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4)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4)
상단전을 운운할 때부터 눈치 챘다.
무인의 경지를 논할 때 초절정이라면 인외(人外)를 엿보는 단계였다. 회귀 전 이훤도 인외의 공능을 몇 가지나 선보이지 않았던가. 애초에 천공혈륜겁 자체가 인외로 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화산의 전대 고수인 노인이라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파파팟!
이훤은 서서히 회전하던 혈륜은 맹렬하게 휘돌렸다.
주원경을 눈앞에 두고 상대를 의심하여 실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몸놀림은 몇 배나 빨라졌고, 현란하던 노인의 발걸음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일성의 경지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이훤은 한순간 갈피를 잃고, 발을 헛디뎠다. 그 순간 노인이 팔을 낚아채더니 표홀하게 날아올라 평지에 내려섰다.
“희한한 놈이네.”
이훤의 예상대로 노인은 어렴풋이 무언가 있음을 짐작한 것에 불과했다.
“허허, 유불도의 깨달음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그걸 강제로 열수도 없을 텐데 말이야. 참으로 희한한 구조로구나.”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지요. 주원경 또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중요한 건 네 놈의 무공 연원이 아니라 주도였지. 어린놈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주도를 논해?”
“술 마시는데 도가 어디 있습니까? 마셔서 좋으면 끝이지. 술은 술입니다. 마시라고 있는 술을 마시면 끝이라고요. 거기에 괜히 도나, 예를 붙여봤자 구차해지지 않겠습니까?”
이훤은 투덜거리면서 주원경의 전경을 눈에 담느라 바빴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숨소리는 거칠고,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붙었다. 중원 최고의 향락가인 소주나 항주의 기녀들을 봤어도 이렇게 흥분되지는 않았다.
노인은 이훤의 행동이 만족스러우면서도 표정을 풀지 않고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술을 즐기기만 할 뿐, 존중할 줄은 모르는 녀석. 이 몸이 진정한 주도가 무엇인지 네 영혼에 새겨주마.”
“술 주신다는 이야기로군요.”
“흥! 청천빙화주가 네 것이라며? 그렇다면 저기 모자란 녀석이 아니라 네 놈에게 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자! 이 중에서 제일 끌리는 술을 골라 봐라.”
이훤은 고민할 것도 없이 이십 년 묵은 여아홍(女兒紅)을 선택했다. 소흥주 중에서도 최상품이라 불리는 여아홍은 고관대작이 아니면 입에 대기 힘들었다. 특히 눈앞의 수십 년 묵은 여아홍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정확히는 이십사 년이다. 잠시 기다려 봐.”
당장 마개를 뽑으려던 이훤은 눈을 끔뻑이며 노인의 행동을 지켜봤다.
“지금 뭐하십니까?”
“기다려.”
노인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손으로 옷소매를 잡은 후 양팔을 벌려서 바람의 강도도 살폈다. 잠시 손가락을 꼽으며 무언가를 헤아리더니 멀쩡히 있는 평상을 동쪽으로 옮기는 것이 아닌가.
“앉아.”
노인은 이훤을 평상에 앉히고 처소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여는 순간 내부의 광경이 보였다.
“아.”
생각보다 넓은 처소의 내부에는 수백 벌의 옷이 걸려 있었다. 그뿐 아니라 관과 두건, 요대와 배자는 물론이고, 십팔반병기까지 배치해 놓았다.
잠시 후 노인이 다시 등장했다.
한데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금의환향한 고관대작처럼 화려한 옷을 걸쳤고, 허리춤에는 장군검까지 꽂았다. 그는 동쪽을 바라보며 갑작스레 한숨을 내쉬더니 장탄식을 흘렸다.
“뭐하세요?”
이훤의 물음에 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술은 분위기로 마셔야 한다. 내가 네게 진정한 술맛을 알려주마.”
이훤은 대뜸 미간을 좁혔다.
술은 술이다.
분위기는 개뿔.
‘술 마실 때 분위기라고 해봤자 둘이지.’
좋고 나쁨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기에 노인이 옷을 차려입고 나왔어도,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반면 노인은 근엄한 어투로 제자를 가르치듯 말을 이었다.
“술을 마실 때에는 천지인을 가려야 한다.”
“몰라요. 관심 없습니다.”
이훤은 자신 앞에 놓인 여아홍만 힐끔거렸다.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인간 또한 하늘의 한 부분이듯 날씨를 살펴야 한다. 몸이 따뜻하거나, 추울 때, 혹은 병이 났을 때에 맞춰 술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천(天)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그 술을 선택한 것은 아주 좋았다. 나 역시도 오늘이었다면 소흥주를 마셨을 게다. 한데 너는 소흥주 중에서도 일절이라는 여아홍을 골랐으니 그 부분만은 칭찬을 해주고 싶다.”
