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이것이 기연이다. >
13, 이것이 기연이다.
청천빙화주(淸天氷花酒).
이훤은 두 병을 만들었다.
하나 공평하게 주조하지는 않았다.
빙화초에서 빙정을 분리한 후 한쪽에 대부분을 투입했다. 투입된 쪽은 영약이나 다름없는 청천빙화주였고, 반대쪽은 그저 잘 익은 청천빙화주일 터였다.
하여 여벌로 만든 술을 노군에게 주었다.
그로 인해 그의 숙원이 풀리기를 기원했다.
이훤이 회귀한 이후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첫 번째 사람이 아니던가. 한데 평생에 걸쳐도 만나기 힘든 지우를 예기치 않게 한 사람 더 만날 줄 어찌 알았을까.
‘시작하시는군.’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집중했다.
노인은 화산의 무복을 걸치고, 다소 예스러워 보이는 검을 늘어트렸다. 화산파의 도적(道籍)에 올라 정식 제자가 되면 받을 수 있는 수화검(修華劍)이다. 수화검의 강도는 강검(剛劍)과 연검(軟劍)의 중간 지점이다. 그렇기에 화산의 현란한 검법과 음유한 검법을 동시에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촤라라라라락!
노인이 검을 떨치는 순간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초절정,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전대 고수가 마음껏 펼치는 무공이 아니던가.
일진광풍이 몰아치고, 술항아리가 비명을 질렀다.
매화나무가 진저리를 치며, 매화를 흩뿌렸다.
하나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꽃잎 사이를 쉴 새 없이 휘돌며 검을 뻗을 때마다 자색의 기운이 번뜩였다. 그만큼 청천빙화주에 대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것이 느껴지니 이훤의 심장 또한 전례가 없을 만큼 빠르게 요동을 쳤다.
술이 달랐고, 상황이 달랐다.
여아홍이 아무리 좋다 해도 존재하지 않던 청천빙화주와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또한 낙향한 관리의 마음보다 무인으로서의 호연지기가 치솟았다.
“아아.”
어느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회귀 이후 단 한 번도 전생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너무도 그리웠다. 만약 예전의 무위를 유지했다면 지금 당장 노인과 함께 어우러졌으리라.
청천빙화주를 무대로, 매화를 배경으로.
내공이 바닥날 때까지 미쳐 날뛰고 싶다.
‘아! 이제야 알겠다.’
이훤은 노인의 검무를 지켜볼수록 납득하게 되었다. 어째서 노군이 삼십 년 동안 노인을 설득하려 했는지 이해했다. 노군동에서 지내온 반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수없이 지켜봤던 매화검법이다.
한데 노인이 펼치는 매화검법은 전혀 달랐다.
매화검법의 원형은 이십사 수였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 열두 수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노인이 펼치는 진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樹梅花劍法)은 충격적이다.
‘내게 술이 없었다면······.’
이훤 역시 저걸 얻기 위해 평생을 바쳤으리라.
그만큼 진짜 매화검법은 현란함으로 햇빛을 밀어낼 정도였고, 음유함으로 달빛을 덮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가지고 싶다.’
술과 매화, 모두!
이훤이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완전히 동화되었을 때였다. 노인은 엄지로 청천빙화주의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입 안 가득 술을 머금은 후 소리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마 입안의 주향마저 빠져나갈 것을 아쉬워했기 때문이리라.
이훤은 노인의 소리 없는 환희가 부럽기만 했다.
그 증거로 입술은 말라붙었고, 몇 번이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다행히 노인은 약속을 기억했다. 그가 술병을 던지는 순간 흩날리던 매화가 길을 열 듯 양 옆으로 갈라졌다.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날아오는 술병을 잡으려 했다. 하나 술병은 매정하게도 코끝에 닿을 만큼만 접근하더니 핑그르르 돌며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 와중에 술병의 주둥이가 흔들리면서 청천빙화주가 미약하게 흩뿌려졌다.
“이런 씨······.”
이훤은 눈을 부릅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입술을 살짝 적신 몇 방울의 청천빙화주가 전부였다. 노인은 청천빙화주를 맛본 후 아까웠을 것이고, 약속한 것이 있으니 주는 시늉만 했으리라.
할짝-
입술을 핥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맛이라면 이훤이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러했을 것이다. 노인에 대한 짜증과 원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 술은 그래도 되는 술이다.
촤라라라라라랑!
노인은 무사히 청천빙화주를 받아들고, 온갖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마치 최후의 한 병을 손에 쥐고, 승리를 자축하듯 현란한 검무(劍舞)가 이어졌다.
스윽-
이훤은 노인의 검무를 눈에 담고서 소리 없이 품안의 술병을 꺼냈다. 본래 조용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마시려던 진짜 청천빙화주였다.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고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들이켰다.
노인의 호쾌함이 우스울 정도로 속 시원하게 들이부었다.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냉기와 함께 얼음 꽃이 존재한다면 이런 향이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술 냄새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
이훤은 입을 꾹 다물고, 주향이 사라질 때까지 음미했다. 그저 노인을 바라보기만 하던 때와는 세상 모든 것이 달랐다.
매화도 노인도, 매화검법도, 그리고 자신도.
마치 모든 것이 하나로 뭉개져 술과 함께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훤이 술병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었을 때 노인의 검무가 끝났다. 온 몸이 얼음구덩이에 처박힌 것처럼 싸늘했다. 하지만 청천빙화주로 인한 만족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으응! 네 눈깔은 언제 그리 빨개진 게야?”
