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4)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4)
예상대로 개미굴의 일층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그들은 노비로 붙잡혀온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조리 목을 벴다. 당장이라도 개미굴 전체를 소탕할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으리라.
하나 거기까지였다.
정파인들은 전왕의 사지를 자르고, 전왕전을 불태웠지만 더 이상 깊숙이 들어서지 못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동굴은 제아무리 정파인이라고 해도 쉬이 들어서기 어려웠다. 결국 소기의 성과라는 핑계와 악인을 징치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퇴각했다.
이 모든 것은 이훤이 이층으로 끌려온 이후 도망쳐 온 자들에게서 들은 정보였다. 그렇게 이훤은 새로운 주인을 모셔야 했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계속됐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움직였는데 이런 놈들에게 겁을 먹었을 리 없지.’
이훤은 전살대주에게 끌려가는 내내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가 산서성에 접어든 후 한 달 동안 돈을 펑펑 쓰며 유람한 까닭은 비단 술을 마시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날짜를 맞춰야 했다.
이 즈음 기습이 있다는 것을 회귀 전에 겪은 이상 이용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돈을 탕진하고, 술을 마시며 느긋하게 유람을 했다.
만에 하나 시기가 맞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저 복수만 하고 떠나려 했다.
하나 다행히 시기가 맞는다면 개미굴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걸 탈취할 요량이었다. 다행히 언젠가부터 거지새끼들이 꼬리를 물고 주변을 배회했다.
꽃에 벌이 찾아오고, 똥에 파리가 꼬이듯.
그리고 오태산에 이르렀을 때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만남이 이뤄졌다.
종초홍(鐘初鴻).
무림맹 비선각의 부각주이자, 무당의 일대제자.
훗날 불사검협(不死劍俠)이라는 별호로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 무당의 차기 장문인이었다. 조매를 핑계로 찾아온 그를 확인하는 순간 이훤은 자신의 예상대로 이뤄졌음을 확신했다.
‘훗, 내가 살아보니 인생에 우연은 극히 드물더라.’
비선각(秘選閣)은 무림맹이 움직이기 전 정보를 수집하고, 작전을 계획하는 핵심 조직이다. 하여 구파오가의 직계나 강호의 큰 명성을 떨치지 못한다면 입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곳의 부각주라면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이훤을 찾아왔으리라. 그리고 사마외도가 아님을 확인하고 스스로 물러났을 터였다. 아마 지금쯤 일층에 잠입하여 기습을 위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시선은 내가 끌어줄 테니 힘껏 날뛰어 보라고. 그래야 나도 빚을 받아내기가 편해지지.’
이훤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 앞에 전왕전이 보였다.
오늘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저곳은 불탔으리라.
아니 저곳만 불탔겠지.
‘회귀 전에는 그랬을지 모르지.’
정파인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
그러니 명분이 충족되는 한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길을 열어준다면 오층이고, 십층이고 간에 비탈길을 구르는 돌처럼 쉬지 않고 달려야 할 것이다.
‘오늘은 내가 있으니까 쉽사리 돌아갈 수 없을 거다.’
이훤은 정파의 저력과 한계를 모조리 끌어내서 개미굴에 처박을 셈이다.
“문을 열어라!”
전살대주의 외침에 전왕전의 문이 열렸다.
이훤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돼지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기억은 방금 전의 일임에도 희미하고, 어떤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또렷할 때가 있다.
‘저 새끼는 진짜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네.’
숨소리가 거칠어졌지만, 전살대는 점혈 당한 여파라고 생각할 뿐이다.
“전왕께서 말씀하신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전살대주는 한쪽에 시립했고, 전살대가 좌우를 포위했다.
전왕은 비대한 몸을 이끌고 직접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이훤의 맥문을 잡은 후에야 입꼬리를 올렸다.
내공의 흐름 자체가 없다.
그 말인즉슨 평범한 성인보다 힘이 약한 상태를 의미했다.
“물러가라.”
전살대주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어찌됐든 상대는 개미굴에서 혈겁을 일으킨 자가 아니던가. 그러나 전왕은 다른 생각이 있었기에 거듭하여 전살대를 내보내려 했다.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결국 전살대주와 전살대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전왕은 비어버린 이훤의 곁을 자신의 호위들로 채웠다.
황금조(黃金組).
금빛 무복을 걸친 십여 명의 무인은 천박한 명칭만큼이나 하찮은 무위를 지녔다. 그도 그럴 것이 쓸 만한 자는 모조리 인왕과 살왕의 수하로 끌려갔다. 그나마 남은 것들을 모아서 충성심을 새겨 넣은 게 황금조였다.
쿵!
전왕은 전왕전의 문이 닫히자,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내 밑에서 일하고 싶다며? 네 성취가 어느 정도냐?”
이훤의 능력은 단전의 내공과는 상관이 없다. 혈륜은 숨을 쉬고, 내뱉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해냈다. 그렇기에 전왕전 밖에 있는 기척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사 년 전에 절정이 되었습니다.”
“호오! 그렇다면 제법 명가의 수련을 받았을 텐데 어쩌다가 개미굴에 오게 됐지?”
“술을 워낙 좋아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이훤은 말끝을 흐렸지만, 전왕은 예상대로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클클, 술에 취해 사문의 남자 제자라도 건드렸나 보군.’
전왕은 단상 위에 올랐다.
그리고 검은 단약을 꺼낸 후 던졌다.
“좋아! 오늘 처음 보았는데 너를 믿을 수는 없는 법. 그러니 이걸 먹어라. 달에 한 번 해약을 줄 것이다. 어차피 일 년 정도 복용하고, 해독하면 효과가 없어. 그러니 일 년 동안은 신뢰를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라. 아! 그리고 나는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이 아니야. 데리고 나와!”
