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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31화 (31/226)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3)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3)

불명의 존재마저 예기치 못한 대꾸였다.

노군이 오히려 노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놈! 나한테는 그래도 되지만, 버릇없이 굴지 마. 하산 못하고 화산의 귀신이 되고 싶으냐?”

이훤은 오히려 웃었다.

본인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말이 너무 웃기지 않은가.

“제가 늘 말씀드렸잖아요.”

그는 노군의 손에서 청천빙화주를 건네받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술과 함께 있을 때 늘 진실하다고.”

그리고는 노군을 앞질러가며 외쳤다.

“어르신! 술 좀 자시나 본데. 이 술 알아보시겠습니까?”

대답이 없다.

하나 이훤은 겁먹지 않았다.

노군을 믿는 만큼, 노군의 행동 또한 신뢰했다.

그가 삼십 년 간 술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상대는 두주불사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육합전성도, 노호성도 사라졌다.

대신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작은 그림자가 번뜩이며 다가왔다. 그리고 이훤이 눈을 깜빡이는 순간 청천빙화주는 이미 상대의 손에 건너간 후였다.

“허어.”

이훤은 그제야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노인의 얼굴 주름만 봐도 나이를 헤아리기 힘들었고, 엉덩이까지 늘어트린 잿빛 머리카락을 보니 속세를 등진 것도 오래일 터였다. 게다가 등은 꼽추처럼 굽었고, 얼굴은 당장이라도 숨을 거둘 것처럼 창백했다.

기인(奇人), 광인(狂人), 혹은 마인(魔人).

누구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터였다.

이훤은 상대의 괴이한 외모에도 개의치 않고,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노인 또한 노군이 그랬듯 청천빙화주를 물끄러미 응시한 채 이훤의 접근을 허락했다.

“어르신, 어떻습니까?”

“진품이네.”

“드셔보셨나 봐요.”

노인은 잠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이훤을 흘겨보며 반문했다.

“네가 만들었냐?”

“잘 아시네요.”

“흥! 저기, 술을 글로 배운 멍청한 녀석이 이걸 복원해낼 리 없지. 차라리 화산파가 구파의 으뜸이 되는 걸 기다리는 게 빠를 게야. 물론 둘 다 안 되겠지만.”

노군은 노인은 신랄한 비판에 얼굴을 붉혔다.

이훤은 그제야 확신했다.

두 사람 모두 화산파에 적(籍)을 뒀고, 생각보다 깊은 관계임을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노군은 노인이 화산파를 모욕하는 순간 죽을 것을 알면서도 덤볐으리라.

“마음에는 드십니까?”

“마음에 든다.”

이훤은 슬쩍 노군을 돌아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건 데 노인은 삼십 년 간 노군의 술을 거절했으리라. 한데 상대가 마음에 들었으니 노군의 숙원(宿願)이 풀리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한데 가만히 있던 노군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사숙.”

예상이 옳았다.

‘나 빼고 다 화산파네.’

노인은 슬쩍 돌아앉으며 청천빙화주를 내려놨다.

“구경 잘 했으니 가져가라.”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진정한 술꾼이라면 청천빙화주를 거절할 수 없었다. 가산을 탕진하고, 남의 돈을 끌어와서라도 마셔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술이다.

“어르신. 제 이야기 좀······.”

그 때 노군이 가볍게 몸을 날려 이훤의 앞에 내려섰다.

그는 이훤의 말을 끊고, 대례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이미 내려놨습니다.”

“뭐라? 네깟 놈이 내려놓긴 뭘 내려놓아?”

“저는 지난 삼십 년 간 사숙의 깨우침을 화산에 전할 수 있다면 본파가 예전의 성세를 되살릴 것이라 믿었지요. 집착이었고, 미련이었습니다. 사숙의 것은 제 것이 아니고, 화산의 것이 아닙니다. 화산을 살리고 싶으면 화산에 묶인 제가 살려야지요. 세상을 등진 사숙께 매달려서는 아니 되는 거였습니다.”

노군은 평소와 달리 달변가처럼 말을 이었다.

반면 이훤은 그제야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의 무공을 복원하기 위해서 삼십 년을 바치셨군.’