이훤은 노인의 말에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호법 좀.”
그리고 폭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혈륜을 한껏 풀어놓았다.
*
노인은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훤의 몸 상태는 호법을 요청한 이후 급변했다.
주변까지 냉기가 일정도로 하얗게 질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흐음, 화산에 오기 전부터 익힌 심법인가?’
그는 이훤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화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모종의 이유로 머물게 됐을 터였다. 그러니 화산 이전의 삶에서 익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에 더하여 무공까지 신비로우니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그러던 중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하얗게 변했다가 빨갛게 변하더니 어느 순간 제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는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기이하다. 기이해.’
그는 이미 이훤을 끌고 낙안봉에 왔을 때부터 무공 수위를 파악한 후였다. 단전은 있으되 미약한 내공이 전부였던 녀석이다. 그러니 저렇듯 극단적인 변화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만에 하나 녀석이 마신 청천빙화주에 빙령단의 성질이 담겼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늘그막에 어영부영 얻은 술친구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노인은 한숨을 흘렸다.
어차피 낙안봉 정상에는 자신과 노군뿐이고, 심지어 주원경은 진법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호법을 서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으리라.
그는 자하심결을 극성으로 운용하여 내공을 외부로 흩뿌렸다. 노군과 이훤을 보고, 육합전성을 펼쳤을 때에도 지금과 같았다. 그로 인해 우연히 이훤의 상단전이 열렸음을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는 주변에 기막을 치고, 미세한 변화조차 찾아내려했다.
그 순간 경악할 만한 일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저것이······.’
이훤의 정수리 쪽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본래 상단전은 백회혈의 개방이 필수였고, 개방된 이후에는 자연지기를 스스로 받아들여 영기를 채운다고 했다. 그렇기에 상단전까지 단련한 자는 내공이 마르지 않고, 삼일 밤낮을 싸워도 지치지 않았다.
한데 이훤은 정반대였다.
상단전으로 자연지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몸속의 것이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노인은 잠시 이훤을 살피다가 연유를 파악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저 놈의 새끼, 나한테는 쭉정이 청천빙화주를 주었구나.’
그는 어린 시절 천하를 주유하며 빙궁과도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그렇기에 이훤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운이 빙령단의 기운과 흡사함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웃는 건 잠시였다.
노인은 표정을 굳힌 채 고민했다.
혹자는 상단전의 개방을 선경에 이른다 하여 무조건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노인처럼 절대지경을 눈앞에 둔 이들은 과유불급이란 말을 잊지 않았다.
이훤처럼 제대로 영글지 못한 상태에서 상단전의 개방은 지금처럼 내기의 손실이 너무 컸다. 이대로 세월이 흐르면 어느 순간 상단전의 개방으로 인해 성장이 막히기 일쑤였다.
“흐음.”
고민이 계속됐다.
이훤을 돕는다는 건 내력을 쏟아 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닌 말로 수십 년 함께 했던 제자에게 벌모세수를 해주거나, 내공을 전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 그가 고민하는 까닭은 내력과 별개였다.
“그래, 저 놈은 화산파 제자가 아니잖아.”
노인은 걸음을 내딛었다.
“문제 되지 않을 것이야.”
두 걸음 째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무도 모르겠지.”
그는 이훤의 등 뒤에 이르러 양손을 겹친 후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화산의 무복이 찢어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리고 그것이 잦아드는 순간 일신의 내공이 양 손에 맺혔다.
“하아.”
노인은 이훤의 정수리에 양손을 얹은 채 전음을 보냈다.
[이 놈아! 하려면 똑바로 해. 이 좋은 술을 먹고 죄다 버릴 셈이냐?]
이훤은 노인의 호통에 호응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부터 대단한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직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노인이라면 자신을 지켜볼 것이라 믿었을 뿐이다.
이훤은 노인을 통해 신세계를 엿봤다.
비록 그의 주도가 완벽한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알 수 없는 술의 세계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가 노인의 세계를 엿봤듯, 노인도 그의 주도를 보았으리라. 서로의 주도가 겹치지는 않지만, 인정하기에는 충분했다. 술은 생면부지의 사람과도 어울릴 수 있게 마들어주는 신비의 묘약이 아니던가.
한데 자신을 돕겠다고 나설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훤은 백회혈을 통해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오는 심후한 내력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노인은 백 년 가까이 무공을 수련했다.
그것도 정종무학의 삼정(三鼎) 중 한 곳인 화산의 비전을 말이다. 그렇게 쌓아올린 내력이 밀고 들어온다면 대문을 활짝 열고 반겨도 부족하지 않겠는가.
그래, 기연(奇緣)이다.
회귀 후 마주한 어떤 상황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기연이 분명했다.
이제 빙정의 기운과 노인의 내공이 혈륜과 어우러져 폭주하듯 휘몰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도와 혈맥은 물론이고, 몸뚱이에 무리가 오지 않았다.
이훤이 혈륜을 품은 이후 몸 상태는 나날이 좋아졌다.
근육은 세밀해지고, 힘줄은 팽팽해졌으며, 혈맥의 노폐물은 미약하게나마 모공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게 금상첨화라는 거지.’
거기에 더하여 빙정은 순수했고, 내공은 정순했다.
이훤이 세 기운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을 즐길 때 노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 놈! 이거 진짜 미친놈일세. 단전은 위장인 게냐? 장식품이야? 도대체 몸뚱이를 단전으로 삼다니 세상 어느 미친놈이 만든 무공이더냐?]
< 13, 이것이 기연이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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