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이것이 기연이다. (3) >
13, 이것이 기연이다. (3)
*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훤과 노인은 술을 마셨고, 노군은 청소와 요리를 도맡았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이훤이 제멋대로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법했다.
그렇기에 노군을 돕고자 나섰다.
하나 노군은 단 한 번도 이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저 노인과 함께 있어 달라는 청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흘렀다.
이제 봄도 지나고, 곧 여름이다.
하지만 주원경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여전히 선선했고, 여전히 매화는 화사했으며, 여전히 술을 맛있었다.
“이제 초도각도 반 년 정도 남았겠네요.”
이훤의 말에 노인은 혀를 찼다.
“쯧쯧,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저자의 무관도 아니면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다니.”
“초도각의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이건 황하건적입니다. 지난번에 잡아놓은 멧돼지의 뒷다리를 말린 후 구워봤습니다. 화산의 성세가 예전 같지 않으니 사람을 모아 괜찮은 제자를 발굴하려는 것이지요. 반면 관도들은 나쁘지 않은 무공을 익혀 강호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검붉은 건적(乾炙)을 서너 점씩 입안에 털어 넣었다.
“크하! 역시 돼지는 뒷다리가 진리지. 그게 문제라는 것이야. 화산 아래 속가방파가 몇 곳이더냐? 그들과 조율했다면 화산에 쓸데없이 건물을 올릴 필요가 없었어. 괜스레 희망만 심어주면서 좋기는 뭐가 좋아. 호오! 양념이 아주 잘 됐구나. 아쉽다. 아쉬워. 네가 술만 마실 수 있다면 꽤 좋은 상대가 되었을 텐데. 하여튼 근골과 자질만 따져서 제자를 받는다면 화산을 어찌 명문이라 하겠는가? 쓸 만한 녀석들이 오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쓸 만하지 않은 녀석들이라도 가르쳐야지. 그것이 순리다. 사람이 아니라면 전하지 않으니 거뒀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이 놈아! 너만 마시지 말고, 나도 한 잔 다오.”
이훤은 노인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형님, 저도 어르신 쪽에 손을 보태겠습니다.”
노군은 예전보다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킁! 형님이라고 하지 마!”
“어쨌든 초도각을 떠나면 표국의 표사나 쟁자수, 혹은 무가의 경비 정도는 서겠지요. 한데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은 만족하지 않아요. 죽는 그 날까지 화산의 제자가 되지 못한 걸 자책하고 살 겁니다.”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너도 그런 게냐?”
이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지금이 아니라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그랬나?’
처음엔 그랬던 것도 같다.
근골이 나쁘고, 자질이 부족해서 도망치듯 화산을 떠나야 했고, 그 후 힘든 삶에 대한 원망은 화산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훤은 잠시 생각한 후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는 자책할 필요가 없지요. 저는 초도각의 관도도, 화산의 제자도 아니니까요. 형님, 이거 더 있나요?”
“이 놈의 자식! 곧 죽어도 형님이라지. 먹고 싶으면 네가 만들어라.”
노군은 모른 척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투덜거리고 싶었나 보다. 이훤은 박장대소를 했다. 노군은 이훤이 노인의 곁에서 외로움을 달래주기를 바랄 터였다. 하나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보면 노군 또한 외로운 것은 당연했다. 한 사람은 술과, 한 사람은 안주와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좋습니다. 제가 비전의 요리 솜씨를 발휘해보지요!”
이훤이 일어나려는 순간 노인이 소매를 잡았다.
“네 놈이 주방을 태워먹은 게 며칠 전이다. 가기는 어디를 가! 주원경 전체에 불을 지를 셈이더냐.”
결국 노군이 주방으로 향했다.
노인은 말없이 술병을 기울였다.
한 달 내내 술을 마시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정작 서로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너는 내가 궁금하지 않느냐?”
“술 좋아하는 제 스승이시잖아요.”
이훤의 대꾸에 노인은 빙긋 웃었다.
