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2) >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2)
이훤은 노군의 잔소리를 피해 바삐 걸음을 놀렸다. 낙안봉을 뛰어내려오는 모습은 한 마리의 산양 같았다. 하나 그런 이훤도 장공잔도(長空棧道) 앞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박혀 있는 쇠말뚝.
저걸 밟고 지나가면 곧장 노군동이다.
‘여기만 오면 형님하고 지나갔던 때가 생각난단 말이지.’
이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노군과 잔도를 지났을 때의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흔여덟 개의 쇠말뚝을 밟고, 뛰는데 걸린 시간은 일순에 불과했다. 칼바람과 어우러져 잔도를 지나는 광경은 그림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멋있었다.
회귀 전 이훤은 노군보다 강했지만, 저렇듯 멋들어지게 날지 못했다. 절름발이였기에 경신술은 입문조차 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보법을 하나 구해 익혔을 뿐이다. 그것으로 인해 소마를 방심하게 만들었으니 보법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나 경신술은 다르다.
회귀 전 다리를 고쳤다면 산속에서 술을 마시고, 경신술만 익혔어도 행복했으리라.
그래서였을까.
노군의 경신술이 끊임없이 아른거렸다.
이훤은 길게 숨을 내쉰 후 쇠말뚝을 향해 뛰었다.
땅을 떠나는 순간 칼바람이 먹잇감을 노리듯 사방에서 몰아쳤다. 이훤은 노군의 경신술을 흉내 내려다 균형을 잃었다. 결국 소마를 놀라게 했던 보법을 사용하여 균형을 잡으려 했다. 휘청거리던 몸이 한순간 고정됐고, 흔들림 없이 다음 쇠말뚝에 내려섰다. 낙안봉의 칼바람을 훈풍으로 만드는 보법의 이름은 군림보(君臨步)였다. 회귀 전에는 지진을 방불케 하는 위력을 선보이지 않았던가.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쳇!”
이훤은 혀를 차며 쇠말뚝을 건너뛰었다.
노군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안정성만은 한 수 위였다.
하나 화려한 경신술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암향표는 흉내 내는 것도 쉽지 않네.’
노군동에 도착한 후 한 숨을 흘렸다. 노군이 낙안봉에 있으니 예전과 달리 잡초와 먼지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주변을 정리한 후 마침내 목적지인 창룡령에 도착했다.
솨아아아아-
장공잔도보다는 나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사방에서 들이쳤다. 그리고 겨울에는 눈 때문에 미끄럽더니 이제는 비 때문에 반질반질한 돌이 미끄럽다.
그래서 좋았다.
수련을 하려면 이 정도 악조건은 되어야지.
이훤은 창룡령을 천천히 거닐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회귀 전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무공을 수련했다. 그렇게 배운 병장술만 스무 개에 이르렀고, 권장법까지 포함하면 서른 개는 족히 넘을 터였다. 그러나 종수가 많다고 해서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무공과 무공이 뒤섞이고, 충돌하면서 다치기 일쑤였다. 노군과 망아취자는 이훤의 다양한 기술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 수준에 오르기까지 수십 번은 죽을 뻔했다.
하나 이번 생은 다르다.
이번에는 천공혈륜겁과 가장 상성이 좋은 것만 골라서 익힐 생각이다. 팔 성을 지나, 구 성, 나아가 대성까지 목표로 삼았다.
‘검법은 환야팔검이 좋겠지.’
이훤은 등짐을 내려놓고, 검을 꺼냈다.
잠시 호흡을 멈춘 사이 두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삼 성을 지나 오 성에 이르렀지만, 혈륜을 극성으로 펼치는 순간 혈안(血眼)이 드러났다. 육 성 이상이 되면 마음대로 숨기고,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리라.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숨이 끊기는 순간 이훤의 신형이 흩어지듯 전방을 수놓았다. 환야팔검(幻夜八劍)은 환검의 일종으로 현란함으로만 따지자면 화산의 검법과 비견 할만 했다. 그리고 회귀 전 이훤이 술에 취할 때면 가장 먼저 꺼내드는 무공이었다.
촤라라라라라락-
검영(劍影)이 난무하면서 번뜩였다.
한데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니 마치 밤처럼 그림자만 일렁이기 시작했다. 현란함이 환야팔검이라면 철혈도(鐵血刀)는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도법이다. 혈륜을 극한까지 휘돌린 후 양손에 담아 내리치는 일격을 받아낼 자는 많지 않으리라.
그렇게 모든 무공을 수련했다.
