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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8화 (28/226)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3)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3)

배고픈 사람에게 떡을 주면 허기가 해결된다. 그러니 술을 잃은 노군에게 술을 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터였다. 하나 육태천화서봉주와 비견할만한 술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술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완성된 후에야 제대로 된 술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시간을 끌기에 이만큼 좋은 핑계가 어디 있으랴.

이훤은 자신이 쓰러져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얌전히 앉아서 노군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술꾼이야 말로 비논리로 논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 중 극에 달한 자가 바로 취마일 것이다.

회귀 전 호사가들은 취마를 평할 때 술로 얽히지 말고, 술을 마시고 있으면 자리를 피하고, 술에 취했다면 유언을 남기라고 했다. 취마의 명예를 걸고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해보려 한다.

‘쩝쩝.’

이훤은 눈앞에 줄지어 선 항아리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노군에게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설득하고, 눈앞의 술을 모두 마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잠시 후 싸늘한 기운이 꽂혀들었다.

“또 훔쳐 마실 궁리를 하는구나.”

이훤은 화북장에서와 달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노군이 내력을 담아 노려보면 모를까, 단순히 적대하는 눈빛만으로는 주눅들 이유가 없다.

술이 걸렸으니까.

“제가 육태천화서봉주를 마셨습니다.”

노군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너, 이 새끼!”

“······.”

“그 술이 어떤 술인지 알고!”

이훤은 멱살을 잡힌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어차피 노군이 정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하늘이 두 쪽나도 피할 길이 없다.

“지금은 실전되다시피 한 천하의 명주, 육태천화서봉주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삼십 년 간 매일 같이 품안의 자식을 기르듯 보듬어주어야 완성된다는 전설의 술이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 훔쳐 마셔?”

“저는 깨진 술이 아까워 마셨을 뿐 훔쳐 마시지 않았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 육태천화서봉주는 정성과 애정으로 만들어지는 술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있었다면 술병이 갈라진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한데 병이 깨져서 술이 새고 있는데 그걸 그냥 둬야 한단 말입니까? 당연히 주인은 세상을 떠난 줄 알았지요. 저는 절까지 한 후에야 그분을 대신해 술을 마신 것 뿐입니다.”

노군은 삼십 년의 고난을 털어내듯 노기를 담아 외쳤다.

“그러지 않아도 그걸 고치러 가던 길이었다. 네 놈이 마시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오시지 그랬습니까? 술은 입안으로 들어가야 제 역할을 합니다. 한데 땅으로 스며들어 냇물에 섞일 때까지 모르셨다면!”

이훤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육태천화서봉주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겁니다.”

“네놈이 왜 그걸 판단해!”

“제가 물을 마셨을 때 섞여든 술의 향이 진득했습니다. 이건 최소한 삼 일 이상 술이 흘렀음을 의미합니다. 노군은 모르셨지요?”

“닥쳐라! 네 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

노군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하나 부들부들 떨 뿐 차마 내리치지 못했다.

반면 이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고, 호흡은 분노한 듯 거칠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늘을 향해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제발 물어라. 물어라.’

그가 본 노군은 성격이 불같고, 급하다.

그렇기에 반응이 조금 느렸다.

하나 잠시만 시간을 주면 결코 대화의 맥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잠깐! 냇물에 섞인 향만으로 육태천화서봉주를 알아냈다고?”

낚였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이훤은 당연하다는 듯 외쳤다.

“진정 술을 즐긴다면 바람에 섞인 향도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미친 짓이 가능할 리가 있더냐.”

노군의 말에 이훤은 눈을 빛냈다.

“저는 주령천의 후계자입니다. 가능합니다.”

주령천(酒靈泉)이란 술꾼들 사이에서 강호의 명문정파에 빗대어 늘어놓는 술주정에 불과했다. 북해빙궁의 소궁주인 북리혜에게 했던 거짓말도 주령천에서 떠올린 논리였다.

- 술의 영혼이 샘솟는 천.

그야말로 술의 모든 것이 집대성되어 전승된다는 허무맹랑한 조직의 명칭이었다.

“하아, 이 놈이 입만 열면 거짓말이로구나.”

이훤은 당당했다.

세상 누구라도 해도, 심지어 천하제일인이 말해도 농담으로 들을 이야기가 아닌가. 하나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이훤이 하면 진실이 될 터였다.

“제 나이가 몇 살입니까?”

“뭐라?”

“이곳에 있는 모든 술의 제조법과 효용에 관하여 말씀드린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물론 저도 주령천의 비의를 모두 체득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술을 마셨다고 해도 저보다는 모를 겁니다. 시험해보시겠습니까?”

멱살을 쥔 손에서 느껴지는 분노는 그대로다.

아닌 말로 이훤이 진짜로 주령천의 후계자라고 해서 사라진 술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제 방점을 찍을 차례였다.

“제가 육태천화서봉주보다 더 귀한 술을 만들어드리지요.”

거래에는 거래로 응수한다.

아니나 다를까 노군은 멱살을 쥔 손에서 슬쩍 힘을 빼며 물었다.

“뭐라고?”

“심지어 육태천화서봉주처럼 삼십 년 동안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더도 말고 일 년! 일 년이면 술이 완성됩니다. 어차피 노군께서 저를 죽일 게 아니라면 술도가에 항아리 하나 더 놓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술과 함께였기에 두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많은 술과 함께 하고 있는 현실에서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증명하지 못하는 주장이야 말로 공염불에 불과하지요.”

“좋다. 지금부터 시험을 해보마.”

그 후로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술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틀린 것도 있었다. 하나 이훤이 지니고 있는 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담은 수십 년 동안 술을 공부한 이도 따르지 못할 만큼 방대할 터였다. 결국 노군은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나, 내키지 않는 한 마디를 내뱉어야 했다.

