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이훤은 홀가분하게 길을 떠났다.
말과 수레, 빈 술항아리까지 모두 적토에게 떠넘겼다.
은자 열 냥을 줬으니 돌아오는 그 날까지 알아서 잘 관리할 듯했다. 놈은 홀어머니에게 은자 열 냥을 내밀며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고 거짓말을 하더라. 그래도 앞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우는 걸 보니 본성이 나쁜 놈은 아니었다.
“은공! 꼭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염려와 달리 침이라도 뱉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홀로 떠난 여정은 편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강호출도를 할 때 검 한 자루만 가지고 다니는구나.’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데서나 먹고, 아무데서나 싸면서 자유를 만끽했으리라. 하나 이훤은 자유롭고 싶었을 뿐 불편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품안의 전표를 아낌없이 활용했다. 제일 좋은 객잔에서 제일 좋은 대접을 받았고, 마을에서 유명한 술을 들이켰다. 확실히 술은 땅이 다르고, 물이 다르면 같은 종류라고 해도 맛이 다르다. 심지어 만드는 사람의 정성까지 더해지니 궁벽한 집안의 술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었다.
“아! 이건 정말 좋구나.”
이훤은 밭을 갈던 사내와 대화를 나누다 간식을 나눠 먹던 중이다. 사내가 집안의 비전이라며 빚어낸 술의 재료는 싸구려 화주와 같았다. 한데 독하기만 한 화주와 달리 달짝지근한 뒷맛이 느껴졌다.
“잘 마셨습니다. 이건 술 만드는데 보태 쓰세요.”
중년인은 이훤이 대수롭지 않게 내민 주머니를 대충 쑤셔 넣었다. 백 냥 짜리 전표와 은자 세 냥을 담았으니 집에 가서 확인하고는 만세를 부르리라. 좋은 술을 마시고, 좋은 일도 하니 좋은 시상이 절로 떠올랐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이훤은 그렇게 유람을 하듯 천천히 이동했다.
명승지나 절경이 있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눈으로 보았다. 회귀 전에는 급한 마음에 지나쳤을 장소지만, 지금은 망아취자의 주도에 흠뻑 빠져 있지 않은가.
그렇게 산서성을 종단하며 보낸 한 달.
수없이 많은 시구를 읊고, 검무를 추었다.
완연한 가을을 가리켜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했던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전낭은 텅텅 비었다. 그러나 술과 장소, 분위기가 맞아떨어지니 마음만은 언제나 풍요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가 저 멀리 구름을 끼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태산(五台山).
산서성 북부에서 가장 높고, 험준하고, 유명했다.
다섯 개의 찌를 듯한 봉우리가 절경이며 한 때 보타산, 아미산과 더불어 불가의 삼대명산에 꼽혔다. 하여 오태산 내의 사찰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르렀고, 암자까지 더하면 천여 개에 이르렀다.
“멀리서 보면 명산인데······.”
하나 그런 영화(榮華)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불가의 명산이라는 그늘 아래 온갖 악인들이 회개를 핑계로 모여들었다. 결국 승려는 떠나고, 사찰의 현판은 떨어졌으며 악인들이 개미떼처럼 득실거렸다. 그들은 땅을 파고, 동굴과 동굴을 연결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동굴이 어찌나 많았던지 혹자는 장성 너머까지 연결이 되어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났을 때 오태산은 예전의 명성을 잃었고, 중원의 쓰레기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가까이 보면 여기만큼 북망산 같은 곳이 또 없지.”
이훤은 혀를 차며 오태산의 초입을 지나쳤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세 번째 봉우리다.
역탑지대의 입구는 개미굴이라는 별명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나 대부분 아는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미로였다.
하여 자신이 도망쳤던 입구를 찾아가는 중이다.
“북방이라 그런지 여기는 벌써 서리가 맺히는구나.”
장성 인근의 오태산은 늦가을임에도 곳곳에 서리가 맺혔고, 북방의 한풍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이훤은 쌀쌀함에 버릇처럼 옷깃을 여몄다.
