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취마행(醉魔行). (2) >
15, 취마행(醉魔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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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탕(掃蕩) 내지는 박멸(撲滅).
이훤은 시산혈해를 뒤로 하고, 장원을 수색했다.
수백 장의 전표와 은자가 담긴 보따리가 나왔다.
“만 냥이라.”
응낙촌의 노인이야 돈을 벌 때마다 전답을 샀겠지만, 백풍당주는 거간꾼에 불과했다. 사람을 데려오면 돈을 주고, 사람을 데리고 가면 돈이 나왔다. 하나 용강촌에 처박혀 사는 주제에 손 쓸 일이 얼마나 될까. 결국 한 뭉치의 전표와 한 보따리의 은자를 챙겨서 용강객잔으로 돌아왔다.
말과 수레, 술까지 모두 무사했다.
이훤은 말을 끌고 중심부로 향한 후 여물을 줬다.
“이거 먹으면서 기다려라.”
그 후 장원 뒤쪽의 언덕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동산은 가을이 찾아옴에도 수풀이 무성했고, 사방이 진창이었다.
“아! 초상비.”
이훤은 입맛을 다셨다.
만약 보법에 조예가 깊었다면 풀만 밟고도 걷는 초상비를 펼쳤으리라. 내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할 줄 모른다는 것에 아쉬움이 컸다.
언덕에 오른 후 마을을 돌아봤다.
예상대로 말과 수레, 술이 한눈에 보였다.
이제 도둑맞을 걱정이 없으니 용강촌에서의 일을 마무리할 때다. 백풍당은 아이들을 팔기 전 언덕에 있는 구덩이에 가뒀다. 한데 구덩이를 판자와 흙으로 덮고, 풀까지 심었기에 쉬이 찾을 수가 없었다. 이십 년 전 기억으로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쿵!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훤이 익힌 보법 중 군림보(君臨步)가 가장 고절했다. 군림보는 회귀 전에도 그랬듯 짓밟는 것에 특화된 무공이다. 대성하면 지축이 흔들리고, 건물이 무너질 정도였다. 실제로 낡은 초옥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지 않았던가.
‘그럼 뭐하나? 초상비도 못 펼치는데.’
이훤은 투덜거리면서도 군림보를 펼치는데 집중했다. 잠시 후 울림의 성질이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깊고, 넓게 퍼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에 울리는 듯했다. 같은 방식으로 총 여섯 개의 구덩이를 찾았다.
하나 그 안은 비어 있었다.
이훤은 혹시나 납치됐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려고 한 은자를 그대로 짊어졌다.
“그래, 있어봤자 귀찮기만 했겠지.”
잠시 후 두 눈이 붉게 달아올랐고, 이내 혈륜을 담은 군림보가 구덩이의 입구를 두드렸다.
쿠쿠쿵!
토굴을 모두 무너트린 후 용강촌 전체에 불을 놓았다.
시뻘건 화마는 지형으로 인해 용오름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이훤은 수레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잘 타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심드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고,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러니 즐거워해도 좋았으리라.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셈이 아닌가.
하나 여전히 심란했다.
지난 이틀 간 상대했던 자들은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칠 필요가 없을 만큼 하찮았다. 한데 그런 자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슬퍼하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차라리 저들이 강했다면 성취감이라도 있었으리라.
지금은 허탈했다.
“쓰레기 몇 치운다고 얼마나 즐거울 것이고,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더러운 것을 치우지 않고 살 수도 없지 않은가. 그저 매일같이 술에 취해 천하를 노닐며 거침없는 질풍처럼 살고 싶었건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 같구나.’
이훤은 혀를 차며 술을 마셨다.
향이 좋고, 감미로운 술이건만 너무 쓰다.
평소였다면 매끄럽게 몸 안으로 퍼졌을 녀석들이 오장육부를 쿡쿡 찌르면서 흡수도는 듯했다.
