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2)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2)
놈들이 열심히 짖어댈수록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마저 처리한다면 삽시간에 악명을 떨칠 것이고, 그것은 곧 자격이 된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갈 통행증이 되겠지.’
다섯 구의 시체만 남은 동굴 입구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훤과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진 종초홍은 시체를 살피며 탄성을 흘렸다.
“초식의 흔적이 없네.”
명가의 무공을 익힌 제자라면 평범하게 검을 휘둘러도 초식의 흔적이 남았다. 하나 혈견을 벤 검격은 일정한 투로 없이 제멋대로 휘두른 듯했다. 그 말인즉슨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초식을 감출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종초홍은 상식과 거리가 먼 천공혈륜겁을 알 수 없었기에 후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흐음, 산서성 남부에서 오태산까지면 열흘로도 충분해. 한데 한 달이나 미적거리며 시간을 끌었단 말이지. 도대체 이유가 뭘까?”
종초홍의 곁에 거지가 다가왔다.
그는 버릇처럼 코를 킁킁 거리며 말했다.
“자네 말은 우리 시선을 끌려고 그랬다는 건가?”
“결국 개방이 들러붙었잖아. 그리고 개방의 보고로 인해서 내가 움직였고.”
“자네를 노린 건가?”
거지의 말에 종초홍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야.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살펴봤어. 저 자는 나를 처음 보았어.”
“그렇다면 설마 이번 작전을······.”
종초홍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입에 담지 말게.”
“킁! 알았네. 거지는 거지답게 오태산 아래쪽이나 둘러봐야겠군. 자네는 들어갈 거지?”
“어차피 정찰 삼아 들어가려 했어. 이런 대규모 작전일수록 피해가 적어야 하니까.”
“그럼 살아서 보세.”
“악담은 그만 하고, 총순찰은 개뼈다귀나 핥고 계시게.”
종초홍은 동굴의 입구로 달려 나갔다.
그가 펼치는 보법은 표홀하고, 기척이 없어 명가의 상승무공이 분명했다.
*
역탑지대(逆塔地帶)라는 명칭의 연원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오태산 중턱에서 시작되는 동굴은 옆으로 길게 뻗었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졌다. 동굴 안에 굴을 파는 건 무공을 익혔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특별한 기술과 엄청난 재화,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했다. 그러니 아래로 향할수록 동굴은 좁았고, 그 모습이 마치 탑을 거꾸로 세운 듯하여 역탑지대라 불렸다.
“오랜만에 낯선 분이 오셨군요.”
이훤이 동굴에 들어오는 순간 염소수염을 기른 늙은이가 슬그머니 옆을 차지했다. 그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면서 연방 손을 비볐다.
“개미굴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 더 넓습니다. 그러니 정보 없이 움직였다가는 미로에 갇혀 시신조차 찾기 힘들지요.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개미굴의 정보를 몇 가지 알려드릴까 하는데요.”
그 대가로 돈을 요구할 것이다.
돈이 없다면 유인하여 팔아먹을 것이고, 돈이 많다면 동료를 불러서 암습을 하겠지. 개미굴에 들어와 있다는 건 인간 이하의 악행으로 인해 쫓기고 있다는 의미였다. 길가다가 부딪치는 놈들의 대부분은 동네에서 악귀 취급을 당했으리라. 말을 섞지 않으면 무시한다고 죽고, 말을 섞으며 꼬투리를 잡아 죽였다. 그렇기에 역탑지대를 가리켜 지옥이라 하지 않던가.
“꺼져.”
늙은이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 돌아섰다.
눈치가 있다면 다른 호구를 찾아갈 것이고, 눈치가 없다면 동료를 불러와서 복수를 하리라.
아쉽게도 늙은이는 후자였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수많은 사람이 북적였고, 사방에서 저자의 상인들처럼 외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서역에서 들여온 비단입니다! 개미굴에서만이라도 비단을 휘감고, 부호처럼 살아봅시다!”
서역은 개뿔! 죽은 부자의 몸에서 벗겨낸 옷을 뜯어서 비단처럼 늘어놨을 뿐이다.