회귀 전에는 한서불침에 천독불침 정도는 되었다. 그렇기에 회귀 후 덥고, 추움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이제는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오 성에 이르러 한서불침에 가까워졌지만, 예전의 버릇만은 버리지 않았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무작정 세 번째 봉우리를 헤매다보니 슬그머니 짜증이 치밀었다. 하나 이훤은 투덜거리던 중 갑작스레 걸음을 늦췄고, 이내 멈춰 섰다.
산길 옆 그늘진 공터에는 살포시 눈이 내렸나 보다.
한데 눈 쌓인 나무가 더없이 익숙했다.
“아! 조매가 벌써······.”
조매(早梅)는 한겨울에 빨리 피는 매화다. 한데 북방의 오태산에서는 늦가을임에도 벌써 매화가 핀 게다. 몇 번이나 탄성을 흘렸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이훤은 아껴뒀던 술병의 마개를 뽑으며 읊조렸다.
“앞마을은 눈 속에 묻혀 있는데, 지난 밤 가지 하나에 꽃을 피웠네.”
당대의 고승(高僧)인 제기가 조매를 보고 지은 시다.
한데 그 순간 누군가 화답하듯 다음 구절을 불렀다.
“바람이 그윽한 향기를 품고 가니 새들은 희고, 고운 꽃을 엿보려 왔다네. 하하하! 이 몸이 새처럼 엿보러 왔으니 형장은 놀라지 마시오.”
이훤은 이미 사내의 접근을 인지했다.
반면 사내는 이훤이 놀라지 않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시인묵객인 줄 알았더니 강호인이었구만.”
너스레를 떨며 다가온 사내는 꽤 특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대충 묶은 머리에는 기름기가 가득했고, 옷은 여정의 험난함을 증명하듯 낡았다. 하나 총기 가득한 눈동자와 자부심 가득한 입매, 일견하기에도 균형 잡힌 몸매로 보아 명가의 기품이 느껴졌다.
‘훗! 술 좋아하게 생겼네.’
게다가 조매를 외며 술자리를 찾아든 불나방을 어찌 내쫓을 수 있겠는가.
이훤은 흔쾌히 맞은편의 바위를 가리켰다.
“좋은 구절을 빼앗아 갔으니 대가를 치러야겠지?”
사내는 히죽 웃더니 품에서 육포 몇 조각을 내밀었다.
“내가 이래봬도 거지는 아니라네. 이 정도면 술 얻어 마실 대가 정도는 되겠는가?”
이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통성명을 할 정도는 되겠네. 나는 이훤. 섬서에서 왔지.”
그 순간 사내의 눈동자가 빠르게 이훤의 곳곳을 살폈다. 아무래도 섬서성에서 왔다는 말에 화산이나 종남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했다. 그는 의심스러운 것을 찾지 못한 듯 빙긋 웃으며 손을 모았다.
“종초홍이라고 부르시게. 호북 출신이야.”
이훤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사내에게 건넸다.
답례로 육포가 돌아왔다.
“어! 이건?”
초도각의 사마충이 술과 함께 선물해줬던 육포가 아닌가.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서 고관대작들만 먹는다는 안주였다.
“아는 걸 보니 제법 좋은 삶을 살았군. 호북성에서는 그걸 먹어야 돈을 벌었다고 할 수 있지.”
이훤은 히죽 웃었다.
“돈 많은 놈을 부려먹으면 내가 벌지 않아도 돼.”
“에잉! 나쁜놈이구만.”
종초홍은 너스레를 떨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좋은 술이다.”
“그래?”
이훤은 술 칭찬을 들을 때 가장 좋았다.
종초홍은 빈말이 아닌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늦가을 싸늘한 바람에 지쳐 잠이 들었고, 밤새 끙끙 앓다가 눈을 뜨니 이불 대신 눈이 쌓였네. 얼어붙은 손발을 놀려서 힘겹게 술 한 잔을 마셨을 때의 따스함이 느껴지는군! 정말 좋은 술이야.”
이훤은 반색하며 말했다.
“주도가 제법이네. 이 술이야 말로 삶에 지쳐서 외로움에 사무칠 때 위로를 해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친구지.”