지(地)는 예상했던 바였다.
산과 바다를 비롯한 지형을 고려해야 한단다. 그것은 바로 술의 핵심인 물맛을 따르는 것이니 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술꾼이라더라. 하나 중원의 젖줄기인 장강과 황하만 봐도 흙탕물 천지가 아니던가. 애초에 사람들이 차를 애용하게 된 이유도 물맛이 원인이다. 그렇기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인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하나 노인은 여유로웠다.
“내가 주원경을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지. 이곳의 모든 것이 지(地)를 위해 준비되었다!”
이훤은 노인의 자화자찬을 귓등으로 흘렸다.
마지막 인에 이르러서는 이훤도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이야 말로 술, 그 자체를 의미한다! 술이 좋지 않으면 어떤 시간, 어떤 환경임이 무슨 소용이랴?”
“당연하지요. 애초에 모든 것이 술에서 비롯됐거늘 술을 빼놓고 천지인을 논했다면 제가 어르신께 정말 실망했을 겁니다.”
“흥! 네 놈은 여전히 나를 우습게 보는군. 좋아! 진정한 주도가 어떠한지 한 번 몸소 체험해봐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훤 또한 노인의 진중함에 조금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시원찮은 짓을 하면 그냥 마셔버려야지.’
반면 진법 밖이라고 해서 소리가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칼바람에 시달리던 노군은 사숙인 노인을 보고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잠시나마 사숙이 미친 건 아닐까 고민까지 했다.
그 사이 노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쳤다.
“관직에 눈이 멀어 가정을 소홀히 했으나, 미안하지 않았다. 훗날 대과에 급제하여 금은보화를 안겨주면 그 동안의 시름이 모두 녹아내리지 않겠는가.”
구구절절한 외침에 애간장이 타는 듯했다.
“이십사 년 만에 금의환향했으나······.”
노인이 한탄하듯 외치다가 불현 듯 장군검을 뽑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둠에 휩싸일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이 검신을 타고 흐르는 순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흐음.”
제법 멋지기는 했다.
하나 이훤은 여전히 관망하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하아, 울기만 하던 여아는 어느새 혼인할 나이가 되었구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절강성 소흥 지방의 전통주를 가리켜 소흥주(紹興酒)라했다. 황주의 일종으로 오래 묵을수록 상품(上品)으로 쳤다. 그 중 최상품을 가리켜 여아홍이라 하지 않던가. 한데 여아홍의 유래가 바로 여아가 태어났을 때 소흥주를 땅에 묻고, 시집갈 때 꺼내서 마신다고 하여 유명세를 탔다.
‘저자의 이야기를 흉내내봤자 별 수 있나.’
이훤이라고 해서 어찌 술자리의 분위기를 모르겠는가.
하나 사람이 술을 마실 때마다 딱 떨어지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던가. 그래서 어설프게 멋을 부리기보다 편하게 들이키는 쪽을 선호했다.
스릉-
한데 노인이 검을 휘돌리는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슨 검법인지 알 길은 없으나, 비장함이 가득했다.
동시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옷은 찢어질 것처럼 펄럭였다.
“사해를 돌며 천하를 안정시켰으나, 나를 보는 아이의 눈빛만은 천지개벽을 방불케 하듯 요동을 치는구나.”
강검(强劍) 일변도의 검법이 어느덧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그와 함께 바람 또한 잦아들었다. 그리고 노군의 검 끝이 흔들릴 때마다 매화가지가 춤을 췄다. 그 아래서 위태롭게 살랑거리는 매화가 희고, 붉게 빛나는 광경은 참으로 처연했다.
‘아.’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지금껏 화산에 머물면서도 매화에 관심을 둔 적이 없다. 한데 저 꽃은 어찌 저렇게도 사람을 심란하게 만든단 말인가.
노인의 검 끝을 통해 온갖 초식이 현란할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한데 공교롭게도 초식의 움직임과 옷의 펄럭임까지 매화와 어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우.”
심장이 뛴다.
어느덧 노인이 아니라 낙향한 관리를 떠올리며 동화되고 있었다. 노인이 아닌 관리의 서글픔이 느껴지고, 매화의 움직임에서 있지도 않은 딸의 어색함이 전해졌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기사가 일어났다.