황금조의 조원이 곱상하게 생긴 사내아이를 끌고 나왔다.
전왕은 잔뜩 겁에 질린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웃었다.
“어때? 마음에 드는가?”
지금 이 순간만은 이훤이라고 해도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뭐하자는 거지?’
전왕은 그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크하하하! 자네가 노비들에게 안주를 줬다는 이야기에 예상을 했지. 어때 이 정도면 취향을 이겨낼 만큼 괜찮지 않은가? 나는 수하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야. 그러니 그걸 먹고, 우리 한 번 잘 지내보도록 하지.”
이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오면 자신의 행위를 저렇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지극히 개미굴적인 사고방식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하하.”
전왕은 거래가 이뤄줬다고 여긴 듯 소년을 내려 보냈다.
하나 이훤은 전살대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단약을 으깨버렸다.
우드득-
“너는 그냥 뒈지는 게 나을 것 같아. 뒈져라! 돼지야!”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황금조는 점혈을 믿고, 검도 뽑지 않은 채 길을 막아섰다.
그러나 이훤은 혈도가 점혈당한 사람답지 않게 청석을 으깨버리며 솟구쳤다.
꺾고, 뜯고, 비트는 순간 세 명이 죽었다.
“점혈을 확인했는데?”
진실을 말해줄 이유가 없다.
“이혈대법이다. 개자식아!”
전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혈도를 움직이는 이혈대법은 초절정 고수의 상징이 아니던가. 하나 눈앞의 사내는 조금 전만 해도 내공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다. 제아무리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맥문을 잡히면 내공의 흐름을 읽히는 법이다.
그는 찰나간 무엇이 진실인지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나 답을 채 내기도 전에 황금조가 전멸했고, 이훤은 군림보를 펼치며 다가왔다.
콰직! 콰직!
값비싼 청석은 발자국을 남기며 으깨졌다.
그 모습이 심히 두려웠다.
전왕은 곱상하게 생긴 아이의 목을 움켜쥔 후 내밀었다.
이훤이 흠칫 놀라는 사이 전왕이 검을 뽑았다.
“크큭! 이 새끼, 감히 나를 놀려?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내공의 흐름이 없을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초절정 고수였다면 이런 연극을 할 필요도 없지. 어디서 사술을 익혀 와서 감히 나를 조롱해?”
전왕은 돈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무공도 중시했다.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공을 필수였다.
그렇기에 온갖 좋은 약을 먹으며 악인들이 팔아넘긴 비급을 익혔고, 이제는 완숙한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실력을 갖췄다.
“전륜대검법을 막아봐라!”
전왕의 검에 시뻘건 기운이 맺혔다. 놈은 검기를 발산하면서도 아이를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훤의 지척에 이르는 순간 육중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허리를 비틀며 사각을 노렸다.
그 순간 이훤의 두 눈이 귀화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푹!
전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훤을 응시했다.
하나 다시 봐도 이훤의 검은 소년의 심장을 관통하여 자신의 어깨를 찌른 상태였다.
“끄으으. 어떻게 이런 일이?”
이훤은 놀란 표정을 지운 채 혀를 찼다.
“미친놈아. 개미굴에 갇혀 있는 놈이 이처럼 곱상하면서 윤기가 흐를 수 있겠냐?”
아닌 말로 소년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숙면을 취한 것처럼 매끈했다. 게다가 앙상하게 말랐을 뿐 피부의 윤기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좋은 편이다. 아니나다를까 죽은 소년이 축 늘어지는 순간 소매에서 검게 번들거리는 비수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의 녀석을 쉽게 죽이다니.”
촤악!
이훤은 소년의 목을 친 후 한달음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전왕의 가슴을 군림보로 두들기면서 밀쳐냈다.
우두두둑!
전왕은 내장 조각까지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그거야 개 눈에는 개만 보인다고. 네가 남색을 하니까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이훤의 조롱에 전왕은 죽은 소년을 힐끔 쳐다봤다.
눈빛만 봐도 하루 이틀을 함께 한 사이가 아닌 듯했다.
“크흑! 죽여 버리겠다.”
“아까부터 그러지 그랬어.”
푹푹푹푹푹푹!
이미 천공혈륜겁을 극성으로 운용한 이상 전왕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심장을 제외한 열두 곳의 요혈을 찌르는 순간 놈이 나뒹굴었다.
이훤은 죽어가는 놈을 뒤로 한 채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전왕의 화려한 의자를 이리저리 확인한 후 기관을 조작했다. 잠시 후 희미한 소음과 함께 벽면으로 통로가 나타났다. 이훤이 알고 있는 한 이층으로 향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짧은 통로였다.
“크흑! 그런 알량한 실력으로는 이층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너 같은 놈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전왕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악다구니를 멈추지 않았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이런 수고를 감수하는 것 같으냐?”
“뭐라고?”
그때 전왕전 밖에서 고함과 쇳소리가 울렸다.
“닥쳐! 돼지야. 그냥 죽으라고!”
전왕은 결국 피를 토한 후 절명했다.
하나 이훤의 신경은 온통 전왕전 밖을 살피는 중이다.
그가 회귀 전에 들었던 종초홍의 명성이라면 지금과 같이 전왕전에 이목이 쏠린 틈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딱 좋을 때에 왔네.’
개미굴에서 한평생 아옹다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훤은 이층과 삼층을 건너뛰고, 사오층까지 내달릴 요량이었다.
지금까지 이목을 끌어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금부터는 저들이 개미굴의 이목을 끌어줄 차례였다.
“아!”
이훤은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와서 전왕의 목과 심장, 그리고 아랫도리까지 찌른 후에야 통로로 자취를 감췄다.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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