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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7화 (27/226)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2)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2)

두 사람은 의견을 교환한 후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장성(長城) 안에서 밖을 새외(塞外)라고 하듯 밖에서도 안을 보고 새외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노인과 소년을 살해하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없다시피 했다.

“이랴!”

그때 노군(老君)이 관도 한복판을 막아선 채로 일갈을 내질렀다.

“멈춰라!”

싸늘한 바람은 한순간 갈 곳을 잃고, 와류(渦流)를 그리며 비산했다. 그 여파는 마치 거대한 통로가 되어 조원과 말을 덮쳤다.

조원들은 내공을 버텼지만, 말은 미쳐 날뛰었다.

그들은 고삐를 당기며 허벅지에 힘을 줬으나, 결국 말을 버려야 했다. 말을 버리고 뛰어오르면서 칼을 뽑는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나 관도를 막고 있던 노군은 어느새 지척에 이르렀다. 그가 양 손을 휘돌리는 순간 경풍이 일며 소매가 말렸다. 앙상한 손목이 드러나는 순간 갈고리 같은 손이 설룡당도들의 손목을 낚아챘다.

“엇!”

노군은 손목을 당겨 균형을 잃게 만든 후 두 사람을 내리꽂았다.

콰당!

그 사이 설룡당의 삼 조와 사 조가 지척에 이르렀다.

설룡당의 삼 조장은 미간을 좁혔다.

노인과 소년에게 접근할수록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짜증 섞인 일갈을 내질렀다.

“베라!”

그 순간 조원들은 저마다 말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기에 포위망을 구성하는데 어긋남이 없다.

노군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진짜인가 보군.”

“제가 진짜라고 했잖아요.”

이훤이 밉살맞게 대꾸를 하자, 노군은 코웃음을 쳤다.

“흥! 떨어져라. 너까지 신경 쓰지 않으련다.”

노군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배려였다. 이훤은 기다렸다는 성큼 물러났다. 이제 양측이 싸움에 돌입하면 은근슬쩍 자리를 피할 요량이었다.

“안주야! 저 쓸데없는 놈을 지켜줘라.”

안주가 다가와 혀를 빼물고 헐떡거렸다. 이제 와서 친한 척을 하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저런다고 해도 평생 쓰다듬어 주지 않을 것이다.

이훤은 가슴을 매만졌다.

빙화초가 느껴지는 순간 모든 짜증이 눈 녹듯이 자취를 감췄다.

‘흐흐, 빙화초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아!’

마치 삼류 도둑이 할 법한 생각이었지만, 짧은 시간 만들어낸 계획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하나 노군이 검을 뽑는 순간 희망은 좌절로 바뀌었다.

스릉-

손잡이의 매화 문양이 뭉개진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사용한 검일 터였다. 하나 석양이 검신을 비출 때마다 불그스름한 잔영이 일렁였다. 검을 저렇게 관리하는 사람의 실력이 퇴색될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노군이 검을 한 차례 휘돌리며 기수식을 취하는 순간 귀를 찌를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찌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검명(劍鳴).

노군의 내공이 심후함을 증명하듯 끊이지 않고 오랫동안 울었다. 설룡당의 당도들이 포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다가 멈칫할 정도였다.

“감히! 화산의 영역에서 양민을 학살하다니!”

쾅!

노군이 진각을 밟는 순간 흙먼지가 칼바람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노군이 튕겨나갔을 때 이훤은 한순간 탄성을 흘렸다.

‘보법마저 완벽하다!’

그는 혈륜을 통해 기의 흐름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혈륜의 성취는 고작 일 성이지만, 일류의 무인도 두렵지 않았다. 하나 노군이 움직이는 순간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저 설룡당의 당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튕겨나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오죽 했으면 그 사이를 노려 도망치려던 계획마저 잊었다.

촤라라라라라라락!

노군의 머리 위로 십여 개의 검이 동시에 내리꽂혔다.

“북해의 잡졸 따위가!”

검 끝에서 피어난 한 줄기 기운이 피어났다.

거미줄처럼 검을 칭칭 감더니 한순간 자색으로 번뜩였고, 그 순간 모든 검이 쪼개져 주인에게 돌아갔다.

