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영약보다 술이지. (5) >
10, 영약보다 술이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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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웅이 물었다.
“오늘은 술 안 마셔?”
이훤이 눈을 흘기자, 그는 황급히 사마충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사마충이 시켰다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사마충은 그런 포대웅을 밀어낸 후 눈짓을 했다. 한데 포대웅은 그걸 또 알아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술 안 마실 거면 같이 수련하자는데.”
포대웅은 덩치만 믿고, 까불거리는 녀석이라고 여겼다. 몇 대 때려준 이후에는 고분고분해져서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데 사마충과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귀엽게 노네. 이러다 정분나겠다. 이놈들아. 가!”
이훤은 벌레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사마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포대웅은 그를 따르다 슬그머니 한 마디를 건넸다.
“용무관도들하고 수련할 거야. 요즘 충이랑 걔네들이랑 다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퍽!
이훤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에게 있어서 초도각이란 차별과 좌절의 산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돈 있는 자에게 밀리고, 자질이 좋은 녀석에게 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억울하더라.
한데 지나고 나니 화산파만큼 편한 곳이 없었다.
삼시세끼 밥이라도 주는 것이 어디던가.
심지어 대단한 검법은 아니지만, 표사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무공까지 가르쳐줬다.
당시 화산파 문도들의 본심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관도들은 하산한 후에야 초도각의 소중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늘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강호는 능력 없는 자를 벌레 취급하고, 파리 목숨처럼 여겼다. 사마외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정파 내에서 버젓하게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강자존(强者存).
도의(道義), 법규(法規), 인예(仁禮)를 떠나 힘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상을 강호라 했고, 무림이라 했다.
정의를 부르짖기 전에 힘을 갖춰야 하는 세상.
이훤은 가슴을 두드렸다.
품안의 옥비녀로 만든 청천빙화주(淸天氷花酒)가 그 힘을 줄 것이다. 본래 초도각에 머물 기간을 일 년 정도로 잡았다. 하나 계획대로 이뤄진다면 두 달 정도면 족히 완성품이 나올 터였다.
‘초봄에 마시면 딱이다.’
이훤은 괜스레 키득거리며 웃었다.
청천빙화주는 빙정으로 만들었으니 극음(極陰)의 기운이 가득했다.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가 실수로 마시기라도 한다면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혈맥이 굳고, 오장육부가 얼어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러니 무림맹주조차 그것을 핑계로 몇몇에게만 청천빙화주를 나눠줬으리라.
하나 이훤에게는 한여름에 찬물을 마시는 것만큼 기분이 좋을 터였다.
혈륜(血輪)은 곧 극양(極陽)을 의미했다.
회귀 전 이훤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양강지기의 최고봉이라는 소림의 범천반야공이나 무당의 순양무극신공에 뒤지지 않았다. 화산이야 음유한 무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애초에 비교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니 한 시라도 빨리 청천빙화주를 만들어서 벌컥벌컥 마시고 싶을 뿐이다.
‘언제 돌아가려나?’
이훤은 입맛을 다셨다.
화북장주의 금분세수를 끝내고 회합마저 마무리된 후에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또 며칠이 미뤄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던 중 불현 듯 소궁주가 떠올랐다.
‘잠깐! 소궁주는 돌아간다고 했잖아. 그러면 무림맹에 갈 일도 없고, 화산파와 종남파와 의논할 이유도 없지.’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잘만하면 금분세수를 끝내자마자, 바로 화산으로 돌아갈 듯했다. 어차피 화북장주 은호탁이 화산파를 불러들인 이유는 소궁주의 안위를 논의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해야 복을 받는 거지.’
그때 천막 입구의 발이 걷히며 누군가 들어섰다.
예기치 못한 손님이다.
소궁주는 방갓을 벗고, 이훤을 내려다봤다.
“손님이 왔으면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닌 가요?”
“초대한 적 없는데.”
빙령단을 만들어줬기 때문일까.
그녀의 언행에서 적개심이 완전하게 사라졌다.
하나 이훤의 퉁명스런 한 마디를 듣고는 대뜸 침상에 걸터앉았다. 이상한 부분에서 승부욕을 보이는 모습이 또래의 아이 같아 귀여웠다.
“무슨 일이지?”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요. 오늘밤 빙궁으로 돌아갈 거예요.”
“금분세수도 보지 않고?”
소궁주는 빙긋 웃었다.
하루 사이에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화북장주께서는 오늘부터 앓아누우실 거예요. 금분세수는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미뤄지겠지요.”
이훤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 너 때문에 억지로 하는 금분세수가 맞았네.”
