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삼 일.
이훤이 노군의 의심에서 벗어나는데 걸린 시간이다.
주야(晝夜)로 함께 얼굴을 맞대고 끊임없이 술을 논했다. 오죽 했으면 꼬투리를 잡으려 했던 노군이 먼저 지쳤을 정도였다.
술의 주조법과 관리 방법, 마개를 딸 시기까지.
이훤이 삼 일 동안 바로잡은 실수만 해도 스무 가지가 넘었다. 그 결과 노군은 버렸어야 할 세 동이의 술을 구해냈고, 맛이 없을 뻔 한 네 동이의 술을 지켰다.
“크흠, 그렇다고 네 놈을 믿는 건 아니야.”
이훤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노군과는 여전히 앙숙처럼 으르렁거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 다 육태천화서봉주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도 주령천의 후계자라는 신분을 가끔 써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회귀한 이후 느는 건 거짓말이고, 주량이었다.
이훤은 뒷짐을 진 채 항아리 사이를 걷다가 탄식했다.
“아! 이 술은 땅에 묻으셔야 한다니까. 왜 안하셨어요?”
노군은 볼을 실룩거렸다.
“놈! 오후에 하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내게 명령하는 게냐?”
“명령이라니요. 노군께서 뭘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이 술 버려도 되요?”
“크흠! 술 훔쳐 마신 도둑놈 주제에! 네가 파라!”
이훤은 대답 대신 손목을 내밀었다.
“맥문 한 번 더 잡아보시지요?”
노군은 혀를 찼다.
처음 이훤을 납치했을 때 슬쩍 확인한 바에 의하면 놈에게는 내력이 없다시피 했다. 딱 초도각의 관도가 지닐 만큼의 내공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놈이 주변을 돌아다녀도 개의치 않았다. 언제든 잡아올 수 있다고 여겼다..
“놈! 저자에서 영웅담 좀 들었나보구나. 나를 도발하여 무공을 얻어 배울 생각이라면 포기해라. 나는 절대 네게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야!”
이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공짜로 가르쳐준다고 해도 사양할 생각이다.
그는 노군이 곡괭이를 챙겨오자, 웃음을 참기 위해 안면에 힘을 줘야 했다.
쾅! 쾅!
노군은 곡괭이질을 몇 번 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동굴 내부가 아무리 훈훈하다고 해도 땅까지 무른 것은 아니었다. 결국 노군은 곡괭이를 내던지고 손으로 동굴 바닥을 내리쳤다.
초절정 고수에 준하는 그가 내지른 일격이다.
땅은 한 방에 한 치씩 움푹움푹 패였다.
잠시 후 항아리를 넣을 공간이 완성됐다.
“항아리와 땅 사이에 빈 공간이 없어야 해요. 흙으로 메우세요.”
우두둑-
노군이 주먹을 쥐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몰아쳤다.
“그건 네가 해야지.”
열흘이 지났다.
노군은 간간히 노군동을 비웠다.
이훤이 요구한 재료들을 구해오기 위함이다. 대부분은 화산파의 창고에서 꺼내왔지만, 몇 가지는 표국이나 전장을 통해 얻어야 했다. 아직도 재료는 절반 밖에 구비되지 않았다.
이훤은 그럴 때마다 청천빙화주를 만들 준비를 했다.
안주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지만, 한낱 미물이 이훤의 의도를 모두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컹! 컹!
“이 놈아. 안가면 되잖아.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이훤은 절벽 앞에 섰다.
노군동이 외진 곳에 위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산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시야 끝까지 구불구불하게 펼쳐진 산로를 응시했다. 좌우로 산림이 가득하여 멀리서 보면 용의 등뼈처럼 보였다. 화산을 험지라 부르는 이유 중 하나인 창룡령(蒼龍嶺)이다. 강풍이 불고, 길이 좁아서 여차하면 길 밖으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노군동의 길은 셋이다. 하나는 낙안봉으로 향하는 잔도였고, 하나는 본산의 주변을 거쳐 초도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인 창룡령이야 말로 화산 아래까지 곧장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게.’
탈출을 한다면 늦은 밤이 될 터였다.
그렇기에 이훤은 시간이 날 때마다 구불구불한 창룡령을 눈에 담았다.
*
이훤의 일과는 일정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술의 주조과정을 살폈다.
당연히 시음(試飮)은 빠지지 않았다.