“급하게 은자가 필요해서 가문의 보물을 팔고 있소이다. 옥룡동의 청옥불상이외다. 은자 열 냥에 넘기겠소.”
진정 옥룡동의 청옥불상이라면 금자 오백 냥에도 팔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가문의 보물을 팔고 있다면서 옆에 놓은 건 태상노군의 조각상이다. 저 놈의 가문은 불가와 도가를 번갈아가면서 믿을 만큼 줏대가 없는 듯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습니다. 제 몸을 팔아 아비를 묻고자 하니······.”
조심해라. 미색에 혹했다가는 관속에서 죽은 아비가 튀어나와 심장을 찌른 후 전낭을 들고 튈 것이다.
“강호는 험난하여 여인 된 몸으로 더 이상 이겨내기 힘들군요. 나와 싸워서 이기는 영웅에게 의탁하여······.”
똑같다. 첫 날 밤 홀딱 벗은 채로 죽기 싫다면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 할 터였다.
“만두 팝니다! 방긋 찐 만두요.”
무슨 고기로 만들었을 줄 어찌 알고 입에 댈까.
‘진절머리 나는 놈들.’
이훤은 수백 명이 오가는 동굴 안에서 혀를 찼다.
이곳은 입구에 불과했지만 마치 번화가의 상가처럼 온갖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로 붐볐다. 곳곳에 뚫린 통로를 지나면 이처럼 넓은 공동이 쉼 없이 등장하리라. 초행에 잠시 한 눈을 팔면 평생 헤맬 수도 있을 만큼 복잡했다.
‘내가 여기서 사 년을 잡혀 있었던가?’
이훤은 어디를 보나 비슷한 동굴 내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그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독 이훤의 귀를 쫑긋거리게 만드는 외침이 있었다.
“가문의 비전으로 빚어낸 술이외다! 딱 삼 일만 팔고 강호로 나갈 것이니 영웅호협이라면 응당 찾아와 석 잔의 술을 마시시오.”
먹다 남은 싸구려 화주에 더 질 떨어지는 수면제나 산공독을 섞었겠지. 그게 아니라면 족보도 없는 제조법으로 만들어낸 독약일 수도 있다.
그러니 다른 곳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하나 이훤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발길을 돌렸다.
“아이고! 신수가 훤하신 영웅께서 본가 비전의 술을······.”
쾅! 쾅! 쾅! 쾅! 쾅!
이훤의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어설픈 기둥이 깨졌고, 천막은 갈가리 찢겼으며 술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술 가지고 장난하지 마라.”
경고를 남기고 돌아서려는데 음산한 한 마디가 들렸다.
“이 새끼가 남의 장사를 망쳐놓고 뭐라는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비전을 나누려던 인상 좋은 사내가 일견하기에도 흉측한 기형 병기를 휘돌리고 있었다. 팔뚝 길이의 만월도는 베고, 긁을 때 위력을 발휘할 만큼 예리했다.
“싸움이다! 싸움이야!”
“돈을 걸어! 내가 걷는다!”
“술 팔아요. 육포도 팝니다!”
갑작스레 수십 명이 몰려와 내기 판을 열었다.
하나 서너 명이 전낭을 풀기도 전에 술을 팔던 자가 피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뭐야? 뒈졌네. 그냥 병신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죽은 거야? 봤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치를 벌일 것처럼 활기차던 이들이 이훤을 곁눈질했다. 이훤의 얼굴을 익히고, 아는 이들에게 경고를 해주려는 게다. 개미굴까지 와서 헛되이 죽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장사 열심히 하시고요. 돈 많이 버세요. 그런데 술 가지고 장난치지 마세요. 다 죽여 버립니다.”
사람들은 이훤이 떠난 후 웅성거렸다.
“조금 전에 혈견들이 떠들던 게 저 새끼인가본데.”
“쯧쯧, 미친놈이 한 명 늘었군. 동굴을 더 넓히든가 해야지. 이거 무서워서 살겠어?”
