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6화 (26/226)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라.

맹염채가 스스로 구멍이 되어줬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노군에게 물었다.

“헉! 노군,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것입니까?”

“그렇다.”

“정말 저 녀석이 그걸 마셨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노군은 날 선 말투로 대꾸했다.

맹염채의 놀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거듭된 질문에 짜증이 치밀었으리라. 반면 이훤에게는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벌어준 고마운 질문이었다.

‘술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해.’

누가 만들었고, 누가 가졌고, 누가 마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술을 얼마나 맛있게, 즐기며 마셨는지가 중요했다. 맛있게 마신 술은 취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난 진짜 맛있게 먹었어.’

죽기 전에 마셨던 취금향만큼이나 맛있었다.

그러니 이훤은 죄를 짓지 않은 셈이다.

자신만의 논리로 한참동안 중무장을 했다. 그 시간은 맹염채가 벌어줬다. 그리고 그 결과 떨림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제 노군 앞에 선 이훤은 도둑이 아니라 초도각의 평범한 문도였다.

자!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이훤은 슬쩍 노군을 살폈다.

화산파가 아무리 쇠락했어도 매화검주라면 분명 초절정의 고수이리라. 기본 정보 외에도 맹염채로 인해 몇 가지 정보를 추가할 수 있었다.

- 노군은 화산파에 머물지 않는다.

-노군의 행색을 보면 오랫동안 홀로 산 듯하다.

- 노군은 말이 빠르고, 발성이 좋지 않다.

오랫동안 산속에서 혼자 살아온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이성보다 감성이 앞설 터였다. 장단점을 생각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한 후에야 노선을 정할 수 있었다.

이훤은 평소와 달리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기······. 화산의 큰 어른이시라고요?”

그는 순박해 보일 만큼 여러 차례 눈을 깜빡이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옛 기억을 떠올렸다.

취마나 광야제 때의 기억이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노예로 끌려가 어딘지 모를 땅굴을 파고, 노비로 팔려가 악랄한 주인에게 매질을 당하며 살았다. 살기 위해서 아첨과 변명을 일삼던 구질구질한 때였다.

“일단 너는 좀 빠져봐.”

노군이 맹염채를 밀치고 다가왔다.

그러자 이훤은 기다렸다는 듯 절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 저는 초도각의 관도 이훤입니다. 화산의 큰 어른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을 하는 것처럼 어정쩡하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화산파의 문도도 되지 못한 초도각의 천덕꾸러기 관도처럼 보였다.

“허어.”

노군은 자신도 모르게 김빠진 한 숨을 내쉬었다.

시골에서 농사나 짓게 생긴 순박한 녀석이 범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힐끔 안주를 쳐다봤다.

컹!

단언컨대 범인이란다.

노군은 미간을 좁혔다.

그가 장문인과 함께 육태천화서봉주를 묻은 게 벌써 삼십 년 전이다. 그리고 십 년 전부터 안주와 함께 열흘마다 한 번씩 술을 묻어놓은 장소를 순찰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방금 만난 이훤보다 안주의 코를 신뢰하는 것이 당연했다.

“네가 내 술을 마셨지?”

불문곡직하고 본론만 꺼내는 모습을 보니 예상대로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는 화북장에서 내어준 술만 마셨는데요.”

“그거 말고! 내가 숨겨둔 술을 마시지 않았더냐? 그게 무슨 술인지 아느냐?”

노군의 추궁에 이훤은 손사래를 쳤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네놈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나거늘! 어디서 거짓 수작을 부리느냐?”

안주가 호응하듯 짖었다.

컹!

“제가 술을 좋아하니까 술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닥쳐라! 안주는 술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한데 네놈이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해?”

이훤으로서는 진정 놀랄 일이다.

강호에 기인이사가 많고, 별의별 일이 다 있다지만, 개가 술 냄새를 구분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안주가 좀 특별하기는 하지요.”

맹염채가 추임새를 넣었다.

노군은 다시 기세등등하게 일갈을 내질렀다.

“심지어 십 년 넘게 육태천화서봉주의 냄새를 맡았다!”