강호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술을 그것도 묵은 햇수별로 맛볼 수 있다는 건 최상의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오 무렵에는 반주를 곁들여 밥을 먹었고, 저녁부터는 노군이 내어준 술을 항아리 째 마셨다.
지상낙원이 따로 있나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그러다 뼈 삭는다. 이 놈아.”
노군은 이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훤도 노군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뼈 안 삭아요. 좋은 술은 보약이라는 말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살다 살다 그런 개소리도 들어보는구나. 술은 몸을 피폐하게 만들고, 머리를 어지럽게 하니 도인이라면 마땅히 금해야 한다. 언제부터 화산이 술판으로 변했는지 원······.”
“무공은 호승심을 자극하여 심신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 있으니 애초에 익히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전의 노군이었다면 이훤의 투덜거림에 대뜸 멱살을 잡았을 터였다. 하나 두 사람은 한 달 남짓한 사이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했다. 제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외로움을 견딜 뿐 극복할 수 없었다. 인(人)이 형태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어깨를 맞댄 것을 의미하니 한 달이라는 시간은 둘 사이에 미운 정(情)이 쌓이기에 충분했다. 그 증거로 노군은 아무리 화가 나도 육태천화서봉주를 거론하지 않았다. 도문의 제자로서 그 술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고 인정한 것이다.
“에잇! 어린놈의 주둥이가 술에 찌들어서 아주 못 돼 처먹었어. 에잇! 버릇없는 놈. 하여간 술 좋아하는 놈 중에 정상이 없어요!”
“제 주둥이가 술에 젖지 않았다면 여기 항아리 중 절반은 버렸을 텐데요?”
컹!
안주까지 호응했다.
노군과 십 년 넘게 지내온 안주로서는 이훤의 합류로 인해 노군동 전체가 풍요롭게 느껴졌으리라.
노군은 인견(人犬)을 번갈아보며 눈을 끔뻑였다.
“쯧쯧, 언제부터 그리 죽이 잘 맞았느냐?”
“사람 둘에 개 한 마리인데 셋이 다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술주정뱅이를 말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심지어 노군은 수십 년 동안 산속에서 지내다시피한 상태가 아닌가. 게다가 성격까지 급하니 속안의 말을 정리해서 쏟아내기가 어려웠다.
“에잇! 자랑이다. 이 놈아! 이거나 받아!”
노군은 암기를 던지듯 보퉁이를 내던졌다.
“이게 뭡니까?”
이훤의 물음에도 노군은 못들은 척 처소로 향했다.
“안주야. 화나신 건 아니겠지?”
컹!
이 놈의 개는 매 번 같은 소리만 내니 속내를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보퉁이를 여는 순간 노군의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아, 이건 참.”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보퉁이 안에는 헛개와 쑥, 칡과 같이 숙취에 좋은 약초가 가득했다. 한겨울에 찾아보기 힘든 약초는 또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하여간 노인네가 수줍어하시기는.”
이훤은 장난스런 말투로 동굴 안쪽을 향해 외쳤다.
“노군! 등이라도 긁어드릴까요?”
“됐다! 이 놈아. 연공을 할 터이니 방해하지 말고, 죽이나 잘 끓여 먹어라.”
그 날 저녁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푹 삶아서 우려낸 죽을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아.”
한데 침상에 눕고 보니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
화산은 중원 오악 중에서 가장 높고, 가장 험준했다.
날씨가 좋아도 오르기 쉽지 않은 화산이 흰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이제야 진정한 겨울이 찾아옴을 자랑하듯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설이 쉼 없이 내렸다.
이훤은 노군동 입구에서 침음을 내뱉었다.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한데 약속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발은 잦아들 줄을 모른다. 심지어 노군동은 낙안봉에 인접하여 사방이 탁 트였다. 그러니 시야에 닿는 온 세상이 하얗게 번들거리기만 했다.
그 순간 안주가 짖었다.
컹!
이훤은 혈륜을 활성화하여 오감을 증폭시켰다.
이내 창룡령의 끝부분에 커다란 항아리를 짊어진 노군이 솟구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
창룡령은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한참을 굴러 떨어질 만큼 좁고, 가팔랐다. 하나 노군은 속도의 변화 없이 갈지자로 몸을 흔들며 전진했다. 아마 저것의 화산의 비전 중 하나인 부운약표(浮雲躍飄)일 터였다. 칼바람을 뚫고, 질주하면서도 움직임은 구름처럼 유유했다. 노군은 그렇게 폭설을 뚫고, 노군동에 발을 들였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어요? 한참 기다렸잖습니까.”