“재료를 말해라.”

이훤은 기다렸다는 듯 수백 가지의 재료를 거론했다.

그 중에는 당연히 빙화초를 녹여 만들 청천빙화주의 재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술부터 만들고 봅시다.’

*

이훤이 노군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을 무렵 장성 인근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설룡당주는 여전히 북리혜를 쫓는 중이다.

야음을 틈 타 도주한 그녀의 행적이 전해졌다.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호위대 중 한 명이 꾸준하게 흔적을 남긴 탓이다. 하나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포위망을 구성했기에 합류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두 개조는 행방이 묘연하기까지 했다. 하여 삼 일째 되는 날 겨우 북리혜가 머무는 마을 근처에 이르렀다.

“이상하군. 잘하면 장성을 넘을 수 있을 시간이야. 한데 장성을 앞두고 멈추다니.”

“애들을 풀까요?”

당주는 정찰을 내보내려다 미간을 좁혔다.

마을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염충이 아닌가.”

소궁주 북리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호위대주가 먼저 모습을 보인 게다.

“오국표!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안다.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라.”

“당주, 함정일 수 있습니다.”

설룡당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북리혜의 수하들은 십여 명에 불과했고, 검을 섞을만한 자는 호위대주 염충이 전부였다.

“오랜만이군.”

“우리가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아가씨께서 부르신다. 와서 인사할 용기가 있느냐?”

염충이 설룡당주의 고민을 해결해줬다.

“모두 오라. 아가씨께서 술 한 잔씩 돌리시겠단다.”

객잔은 텅 비어 있었다.

설룡당주는 북리혜의 맞은편에 앉은 후 표정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장성 근처의 객잔이라면 상인과 표사들로 붐벼야 했다.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북리혜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아가씨가 원래 술을 마셨던가?’

잠시 후 그녀가 설룡당주의 잔에 술을 따랐다.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모습.

예전의 모습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지금은 확실한 성장한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다.

“백 일 사이에 많이 변하셨군요. 예전의 앳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벼운 도발이었다.

“당주 덕분이네요. 서로 윗사람들 때문에 고생을 하는 처지이니 원망은 하지 말자고요.”

설룡당주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녀가 병약한 오라비를 따르는 것처럼 설룡당주는 구룡전주를 따랐다. 구룡전주는 빙궁 양대 무력단체 중 한 곳의 수장이다. 한데 북리혜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신을 회유하려는 듯했다.

“제가 빙궁에 뿌리가 없어 늘 충심을 의심받지만, 줄을 갈아탈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제게 술을 하사하셨으니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북리혜가 입꼬리를 올렸다.

“줄을 갈아탈 수밖에 없다면 어쩌실 건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는 설룡당주를 향해 작은 함을 내밀었다.

“선물. 열어봐요.”

설룡당주는 함을 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빙령단입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먹어도 되요. 빙궁의 궁도라면 누구나 알 수 있지요. 이것의 진위 여부를.”

심지어 함 안의 빙령단은 여섯 개였다.

중간 크기의 빙령단과 작은 것 다섯 개.

“조장의 숫자가 줄었네요. 두 개가 남을 테니 당주가 알아서 처리하세요.”

설룡당주는 북리혜의 자신만만한 언사를 들으면서도 빙령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빙궁의 궁도들에게 빙령단이란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자소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약효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빙공을 끌어올리는데 빙령단만한 것이 없었다.

“실전된 이것이 어째서······.”

“제가 백 일 동안 쫓겨만 다녔다고 생각하시나요?”

“설마 빙정을 다룰 줄 알게 되신 겁니까?”

북리혜는 대답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설룡당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빙령단에서 느껴지는 기운만 해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빙궁의 권력 구도가 완전히 뒤집히는 그림이 그려졌다. 빙령단의 복원이 알려진다면 중도파는 무조건 줄을 갈아탈 것이다. 심지어 반대파에서도 이탈이 적지 않을 터였다.

“제게 뭘 원하십니까?”

“먼저 돌아가세요. 구룡전에 속한 아홉 당주 중 네 명은 뿌리가 없어요. 그들을 회유하세요. 저는 중도파를 설득하여 차기 궁주를 만들겠어요.”

설룡당주는 염충을 바라봤다.

“먹었나?”

염충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시험해 봐도 좋다. 너희 서른 명을 한 날 한 시에 보내주는 것도 가능할 만큼 강해졌으니까.”

설룡당주는 크게 숨을 내쉰 후 몸을 일으켰다.

“이걸 먹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북리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설룡당주가 의자를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북리혜의 반대편, 세 명의 호위가 갑작스런 공격에 검을 겨눴다. 하나 당주의 기습을 막을 실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당주의 검이 가운데 있던 호위의 목을 쳤다.

촤악!

북리혜는 웃었다.

“고마워요. 당주가 어쩜 그리 우리를 잘 쫓아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의문이 풀렸네요.”

설룡당주는 그제야 빙령단을 복용했다.

일각 후 그가 눈을 떴을 때 한 차례 한기가 몰아쳤다.

빙공의 성취가 최소한 두어 단계는 올라간 듯했다.

“약효를 잘 받는군요.”

북리혜가 술을 마시며 내뱉은 농담이다.

“아가씨께서는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

“글쎄요. 술에 눈을 떠서 그런가?”

설룡당주는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설룡당주 오국표, 남은 생을 아가씨께 걸겠습니다.”

북리혜는 술주정뱅이 도둑놈을 떠올리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진짜 간다! 다시 볼 때까지 살아 있어라.’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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