또한 이미 이십 년 전부터 눈으로 보았던 적이 아니던가. 이훤은 무를 뽑듯 솟구치는 적의 목을 움켜쥔 채 꺾어버렸다. 위장막을 벗어던지고 튀어나오는 놈의 심장을 가볍게 찔렀다. 허공에서 그림자처럼 흐물흐물 내려오던 녀석은 턱을 날려 버렸다.
이훤은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모든 암습자들을 손쉽게 처리했다.
“씨발, 이 년 동안 너희들의 밥을 챙겨준 게 나였다.”
동굴로 들어섰다가 다시 나왔다.
그리고 시신의 모든 뼈를 으스러트릴 것처럼 짓이겼다.
“퉤!”
그 후에야 동굴로 들어섰다.
동굴의 끝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문이 존재했다.
열두 개의 손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이훤은 그 중 두 개에 손을 얹은 채 혈륜을 휘돌렸다.
이년 동안 누군가 문을 열어줄 때마다 매일같이 지켜본 기관이다.
그그그그극-
철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야명주나 횃불이 아니라 태양의 열기였다.
*
개미굴이라 하면 모두가 지하를 떠올렸다.
험준한 오태산과 수많은 동굴.
인왕이 머무는 오층이야 말로 무저갱처럼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옥처럼 알려졌다.
하나 이훤은 지금 동굴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숲속에 서 있었다.
‘이곳에 오지 않는 한 누구도 믿지 못할······.’
그가 나온 동굴의 끝은 오태산의 봉우리 중 이름 없는 산자락이다. 그리고 산자락 아래의 분지에는 제법 규모 있는 마을이 존재했다.
저곳이 바로 개미굴의 종착역인 오층이다.
사층보다 아래에 있으니 오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하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층과는 전혀 다른 세상임이 분명했다.
이훤은 나무 위에 올라 오층의 전경을 둘러봤다.
‘변한 게 없군.’
회귀 전 이곳에서 사오 년을 보냈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벗어나기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무너트리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훤이 강해지기 전 개미굴은 무너졌다.
가운데 봉우리가 주저앉으며 지형이 변했을 정도로 큰 사고가 있었단다. 사람들은 천벌이라고 여기며 개미굴을 기억에서 지웠다. 이훤 또한 술로 아쉬움을 달래며 개미굴에 대한 악연의 끈을 놓아야 했다.
‘결국 여기를 다시 오게 되는구나.’
그는 회한 가득한 눈빛을 거두고, 냉정하게 오층, 인왕부를 살폈다. 인왕부(人王府)는 인왕전을 중심에 두고, 방사(放射)형태로 지어진 전각군을 벽으로 삼았다.
희한한 장소였다.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 인왕부의 외관은 불과 십 년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 밖의 다른 건물들은 갓 지은 태가 역력했다.
예전에 노비로 있을 때에는 몰랐다.
이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마을이나 마찬가지였다.
‘외부의 도움 없이 이런 공간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지.’
결국 개미굴 자체가 악인들의 집합소가 된 것도 누군가의 의도가 섞였을 수 있는 게다.
이훤은 웃었다.
사연이 깊을수록 구멍 또한 깊을 터였다.
어차피 개미굴 전체를 정화하고, 악인을 소탕하겠다는 결의조차 없었다. 그저 옛 원한을 풀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찾아온 길이 아니던가.
그가 할 일은 간단했다.
- 한 가지를 마신다.
- 한 가지를 얻는다.
- 한 사람을 죽인다.
이것만 이뤄낸다면 뒷일은 무림맹에게 맡길 생각이다.
무림맹이야 말로 정도(正道)의 상징이면서 의협(義俠)을 행하기 위해 강호인들이 뭉친 조직이다. 그러니 그들이 의협을 편안하게 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 요량이다.
이훤은 인왕부로 향했다.
밤까지 기다렸다가 스며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입구의 시신들은 곧 발견될 터였다. 그러니 개미떼처럼 솟아나올 악인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인왕부가 제격이었다.
