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3) >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3)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은 죽음을 각오한 순간 일부러 한 명씩만 남긴 게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무공을 구술했고, 깨달음을 전했다.”
꽈직!
술병이 산산조각 났다.
“크흑! 놈이 입을 뗐을 때 죽였어야 했어. 하나 우리는 누구도 놈을 공격할 수 없었다. 생각해 봐라. 정파는 절정과 초절정, 그 후 화경의 경지를 논했다. 마교도 비슷하지. 진마와 극마, 그리고 인외의 경지에 다다른 자를 탈마라 했다. 한데 놈은 말이다.”
이훤은 화경(化境)과 탈마(脫魔)를 뛰어넘는 상상속의 경지를 떠올렸다.
절대지경(絶對之境).
“그런 놈의 심득을 듣고 있는 게다. 우리는 모두 잠시나마 욕심을 냈지. 나도 저렇게. 나는 저 놈보다 더. 욕망에 눈이 멀었다. 결국 우리는 놈의 꼭두각시처럼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망아취자는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연거푸 한 숨을 내쉬었다. 이훤은 그의 심경을 이해했다. 한 조각의 비급이나 보물만으로도 가족을 버리고, 형제를 죽이는 것이 무인이고, 강호였다. 그가 같은 상황이었다고 해도 칼을 뻗지 못했으리라.
“놈은 웃으며 스스로 천장단애에서 몸을 던졌다. 나를 비롯한 여섯 명은 세 번의 맹세를 했다. 놈의 심득을 절대로 익히지 않는 것이 첫 번째다. 하나 마음이란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 않더냐. 그렇기에 모두 은거하는 것이 두 번째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은거지를 떠나지 않고, 사문에 깨달음을 전하지 않기로 말이야. 마지막은 누군가 맹세를 깼을 때 다른 다섯이 힘을 모아 배신자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 세 번째다.”
그들은 자신의 깨달음에 신마나 무신의 심득이 섞일 것을 우려했으리라. 자칫 사문에 괴이한 것을 전했다가 큰 화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대단하군요.”
이훤은 이제야 망아취자가 낙안봉에 은거한 이유와 삼십 년 간 노군을 밀어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다행히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배신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 놈아!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이것이 명문의 힘인 게야. 사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명분으로 무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지. 그러니 안쓰럽게 여기지 마라. 그건 나를 오히려 욕보이는 일이다.”
방금 전까지 울먹이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이훤은 빙긋 웃으며 술 한 병을 꺼냈다.
“그럼 기분 전환이나 하실 겸 즉묵노주 어떠세요?”
“그건 데워서 마시는 술이잖아.”
“이 날씨에는 알아서 데워질 걸요.”
망아취자는 대답 대신 술잔을 내밀었다.
그는 술잔을 비운 후 말했다.
“나는 네가 좋다. 어린 시절 나를 보는 것 같아.”
‘아닌데.’
“하나 나는 내공을 전해주지도, 무공을 가르쳐줄 수도 없다. 하여 과거의 비사를 알려준 게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알겠느냐?”
이주전주(以酒傳酒)라 했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강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됐습니다. 그러니 제게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놈이 입을 열기 전에 머리를 쳤을 겁니다.”
“그래. 잠깐의 망설임으로 인생이 변한다. 너는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날뛰며, 삶을 즐겨라. 후회하지 않으려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제자의 강호행을 염려하시는 스승의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그런 의미에서 이별주라도 한 잔 하시지요?”
망아취자는 헛웃음을 연발했다.
이훤은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보이지만, 가끔 반노환동을 한 고수처럼 노회함이 엿보였다. 남의 인생을 바꾸면 바꿨지, 제 인생을 손해 볼 놈은 아니었다.
“이별주는 개뿔! 네 놈 때문에 없어진 술이 몇 병인 줄 아느냐? 해 지기 전에 떠나려면 그만 마셔.”
이훤은 헤죽거렸다.
“마시면서 내려갈 건데요?”
다음 날 이훤은 아침 일찍 술병이 잔뜩 실린 수레를 끌고 하산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셨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새해에 마셔야 제 맛! 그 때까지 술 관리 잘 하셔야 합니다!”
망아취자는 텅 비어버린 술 창고를 보다가 노군에게 물었다.
“후우, 망둥이 같은 놈이 사라지니까 조금 쓸쓸하군.”
“노래를 참 신명나게 잘 부르더군요.”
“클클, 술꾼에게 노래와 춤은 무인에게 검과 같지. 술 한 잔 할 테냐?”