푹푹푹푹푹푹!

단 한 수였다.

노군이 검을 늘어트렸을 때 두 발로 서 있는 자는 삼 조장과 사 조장뿐이다.

“끄으윽.”

삼 조장은 반쯤 잘린 목을 양 손으로 막아봤지만, 이내 무릎을 꿇고 꼬꾸라졌다. 사 조장은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마지막 힘을 짜내 달려들었다. 하나 노군이 엄지로 검지를 튕기는 순간 이마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리며 튕겨나갔다.

“흥!”

노군은 검을 갈무리한 후 미간을 좁혔다.

“너 뭐하냐?”

이훤은 안주와 찰싹 붙어선 채 말했다.

“제가 원래 개를 좋아해서요.”

하나 속으로는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빌어먹을! 개새끼가 지켜주는 거야? 감시를 하는 거야?’

*

“소면 두 그릇과 차를 내오게.”

노군의 말에 점소이는 대충 탁자를 훔친 후 주방으로 향했다.

“노군, 술 한 잔 하셔야지요?”

이훤이 슬쩍 물었다.

육태천화서봉주를 찾기 위해 며칠 동안 안주와 헤맸던 사람이다. 그만큼 술에 집착한다면 하루 종일 술병을 물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터였다.

“됐다. 생각 없다.”

이훤은 이해했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면 상심하는 법.

노군도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저라도 한 잔 하는 것이······.”

이훤은 노군의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보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예, 그래도 어른과 함께 있는데 혼자 마실 수는 없지요.”

“너, 아직 범인이다. 나를 더 이상 편하게 대했다가는 가만 두지 않을 테다.”

노군이 윽박을 지르듯 인상을 썼다.

이훤은 결국 소면 그릇에 얼굴을 묻고, 투덜거려야 했다. 술은 술로서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니 술을 땅에 버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 마셨다면 그 자체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몇 번씩 경험하는 일이 아니던가. 강호초출처럼 술 한 병에 마음 상해하는 모습을 보니 의아하기만 했다.

‘하긴 나처럼 즐기는 자보다 주도가 높기란 쉽지 않은 법이지.’

결국 대충 밥을 먹은 후 다시 뒷목을 잡혔다.

그렇게 두 시진 만에 화산을 목전에 뒀다.

“아무래도 제가 초도각 소속이다 보니 각주에게 가서 허락이라도 받아야······.”

“시끄러운 놈!”

노군은 짜증 섞인 한 마디와 함께 수도를 내리쳤다.

퍽!

*

눈을 뜨기도 전에 알았다.

이곳이 천국임을 말이다.

온갖 술 냄새가 자신을 알아봐달라는 듯 코끝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건 소흥주로구나. 제대로 증류를 한 죽엽청도 있고, 이곳이야 말로 신선이 산다는 도원경이로구나.’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눈을 떴다. 주변에 가득한 술항아리에 다시 한 번 마음이 평온해졌다. 하나 그 사이로 돌아다니며 내용물을 확인하는 노군을 보고 있자니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

이훤은 눈을 부비고 다시 한 번 노군을 살폈다.

‘왜 코하고 입을 가리고 있지?’

술꾼에게 이곳은 지상낙원이다.

한데 노군은 흘러내리는 천을 고쳐 맬 때마다 욕설을 내뱉었다. 마치 이곳에서 형벌을 받는 사람처럼, 혹은 술에 진절머리를 내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노군, 혹시 술 못 마셔요?”

그래, 처음부터 어딘가 모르게 미심쩍었다.

하지만 범인으로 몰린 탓에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노군에게서는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술꾼과 냄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술꾼에게 냄새란 곧 훈장이었고, 명예였다. 그뿐이 아니다. 이훤을 도둑으로 몰아붙일 때마다 내세우는 증거라고는 안주의 후각이 전부였다.

‘하아.’

지금껏 노군과의 대화가 뇌리를 스쳐갔다.

대화 중 술을 비급이나 보검으로 바꿔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으리라. 무엇보다 진정한 술꾼이라면 이훤을 처음 보는 순간 술이 남아 있는지를 물어야 했다. 삼십 년 동안 빚은 술을 강탈당했으면 다 마셨는지부터 확인해아 하지 않겠는가.

