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취마행(醉魔行). >
15, 취마행(醉魔行).
이훤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삼문협, 괴인, 신마, 살아남은 구파오가의 장로들.
그 모든 화제를 뒤로 한 채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훤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산처럼 쌓인 술항아리가 가득했다.
“이걸 가지고 움직이는 건 무리가 있어.”
수레를 끌던 말이 호응하듯 투레질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싼 맛에 산 녀석이거늘 고삐를 잡지 않아서 잘도 간다. 산을 넘을 때까지는 갈림길도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사람을 구해야 하나?”
하려면 못할 것도 없다.
표국에 의뢰를 해서 표사와 동행을 하거나, 적당한 방파에 들러 무인을 빌려도 됐다. 하나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한 숨을 흘렸다.
“무인 새끼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것이야 말로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맡기고, 쥐에게 양식을 맡기는 것과 뭐가 다를까. 결국 고민을 극복하기 위해 큰 결단을 내렸다.
“마셔서 해결하자!”
이훤은 단지를 들어 바닥까지 비운 후 새 항아리를 뜯었다. 향긋한 주향을 맡는 순간 술의 이름과 묵은 햇수가 저절로 그려졌다. 이 술은 조금씩 머금고, 향이 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실 때 제일 맛있다.
우물우물.
싼 맛에 산 말이 갑자기 투레질을 했다.
“너 지금 욕하는 거냐?”
아니라고 하겠지. 하지만 이미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더 술을 마셨다. 기분은 점차 좋아졌고,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절로 호연지기가 피어올랐다.
“워워!”
이훤은 수레에 눕혀놓은 창과 술 한 병을 꺼냈다.
창무(槍舞)를 한바탕 추고 난 후 술 한 병을 한 번에 비웠다. 확실히 망아취자와 몇 달 동안 대작을 한 후 주도라는 것이 한층 성장한 듯했다.
“좋구나!”
하나 기분 좋음은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이십 년 전의 기억이 채웠다. 썩은 물이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드는 기분은 더없이 더러웠다.
‘이게 용강촌인가?’
용강촌은 응낙촌과 달리 알려지지 않는 장소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모르고 찾아오기도 어려웠고, 사방에 뻗은 산길은 모조리 목책을 세우거나, 나무를 쓰러트려서 통행을 금지했다. 그러니 사람을 사고파는 자들이 아니라면 살아있기 힘들 터였다.
따각따각-
말이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이 놈은 진짜 뭐가 있나 싶을 정도로 감이 좋다.
하나 말의 기분을 생각해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말을 몰아 입구로 향하자, 서성거리던 자들이 슬그머니 접근했다.
“아이고! 외지인은 오랜만이시네. 술을 사고파는 상인이신가요?”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한 손은 뒤로 숨겼다.
그러면서도 혀를 매끄럽게 잘 놀리는 놈이다.
“크큭, 팔기는 파는데 술은 아니지.”
“뒤에 술 항아리 아닌가? 술 냄새도 나는 걸.”
혀가 점점 짧아진다.
이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히죽 웃었다.
“항아리마다 물건이 하나씩 들었어.”
사내의 목소리가 변했다.
“어디서 왔어?”
“응낙.”
“처음 보는데.”
이훤은 인상을 썼다.
“나도 너 처음 봐. 우리 주인, 성미 몰라? 너 알던 놈은 벌써 죽었어. 이러다 해지면 못 돌아가는데 재워줄 거야?”
사내는 그제야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렸다.
“흥! 그 장주 성격에 오래 참았네. 들어가.”
이훤은 수레를 몰았다.
“잠깐! 진짜 술 없어?”
“돈 주고 사 마셔라. 그나저나 나는 초행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설명은 해야지. 용강객잔이 어디야?”
사내는 입맛을 다시며 마을 안쪽을 가리켰다.
“벌목장 뒤로 가.”
이훤은 사내들을 지나치면서 혀를 핥았다.
이십 년 전에는 마차 안에서 저들의 대화를 들어야 했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원통했나 보다.
‘지금도 다를 건 없고.’