죽은 자의 무복과 칼을 챙겨왔다.
인왕부 안의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무기를 지닌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전자는 인왕의 수하였기에 모든 것이 공짜였고, 후자는 전자를 위해 봉사하는 노비에 불과했다.
이훤은 자신의 집처럼 거리낌 없이 객잔에 들어섰다.
대낮임에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다. 어차피 악인들 중에서 제법 칼을 쓰는 자들만 모아놓은 장소였다. 그러니 제멋대로 떠드는 이가 수두룩했다.
‘저런 놈들이야 말로 가장 먼저 버려졌지.’
인왕의 직속이라 할 수 있는 고수들은 인왕전 주변에 퍼져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훤은 더욱더 편안한 마음으로 섞여들었다.
“합석 좀 합시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힐끔 보더니 말을 건넸다.
“입구 경계였나?”
“어. 방금 교대했지.”
“무복이 찢어졌군.”
무복의 주인은 절혼지를 맞고 절명한 악인이다.
이훤은 가슴팍에 뚫린 구멍을 매만지며 혀를 찼다.
“노비 새끼를 두들겨 패는데 옷을 잡아당기잖아. 찢어진 김에 놈의 아가리도 찢어줬지.”
“클클, 어린 친구가 성질이 장난 아니군.”
사내는 기꺼이 자리를 내어줬다.
이곳은 나이와 출신이 아니라 실력과 악행으로 인정받는 장소였다.
이훤은 손짓으로 점소이를 부른 후 몇 가지 안주를 능숙하게 주문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소년은 잠시 후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그런데 좀 소란스럽던 걸? 또 공사라도 하나.”
사내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름에 잠깐 하더니 요즘은 뜸하네.”
이훤의 눈빛이 한차례 번뜩였다.
인왕전 주변에서 공사를 하지 않는다는 건 아직 그것이 발견되기 전이라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이훤이 알고 있던 과거와 지금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좋네.’
사내가 슬그머니 곁눈질을 했다.
“한데 갑자기 공사를 묻는······.”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사는 공사지. 정파 놈들을 모조리 묻어버리는 것만큼 즐거운 공사가 어디 있겠어?”
사내는 이훤의 너스레에 키득거리며 말을 보탰다.
“살왕과 혼왕의 수하들만 신났지. 개미굴에 들어온 이상 두 발로 걸어 나가는 놈이 몇이나 될까? 나도 인왕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오랜만에 피 맛을 보고 싶군.”
사내는 취기가 오른 듯 호방함을 자랑했다.
이훤은 이래서 술이 좋았다.
술은 자물쇠가 채워진 입까지 자연스럽게 열어버리는 최고의 무기가 아니던가. 술이 몇 순배 돌았고, 특유의 너스레를 통해서 사내와 교류를 이어갔다.
“홍초주는 다 좋은데 쓴 맛이 너무 강해!”
“클클, 소형제는 아직 술을 잘 모르는군. 술은 씁쓸할수록 좋은 거라고.”
“흥! 술이 다 똑같은 술이지.”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이거 안 되겠네. 내가 안계를 넓혀주지. 따라와 봐.”
이훤은 사내를 따라 객잔을 나섰다.
“골목을 꺾으면 작은 주루가 나와. 소형제는 술을 잘 모르니 있는지도 몰랐을 걸? 그곳의 홍초주는 달짝지근하면서 씁쓸한 오묘한 맛을 자랑한다고!”
“아니지. 씁쓸하면서 뒷맛이 달콤한 거지.”
사내는 골목 중앙에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한데 이훤의 기도는 일변한 후였고, 사내는 두 개의 귀화(鬼火)를 본 것이 생의 마지막이었다.
“옷은 잘 입을게.”
사내의 옷을 벗긴 후 시체는 냇가에 버려뒀다.
