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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30화 (30/226)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2)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2)

이 세상에는 참 많은 술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귀한 술은 손꼽을 때 술꾼마다 선호하는 주류가 있을 터였다. 누구는 백주의 맑은 맛을, 누구는 황주의 진한 향을 손꼽는다. 그러다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너나 할 것 없이 멱살을 잡고 싸워야 할 만큼 술의 세계는 방대했다.

그때 누군가 세상에 없는 술을 최고라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데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 술을 꺼내 놓는다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황제보다 더 한 대우를 받으리라.

노군(老君)에게 있어서 청천빙화주란 그런 술이었다.

“백 년 전 사라진 술이 어떻게······.”

“화북장에서 북해빙궁의 소궁주를 만났습니다. 빙정을 추출하는 방법을 공유했지요.”

이훤은 자랑스러웠다.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그림이나 필체를 자랑하듯 당당했다. 노군은 여전히 청천빙화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탄성을 흘렸다.

“기연이로구나. 과연 주령천의 방대한 지식은 놀랍고도, 놀랍구나. 네가 빙정을 녹여 술을 만들어낼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네가 아니라 내가 기연을 만난 게야. 살아서 이 술을 보게 될 줄이야!”

이훤은 노군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며 웃었다.

있는 힘껏 감탄하고, 경외심을 품어주는 노군을 보고 있다니 장난기가 절로 생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득도하셔서 신선이라도 되실 줄 알았는데요.”

노군은 헛웃음을 지었다.

“클클! 이 놈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게다. 그리고 보아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리하는 순간 눈앞에 이것이 나타났지 않더냐? 이것이 바로 도지.”

“아! 그건 너무 억지인데요.”

이훤의 투덜거림에도 노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억지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노군은 청천빙화주를 봐서 좋았다. 하나 저것을 준다고 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기다렸다. 억지로 빼앗을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돈독한 사이였기에 그저 잠자코 있을 뿐이다.

반면 이훤은 단순히 이 상황을 즐겼다.

‘크큭! 안달 나셨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잠시 후 노군은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환호할 것임을 말이다.

스윽-

이훤이 등 뒤에서 한 병을 더 꺼내더니 자신 앞에 뒀다.

그리고 처음 꺼낸 술병을 슬쩍 밀었다.

“한 병은 정 없잖아요.”

그 순간 노군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구친 환호와 함께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술병이 저절로 흔들리며 빨려 들어갔다.

“크흠! 물리는 것 없다.”

“제 술 욕심이나 내지 마십시오.”

이것은 진심이다.

두 병 모두 청천빙화주였다.

하지만 이훤이 지닌 술이야 말로 빙정의 정수를 가득 담겨 있었다. 두 병을 비교하자면 최상품(最上品)과 상품 (上品)정도가 되리라.

반면 노군은 여전히 청천빙화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으로 보았을 때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 손에 쥐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술병을 뚫고 전해지는 한기, 보통 사람은 마시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만큼 강력한 녀석이다.

한참동안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다.

“고맙다.”

이훤은 멋쩍은 듯 딴청을 피웠다.

노군의 진심이 전해졌다.

육태천화서봉주가 귀한 술이라고 해도, 비슷한 술들이 존재했다. 더 좋은 맛, 더 나은 향, 더 귀한 느낌의 술중에서는 으뜸이라 할 만하다.

반면 청천빙화주는 아예 격이 달랐다.

“올 겨울 편하게 보낸 방값이라고 생각하세요.”

노군은 그제야 평소처럼 코웃음을 쳤다.

“놈! 방값만? 밥값은 또 어쩔 것이냐?”

“납치범이 너무 당당한 걸요?”

“예의범절은 술과 함께 먹어버렸냐? 네가 화산을 좋아하지 않아도, 노인네한테 예의는 갖춰야지!”

장난처럼 말했어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즐겁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두 사람은 다소 날 선 말을 주고받았지만, 선을 넘지 않았다.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화산을 싫어하진 않아요.”

“좋아하지 않으면 싫은 거야.”

“언제부터 아셨나요?”

노군은 헛웃음을 지었다.