맹염채는 유건평과 정표의 동의를 구하듯 탄성을 흘렸다.

“허허! 역시 안주로다. 사형과 안주의 주종 관계는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럴 리가. 그 술 냄새는 최근 들어 퍼졌을 텐데······.”

노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제가요?”

“그래, 방금 뭐라고 했잖아.”

이훤은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육태천화서봉주는 천하에 손꼽히는 명주답게 특유의 향을 풍겼다. 하나 특별한 제조법으로 만든 술답게 완벽하게 밀봉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안주가 설령 냄새를 구분할 수 있고, 맡았다고 해도 최근의 일일 터였다. 한데 자신도 모르게 술에 대한 지식 자랑을 했으니 한순간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아! 옛날 버릇 나왔네.’

한데 맹염채가 그런 노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사형의 술에 대한 애정이야 말로 안주가 술을 구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얘기였지요. 그만큼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하하하!”

“너 말고!”

노군은 얼굴을 붉히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술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남의 술을 탐할 만큼 못된 녀석은 아닙니다. 심지어 저는 노군께서 어디 계시는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크흠, 대사형, 그도 그렇습니다. 저 녀석은 그저 초도각 정무관의 일개 관도라고요. 간도 크게 노군동을 얼쩡거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훤은 속으로 맹염채를 응원했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은혜를 갚으리라.

최소한 먹다 남은 술이라도 몇 잔 따라줘야겠다.

그때 예기치 못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이대제자인 유건평이다.

“사백께 사질, 유건평이 인사드립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아이들이 어디 갈 일은 없으니 일단 맹 사숙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사형을 뵌 것도 오랜만인데 차 한 잔 하시지요. 화산의 사형들은 제가 혼자 대사형과 담소를 나눈 사실을 알고 땅을 치며 부러워할 겁니다.”

이훤은 한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유건평이 은근슬쩍 끼어들어 맥을 끊더니 자신을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마치 네가 술을 훔쳐 마신 것을 알지만, 더 큰 그림을 위해 지금은 넘어가준다고 내색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나를 뺏길까봐 초를 치려는 건가?’

만에 하나 그렇다면 꿈에 나올까 두려운 집착이다. 지켜보는 것만 해도 소름이 돋는 지경이다. 한데 자칫하면 유건평이 선점하겠답시고 제자로 들일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앞에는 호랑이, 뒤에는 늑대인 형국.

고립무원이란 바로 이런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훤은 이 와중에도 육태천화서봉주와 비견할만한 청천빙화주는 생각지도 않았다. 실상 청천빙화주는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 지금 시점에서는 천하에 존재하지 않는 술이 아닌가. 하지만 그걸 남과 나눌 바에는 노군의 고문을 당하거나, 유건평의 제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

그때 노군을 중심으로 일진광풍이 일었다.

쾅!

“답답하구나! 이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훤은 노군이 기세를 떨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산속에 혼자 틀어박혀 살던 초절정고수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골칫덩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다를까 노군은 유건평을 밀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나랑 조용히 얘기 좀 하자.”

그 말만 내뱉고는 대뜸 뒷목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어! 납치는 범죄입니다만.”

하지만 노군은 개의치 않았다.

“술 훔치는 것도 범죄다!”

그리고는 이훤의 뒷목을 잡은 채 뛰어올랐고, 천막의 지지대를 밟고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허허, 지금 당장 사형을 따라갈 수도 없고······.”

맹염채의 부러움 섞인 한 마디였다.

“크큭, 사숙, 저러다가 대사백께서 저 놈을 제자로 거두는 건 아닐까요?”

정표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정표야. 대사백께서는 십 년 전 화산을 떠나실 때 장담하셨다. 결코 제자를 들여 화산의 배분을 망가트리지 않겠다고 말이야.”

유건평은 아직 기회가 남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노군과 엮이는 모습을 본 이후 더욱 불타올랐을 정도였다.

*

파팟!

이훤은 생전 처음 겪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초절정 고수의 경공은 준마보다 빠르다. 범인은 강풍이 분다고 생각할 만큼 형체를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분명 회귀 전의 이훤은 노군보다 강했다.

