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3)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3)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너희들의 목숨은 파리와 같다. 누가 됐든 자릿세만 유지하면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 술까지는 마시게 해주마. 그거 마시고, 아까 그 자리로 가서 술을 팔아라. 한 달에 의전, 열두 개. 네가 상납해야 할 금액이다.”
전왕의 수하는 혈견이나 입구에서 호객을 하던 자들과 달랐다. 불한당이나 왈패와 달리 사마외도의 흔적이 엿보였다.
하나 이훤에게는 어린아이 장난 같을 뿐이다.
“훗, 전왕이 요즘 궁한가 보네. 입구 쪽 돈벌이까지 신경 쓰는 걸 보면 말이야.”
“말조심해라!”
수하들이 눈을 부라리며 인상을 썼다.
“놈! 이곳은 전왕께서 다스리는 열 개의 동굴 중 하나에 불과하다. 흑전대주께서 책임지는 장소지. 한데 네깟 놈이 감히 전왕을 비웃어?”
탁!
이훤이 술잔을 내려놨다.
“나는 세상에서 ‘감히’라는 두 번째로 싫어.”
이쯤 되면 첫 번째는 무엇이냐고 묻는 자가 있어야 했다.
하나 흑전대의 무인들은 이훤이 움직이는 순간 이미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전왕을 모욕한 자다. 죽여라!”
악당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충성심은 개뿔!
“제일 싫은 건 술 가지고 장난치는 거다!”
이훤은 스스로 답을 논한 후 가장 가까이에 있던 흑전대원의 목울대를 꺾었다. 놈이 축 쳐지며 떨어트린 검을 발로 찼다. 그것을 낚아챈 후 투장처럼 던졌다.
세 명이 꼬치처럼 꿰여서 죽었으면 멋있었으련만.
초심자의 투검만큼 피하기 쉬운 것도 없으리라.
이기어검이라면 모를까.
“쓸데없는 짓을!”
흑전대원이 유려한 보법을 사용하여 핑그르르 돌며 검을 피했다. 하나 이훤이 발을 구르며 몸을 날리는 순간 놈의 목이 잘렸다. 군림보는 투박하지만, 폭발력만은 천하에 손꼽히는 보법이 아니던가.
“세 번째로 싫은 건 멋있는 보법을 펼치는 새끼다!”
“신경 쓰지 말고 구석으로 몰아!”
이훤은 검을 주워들고 환야팔검을 펼쳤다.
그 순간 검은 장막이 드리워지듯 흑전대원들 앞에 검영이 비산했다. 흑전대원들이 흠칫 놀라서 뭉치는 사이 이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따라놓은 술잔을 꺾으며 탄성을 내뱉었다.
“하아! 그런데 이 분위기도 나쁘지는 않네.”
술과 피는 제법 잘 어울렸다.
이훤은 아예 죽엽청이 든 술병을 쥔 채 덤벼들었다.
찌르고, 마시고, 베고, 마셨다.
“헉!”
마지막 남은 대원은 목 끝에 닿은 검을 느끼고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훤은 혈주(血酒)의 절묘한 조화를 느끼듯 그대로 얼굴만 돌려 술병을 기울였다. 한데 한 방울의 술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검을 늘어트렸다.
“흥이 식었다. 가.”
그리고 구석에 숨어 있는 주인을 향해 외쳤다.
“주인장, 죽엽청 한 병 더!”
흑전대원은 그 틈을 노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이훤은 죽엽청을 받아들고 흑전대원이 도망친 길을 따라 움직였다.
“같이 가야지.”
흑전대마저 처리하면 전왕이 직접 나설 것이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발걸음은 절로 가벼웠다.
*
전왕(錢王)이 처음부터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추격을 피해 강호를 떠돌다가 개미굴에 들어서는 수많은 악인 중 하나였다. 하나 돈을 버는 재주가 뛰어나고, 잔악무도한 성격으로 인해 금세 자리를 잡았다. 그 정도로 만족하려 했다. 개미굴에서는 너무 못나가도, 너무 잘나가도 단명하는 법이다. 하여 전대 전왕이 급사했을 때만 해도 오히려 장사를 접고 난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데 그런 그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인왕의 사자라고 했다.