종초홍도 눈을 빛내며 맞장구를 쳤다.
“자네의 주도 또한 제법이군! 이 불사주귀와 함께 술을 마실 자격이 있어.”
불사주귀(不死酒鬼)라는 별호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아니지. 자네가 취마와 함께 술을 마실 자격이 있는 거지.”
종초홍은 박장대소를 했다.
“불사주귀와 취마라! 사해가 동도라지만, 자네처럼 한순간에 마음이 딱 들어맞는 자를 본 적이 없네.”
이훤은 망아취자를 떠올리며 웃었다.
“난 있어.”
“쳇! 처음부터 어디 하나 만만한 구석이 없군.”
술꾼이 두 명인데 술은 한 병이다.
잠시잠깐 대화를 나눴음에도 이미 술은 바닥을 보였다.
“아쉽군. 자네와는 석 달 열흘에 걸쳐 술을 마셔도 지겹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훤은 눈을 지그시 감고 빙긋 웃었다.
“내 스승께서 말씀하셨지. 비워서 채우는 것이 있고, 채워서 비우는 것이 있다고 말이야. 술병은 비웠으되 다른 것을 채웠다면 오늘의 만남도 영 아쉽기만 한 건 아닐 거야.”
종초홍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흘렸다.
“크하! 그야말로 주도가 하늘에 닿으신 분이로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인사를 드리고 싶네.”
이훤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기회가 되면.”
“그래! 기회가 되면.”
“내 동생을 시켜주지.”
종초홍은 눈을 끔뻑이다가 배를 잡고 키득거렸다.
“취마가 아니라 광마잖아! 크하하! 좋아! 다음에 우리가 인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면 형동생을 정해보자고!”
일각에 불과한 만남으로 의형제를 논한다.
하나 두 사람은 조금의 위화감 없이 흔쾌히 주먹을 맞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처럼 갑작스럽게 헤어졌지만, 표정에 아쉬움은 조금도 없었다.
*
이훤은 봉우리의 중간쯤 올라가서야 기다렸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녹슨 칼로 이빨을 쑤시며 다가왔다.
“초면이군.”
흉터는 예사였고, 몸 어딘가가 성하지 않은 자들이 열 명이다. 저들은 개미굴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에 입구 근처를 배회하는 혈견(血犬)들이다. 저들은 주로 개미굴을 찾아온 초심자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들개나 마찬가지였다.
“개미굴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리고 이훤을 두들겨 팼던 자들이며, 끝까지 추격하던 자들이기도 했다.
“새끼,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 없어. 그냥 가진 것만 다 놓고 들어가라. 개미굴은 맨몸으로 시작하는 곳이니까.”
이훤은 얼굴에 바둑판처럼 흉터를 새긴 자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일단 옷부터 벗어.”
촤악-
한순간 허공에 검광이 아른거렸고, 혈견의 목이 잘려나갔다. 한 박자 늦게 핏물이 사방으로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훤은 손가락 세 개를 펴고 말했다.
“딱 세 명만 죽인다. 그러니 죽고 싶은 자가 있다면 뒤처지지 말고 먼저 나서라.”
혈견들은 수장이 죽었음에도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춤에서 손을 떼거나 슬쩍 허리를 굽혀서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들은 상대의 강함을 확인하는 순간 꼬리를 말았다. 사람이지만, 개와 같이 행동하는 자들이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기세등등한 말종이었다.
“허락해주신다면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않겠습니다.”
하나 이훤은 세 손가락 중 하나를 굽혔다.
“주먹을 쥐는 순간 모두 죽는다.”
그 순간 혈견 중 두 명이 동료의 목을 치고, 등을 베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두 명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지만, 여전히 다른 자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세 명이 죽었으니 부디 목숨만······.”
파팟!
동료를 기습한 혈견의 목이 떨어졌다.
이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동굴로 향했다. 살아남은 혈견들은 동료의 시체를 챙기지도 않고 재빨리 흩어졌다.
‘소문을 내라. 미친놈이 한 명 늘었다고.’
< 16,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죽인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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