이훤은 오매불망 기다린 사실을 숨기려는 것처럼 투덜거리며 말했다. 노군은 장정의 덩치만한 항아리를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 네 놈이 구해오라고 징징 대던 물품이다. 이런 날씨에 창룡령을 오가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나 알아?”
노군은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동굴에 놓인 물통을 들었다. 한데 마개를 뽑는 순간 미약한 김이 흘러나왔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따뜻한 물 한 잔은 몸을 더욱더 편하게 만들어줬다.
‘흥!’
그렇게 고립된 장소와 생각보다 긴 시간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섞어버렸다. 여전히 조손지간보다는 앙숙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이훤도 알고, 노군도 안다.
이제는 안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나 겉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얼마 후 폭설이 그치고, 잠깐의 고요가 찾아왔을 때 이훤이 원했던 모든 재료가 구비됐다.
“나는 연공을 하고 있을 테니 편하게 준비해라.”
노군은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었다. 안주 또한 꼬리를 흔들며 노군을 따라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
이훤은 한 쪽에 쌓아놓은 재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노군이 지난 두 달 동안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모아놓은 재료였다. 그러나 저 중 칠 할 이상은 시간을 벌기위해 대충 알려준 재료에 불과했다.
솨아아아-
가슴에 손을 대는 순간 빙화초의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당금 강호에는 천하제일인이라고 해도 구할 수 없는 술, 청천빙화주의 주재료가 아닌가. 그러니 세상이 두 쪽 나도 남과 나눌 수 없다고 여겼다. 한데 그런 결심의 반대편에서 어느 순간부터 피어난 마음도 존재했다.
‘하아.’
그렇게 두 달이 또 흘렀다.
그리고 겨울의 맹위도 한풀 꺾여 조금씩이나마 봄을 기대하게 만드는 날씨가 계속 됐다. 화산이 흰 옷을 벗고, 다시 녹빛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그 즈음 이훤은 노군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무슨 일이냐?”
노군은 아침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초절정의 고수나 다름없다지만, 세월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혹독한 겨울보다 생동감 넘치는 봄의 기운을 만끽했다.
반면 이훤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열 달이 흘러도 말씀드린 술은 완성되지 않을 겁니다.”
노군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멈칫했다.
그러나 이훤을 탓하는 대신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죄송합니다.”
이훤은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술을 마시지 못할 뿐 최고의 술을 만들겠다는 마음가짐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노군이다. 그런 사람을 속였으니 이번만은 사과를 해야 했다.
‘언제나 진실하게 술을 대하고자 맹세했다. 한데 나는 저런 사람에게 술을 미끼로 거짓을 약속했어. 술이 걸린 일이라면 나는 끝까지 당당했어야 해.’
하나 그렇지 못했기에 깊이 숙인 고개는 올라올 줄을 몰랐다.
그때 노군의 거친 손이 이훤의 머리를 덮었다.
“고생했다. 육태천화서봉주가 내 손을 떠났을 때 놨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집착에 사로잡혀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일에 너까지 끌어들인 게다.”
“노군.”
“되었다. 이제 되었어. 도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하나 포기하고 돌아서는 순간 보이고, 잡히는 것을 도라 했다. 애초에 술을 즐기지 않는 내가 술을 즐기는 자가 되려고 했으니 처음부터 어긋났으리라. 집착과 미혹에 빠져 허비한 삼십 년의 시간을 끝으로 이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나만의 도라 할 수 있겠지. 비록 염원하던 것은 실패했으나,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련다. 화산의 제자로서 살지 못했으니 이제는 화산의 제자로서······.”
결국 참다못한 이훤이 등 뒤에서 술병을 내밀었다.
노군은 일견하기에도 상서로워 보이는 병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뭐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술입니다.”
“뭐라고?”
이훤은 술을 마실 때의 순수한 표정 그대로 대꾸했다.
“청천빙화주라 합니다.”
노군의 굳은 얼굴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득도하여 초탈한 것처럼 보이던 표정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래, 이거네.’
이훤은 자랑스러웠다.
술꾼에게 술 자랑을 할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 12,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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