“그렇다면 내가 곡괭이를 팔고 싶은데 말이야.”
“꺼져! 미친놈아.”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는 순간 누군가 외쳤다.
“싸움이다! 돈 걸어!”
*
이훤은 몇 개의 동굴을 지났다.
이제야 제법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다.
삼류잡배들이나 범법자들은 입구 쪽에 머물렀다. 개미굴에 들어오지 못하는 혈견보다 조금 나은 존재였다. 반면 안쪽은 어느 정도 규칙을 정하여 생활하는 동굴이다.
“술, 뭐 있지?”
종유석에 줄을 걸어 천막을 치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의자와 탁사로 삼은 주루였다. 초췌한 기색의 중년인은 이훤을 살펴본 후 말했다.
“초행인 듯한데?”
“초행이야.”
“그렇다면 의전이 없겠군. 아는지 모르겠지만, 전왕의 구역에서는 의전만 사용할 수 있다네.”
의전(蟻錢)은 ‘개미 돈’이라는 말처럼 개미굴 내에서만 사용하는 돈의 명칭이다. 그냥 전표를 대신해서 전왕이 만들어낸 철전(鐵錢)을 의미했다.
짤그랑-
이훤이 던진 철전 세 개가 종유석에 튕겨, 중년인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술은?”
“죽엽청이 있습니다.”
중년인은 의전을 확인하는 순간 공손하게 대꾸했다.
“의전을 가지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결례를 범했으니 안주는 제가 그냥 드리겠습니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조금 전 상인들을 헤치고 지나칠 때 손에 잡히는 대로 전낭을 훔쳤다. 죄책감은 전무했다. 어차피 개미굴은 당하는 놈이 바보고, 죽은 놈이 하수였다.
이훤은 중년인이 가져온 죽엽청을 따랐다.
입구 쪽과 달리 진짜 술이다.
‘나쁘지 않네.’
분위기가 최악이었지만, 술은 죄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런 곳에서 팔려야만 하는 술을 위로하기 위해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러던 중 등 뒤의 천을 걷어치웠다. 그러자 앙상하게 마른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훤은 잠시 혀를 찬 후 안주를 내어줬다.
그리고 다시 천을 내렸다.
잠시 후 아이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십 년 전 이훤도 그랬다.
땅에 떨어진 음식이라면 호사였고, 쓰레기더미에 섞인 음식이면 일진이 좋은 셈이다. 대부분 굶주렸고, 얻어맞았고, 헐벗은 채 지냈던 시절이다.
‘쯧.’
이훤은 술잔을 기울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가 악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작은 왕국처럼 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 모든 것이 일층의 주인을 자처하는 전왕(錢王)의 힘이었다.
하나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란다.
악인들끼리 모이면 하루 종일 칼부림을 하다가 공멸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여 예전의 개미굴은 피 냄새가 빠지지 않았고, 시체가 썩어서 역병이 돌기도 했단다. 하나 역탑오왕이 등장한 이후 개미굴은 빠르게 안정됐다.
전왕, 도왕, 혼왕, 살왕, 인왕.
그 중 전왕은 이훤이 개미굴에 끌려왔을 때 만난 첫 번째 주인이었다.
‘돼지새끼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을 텐데······.’
아니나다를까 죽엽청을 반도 비우기 전에 주루 밖이 시끌벅적했다. 흑의 무복까지 갖춰 입은 십여 명의 무인들이 포위망을 펼쳤다.
“네 놈이 박부를 죽였냐?”
“박부가 누군데?”
“술 팔 던 놈.”
이훤은 십여 명의 무인을 바라봤다.
가슴팍에 전(錢)을 새긴 자들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처럼 살기를 드러냈다.
“그럼 내가 죽였다.”
“시전에서 물건을 판다는 건 전왕의 허가를 받았다는 의미다. 한데 네가 박부를 죽였으니 놈이 내던 자릿세를 대신 내야할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이내 손을 떨었고,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 음울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지금 나보고 살고 싶으면 가짜 술을 팔라는 거냐?”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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