이훤은 못들은 척 술항아리를 살피고 있는 노군을 향해 한 번 더 물었다.

“노군, 진짜 술을 못 드시는 건 아니죠? 인간의 가장 큰 즐거움을 포기한 건 아니겠죠?”

“닥쳐라! 이걸 다 확인할 때까지 말 걸지 마.”

항아리의 술이 익어가는 걸 보면 자식이 무탈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즐거울 터였다. 하나 노군은 연방 투덜거리며 힘겹게 주변을 돌았다.

‘도대체 무슨 연유지?’

이훤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혈도를 잡힌 것은 아니었기에 운신에는 무리가 없었다. 솔직한 속내로는 노군의 과거사보다 코끝을 찌르는 술 냄새가 좋았다.

“쓸데없이 건드리지 마라!”

이훤음 멈칫했다.

하나 노군은 그 말을 끝으로 자기 할 일에 집중할 뿐이다. 그렇기에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노군동 내부를 둘러봤다. 도가의 사대동천 중 노군동은 가장 외진 곳에 위치했다. 화산에서 가장 험준한 봉우리인 낙안봉(落雁峰) 바로 아래 위치했으니 범인은 접근조차 어려울 터였다.

‘서현동하고는 비교도 안 되네.’

이훤은 백여 명이 들어서도 남을 만큼 넓은 동굴 내부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한겨울에도 온기가 적당했고, 퀴퀴한 냄새는 없다시피 했다.

‘이건 칠 년 된 소흥주고, 호오! 이건 십 년이 넘은 관음주로구나. 이건 무슨 술이지?’

항아리마다 표찰이 붙어 있었고, 술의 이름과 제조 연월일과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그렇기에 낯선 냄새와 술의 이름을 조합하는 것이 가능했다.

즐거운 것도 잠시였고, 이내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그가 노군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삼십 년 가까이 술을 빚었고, 매화검주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화산파를 떠났다는 점이 전부였다.

회귀 전에도 매화검주의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있다.

본래 장문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 갑작스레 화산을 떠나 노군동에 은거한 후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이다. 당시에는 미친 도사 놈들의 속내를 어찌 알겠냐고 술안주 삼아 비웃었을 뿐이다.

한데 진실은 알려진 것과 달랐다.

노군은 술을 마시지 못하면서도 술을 빚는다. 그리고 술을 싫어하면서도 누구보다 꼼꼼하게 술을 관리했다. 동굴 한쪽에 놓인 서가만 봐도 그렇다.

매화검주의 서가지만, 경전이나 비급보다 술에 대한 책이 더 많았다. 표제만 봐도 하나같이 술을 주조하는 방법이나, 술의 역사를 기록한 잡서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술을 배우고자 한 듯 서책은 너덜너덜했다.

‘술을 글로 익힌 건가?’

이훤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하기 싫은 일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제대로 된 대가라도 받아야 억지로 할 수 있을 터였다. 한데 노군은 무엇을 바라고 수십 년 동안 매화검주라는 영광된 자리를 버리고 술을 빚었단 말인가.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저렇게까지······.’

이훤은 그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놈! 조용히 하라니까. 그거 함부로 건드리지 마. 찢어지면 네 놈을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릴 것이야!”

저 불 같은 성격을 보라.

화산의 매화검주였으면 온갖 칭송을 들으며 호의호식할 수 있을 터였다. 한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술을 빚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거래. 거래다. 뭔가가 있어!’

불같은 성격을 억누를 가치가 있는 거래.

매화검주를 차버리고 은거할 만한 거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할 거래.

삼십 년이라는 시간도 아깝지 않은 거래.

이훤은 눈을 빛냈다.

‘그거다! 누군가에게 술을 주고,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거야.’

하나 눈을 빛낸 것도 잠시였다.

이훤은 노군의 상황을 자신에게 대입해봤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삼십 년 동안 술을 마셨으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을 터였다.

하나 속내와 달리 입꼬리는 한껏 치솟았다.

‘이건 먹힌다!’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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