이훤은 하산 날짜가 정해진 이후 매일 같이 창룡령에서 다양한 무공을 익혔다. 그리고 오늘 최적의 무공들을 선별했다.
혈뢰유성창(血雷流星槍).
삼초나락수(三招奈落手).
파륜권(破崙拳).
절혼지(切魂指).
이 정도만 제대로 익혀도 구파의 장로쯤은 대적할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초절정 고수가 상대라고 해도 이기지 못할 뿐 두렵지 않았다.
“하아, 진짜 비 오네.”
이훤은 혈륜을 가라앉힌 후에야 날씨를 확인했다.
한서불침에 이르렀으나, 비에 젖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우산을 챙겨가라던 노군의 말을 떠올리며 후회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노군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빈 벽에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절혼지를 펼치는 순간 암석이 두부처럼 파이며 글씨가 만들어졌다.
살명부(殺命簿)다.
십여 명의 이름을 적어내려는 내내 표정의 변화가 없다. 하나 마지막 이름에 이르러서는 저절로 눈매가 역팔자를 그렸다. 그리고 잠시 잠들었던 혈륜이 다시 깨어나 불덩이처럼 타올랐다.
“소마.”
머리가 좋은 놈, 비위를 잘 맞추는 놈, 욕심이 없는 놈.
생각해보면 의제랍시고 함께 했지만 아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어쩌면 처음 자신에게 접근했을 때부터 계획적이었을 수도 있다.
‘나를 공적으로 만든 것도 웃겼지만, 정사마가 함께 공격할 줄은 몰랐지.’
분명 이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꿀꺽-
술 한 병을 통째로 비웠다.
그 후 손바닥으로 살명부를 쓸었다.
모조리 지워졌다.
“일단 너부터 죽이고, 뒷배를 찾아보마.”
이훤은 소마의 얼굴이 희미해질 때까지 벽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망아취자와 노군이 채울 때쯤 낙안봉으로 향했다.
*
입추 전날.
당사자인 이훤은 이른 아침부터 노인과 함께 검무를 추며 술을 마셨다. 한데 노군은 장성한 자식이 대과라도 보러 가는 양 이것저것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홀로 남은 안주는 떨어지는 매화를 받아먹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평범한 가족의 일상 같았다.
“잠시 산 아래 좀 다녀오마.”
“아! 또 뭘 사시려고요?”
노군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너 때문에 가는 줄 알아? 그냥 볼 일이 있다!”
“저기 쌓아놓은 것만 해도 한 짐입니다. 다 놓고 갈 거예요. 오늘은 술 마시라고 강요 안 할 테니 그냥 쉬세요.”
이훤의 만류에도 노군은 코웃음을 쳤다.
“이 놈아! 강호를 우습게보면 안 돼! 기세 좋게 하산했다가 하루 만에 병신이 돼서 돌아올 수도 있어.”
“내 물건, 준비하는 게 맞네.”
“흥! 버릇없는 놈. 한 마디를 안지지.”
노군은 경공까지 펼쳐가며 낙안봉 아래로 사라졌다.
이훤은 망아취자의 술창고로 향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별해야 하는 녀석들이 간택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향을 뿜어낸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망아취자가 들어섰다.
“할 이야기가 있다. 따라와.”
망아취자는 그 말만 남긴 채 낙안봉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매화숲 너머는 이훤이라고 해도 출입을 금하지 않았던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매화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스승님! 술은 챙기셨어요?”
이훤과 노군이 올라왔던 길은 전망이 좋았다.
낙안봉 정상에 오르는 순간 고개를 돌리면 화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면 매화숲을 지나야 확인할 수 있는 반대쪽 풍광은 마주하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온통 녹색의 수해(樹海)가 시야 끝까지 퍼져 있었다. 한데 누군가는 그런 광경이 좋았나 봐다. 누군가 절벽 끝에 바위를 깎아서 석탁을 만들어 놨다.
이훤은 석탁 옆에 놓인 병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대곡주군요.”
대곡주(大曲酒)는 맑은 백주의 일종으로 저자에서 구하기 쉬웠다. 그러니 강호 출도를 앞두고 마실 만큼 귀한 술은 아니었다. 하나 백주 중에서도 대곡주는 목 넘김이 좋고, 숙취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음을 가다듬기에 이만큼 맞아떨어지는 술도 없을 터였다.
이훤은 수해와 술을 번갈아봤다.
“할 이야기란 스승님의 이야기로군요.”
망아취자는 주름진 눈매를 좁혔다.
“그게 보이느냐?”