“한평생 화산을 품고 살았다. 호불호 따위는 눈빛만 봐도 알아. 화산을 떠나고 싶으냐?”

이제는 속일 수도,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청천빙화주 앞에서는 술의 빛깔처럼 언행 또한 깨끗해야 했다.

“갈 곳이 많습니다.”

“언제 가도 좋은 곳이라면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되지 않겠느냐?”

노군은 시선을 돌린 채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노군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저를 제자로 받고 싶어서 그럽니까?”

“놈! 내가 이야기 했잖아. 나는 제자 안 받아. 받을 수도 없어. 본산을 떠나면서 화산파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그런데 네 놈이 조금 볼만해졌다고 해서 제자로 삼을 것 같으냐?”

“후훗, 아닌 것 같은데요.”

이훤이 장난처럼 받아들이자, 노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평소와 달리 이훤에 대한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가끔 초도각에 내려가 각주와 너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한데 내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르더구나. 네 기민함과 명석함이야 알려져 있지만, 근골과 자질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내가 봤을 때 네 근골과 자질은 상품이다! 심지어 더욱더 좋아지고 있지. 오죽 했으면 술을 마실수록 좋아지는 체질이 있는지 조사까지 해봤을 정도였어.”

혈륜이 무르익을수록 체질이 개선되는 중이다. 하나 이것을 설명할 수 없으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예전에는 다시 화산에 올 일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한데 요즘은 어쩔 수 없이 지나게 되면 멀리서나 보지 않을까 싶네요.”

“흥! 네 놈처럼 오악의 으뜸인 화산을 괄시하는 자가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으랴? 크흠! 어쨌든. 크흠! 제자로 받을 생각은 없다. 하나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크흠! 약자에게 강호가 얼마나 비정한지 말이다. 크흠!”

이훤은 박장대소를 했다.

“지금 제자로 받지는 않지만, 무공을 가르쳐주시겠다고 제안하시는 건가요?”

“크흠! 얄미운 소리를 하려거든 입 닥치고 있어!”

“화산의 무공을 유출하는!”

“아니다! 그냥 자세만 몇 가지······. 크흠!”

두 사람은 한참동안 농담과 진담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시골의 조부를 찾아온 도시의 손주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럼 갈 때 가더라도 이야기는 하고 가.”

“술상이라도 봐주시게요?”

“그래, 이 놈의 새끼야!”

*

솨아아아아아아-

이훤은 다음 날 노군동 밖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술상 차려달라고 한 건 조금 심했나?’

혈륜이 삼성에 이르면 한서불침은 못되어도 어느 정도 온기와 한기를 조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한 시라도 빨리 청천빙화주를 마시고, 삼 성의 경지를 이루고 싶었다. 하나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종용하는 노군의 말을 어기지 못했다.

잠시 후 노군이 노군동 밖으로 나섰다.

그는 평소와 달리 태극건에 흑관을 썼다. 때 묻지 않은 백의무복을 입었고, 그 위에 붉고, 흰 문양이 교차한 장삼을 걸쳤다. 이훤의 기억이 맞는다면 화산파의 정식 무복이 분명했다.

‘저건 제례나 큰 행사가 있을 때만 꺼낼 텐데.’

노군은 평소와 달리 근엄한 표정으로 으스대며 연방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나 이훤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추워 죽겠는데 어디를 가시려고요?”

“흥! 그러게 무공이라도 익히지 그랬느냐.”

“아이고, 아직도 그 소리십니까?”

“됐다.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놈. 따라와.”

노군이 앞장서자,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장공잔도에 가시는 건가요?”

동굴에서 이어지는 길은 세 가지다.

- 본산을 지나 초도각으로 향하는 길.

- 위태로운 창룡령을 지나 하산하는 길.

- 낙안봉으로 향하는 길.

그 중 노군은 세 번째 길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절벽 앞에 섰다.

길이 끊긴 듯 보였지만,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구친 절벽의 곳곳에 철심이 박혀 있었다. 화산의 창룡령조차 한 수 접어야 한다는 잔도(棧道)였다.