“거봐요. 술은 마음의 방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훤은 언젠가 망아취자에게 주장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는 회귀 전 취마와 광야제라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성정은 선했다. 그저 과거에 대한 상처가 깊었고, 술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했을 뿐이다. 하여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일을 저질렀다. 그 결과가 공적일지라도 개의치 않았고, 술과 함께라면 모든 걸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오늘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막 살았다.
‘그때는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하여 원망하고, 복수를 꿈꿨다.
그렇게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만큼 삶이 지루했다. 한데 회귀 이후 복수를 시작한지 이틀 만에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 동안 칼을 갈았던 복수가 이처럼 손쉽게 이뤄지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갑자기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이훤은 오랫동안 상념에 잠겨 있다가 불현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언가 얼굴을 만지는 듯하여 허공을 보았더니 달빛이 환하게 일렁였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사위는 어둠이 자욱했다. 오늘따라 하얀 달을 보고 있자니 망아취자가 취할 때면 읊조리던 시구가 떠올랐다.
“침상머리에 비친 달빛, 땅위에 내린 서리인줄 알았네. 고개 들어 밝은 달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주선(酒仙) 이백의 정야사(靜夜思)였다.
이백은 이 년 동안 타지를 떠돌다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정야사를 지었단다. 망아취자는 코앞의 연화봉을 가지 못해 삼십 년 동안 괴로워했다. 한데 자신은 고작 며칠 사이에 이렇게 이 모양, 이 꼴이다.
“병신, 고향도 없으면서 달빛을 느끼기는 왜 느껴? 화산이 고향이냐? 정신 넋 빠진 새끼.”
이훤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술 한 병을 더 꺼냈다.
그때 술병 사이에 끼어 있던 무언가가 딸려왔다.
“······.”
이훤은 팔뚝 길이의 매화 가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갈색의 가지 위에 위태롭게 매달린 매화 몇 송이.
회귀 이후 지겨울 만큼 보았던 평범한 매화였다.
“아! 왜 허락도 없이 이런 걸 끼워 넣고 그러는 거야.”
이훤은 투덜거리면서도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잠시 후 헛기침과 함께 매화를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었다.
그렇게 잿더미가 된 용강촌을 뒤로 했다.
“이제 섬서성도 안녕이로구나.”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한 마디.
그도 그럴 것이 마음을 나눈 동물과 편한 이동 수단, 거기에 술을 잔뜩 실었다. 심지어 가슴에는 전표, 등에는 은자가 매달려 있지 않은가. 그리고 품안의 매화는 오랫동안 좋은 안주가 되어줄 터였다.
*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하나 인생은 고통이라는 명언처럼 오늘의 고민은 며칠 전의 고민과 궤가 달랐다.
“뭐로 할까?”
수레와 술이 처치 곤란일 때 결심하지 않았던가.
마셔서 없애자고.
이훤은 술에 관한한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열흘을 넘기기 전 수레의 술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아아.”
마지막에 힘을 냈더니 취기가 너무 오른 듯했다.
하루 종일 매화향만 맡으며 열 동이의 술을 마셨으니 제아무리 이훤이라고 해도 배겨낼 재간이 없다.
“뭐가 좋을까?”
이훤은 혈륜을 발동하지도 않았거늘 시뻘게진 얼굴로 연방 중얼거렸다. 오늘의 고민은 선택지가 너무 많은 탓에 해결이 어려웠다.
바로 말의 이름이다.
지금껏 달포 남짓 함께 여행을 한 사이가 아닌가. 이제는 최소한 이름 정도는 지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혼자 떠들어대면서 심심했던 점도 없지 않아 영향을 끼쳤다.
“너는 어떻게 선호하는 이름이 있냐?”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그 대신 사방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슈슈슈슈슈슉-
어설픈 궁술, 조잡한 화살까지.
이훤은 이미 적의 접근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창을 꺼내들고 휘돌리는 순간 세 발의 화살이 튕겨나갔다. 스무 발이 날아든 것으로 보아 저들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산대왕의 허락 없이 산을 넘을 생각이냐?”