“눈은 마음의 창이고, 술은 마음의 방향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곳의 분위기와 술만 봐도 스승님의 감정이 느껴지네요.”
이훤의 너스레에 망아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개소리도 그 정도면 진실처럼 들리는구나. 흰소리는 그만 하고 앉아라.”
석탁 옆에는 땅을 골라서 엉덩이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다. 한데 앉는 순간 저절로 시야가 상대방이 아닌 수해를 담았다.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시기 위해 만들어놓은 듯하지 않은가.
“무섭지 않느냐?”
술과 함께라면 무서울 것이 없다.
하나 이번만은 진심을 숨기고, 평범하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나는 무서웠다.”
이훤은 말을 아꼈다.
회귀 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했던 노군과 망아취자였다. 마치 가족이 있다면 저들과 같았을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망아취자가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큰 고민을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본파는······.”
늘 화산을 욕하고, 탓하던 그였다.
그렇기에 본파라는 한 마디가 무겁게 다가왔다.
“융성했다. 천하의 으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늘 세 손가락에 꼽혔지. 전대는 현대에 잇고, 현대는 후대에 비전을 전하니 잠시 흔들릴지언정 지금처럼 쇠락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정마대전이 일어났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이훤은 대곡주를 따랐고, 망아취자는 천천히 음미하듯 술을 입안에 굴렸다. 양치를 하듯 우물거린 후 탄식과 함께 술을 넘겼고, 그 후에야 말이 이었다.
“오래 전 내 위로 사형들이 아주 많을 때였지.”
회귀 전에도 화산은 쇠락했고, 정마는 유례가 없을 만큼 팽팽하게 대립했다. 한데 생각해보니 화산이 쇠락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 사내가 나타났다. 정파의 세상임에도 자신만의 기준으로 독보강호를 했다. 적아를 가리지 않았고, 정마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죽이고, 살렸다. 그 자를 가리켜 신마라 칭했다.”
이훤은 소리 없는 탄성을 흘렸다.
정파인은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고, 사마외도를 경멸했다. 그렇기에 무림공적에게는 수치스런 별호를 붙여 퍼트리기 일쑤였다. 한데 적을 신마(神魔)로 불렀다는 건 그만큼 강했고, 인상적이었으며 압도적이었다는 의미리라.
“그리고 마교 놈들도 그리 불렀지.”
고금을 통틀어 정마(正魔) 양측에 인정을 받는 괴인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이제 무림맹과 마교는 선택해야 했다.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기존의 강호는 체계가 무너진다. 그 결과 정마가 처음으로 합심하여 괴인을 공격했단다.
“삼문협이었지.”
망아취자는 한 잔을 더 마셨다. 한데 처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 마치 떠올리기 싫은 옛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듯했다.
이훤은 삼문협을 떠올렸다.
그 또한 회귀 전 삼문협을 오가지 않았던가.
산서성 남부의 물줄기인 삼문협의 수로는 거미줄처럼 얽혔고, 수천 개의 절벽의 첨탑처럼 솟구친 험지였다. 그리고 노비로 잡혀 있다가 도망치면서 은신했던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괴노인에게 천공혈륜겁을 건네받은 장소였다.
‘설마?’
이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도 눈이······.”
망아취자는 쓴웃음을 흘렸다.
“신마는 너와 달리 평범했다. 그는 모르고 지나치면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말이야.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구, 적당한 인상에······. 모든 것이 무난했지. 그렇기에 그가 삼문협의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순간 무림맹과 마교는 알게 되었다. 가둔 것이 아니라 갇힌 것임을.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마의 고수들을 도륙했다. 지금껏 기록된 적 없고, 보지도 못한 무공으로 우리를 농락했지.”
“화산은 물러나지 않았군요.”
망아취자는 아예 술병을 들었다.
“내 사형이 오래 전 그에게 죽었다. 다른 방파들은 이권을 따질 때 우리는 모든 걸 걸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는 남았지. 우리와 뜻을 함께 하는 정파의 무인들도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놈을 빈사지경에 몰아넣었지.”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신마나 무신이라 불린 괴인은 죽은 듯했다. 그 말인즉슨 화산이 승리했다는 의미였다. 한데 망아취자는 어째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낙안봉에 숨어 지낸단 말인가.
“놈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하나 놈의 숨이 곧 끊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한데 놈이 마지막 기력을 쏟아낸 후 주저앉았을 때 우리는 깨달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망아취자의 호흡이 거칠다.
“남은 사람은 여섯 명. 저마다 구파오가에서 가장 약한 자였다.”
<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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