본래 검명(劍鳴)이란 내공을 검에 담아 기세를 떨치는 행위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연검과 달리 강검이 낼 수 있는 검명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한데 노인이 검을 떨치는 순간 마치 연검을 방불케 하듯 요란한 검명이 울렸다.
‘철을 엿가락처럼 가지고 노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동시에 노인이 일갈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먼저 내게 다가와 술을 내미는 구나. 내가 남긴 줄도 잊고 있었던 술을 내밀며 옛 추억을 떠올리고자 하는구나.”
이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여아홍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마개가 뜯겼다.
병에 무리가 가지 않고, 마개만 뜯을 만큼 섬세한 내공의 사용이 돋보인다. 하나 이훤은 이 순간 무인이 아니라 낙향한 관리였다. 그렇기에 여아홍에서 흘러나오는 주향을 맡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것을 인지했다.
솨라라라라락!
노인이 광풍 사이를 비집고, 매화나무와 어우러지더니 이내 지척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검 끝으로 술병을 띄워 올렸고, 역으로 휘두르는 순간 술잔이 검 위에 올라섰다.
쪼로로로록!
허공을 회전한 여아홍의 주둥이에서 술이 흘러나와 잔을 채웠다. 노인이 검의 손잡이를 튕기는 순간 검 위에 올라와 있던 술잔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재차 검을 휘돌려 술병을 밀치는 순간 주둥이가 이훤의 앞을 지나갔다.
쪼로로로록!
두 개의 술잔을 채운 여아홍은 흔들림 없이 상 위에 안착했다.
노인은 그 사이에도 온갖 감정이 실려 있는 검법을 펼쳤고, 마무리 짓는 순간 허공에 떨어진 술잔이 저절로 검 위에 내려섰다. 그가 손잡이를 튕기는 순간 검이 핑그르르 회전했다.
검 끝이 목에 닿을 것처럼 위태롭다.
한데 그 모습 또한 이제는 남은 생이나마 누군가에게 바치고자 하는 아비의 결심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가볍게 술잔을 낚아챈 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장군검이 허공을 돌다가 땅에 박혔을 때 두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쳤다.
“크아아아!”
“크아아아!”
술잔이 비었음에도 입에서 쉽사리 뗄 수 없었다.
이 순간 전해지는 매화향 또한 고금을 통틀어 비견할 수 없는 최고의 안주였다. 두 사람은 잠시 여운을 만끽하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노인이 모든 힘을 소진한 것처럼 몸을 돌렸을 때 이훤은 고개를 숙인 채 진심을 담아 존경을 표했다.
“어떠냐?”
“좋았습니다.”
노인은 사심 없이 순수하게 웃었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주도를 깨우친 듯하구나.”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하아, 정말 좋았어요. 일단 술부터 달랐습니다. 사실 이십사 년 묵은 여아홍이 드문 술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데 주원경의 덕일까요? 지기(地氣)가 수십 년 간 일정하여 고르게 술이 성장했으니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여아홍이 탄생한 셈이군요. 아마 백 년 묵은 여아홍도 이 맛을 내지는 못할 겁니다. 거기에 더해 어르신께서 만들어주신 분위기로 인해 마치 꿈을 꾸는 듯했으니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클클, 그럴 줄 알았다.
“한데.”
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훤은 한 가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하나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연스럽게, 자유분방한 상황에서 제가 느낄 수 있는 최선의 한 잔이 더 그립습니다.”
노인은 의외로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주도의 끝자락이나마 엿보게 해주려 했더니 진정한 주도를 꿈꾸는 게냐? 네가 오늘 내 밑천을 다 털어가려는 속셈이구나.”
이훤은 빙긋 웃었다.
“솔직한 마음인 걸요.”
“클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네 놈이야 말로 전생에서부터 술꾼이었을 게야. 어쨌든 네 말은 가공되지 않은 진짜 감정과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렷다.”
“그렇지요.”
노인은 한쪽에 치워둔 청천빙화주를 쓰다듬었다.
“너와 내가 교류할 수 있는 매개체는 이것이 유일하다. 어디 이걸로 한 번 대작을 해보겠느냐?”
이훤은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바라마지 않던 일이지요.”
잠시 후 노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염원하던 청천빙화주에 대한 상념을 구체화했다. 복장이 바뀌고, 자세가 바뀌고,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가 화산의 매화검법임을 알리며 검무를 추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검무가 끝났을 무렵.
두 병의 청천빙화주가 바닥을 보였다.
노인은 술에 취하여, 여운에 취하여, 분위기에 취하여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하나 이훤을 보고는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으응! 네 눈깔은 언제 그리 빨개진 게야?”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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