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미래를 안다는 건. >
17, 미래를 안다는 건.
개미굴의 일층은 가장 많은 악인이 가장 많은 사기를 치며 가장 많은 범죄가 하루 종일 일어나는 장소였다. 한데 그랬던 개미굴이 오늘따라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백의무복을 걸친 무인들은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악인들을 죽였다.
청수한 인상의 노인은 소매로 입을 가린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쯧, 버러지 같은 것들이 많이도 모였군.”
그는 무림맹 외단의 부단주이자,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였다.
탈명선협(奪命扇俠) 위태교.
그는 이번 작전을 출세의 동아줄로 생각했다.
무림맹의 부맹주가 직접 입안한 후 무당파를 주축으로 전열을 꾸몄다. 그 외에 외원의 타격대가 셋이나 공동으로 출진했다. 핵심인원만 이백 명이 넘었고, 오태산 근처를 포위하고 있는 산서지부와 중소방파의 무인들까지 헤아리면 육백 명을 훌쩍 넘길 정도였다. 이런 작전을 성사시킨다면 일신의 명성은 물론이고, 맹의 장로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외단의 부단주만 해도 여섯 명이야. 언제까지 뒤엉켜서 엎치락뒤치락 할 수는 없지.’
백호대와 비검대와 비적대의 대주가 다가왔다.
“일층의 점거가 모두 끝났습니다. 납치된 아이들은 밖으로 내보냈고, 현재 잔당을 소탕 중입니다.”
“우리 쪽 피해는?”
대주들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한 명도 없습니다.”
개미굴 일층에 있던 악인들의 숫자만 해도 이천여 명은 됐으리라. 하나 대부분 삼류잡배였고, 전왕의 수하라고 해봤자 절정의 무인이 드물었다. 그러니 전원 절정의 무위를 자랑하는 외단의 타격대로서는 식은 죽 먹기처럼 일층을 점령했다.
위태교는 독문병기인 철부채를 흔들며 웃었다.
“클클, 좋군. 종 부각주는 어디 있는가?”
종초홍이 기다린 것처럼 다가왔다.
“전왕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전살대는 여기 여러 대주들께서 한 놈도 빠짐없이 참살하셨고요.”
위태교의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비선각의 정보는 강호 제일이로군.”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닐세. 멀쩡하던 개미굴이 소란스러웠던 건 비선각에서 꾸민 일이겠지? 그 덕에 우리는 적의 후미를 기습하여 피해 없이 승리했잖은가. 이번 일이 잘 마무리 된 후 비선각주에게 자네의 공을 치하하겠네.”
종초홍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모았다.
“위 장로께서 좋게 봐주니 비선각의 세작들도 힘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번 작전의 공은 오롯이 이훤에게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개미굴의 모든 시선을 홀로 감당하지 않았던가. 그 덕에 이백여 명에 이르는 무림맹 타격대가 은밀하게 침입할 수 있었다.
‘빚이 점점 늘어나는군.’
위태교는 종초홍의 어깨를 두드린 후 움직였다.
“일단 전왕의 시신을 확인하자고.”
타격대의 대주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도인들이 슬그머니 종초홍의 곁에 붙었다.
“사형, 시신을 모두 확인했습니다.”
종초홍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곁에 모인 도인들은 모두 무당파의 제자로 종초홍의 사제들이다. 그리고 이번 작전을 위해 특별히 파견된 검수(劍手)이기도 했다.
“놈의 흔적은?”
사제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종초홍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표정을 굳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능수능란하게 장로인 위태교를 대하던 사람 같지 않았다. 초조함을 내비치며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을 덧붙였다.
“본 파의 반도를 잡기 위해 장문인께서는 부맹주까지 동원하셔서 이번 작전을 실행하셨다. 놈이 개미굴에 들어선 것이 확실한 이상 반드시 찾아야 한다.”
“예, 사형!”