원한에 깊이가 있겠냐마는 굳이 한쪽을 고르라면 응낙촌보다 용강촌이 더했다. 응낙촌에서 하루를 보냈다면, 여기서는 보름을 있었다. 그 동안 성질을 죽여 놓는다며 굶기고, 때리고, 재우지 않았다. 반송장을 만든 후 사방팔방으로 팔려나갔고, 그 중에 이훤도 있었다. 그간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살심이 치솟았다.
“후우.”
한데 벌목장 뒤에 위치한 폐건물을 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방이 산으로 막힌 마을이 아니던가. 이런 곳에 지금까지 모여 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누구냐?”
이훤은 대답 대신 술을 마셨다.
“누구냐니까?”
쥐새끼에게는 말도 아까웠다.
호리병의 마개를 던지는 순간 놈이 목울대를 움켜쥐고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고통스러워 보이니 편안할 수 있도록 목을 꺾었다.
“폐건물이라 다행이네.”
입구가 반쯤 무너졌기에 수레를 끌고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존재했다. 말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순순히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야! 오해하지 마. 술을 지키는 게 첫째고, 수레가 둘째, 네가 마지막이다.”
말이 서운하다는 듯 투레질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삼았는지 어두컴컴한 객잔의 이층에서 수십 명이 뛰어내렸다.
이훤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칼날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훗! 그래도 형이 너 까지는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
잔혈도(殘血刀) 양충현.
말단 무인으로 들어와 십 년 만에 백풍당의 부당주가 된 입지전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무공 또한 일류에 이르렀으니 당도들이 우러러보기에 충분했다. 그는 오늘도 그처럼 되기를 꿈꾸는 녀석들에게 일장훈시를 하고 들어왔다.
“아! 목에 좋은 거라도 먹어야 하나.”
한데 아래층이 소란스럽다.
용강객잔은 폐건물이지만, 기둥을 보강하여 보이는 것보다 튼튼했다. 그러니 수하들끼리 주먹다짐이라도 하는 것이라 여겼다. 늘 있는 일이다. 분지에 갇혀 있으니 혈기를 분출할 곳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푹신한 보료에 누워서 술이나 한 잔 기울이려는 순간이었다.
쿠쿠쿵-
양충현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지진? 폭발? 그것도 아니라면 붕괴?
“이 새끼들이 문제가 있으면 빨리 와서 알려야지!”
그는 수하들을 모아놓고 드잡이 질을 할 생각에 흉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처소의 문이 날아왔다. 말 그대로 문이 뜯긴 채로 날아들었다.
“어! 뭐야? 씨벌. 깜짝이야.”
문과 함께 튕겨 들어온 수하는 이미 절명한 후였다.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양충현은 문가를 바라보고 질색을 했다.
그곳에는 눈이 시뻘건 악귀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도리질을 쳤다.
“아닌데요.”
이훤은 피식 웃었다.
수십 명의 백풍당도를 상대하면서 묻은 먼지를 털어낸 후 말했다.
“그래. 초면에 욕은 하면 안 되지. 우리가 무슨 사이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양충현은 손을 모으고,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지요?”
이훤이 입꼬리를 올렸다.
“눈치가 있는 놈이네. 그래, 어디서 왔을 것 같으냐?”
양충현으로 속으로 지옥을 부르짖었다.
지금껏 미친 놈, 안 미친 척 하는 놈, 곧 죽을 놈을 수도 없이 상대했다. 하지만 어떤 놈도 눈앞의 악귀처럼 시뻘건 눈빛을 내비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눈깔이 저렇게 희번덕거릴 수는 없는 법이다.
“고인께서 백풍당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이훤은 혈륜을 활성화했다.
“내가 술 수레를 좀 끌거든. 그런데 귀찮은 일이 생겼어.”
“그렇지요. 수레가 원래 끌기 귀찮기는 하지요.”
“그런데 여기 놈 중 한 명이 내 술을 탐내더라.”
“허어! 그럼 벼락 맞아 죽을 새끼가 있답니까? 말씀만 하시면 제가 당장······.”
양충현은 이훤의 삐딱한 시선을 느끼는 순간 넙죽 엎드렸다.
“추임새 넣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이훤의 발이 양충현의 뒤통수를 짓눌렀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감히 내 술을 노려? 하아, 생각 같아서는 씨를 말려버리고 싶은데······.”