하나 절름발이 신세로 인해 제대로 된 경공을 펼쳐본 적이 없다.

‘하아, 빠르기는 진짜 더럽게 빠르구나.’

주변의 풍광은 속도가 빨라질수록 단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보니 복잡한 마음이 잠시나마 맑아질 만큼 상쾌함이 밀려왔다.

컹! 컹!

이훤은 슬쩍 뒤를 돌아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개가 저리 빨라?’

개한테도 밀린 인생임을 자각하는 순간 언제 상쾌했냐는 듯 절망이 몰려왔다. 혈륜은 상고의 절학이나, 작금의 성취가 너무 미약했다. 초절정 고수에게서 도망치려면 최소한 오 성 이상은 되어야 시도라도 할 수 있을 터였다.

‘젠장! 술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네에게 납치당하는 신세라니······.’

그때 반대편에서 빠르게 질주하며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모두 말을 탔고, 복장은 통일 됐으며 절제된 예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들의 복장이 더없이 익숙했다.

“어? 어!”

지원군이다. 구세주다. 미끼였다. 동아줄이다.

이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설룡당, 설룡당입니다!”

한데 노군은 의외로 개의치 않았다.

생각해보니 수십 년 동안 강호를 등지지 않았던가.

“북해빙궁의 무인들입니다.”

“흥! 수작 부리지 마라. 북해빙궁의 궁도가 어째서 섬서성을 돌아다닌단 말이냐.”

회귀 전 이훤과 가장 많이 싸웠던 자들이 바로 정파였다. 사마외도는 능력이 부족하면 꼬리를 말고 도망쳤지만, 정파는 귀찮을 정도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다루는 방법 또한 숙달된 상태였다.

“저들이 섬서성에 들어와 양민을 죽이고, 수탈하여 피해가 컸습니다. 이번에 화산파와 종남파가 함께 모여 화북장주와 회합을 가진 이유가 바로 저들 때문이라고요.”

진실과 거짓말을 적당히 섞은 후.

정파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역린을 건드렸다.

바로 명분(名分)과 의협(義俠)이다.

“뭐라고?”

노군은 속도를 늦췄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진위 여부를 이 자리에서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이훤은 다시 한 번 진실과 거짓을 버무린 후 모략과 이간질에 힘썼다.

“저들은 빙궁의 반도입니다. 화북장주는 오래 전 무림맹 시절 장성 쪽에서 빙궁과 교류했답니다. 하여 빙궁에서 반도들을 처리하기 위해 화북장주와 접선했고······.”

이훤은 말끝을 흐렸다.

노군의 눈매는 역팔자로 치솟았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조용히 해라. 내가 확인하겠다!”

그는 이훤을 내려놓고 관도의 한복판을 막아섰다.

그리고 전방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무인들을 향해 외쳤다.

“멈춰라!”

*

설룡당 삼 조와 사 조의 임무는 북해빙궁의 소궁주, 북리혜의 신병 확보였다. 그렇기에 거미줄처럼 경계망을 펼쳐놓고 목표가 접근하기만을 기다리던 중이다.

한데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화북장주가 금분세수를 연기했고, 소궁주의 신병에 변화가 생겼단다. 하여 만사를 제쳐두고 설룡당주와 합류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다.

“앞에 뭐냐?”

“노인입니다. 아, 애도 있군요.”

조장은 대수롭지 않게 명령했다.

“정찰.”

조원 두 명이 말의 옆구리를 후려치며 속도를 올렸다.

“이랴!”

잠시 후 싸늘한 칼바람 사이로 노인과 소년, 이제는 털북숭이 개까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노인은 기골이 장대한 것을 제외하면 눈여겨 볼 부분이 없다. 삼십 년 동안 산속에서 술을 빚은 노군이다. 겉으로 보면 거지나 마찬가지였다. 이훤 또한 화산파의 무복이 아니기에 또래의 소년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안주가 땅에 끌릴 만큼 기다란 털로 인해 시선을 독차지할 정도였다.

“그냥 밟아버리자.”

“그래.”

< 11, 납치는 범죄입니다.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