“사형, 근데 죽여도 됩니까?”
종초홍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한때 무당의 일대제자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의제들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아. 그러니 발견하는 즉시 일전에 나눠준 호각을 불어라.”
십여 명의 사제들은 품안의 호각을 확인한 후 전왕전 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고목처럼 빼빼마른 두 명의 노인이 다가왔다.
“종초홍이 두 분 사백을 뵙습니다.”
그들은 각기 무당의 장로로서 백암진인와 청암진인이라 불리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무암자를 찾지 못했구나.”
“아래로 내려가면서 훑으면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백암진인이 눈을 빛냈다.
“잊지 마라. 무암자, 그 반도 놈의 죽음보다 중요한 건 훔친 물건의 행방이다. 그분의 심득이 강호에 전해진다면 큰 혈겁이 일어날 터, 반드시 확보하여 폐기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백암진인은 꼬장꼬장한 말투로 훈계한 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지나쳤다. 한데 청암진인은 다소 후덕한 인상을 보이며 말을 건넸다.
“술 냄새가 나는구나.”
“네, 조금.”
“클클, 너처럼 치밀한 녀석이 대업 전에 술을 마셨다면 성사를 장담했기 때문이렷다?”
종초홍은 이훤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덕을 조금 보았지요.”
“그래, 사형이 다소 엄하게 말했지만, 너를 탓하는 건 아니다. 그저 사안이 너무 위중하기에 당부를 하려는 것뿐이다. 함께 가자. 이곳에서 찾지 못했으면 아래층에서 찾으면 될 것이야.”
*
무림맹 타격대가 백팔십 명이다.
거기에 더하여 무당의 문도가 열 명이다.
그 외에 각 조직을 오가며 말을 전달하는 인편을 더하면 이백여 명이 된다. 그 모든 무인들이 전왕전을 둘러싼 채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봤다.
“당장 이층으로 내려가서 도왕을 정리해야 하네.”
백암진인의 주장이다.
하나 위태교는 말로만 듣던 개미굴의 동굴들을 목격한 후 한껏 위축이 된 상태였다. 아닌 말로 지금껏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층의 점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선배, 당연히 오층까지 내려가서 인왕이라는 마두의 목을 치고 싶지요. 하나 일층에서 뻗어나가는 동굴의 숫자만 해도 백여 개가 넘는답니다. 이대로 흩어졌다가 적의 기습을 당하거나, 길을 잃어 행방불명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기회가 왔을 때 몰아쳐야 하네! 지금이 아니면 개미굴을 청소하는 건 불가능해! 어차피 며칠이 지나면 또 다른 전왕이 나타나 민초들을 핍박할 것이야.”
두 사람의 주장은 타당했지만, 위태교 쪽으로 무게가 쏠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개미굴은 위협적인 장소였다.
위태교 역시 자신 쪽으로 기운 분위기를 느끼며 목소리에 힘을 더했다
“저는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현실을······.”
종초홍이 전왕의 단상 근처를 살피다가 외쳤다.
“잠시 만요!”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종초홍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잡혀 있는 꽃잎이었다. 종초홍은 꽃잎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조매입니다.”
“조매라면 이르게 피는 매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더냐?”
“지금 꽃잎의 이름을 논할 때가 아닐세!”
하나 종초홍은 조매를 쥔 채 의자를 신중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기관을 발견한 후 발동시켰다.
그그그극-
울퉁불퉁하던 기암괴석 사이에 입구가 나타났다.
“아까 세작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설마 그가 흔적을 남겼다는 거냐?”
백암진인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반면 위태교는 인상을 썼다.
“일개 세작의 흔적을 믿고 내려가기에는 딸린 목숨이 너무 많네.”
종초홍은 전왕의 시신을 가리켰다.
“전왕의 시체가 어떻습니까?”
“자세와 표정을 보면 기습이 아니라 정면에서 붙었어. 한데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죽었군. 고수야. 그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을 만큼 검술에 조예가 깊군.”