처음부터 비슷한 체구이면서 만력당에 속한 악인을 찾았다. 만력당(萬力黨)은 멋들어진 이름과 달리 인왕부 주변을 경계하는 이들의 조직이다. 그리고 이훤이 찾아가야 할 곳을 지키는 자들이기도 했다.
“슬슬 날은 저물고, 술을 맛있고······.”
이훤은 사내가 데려가려던 주루에서 술 한 병을 받은 후 익숙하게 거리를 지나쳤다. 그리고 인왕전이 코앞에 이르렀을 때 방향을 바꿔 허름한 숙소로 향했다.
술을 마시러 가는 자, 잠을 청하는 자.
오직 경계를 서는 이만 없었다.
이훤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만력당의 배후로 돌아갔다.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가니 버려진 공사장에 이르렀다. 사내가 여름에 공사를 하다가 지금은 멈췄다는 장소였다.
‘방향이 어디였더라?’
이훤은 공사장을 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기억 속의 풍광이 서서히 뇌리를 스쳤다.
값 비싼 청석을 바닥에 깔고, 주변은 꽃과 나무로 장식을 했었다. 그리고 나무의 내부를 통째로 파내서 만든 관에서는 뜨거운 물이 쉴 새 없이 내려왔다.
이곳은 본래 정자를 세우려 했다.
하나 우연히 온수(溫水)가 솟구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반 년 후 인왕의 온천이 된다. 그리고 오층까지 흘러들어온 이훤의 마지막 업무가 온천 관리였다. 관리라고 해봤자 물때가 생기지 않도록 바닥을 닦고, 주변의 낙엽을 치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니 노비에게 일을 맡겼으리라.
터벅터벅-
이훤은 눈을 감고 공사장을 지났다.
그리고 깎아지를 듯한 절벽 앞에 섰다.
바닥에서 이 장 높이.
이쯤이었던 듯싶다.
천공혈륜겁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는 순간 감은 두 눈 사이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더없이 예민해진 두 손은 천천히 벽을 매만졌다.
그리고 금세 찾아냈다.
만력당의 당도들이 곡괭이와 망치질을 하다가 발견했을 정도이니 깊지는 않을 터였다.
“후우.”
삼초나락수를 시전 하는 순간 양 손이 두부를 으깨듯 벽을 파고들었다. 삼초나락수는 초식이 이어질수록 위력이 증가했다. 한 치가 파였다가 세 치가 파였고, 이내 일곱 치가 움푹 파였다. 그리고 두 손은 공동에 들어섰고, 그 자리를 통해 온수가 쏟아져 나왔다.
한서불침의 경지였지만,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을 밀어내는 온수의 물결은 포근함을 전해줬다. 하나 나른해지는 대신 혈륜을 더욱 휘돌렸다.
‘아! 찝찝하게.’
퍽퍽퍽퍽퍽!
이훤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빈 동굴의 온수는 어차피 바닥에서 샘솟았다. 그렇기에 들어서는 순간 허리까지 차오른 온수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쯤 나아갔을까.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벽을 훑고 지나갔다.
이훤은 찰나간 희뿌옇게 번들거리는 벽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헤헤, 찾았다.”
이훤은 희뿌옇게 변색된 바위의 위쪽을 바라봤다.
오래 전의 기억이었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자연스럽게 변색되지 않은 부분과의 경계를 살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혈륜이 맺힌 절혼지는 두부처럼 바위를 뚫고 사라졌다.
그때부터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행위가 반복됐다.
마치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듯 돌을 빼내고, 흙을 털어내며 공간을 넓혔다.
이훤은 팔이 드나들만한 공간 내부를 바라봤다.
사람의 머리통만한 공간에는 어디선가 흘려 내려왔을 희뿌연 액이 바위틈에 고여 있었다. 희미한 빛 사이에서도 녀석은 환영하듯 영롱하게 반짝였다.
회귀 전과 회귀 후.
이훤은 두 번째 보게 된 희뿌연 액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봐서 반갑다.”
< 17, 미래를 안다는 건.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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