누군가 들었다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불같은 성정의 사내가 명예와 사문을 등지고,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삼십 년 동안 만들었으리라고 누가 믿겠는가.

반면 노인은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 술은 저 녀석이 저와 헤어지기에 앞서 선물해준 것입니다. 그러니 저 녀석이 허락한다면 지금껏 사숙을 괴롭힌 제 잘못을 사과하는 의미로 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예, 저는 앞으로 술을 내려놓고, 사숙께 부끄럽지 않은 화산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고자 합니다.”

노인은 입맛을 다시더니 되물었다.

“진짜? 내 동정심을 사려는 건 아니고?”

멋있는 척 밀어내기는 했지만, 술꾼이 청천빙화주를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면 급한 건 노인뿐이 아니었다.

이훤 또한 노군의 포기가 답답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텐데.’

이 자리에서 즐거운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노군뿐이다.

그는 옛 일을 떠올리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 몫까지 즐겁게 마셔주십시오. 저 녀석이 그러더군요. 즐겁게 마신 술은 취하지 않는다고요.”

노인은 헛웃음을 짓더니 이훤을 바라봤다.

“저 놈이 반 년 전에 나를 찾아왔으니 둘의 사이가 반년을 넘지는 않았을 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그나저나 너는 표정이 왜 그러느냐?”

이훤은 노군을 위해 결심했다.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기로 말이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저는 허락하지 못하겠네요.”

“뭘?”

“제가 허락해야 어르신께서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노군께서 포기하신 이상 저 술은 제가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허허! 이 놈, 생각보다 재밌는 녀석이네? 사질이 사숙에게 줬는데 왜 네가 끼어들어?”

이훤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르신은 이 술을 마실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 순간 노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훤이 노인의 무공 성취를 판단할 수 없지만, 그가 어느 정도의 술꾼인지는 가늠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라.

노군은 화산의 무공을 복원하기 위해 삼십 년을 걸었다. 한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처럼 대단한 화산의 무공을 걸고, 노인이 요구한 것은 마음에 드는 술 한 병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청천빙화주를 마음에 둔 이상 노인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다를까 노인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뭐라?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술을 논해?”

술꾼에게 술 자랑하지 말고, 도박꾼에게 돈 자랑하지 말고,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더라.

노군이 당황하여 끼어들었다.

“사, 사숙. 사숙,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 놈이 말본새가 더러울 뿐 악의는 없습니다.”

하나 노인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후였다.

이훤은 노인이 살기까지 일으키며 접근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노인이 일어나면서 청천빙화주를 슬쩍 챙긴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네가 주도를 알아?”

그 순간 노인은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이훤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낙안봉 정상이었다.

이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여, 여기는······.”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으스대듯 항아리 사이로 거닐었다.

“이곳이 바로 주원경(酒源境)이다.”

이훤이 호응하듯 중얼거렸다.

“천국!”

낙안봉의 이름은 기러기가 잠시 쉬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강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쳤고, 화산에서도 가장 험난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절벽까지 굴러갈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킁킁! 이렇듯 다채로운 술 냄새가 존재하다니!’

주향(酒香)이 칼바람을 뚫고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이훤은 자신 앞에 우뚝 선 비석을 보는 순간 다시 한 번 전율이 일었다.

주원경(酒源境)

신선이 도원경에 산다면 술꾼은 주원경에 살 터였다.

삐뚤삐뚤한 필체로 보아 노인이 만취 상태로 새긴 듯했다. 하지만 비웃을 수 없었다. 이미 주원경이라는 지명 아래 새겨진 구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건! 이백의 장진주.”

이훤은 시문에 관심이 없지만, 술꾼을 위한 구절만은 잊지 않았다. 특히 장진주(將進酒)의 전문은 모르지만, 저 구절만은 늘 마음에 새겼다.

- 고래성현개적막(古來聖賢皆寂寞)

- 유유음자류기명(惟有飮者留其名)

“옛 성현들은 모두 다 흔적 없이 사라졌어도, 오직 술꾼들만이 그 이름을 남겼도다.”