대왕(大王)이나 되는 자가 어째서 이런 이름 없는 산에서 숨어 지내는지 궁금했다. 하나 입을 열어야 할 만큼 큰 호기심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창두를 휘둘러 놈의 목을 쳤고, 그대로 창대를 휘돌려 닥치는 대로 산적들을 처리했다.
“살아서 해를 끼치느니 그냥 죽어라!”
혹자는 탐욕스런 관리를 피해 도망친 민초들이 산적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 그런 자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숨어 살 뿐 산적질을 하지 않았다. 민초였어도 불한당이었을 놈이 도망쳐서 산적이 될 뿐이다.
창을 세 번 정도 휘돌린 순간 산적들이 개미 떼처럼 흩어졌다. 이훤은 껄껄 웃으며 창대로 대지를 찍은 후 엄청난 거리를 도약했다.
“산적쯤 됐으면 오늘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살아야지!”
도망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인 후 수레로 돌아왔다.
확실히 말의 이름을 고심하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쪽이 후련했다.
한데 수레 옆에는 살아 있는 놈이 있었다.
애초에 첫 수를 보였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은 듯했다. 오줌을 시원하게 싸더니 똥까지 지렸나 보다. 퀴퀴한 냄새와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놈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넙죽 엎드려서 빌기 시작했다.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께 납치당하고, 계속 맞기만 했어요. 한패로 활동하면 죽인다는 말에 따라왔을 뿐입니다. 보세요. 상처가 아직도 그대로란 말입니다. 저기 앞에 보면 제가 끌고 가던 수레가 있어요. 그걸 가지고 돌아가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려고 했는데······.”
“옷 갈아입어.”
이훤의 나직한 한 마디에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끔뻑였다.
“살려주시는 거예요?”
“너 같은 놈이 진짜 산적이라면 저렇게 다 쳐 죽일 필요도 없을 거야.”
빈말은 아니었다.
놈의 순박한 눈동자는 덕구를 연상케 했다.
이훤이 말을 쓰다듬는 사이 놈이 옷을 갈아입고 다가왔다. 몇 번이나 눈시울을 훔치는 것으로 보아 살아난 것이 정말 기쁜 듯했다.
“너는 말 이름을 지을 때 주로 뭐라고 하지?”
“저는 말이 없는데요.”
“만약에 갑작스레 말이 생겼어! 이름을 뭐라고 짓고 싶어?”
놈은 눈을 끔뻑이다가 헤벌쭉 웃었다.
“적토요. 적토마! 소설에서 봤습니다. 말 중에 최고라고······.”
딸깍-
이훤은 말과 수레를 분리했다. 그리고 사내를 향해 손짓을 하며 웃었다.
“너를 앞으로 적토마라 부르겠다.”
순조로운 논의 결과 사내, 즉 적토는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죽는 것보다야 힘들지언정 수레를 끌고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인생 두 번 경험한다고 생각해. 다음에는 절대로 가출하지 말고 말이야. 알았냐?”
“네! 앞으로는 집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녀석의 눈빛을 보아하니 죽을 때까지 집에서 효도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며칠을 걸어 섬서성을 벗어났고, 녀석의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은공께서는 어디로 가시는지요?”
“왜? 그쪽으로 오줌이라도 싸게.”
적토 놈이 슬쩍 표정을 굳히더니 시선을 피했다.
“그쪽을 향해 불공이라도 드리려고요.”
“크큭, 됐다. 마귀와 거래라도 하면 모를까. 거기는 불공이 통할 동네가 아니야.”
이훤의 말에 적토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어! 설마?”
“그래, 나는 개미굴에 간다.”
개미굴, 역탑지대(逆塔地帶)의 별칭이다.
흔히 구제불능이라 불리는 악인들의 종착역이었다.
< 15, 취마행(醉魔行).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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