“그렇지. 한데 나는 네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분위기가 잠시 무거워졌다.
이훤은 말을 아꼈고, 노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망아다. 예전의 나를 잊고, 술에 취했으니 망아취자라고 해야겠군.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망아취자(忘我醉子)라니.
노인은 그 후 입을 닫았다.
이훤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은 이훤을 궁금해 했으나, 결국 묻지 않는 것을 택한 게다. 그저 자신이 그런 마음이라는 것만 전했다. 그리고 과거가 아닌 앞으로의 삶을 망아취자라는 별호에 빗대며 화제를 돌렸다.
이훤은 빈 잔을 채운 후 말했다.
“저는 취해서 멋대로 살 것이니 취마라 하겠습니다. 저도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딱-
노인이 이훤의 손목을 쳤다.
‘그래도 화산의 도인이시니 마를 멀리 하시는 건가.’
이훤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노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만 멋있는 걸 하려고? 다른 걸로 바꿔라.”
아이처럼 떼를 쓰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이것이야 말로 삶의 이정표와 같은 별호가 아니었던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한 번 정했으면 땡입니다.”
이훤은 노인이 만류하기 전 잽싸게 술을 들이켰다. 노인이 막으려면 무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저 이렇게 술처럼, 물처럼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 취마는 오늘 뭘 하실 생각인가?”
이훤은 노인의 농에 농으로 대꾸하려다가 탄성을 흘렸다. 취마라는 별호를 회귀 이후 처음 듣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쳐간 것이다.
“아! 생각난 김에 잠깐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창룡령은 가파르다. 조심히 다녀와.”
“술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법칙, 아무리 만취해도 집은 찾아가라. 걱정 마세요.”
이훤은 휘적휘적 주원경 밖으로 향했다.
그 때 노군이 갓 지은 밥과 건적을 가지고 나섰다.
“이 놈아! 밥 먹어야지. 어디 가?”
이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만두 사러 갑니다.”
*
“덕구야.”
반덕구(班德邱)는 잠결에도 입맛을 다셨다.
초도각 산하 성무관(聖武館)에 소속된 그는 저녁을 양껏 먹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닭 두 마리와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삶아서 뼈만 남기고 모두 먹어치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를 우려낸 달콤한 물이 샘솟는 우물에 뛰어드는 꿈을 꾸고 있었다.
“반덕구.”
반덕구는 잠결에 들려온 목소리를 피해 몸을 돌렸다.
항아리처럼 비대한 몸뚱이가 찌그러지며 갈비뼈를 압박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니 몸과 마음이 이처럼 편할 수가 없다. 이제 우물에서 달콤한 물을 퍼마시는 걸로 부족해 몸을 던지려 했다.
그때 누군가 뺨을 후려쳤다.
짝!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덕구는 눈을 번쩍 떴다.
한데 그 순간 두 개의 귀화(鬼火)가 덮칠 것처럼 다가왔다. 사람의 눈처럼 보였지만, 악귀가 아닌 이상 저렇게 번들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건 꿈이 아니다.”
악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눈빛은 지옥의 겁화를 방불케 했지만, 목소리는 친근할 정도로 담담했다.
“소리 지르지 않겠다면 말을 할 수 있게 해주마.”
반덕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질러서 악귀를 화나게 만드는 것보다 시키는 대로 하는 쪽을 택했다. 커다란 눈망울이 눈덩이처럼 데굴데굴 구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조용히 따라해.”
“어, 네.”
“후우! 돌고, 돌아서 이르되, 더하고, 더하여 채우되, 굴리고, 굴려서 내린다.”
반덕구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서 소곤거렸다.
“후우! 돌고······.”
“앞에는 빼고.”
악귀는 도합 백팔십 글자를 외우게 했다.
반덕구는 외우면서도 누군가를 저주하는 주문은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나 백팔십 글자 중 스무 글자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순간 귀화가 양 옆으로 길게 늘어지며 더욱 흉측하게 변했다.
“너, 둔한 거 알아. 그러니까 천천히 해. 한 글자라도 잘못 외우면 안 돼.”