개미굴의 가장 깊은 곳, 오 층의 주인이 사람을 보낸 것이다. 그는 인왕께서 새롭게 전왕으로 인정했으니 일층을 책임지라 했다. 그러더니 수락도 거절도 듣지 않고 돌아갔다. 거절했다면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고, 다른 자가 자리를 차지했으리라.
그때 알았다.
역탑지대의 진정한 주인은 인왕(人王)임을 말이다.
그리고 첫 회의 때 또다시 알게 됐다.
도왕(賭王), 혼왕(混王), 살왕(殺王) 역시 인왕이 임명했음을 말이다. 인왕은 등장하지 않았고, 좌우사자라 불리는 두 명의 노인이 배석했다. 그들은 각 왕의 행보를 확인한 후 돌아갔다. 인왕은 다른 왕들이 제 역할만 한다면 무슨 짓을 해도 개의치 않았다. 하나 전왕은 그 날 이후 오히려 악몽에 시달렸다.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그렇기에 흑전대의 일을 듣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하찮은 신입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병신 같은 새끼!”
“다른 동의 전력을 투입할까요?”
수하의 물음에 전왕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칼질 좀 하는 놈이 들어왔나 본데 어설프게 애들 보냈다가는 기만 살려주는 꼴이지. 전살대주를 불러라.”
잠시 후 복면을 쓴 자가 들어섰다.
무인의 기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범한 눈빛과 자세였다. 하나 살왕이 직접 각층의 왕을 보조하기 위해 골라낸 살수가 아니던가. 주인은 살왕이지만, 소속은 전왕의 아래였다. 그렇기에 전왕은 수족 부리듯 명령을 했다.
“술 때문에 난장을 부리는 놈이 있다. 팔다리를 잘라도 좋다. 목숨만 붙여서 데리고 와.”
아량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놈을 잡아온 후 일층의 악인들에게 보여줄 셈이다. 전왕의 통치를 거역했을 때 얼마나 처참하게 죽는지 말이다.
전살대(錢殺隊)의 대주가 입을 열었다.
“허락하시는 인원은?”
“모두 데리고 가라. 장사치는 은자 한 냥을 빼앗을 때에도 전력을 다하는 법! 다시는 누구도 내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동굴마다 흔적을 남겨라!”
“존명.”
전살대주가 가볍게 통통 튀기듯 물러나더니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전왕전 밖에서는 상인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살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가게가 무너졌고, 이유 없이 사람이 죽었다. 그들이 전왕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사이 정찰을 보냈던 자가 돌아왔다.
“놈이 흑전대주를 죽였습니다. 자리를 차지한 후 흑전대주의 창고를 열어 술을 마시고 있답니다.”
전살대주는 미간을 좁혔다.
놈의 행보를 확인한 후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했다.
어설픈 정의를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 처절한 복수를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술 냄새를 좇으며 닥치는 대로 난장을 부리는 듯하지 않은가.
“미친놈이다. 전열을 정비한 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라.”
악인에게 미쳤다는 건 호평이 분명했다.
흑전대주의 처소를 포위한 후 살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전살대주는 그 후에야 스무 명의 수하를 이끌고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뭐야? 너희들도 뒈지고 싶어!”
이훤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살대주는 이훤의 곁에 나뒹굴고 있는 빈 항아리들을 살폈다. 그리고 바람에 섞여 스며드는 진득한 술 냄새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전왕 직속의 전살대다. 순순히 따르겠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저 살수들이 더 좋은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시간을 끌었을 뿐이다. 한데 이훤은 눈을 부릅뜨더니 쥐고 있던 술병을 놓쳤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검을 내려놓고 입술을 훔치는 것이 아닌가.
“전왕 직속이라면 기다리고 있었소.”
“우리를?”
이훤은 공격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후 말을 이었다.
“개미굴에 들어와서 들개처럼 떠돌고 싶지 않소. 하여 전왕의 눈에 들기 위해 다소 소란을 피웠을 뿐이외다. 전왕께 데리고 가겠다면 기꺼이 따르겠소.”