노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늘만······.”
*
강호행(江湖行).
무인이라면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이것처럼 두근거리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한 자루 장검과 봇짐을 짊어지고 집을 떠나면서 얼마나 잠을 설쳤을까. 지금은 천하에 우뚝 선 고수라고 해도 첫 강호행은 남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한데 이훤은 달랐다.
노군이 본산에서 빌려온 수레에 실린 술 항아리만 해도 서른 개가 넘었다. 노끈으로 항아리가 떨어지지 않게 조인 후 사이사이에 술병을 꽂았다. 수레에 실린 술만 해도 백여 명이 술판을 벌일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가져오길 잘했어.”
이훤은 옆구리에 술 한 동이를 끼고, 수레에 비스듬히 앉았다. 한 손으로는 사발에 술을 채웠고,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살살 흔들었다.
“너도 사기를 잘했어.”
하산하자마자 마을에서 말을 샀다.
말은 수레를 끌고, 이훤은 술을 마셨다.
이것이야말로 이훤이 꿈꾸던 안빈낙도였고, 강호행이었다.
“이랴. 이랴.”
선선한 바람과 함께 수레가 나아갔다.
화산도 이제는 매화향이 옅어질 만큼 멀어졌다.
“노인네들은 잘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네.”
이훤은 술로 입안을 헹구며 망아취자와 노군의 안녕을 빌었다. 그리고 화산의 매화가 늘 만개하기를 빌며 한 잔을 채웠고, 덕구가 잘 살기를 빌며 또 마셨다.
“아! 취한다.”
취하면 잠을 잤다.
어차피 말이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꺾으면 고삐를 잡은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나아간 끝에 이름 없는 마을에 들어섰다.
“응낙촌이라.”
이훤은 턱을 괴고 한참동안 마을 초입에 세워진 비석을 응시했다. 이곳은 화산에서 야반도주 했던 이훤이 머물던 장소였다. 당시에는 화산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돈 없이 여행을 하던 그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이곳에 있을 터였다.
“이름 좆같네.”
이훤은 수레를 몰고 마을의 중심부로 향했다.
이십 년 전의 기억임에도 조금 전의 일처럼 선명했고, 회귀 이후 예전과 달라졌어도 길을 잃지 않았다. 잠시 후 마을의 규모로 보았을 때 제법 큰 장원이 보였다.
저곳이다.
쾅!
이훤이 일장을 내지르는 순간 문 한쪽이 뜯겨져나갔다.
말을 끌고 들어서자 하인들이 넋을 놓은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총관은 어디 있지요?”
놈은 묻지 않아도 제 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제법 인상이 좋은 중년인이 인상을 쓰며 달려 나왔다. 저 얼굴에 속아서 주는 대로 먹고,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에는 팔려가는 마차더라.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총관의 가슴을 걷어찼다. 슬쩍 힘만 줬음에도 수레의 바퀴보다 더 잘 굴러가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훤은 총관의 목을 밟고, 허리를 숙인 채 물었다.
“사람이 누군가의 얼굴을 이십 년 동안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뭘까?”
“아흐흐, 도대체 왜 이러시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게요.”
“배신감.”
총관은 갓 스무 살이 되어 보이는 이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발버둥을 치면서 고래고래 도움을 청했다. 하인들이 뒤늦게 안채로 달려가거나, 밖으로 사라졌다.
“불쌍한 애들을 현혹해서 팔아먹는 새끼가 제 아픈 건 조금도 못 참는구나.”
총관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잠시 멈칫했다.
이훤은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나한테 수면제 먹이는 게 너무 익숙해서 예상은 했었다. 이런 일이 아주 많다는 걸 말이야.”
스릉-
“살려주시오! 나는 이곳 현령과 친분이 깊소.”
“그 전에 가면 돼.”
“나는 모르는 일이외다. 나도 시켜서 하는 일이야!”
검 끝이 잠시 땅을 가리켰다.
“장주겠네.”
“그, 그렇습니다. 저는 길을 잃거나, 곤경에 처한 아이들을 구해왔을 뿐 그 뒤의 일은 모릅니다.”
땅을 가리키던 검은 검집으로 돌아갔다.
“좋아. 나는 정파인이니 네가 모든 것을 말한다면 살려주겠다.”
총관은 이훤의 싱그러운 미소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목을 밟고 있던 발은 그대로였다.
“이것 좀 치워주시지요. 살려준다고 하셨잖습니까?”
“너도 나한테 그랬잖아.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그런데 그거 거짓말이었지?”