청암진인의 말에 위태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일개 세작이 전왕을 죽이고, 비밀 통로를 발견한 후 흔적을 남겼다는 겐가?”
“세작이라고 해서 다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요.”
위태교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설마! 매화와 자네가 믿을 만한 세작, 아니 동료라면?”
무인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방파가 떠올랐다.
그곳의 상징과 명성, 그리고 무공이 더해지는 순간 분위기의 추는 백암진인 쪽으로 기울었다.
‘화산이 함께 하고 있었던 건가?’
‘하긴 지리적으로 따지자면 화산이 제일 가깝지 않은가. 종 부각주의 귀계라면 화산을 몰래 끌어들였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
백암진인은 먼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동굴에 발을 들인 후 화색을 띄며 말했다.
“갈림길마다 조매의 꽃잎이 놓여 있군. 홀로 개미굴을 돌파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자다. 너와 어떤 사이더냐?”
종초홍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조만간 제가 형님이라고 부를 사람이지요.”
“네가 의형제라 부르는 사람이라면 나도 믿겠다.”
청암진인이 뒤따랐고, 위태교 또한 미적거리면서도 뒤를 따랐다. 정파의 중진, 그것도 무림맹에 속했다면 방법이 있음에도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다.
이훤의 예상처럼 정파는 비탈길의 돌처럼 쉬지 않고 구르기 시작했다.
“돌입한다!”
*
이훤은 박쥐처럼 천장에 붙어 있었다.
하나 그 밑을 지나는 흑의인들은 이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바삐 걸음을 옮겼다.
“도왕의 수하들이 이층에서 분전하고 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도왕을 지원하여 적을 섬멸한다.”
삼층의 혼왕(混王)은 여인을 납치하여 세뇌한 후 육욕(肉慾)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층의 살수들과 오층의 인왕이 허락한 수하들은 빈번하게 삼층을 찾아 회포를 풀곤 했다. 혼왕의 수하들은 각성제라도 먹은 것처럼 혈기를 뿜어내며 동굴을 지나쳤다.
타탁-
이훤은 그들이 지나간 후에야 동굴에 내려섰다.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마다 술을 마신 후 잘라온 조매의 꽃잎을 하나씩 내려놨다.
이미 무림맹은 이층을 돌파하기 직전이다.
그러니 삼층의 무인들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게다.
‘무림맹의 약점은 지리를 모른다는 것.’
그것이 충족된 이상 개미굴의 악인들은 무림맹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훤은 가벼운 걸음으로 동굴을 질주했다.
한참을 나아가던 중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사층에서 급하게 올라온 살수들이 분명했다.
그는 다시 동굴의 천장에 붙은 채 귀호영체술(龜護影體術)을 펼쳤다. 탈마가 전해준 귀호영체술은 기척을 숨기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하나 탈마조차 절정을 넘긴 후 귀호영체술을 버렸다. 술법에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바로 내공이다.
귀호영체술은 심법이나 무공과 달리 인체를 조율하는 기술의 일종이다. 그렇기에 단전에 내공을 담는 순간 실행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나 이훤의 단전은 텅 비어있지 않던가.
천공혈륜겁으로 인해 육신 자체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언젠가 목적했던 심법을 얻게 된다면 단전을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귀호영체술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이걸 펼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군.’
이훤은 오층에 있을 그것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나 살왕의 수하들은 살수임에도 머리 위에 붙어 있는 이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적을 피하면서 삼층과 사층을 지나쳤다. 개미굴에 대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층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진다고 했다. 아래로 갈수록 동굴을 파기 힘드니 당연한 사실처럼 알려졌다. 하나 실제로는 진짜 개미굴처럼 되는대로 파헤쳤을 뿐이다.
그리고 오층이야 말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랐다.
< 17, 미래를 안다는 건.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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