본래 잔도는 철심을 박고, 철심과 철심 사이에 판자를 대어 고정한 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줄을 엮어서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겹겹이 안전장치를 해야 했다.

하나 눈앞에는 오직 철심뿐이다.

노군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겁나느냐?”

“네.”

이훤의 솔직한 말에 노군은 혀를 찼다.

“재미없는 놈. 이리 와!”

그는 예전처럼 뒷목을 잡는 대신 이훤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준비 자세도 없이 절벽을 박차고, 철심까지 몸을 날렸다.

파파파파팟!

첫 철심부터 마흔여덟 번째 철심을 밟는 시간은 고작해야 일순(一瞬)에 불과했다.

“헉! 헉! 아! 진짜 다시 하기 싫은데요.”

“클클, 갈 때 또 해야 한다. 억울하면 무공을 배우던가.”

이훤은 털옷을 고쳐 입은 후 입술을 삐죽였다.

“쳇! 점점 속세의 때가 묻으셔서 선풍도골의 옛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네요.”

“다 네 놈 덕이지.”

노군은 길이 익숙한 듯 낙안봉 정상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훤은 그 뒤를 쫓으며 생각했다. 아마 정상에 있을 누군가가 노군의 거래 대상일 터였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유추해본 결과 화산과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술을 바쳐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건데······.’

노군이 삼십 년 동안 매달려서 얻어낼 무언가는 짐작초자 되지 않았다. 결국 이훤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데 정상을 코앞에 두고 노군이 멈춰 섰다.

그는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양 손을 천천히 모아 예를 표하며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화산의······.”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칼바람을 뚫고, 들려왔다.

[넌 됐고, 대가리에 뚜껑 열린 저 놈은 뭐냐?]

이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수!’

고수(高手)가 될수록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

그렇기에 경지에 이른 자는 사소한 것만으로도 상대의 무위를 짐작하곤 했다. 불명(不名)의 존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강렬한 위압감을 드러냈다.

육합전성(六合傳聲).

목소리가 여섯 방향에서 들리는 것처럼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신공이 아니던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비슷하게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하나 불명의 존재만큼 종잡을 수 없고, 깨끗하게 목소리를 전하는 건 쉽지 않았다. 회귀 전 이훤이라고 해도 저렇게 깨끗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훤이 경악한 이유는 육합전성과 별개였다.

‘어떻게 알았지?’

회귀 전 죽는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생기가 사라지고, 사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순간 누군가 정수리를 통해 영혼을 뽑아내는 듯했다.

그리고 회귀 후 한 번 겪었다.

원가휘의 기연을 강탈하여 과실을 먹었을 때였다. 영약을 흡수하여 혈륜의 성취가 일 성에 이르렀다. 당시 영과의 기운은 홀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기에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을 감수했다. 노군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버림으로서 채운다는 것을 체감한 셈이다. 그리고 그때 회귀 후 처음으로 자신을 관조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신을 역으로 바라보는 상황. 그때에도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을 정수리라는 배출구를 통해 내보내지 않았던가.

‘이게 원래 보이던 건가?’

그러니 불명의 고수가 말한 ‘대가리에 뚜껑 열린 놈’이란 상단전(上丹田)의 개방을 의미했다.

“너 뭐하냐?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노군은 이훤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느 상황에서도 제 할 말을 하는 놈이 망부석처럼 꼼짝도 않고 있으니 의아했으리라.

[인사를 왜 해.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육합전성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나 그것은 노기를 폭발시키기 위한 숨고르기였다.

[화산의 병신들은 너로 족하다고! 아무도 데리고 오지 말라 했거늘!]

제멋대로 오가던 광풍의 끝이 노군과 이훤을 향한 듯했다. 노군은 고개를 숙였고, 이훤은 뒤늦게 잠이 깬 듯 탁한 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건 나중의 일이고.’

상단전의 개방과 천공혈륜겁이 어떻게 어우러질지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지금 상단전을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으리라. 지금은 노군이 삼십 년 간 술을 바친 불명의 존재에게 집중해야 했다.

머리가 맑아지는 순간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저기요.”

이훤은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저는 화산의 제자가 아닌데요.”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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