“살려주십시오. 잘하겠습니다. 저를 대신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저만한 사람을 구하기 힘드실 겁니다. 아니, 고인께서 마음만 먹으면 당장 구하시겠지요. 그래도 저만은 못할 겁니다. 새로운 놈을 구해서 언제 일을 가르치시겠습니까?”
“새끼, 살고는 싶으냐?”
양충현은 이훤의 비웃음 가득한 말에 무릎걸음으로 기어왔다. 그리고 이훤의 발등을 핥으며 비굴하게 웃었다. 그 순간 이훤의 발이 빠져나갔고, 가슴팍을 걷어차였다.
“아흑!”
이훤은 더러운 것이 닿은 듯 천으로 발등을 닦았다.
하나 양충현은 속으로 자신이 살았음을 직감했다. 애초에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 벌레의 습성이 그렇지. 너희들을 다 죽여 봤자, 다른 놈들이 또 여기로 들어오겠지. 내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다 죽이는 것도 귀찮고 말이야.”
양충현은 황금 동아줄을 발견한 사람처럼 화색을 띄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벌레 소굴에는 벌레가 끊이지 않지요. 박멸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려만 주신다면 이곳을 어르신의 휴양지로 만들어놓겠습니다. 술! 술을 좋아하신다고 했으니 세상의 모든 술을 준비해놓겠습니다.”
이훤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침음을 흘렸다.
“흐음, 그래도 이대로 가기는 화장실에서 그냥 나온 것 같단 말이지.”
양충현의 눈빛에 살기라는 이름의 물기가 차올랐다.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다가 노다지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게 백풍당의 당주 놈 때문입니다.”
이훤은 반갑게 웃었다.
“아! 네가 대장이 아니었어? 그럼 일이 쉽지. 그 새끼는 어디 있는데?”
양충현은 주인을 대하듯 창가에서 비켜선 후 말했다.
“저기 보이시는 세 번 째 장원에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가시면 바로지요.”
턱-
이훤은 양충현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지금부터 눈에 보이는 족족 쳐 죽일 테니까 너는 밖에 나가 있는 놈들을 죄다 불러와. 그 자리에서 너를 대장, 아니 당주로 임명해주마.”
양충현은 고개를 바닥에 박으며 외쳤다.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이훤은 장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크큭, 벌레라도 좋다. 벌레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구나. 내가 으뜸 패를 잡았어!”
양충현은 사십여 명의 수하를 모았다.
마을 입구를 지키던 녀석들까지 죄다 불러들였다.
“부당주님, 무슨 일로 저희를?”
“쉿.”
그는 섣불리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직 당주가 죽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칫 찾아갔다가 당주가 살아있기라도 하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붙어서 배신하기로 결심했다. 잠시 후 그는 용강객잔의 일층에서 말과 수레를 발견하고 뒷걸음질 쳤다.
“저, 저거는 건드리지 마. 아무도! 알았느냐?”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알려주셔야······.”
“당주!”
양충현은 한 마디로 수하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장 먼저 당주의 처소인 장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용감하거나,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혹여 이훤이 죽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흡.”
장원 안은 사방이 피였다.
당주 직속의 호위 열 명은 목과 머리가 분리된 채로 이곳저곳에 죽어 있었다. 그 외에 경계를 서던 자들도 모두 절명한 후였다. 그리고 바라마지 않던 당주의 머리통이 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양충현은 무릎을 꿇고, 외쳤다.
“뭣들 하느냐? 모두 무릎을 꿇어라!”
수하들은 혈사가 벌어진 것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양충현은 그 사이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고인께서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래,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데려왔구나. 잘했다. 양충현.”
이훤은 정문 위에 앉아 있다가 뛰어내렸다.
양충현은 반색하며 대꾸하려다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이훤은 대답 대신 문 앞에 섰다.
끼이이이익-
문을 닫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는 벌레를 볼 때마다 족족 밟아 죽이는 성격이야.”
쾅!
이훤은 걸쇠까지 걸고, 돌아섰다.
두 눈에는 극대화된 혈륜으로 인해 불덩이가 아른거렸다.
“여기 벌레 아닌 사람 없지?”
< 15, 취마행(醉魔行).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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