총관은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며 따지고 싶었다.
콰직!
이훤은 목이 낫처럼 꺾인 총관의 아랫배를 걷어찬 후 몸을 돌렸다. 그는 혈륜을 끌어올려 멀뚱히 서 있는 하인을 바라봤다.
“내 말, 내 수레, 내 술. 건드리면 죽는다.”
하인은 시뻘건 귀화를 마주하는 순간 주저앉았다.
모르긴 몰라도 한동안 오줌을 꽤 쌀 듯했다.
지금 쌌을 수도 있고.
이훤은 총관이 말한 내원으로 향하면서 한 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강호에 출도 할 때 무기만 가지고 단출하게 나서는구나.”
좋아서 들고 온 술과 수레였지만, 지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 귀찮음을 무릅쓰는 것과 망아취자의 술이라면 애초에 선택지는 하나였다.
파팟!
한 달음에 담장을 넘었다.
내원의 화려함은 외원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개새끼가 돈을 많이도 벌었구나.”
그때 처소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홍아. 이거 홍옥이다. 홍옥! 내가 너 주려고 어렵게 구한 거야. 이거 받고, 어디 서방님 품에 한 번 안겨봐라.”
교태로운 웃음이 뒤이었다.
“에게! 언제까지 이런 자질구레한 선물로 제 마음을 사시려고요. 요즘 총관이나 아랫것들이 게으름을 피우나 봐요. 장사가 잘 안되시나?”
“이 년아! 이 장사도 겨울이 대목이야. 여름에는 먹을 것 천지야. 누가 아무 생각 없이 팔려가겠냐? 겨울에는 좋은 걸 사줄 테니 일단 술부터 한 잔 따라보아라.”
이훤은 웃었다.
“하, 죄책감이 사라지는 이런 상황. 아주 좋아.”
파팟!
발걸음도 경쾌하게 문을 걷어찼다.
검버섯이 숭숭 핀 늙은이와 옷을 반쯤 벗은 계집이 놀란 눈으로 이훤을 반겼다.
“웬 놈이냐?”
스릉-
이훤은 일부러 검을 뽑았다.
그리고 침상 앞의 서탁을 향해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나무가 종이처럼 얇게 깎여나갔다.
“둘 중 한 명만 살려준다. 애들 어디에 넘겼어?”
“이 놈이!”
“화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먼저 얘기하는 자는 살려준다.”
연놈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회귀 전 이십 년 동안 강호를 떠돌며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나쁜 새끼들에게 의리란 언젠가 배신하기 위한 밑밥에 불과함을 말이다.
화홍의 눈빛이 변하는 순간 노인이 손을 뻗었다.
“이 년이!”
촤악!
이훤의 검이 노인의 팔목을 자르는 순간 화홍이 외쳤다.
“용강객잔! 이 새끼랑 거래하는 곳이 용강객잔이야.”
“이런 덜 떨어진 년! 저 새끼가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를 살려줄 듯싶으냐?”
노인의 악다구니에 화홍은 반쯤 흘러내린 옷을 아예 잡아끌었다.
“거, 거짓말 아니지? 나도 늙은이보다 당신처럼 멋진 사람과 있는 게 좋아.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이훤은 물건을 품평하듯 여인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럴수록 홍옥은 교태를 부리며 이훤을 유혹하기 위해 노력했다.
촤악!
흰 나신에 비스듬히 칼자국이 생겼고, 이내 새빨간 핏물이 옷처럼 몸을 덮었다.
이훤은 검을 역수로 쥐고 말했다.
“지옥에 가면 총관한테 물어봐. 나 거짓말 잘해.”
그녀의 심장을 찌르고, 노인을 바라봤다.
“너 누구냐? 내가 팔아먹었다면 반드시 기억할 수 있어. 한데 너는 아니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훤은 하얗게 질린 노인을 보며 웃었다.
“이십 년 전에 네가 팔았어.”
“뭐라고? 그 때는 이 일을 시작하지도······.”
촤악!
팔다리를 베고, 마지막에 목을 쳤다.
이훤은 검에 묻은 피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이쪽이 편하기는 해.”
그는 여전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말과 수레, 술은 멀쩡했다.
실금을 한 하인은 용강객잔의 위치를 묻자, 산 너머라고 알려주었다. 한데 용강객잔의 위치를 알 정도면 한패나 다름없지 않은가.
목을 쳐버렸다.
이훤은 새롭게 한 동이의 술을 끼고, 고삐를 흔들었다.
빚 받으러 가는 길이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이랴!”
<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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