첫 구절은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다면 두 번째 구절은 노인과 함께 합창하듯 외쳤다. 주선(酒仙) 이백이라면 술꾼들의 시조쯤 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이 순간 잠시마나 나이를 떠나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술꾼들의 합창에 뒤늦게 도착한 노군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반면 노인은 노군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거만하게 물었다.

“어떠냐?”

이훤은 평소와 달리 겸손한 자세로 대꾸했다.

“대단합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단해요. 어떻게 이 많은 술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채 스스로 뽐낼 수 있답니까?”

진심이 가득 담긴 물음이다.

이훤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연방 탄성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술이란 그곳의 물과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당연히 추운 곳에서 만드는 술과 따뜻한 곳에서 만드는 술은 달랐다. 한데 이곳에는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다시피 모든 종류의 술이, 햇수 별로 존재했다.

향만 맡아봐도 신선함이 전해진다.

이건 절대 돈을 써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기러기가 쉬어갈 만큼 험준하고, 척박한 낙안봉의 정상에서 삶을 쏟아부어 오롯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이훤이 품은 경외심이 전해지자, 노인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들어올래?”

노군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사숙!”

“왜?”

“제게는 삼십 년 동안 허락하지 않은 공간이 아닙니까.”

“술도 못 마시는 놈이 여기를 왜 와? 도박판에서 거지 받아주는 거 봤냐?”

이훤은 노군이 억울해하는 모습을 모른 척했다.

그만큼 주원경은 상상 속에나 존재할 법한 장소였다. 사방이 탁 트였고, 황량하기만 한 산 정상이 아니던가. 한데 매화나무가 숲을 만들었고, 어디서 끌어왔는지 물까지 샘솟았다. 곳곳에 놓인 항아리는 종류에 따라 묻히기도 하고, 공중에 걸어놓기도 했다.

마치 도원경의 복숭아처럼.

노인은 이훤이 지척에 이르자,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가는 곳만 골라서 밟아야 한다.”

“아. 그냥 땅이 아니었군요!”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이제야 눈앞의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진법(陣法)과 기관(機關).

본래 진법은 무언가를 숨기거나, 가둘 때 사용했다. 그리고 기관진식이야 말로 함정이나 경계를 위해 설치하는 대표적인 무기였다.

“클클, 발상의 전환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

노인의 거드름은 하늘을 찔렀다.

반면 이훤은 탄식했다.

그 또한 회귀 전 술을 마실 때마다 꿈꿨던 장소가 있었다. 세상의 온갖 술을 모아놓은 후 유통기한을 고려하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였다. 하여 기관진식이나 진법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인맥이라고는 쥐뿔도 없고, 공적처럼 쫓기던 입장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공상(空想)이자, 망상(妄想)이었다.

한데 노인은 그것을 이뤄낸 것이다.

경외심이 피어나는 한편 아쉽기만 했다.

‘내게도 이런 곳이 있었다면······.’

노인은 이훤의 넋 나간 표정을 즐겼다.

낙안봉을 떠날 수 없는 그가 평생에 걸쳐 이뤄낸 결실이 아니던가. 무인이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걸 듯 노인의 뿌듯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 노군은 얼굴을 붉힌 채 따지고 들었다.

“사숙! 지금껏 본산에서 조달한 자재와 물건이 수만 짐입니다. 한데 그걸로 술을 보관하는 장소를 만드시다니요. 심지어 이곳은 검신이 석검을 얻고, 매화검을 전파한 장소입니다. 화산파의 성지라고요! 하아! 낙안봉 정상에 희고, 붉은 매화가 어찌 저리 잘 피어나나 했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노인은 노군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자, 나를 따라 오너라.”

이훤도 이번만은 노군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예.”

짧은 대화를 끝으로 노인이 가벼운 걸음으로 움직였다.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라고 해도 바보가 아니라면 따라할 수 있을 만큼 손쉬웠다. 한데 다섯 걸음이 넘어가는 순간 묘하게 복잡해졌다. 무공을 쓰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자리를 밟아야 했다.

그 때 노인의 전음이 뇌리를 스쳐갔다.

[클클, 계속 실력을 숨기려면 그냥 거기서 나자빠지면 된다. 술을 앞에 두고 본심을 숨기는 놈팡이는 주원경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지!]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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