“네, 네.”
악귀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잦아들었다.
악귀는 친절했다.
그저 눈알이 조금 무서울 뿐.
반면 성무관의 관도들은 어떠한가.
성무관은 무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지식을 쌓게 해주었다. 초도각의 무관 중 성무관은 돈 많고, 능력 없는 자들이 속했다. 저들은 졸업한 후 화산에서 이 년을 보냈다는 자랑거리를 위해 모였을 뿐이다.
하루 종일 놀고, 먹는 한량들.
이것이 성무관도였다.
한데 인간이란 족속은 한량 사이에서도 급을 나눴다.
반덕구의 위치는 가장 아래였고,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할 만큼 구박을 받으며 지냈다. 하지만 그는 관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혼자 외롭게 크면서 친구를 필요로 했다. 자신이 웃는 낯으로 다가가고, 가진 것을 나누다보면 저들도 마음을 열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것은 전무했다. 그러니 낮의 성무관도와 밤의 악귀를 고르라면 후자일 수밖에 없었다.
‘악귀는 때리지 않아. 친절해.’
반덕구에게 있어서 누군가 자신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가문의 돈이나 지위를 보고 굽실거리는 척 할뿐이다. 돌아서면 삿대질을 하며 비웃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악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억지로 놀려 외우고, 또 외웠다. 이제는 설령 백팔십 글자가 주문이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으련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받는 기분, 솔직히 좋았다.
“잘했다.”
칭찬과 함께 무언가가 단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부잣집이라고 하더니 그래도 좋은 걸 많이 먹었구나. 운기조식은 할 줄 알지?”
“네.”
“지금까지 네가 알던 심법은 잊어. 내가 가르쳐준 걸 외워라.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이야. 더도 말고 딱 세 번만 해. 네가 일어나는 시간을 기준으로 세 번이다. 알았어?”
새로운 구결을 알려주고, 옛것은 버리란다.
반덕구가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이것이 무공임을 모를 리 없다.
“지금 제게······.”
“대답만 해.”
“네.”
잠시 후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후끈한 기운이 등 뒤의 명문혈과 정수리의 백회혈을 통해 흘러들었다.
“외우면서 기억해. 많지 않아. 할 수 있어. 이건 위험하지 않아. 천천히 해. 따라올 수만 있으면 다른 건 문제되지 않아.”
아이를 다독이듯 친절한 설명.
반덕구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악귀의 설명을 따라했다. 다행히 구결을 외는 것보다 혈도의 위치를 기억하는 과정은 쉬웠다.
“후우, 후우.”
하나 평소에 수련을 하지 않던 몸뚱이는 연방 거친 숨을 뿜어냈다.
그때 악귀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했어. 너 만두 좋아하니?”
반덕구는 아기 새가 어미 새를 본 것처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만두 세 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반덕구는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만두를 뜯어서 삼켰다.
“아, 좋아. 너무 맛있어요.”
“목마르지? 이거 마셔.”
반덕구는 악귀가 건넨 병을 기울였다가 심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물인지 알고 들이켰는데 온 몸이 마비될 정도로 독한 술이 아닌가.
악귀는 콜록거리는 반덕구에게 말했다.
“덕구야. 나는 네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어.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도와줄 거다.”
반덕구는 영문 모를 소리에 눈만 끔뻑였다.
“그러니 살아. 열심히 안 살아도 되니까 살아만 있어라. 그럼 내가 너를 도와줄게. 알았지?”
악귀가 유혹하듯 내뱉는 한 마디마다 반덕구의 볼 살은 요동을 쳤다. 바보라고 해도 알 수 있다. 악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군지 몰라도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가, 가실 건가요?”
“응, 난 간다.”
반덕구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달콤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러니 다음에 볼 때까지 주량 좀 늘려 놔라.”
반덕구가 고개를 들었을 때 시커먼 무언가가 정수리를 강타했다. 그는 그대로 기절했지만,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 13, 이것이 기연이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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