전살대주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상대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게다.
한데 이훤은 한 술 더 떠서 양 손을 내밀었다.
“점혈을 해도 좋소.”
“격공이라고 해도?”
마지막 시험이었다.
전살대주의 말에 이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목을 뒤집어 맥문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대주는 소매에서 콩알만한 쇳덩이를 꺼내 튕겼다.
파팟!
“크흑!”
이훤이 양팔을 늘어트린 채 신음을 내뱉었다.
“곡지와 명문도.”
“그래야 안심이 된다면 그렇게 합시다.”
대주의 지풍이 양 어깨와 등에 꽂혔다.
이훤이 주저앉는 순간 전살대원 두 명이 달려들어 부축했다. 하나 실제로는 부축하는 척을 하면서 맥문을 짚어 내공의 흐름을 확인한 것이다. 두 사람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내공의 흔적이 없음을 알렸다.
“돌아간다.”
전살대주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성향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임무만 해결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훤이 스스로 혈도를 허락했지만,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가 받은 명령은 전왕 앞에 이훤을 무릎 꿇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전왕은 전후사정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허헛, 하여간 중원의 미친 새끼들은 죄다 개미굴로 기어들어오는구나.”
“어쩌시겠습니까?”
“일을 벌이는 용기나 머리가 나쁘지 않아. 게다가 흑전대를 통째로 죽였다며? 일단 봐서 쓸 만하면 약을 먹인 후 흑전대의 구역을 맡기겠다.”
“역시 전왕의 지혜는 하늘에 닿을······.”
퍼퍽!
“이 새끼가 어디서 아첨질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장부나 가져와서 의전이 얼마나 모였나 확인해라! 한 개라도 비면 일단 네 목부터 치고 시작할 것이다!”
전왕은 혼자가 되자, 표정을 굳혔다.
그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전왕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돈을 버는 족족 인왕에게 상납하는 신세였다. 생각 같아서 다른 주머니를 차고 싶지만,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수하들은 구역을 나눠 다스렸고, 가까이에 있는 건 아첨꾼과 전살대가 전부였다.
전자는 쓸모가 없고, 후자는 남의 검이 아닌가.
자신만의 검이 필요했다.
‘일단 내 밑에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그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상태였다. 꽤 많은 정보 중에서 한 가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주루에서 곱상하게 생긴 노비에게 안주를 내어주며 음흉한 시선을 보였단다.
약점이 있는 놈이라면 강한 노비로 삼기에 제격이었다.
전왕은 한결 느긋한 표정으로 이훤을 기다렸다.
“클클, 남색이라. 어째서 개미굴까지 기어들어왔는지 훤히 보이는군.”
*
이훤이 응낙촌에서 납치당하고, 용강객잔에 팔린 건 봄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봄이 되었을 무렵 수십 명의 아이들과 함께 개미굴에 팔렸다. 그 후의 삶은 주루의 장막 뒤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노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량이나 배려, 측은.
개미굴은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감정을 버린 자들로 가득했다. 그렇기에 매일 아침 눈뜨는 것에 감사하고, 잠이 들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였다.
한데 그러던 중 유일하게 희망을 지녔던 때가 있다.
가을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여느 때와 같이 오물통을 청소하던 중 개미굴의 일층에 피바람이 불었다. 입구에서 호객을 하고, 사기를 치던 자들은 해일을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사색이 된 채로 들이쳤다.
- 무당이 왔다!
- 무림맹이다! 놈들을 막아야 해!
개미굴의 입장에서는 적의 습격이었고, 이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정파의 구심점인 무림맹이나 무당파에게 있어서 개미굴이란 똥과 같았다.
더러울 뿐 두렵지 않은.
게다가 오태산 깊숙한 곳에 숨어살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니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면서 내버려뒀으리라.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파는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개미굴을 습격했다. 그들은 움직이기 어려울 뿐 한 번 움직이면 사마외도를 발본색원해야 할 만큼 강박관념을 지녔다. 게다가 일신의 무공은 개미굴의 악인들을 공깃돌처럼 다룰 만큼 뛰어났다.
그때의 이훤은 살았다고 여겼다.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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