“웃지 마요. 저 때문에 불명예까지 감수하신 분이랍니다. 그분의 인생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요. 당신도 강호의 후배로서 예의를 갖춰줘요.”
“그래도 이건 너무 재밌잖아. 적당히 시간이 흐르면 금분세수를 거론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 쯤 자연스럽게 복귀하시는 건가?”
“그러실 거예요.”
“회합은?”
소궁주는 미간을 좁혔다.
처음에는 술주정뱅이 도둑놈인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제가 돌아가면 그분들께서 고심하실 이유도 없지요.”
이훤은 눈을 빛냈다.
“좋았어. 그럼 바로 돌아갈 수 있겠네!”
소궁주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이훤의 말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게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고마웠어요. 빙궁이 안정화된다면 언제고 반드시 은혜를 갚으러 올 게요.”
이훤은 상체를 일으켜 소궁주를 마주봤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후훗, 어떻게 갚아야 할지는 알겠지?”
술이다. 술!
태곳적부터 좋은 술로 은혜를 갚는 건 상식이 아니던가.
소궁주는 몸을 슬쩍 뒤로 빼며 말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짜증이 날 정도예요.”
“됐어. 그럼!”
이훤은 침상에 털썩 누웠다.
소궁주 역시 용무를 끝낸 듯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천막을 나서며 눈매를 찡긋거렸다.
“아! 나는 북리혜라고 해요. 기억해둬요.”
아무래도 감사 인사는 핑계였고, 이름을 알려주러 온 듯했다.
이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천막 내에 남은 북리혜의 잔향을 밀어낸 후 혀를 차며 말했다.
“어린 녀석이 치명적인 척하기는.”
화북장 인근이 소란스럽다.
장주인 은호탁이 금분세수를 준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피를 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동안 먹고, 마신 것이 있으니 사람들은 장주의 안녕을 빌었다. 방패막이로 삼기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뿌린 것이 다른 의미로 돌아온 셈이다. 그 결과 금분세수를 취소한 것에 대한 반발은 없다시피 했다.
“좋은 날도 이제 끝이군.”
“그래도 며칠 즐거웠다.”
“옆 동네에 무슨 학사가 낙향한다네. 잔치를 연다니 거기라도 가봐야겠군.”
“학사? 쳇! 풀이나 잔뜩 늘어놓겠지.”
한데 그 와중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화북장은 삼 일 동안 술과 고기를 제공하겠다고 선포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에 대한 예의와 장주의 쾌유를 빌어달라는 부탁을 명분으로 삼았다.
술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불야성은 계속됐다.
하나 화산과 종남은 달랐다.
“우리는 삼경을 기해 화산으로 돌아간다.”
며칠 만에 만난 맹염채는 처음과 그대로였다.
하나 표정에는 회합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북리혜는 빙령단에 모든 걸 걸었고, 그녀의 생사에 따라 빙궁의 권력구도가 재편될 터였다. 그러니 맹염채는 화산으로 돌아가 장문인과 새외의 동향을 논의하고자 했다.
이훤은 남몰래 환호성을 지었다.
바라마지 않던 일이 이뤄진 게다.
그는 마지막 오후를 즐겁게 보냈다.
사마충의 단점을 고쳐주고, 용무관의 관도들에게도 몇 가지 조언을 해줬다. 며칠을 함께 했던 술꾼들과 석별의 정을 나눴고, 기념으로 석 잔의 술을 마셨다.
물론 한 사람 당 석 잔이다.
“아! 하늘 참 파랗구나!”
마치 화산이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저 멀리서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개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이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혈륜을 만들기 위해 찾아간 서현동에서 들었던 개소리였다. 그리고 육태천화서봉주를 캐내서 마신 후 들었던 개소리이기도 했다.
한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본능이 경고했다
“어라?”
이훤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그때 맹염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군! 이곳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비켜라!”
개 짖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듯했다.
이훤은 칠각보를 펼치며 우산처럼 줄지어 선 천막촌으로 달렸다.
컹!
하나 그보다 앞서 허공에서 커다랗게 펼쳐진 총채가 장막처럼 드리워졌고, 눈을 끔뻑였을 때에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털을 늘어트린 대형견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컹!
송아지만한 크기였지만, 왠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하나 이훤은 주먹을 말아 쥐는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뒤를 돌아보는 모양새가 마치 목각인형의 목을 돌리는 것처럼 삐걱거렸다.
기다렸다는 듯 씹어뱉는 듯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찾! 았! 다!”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회귀 후 만난 그 누구보다 고수라고 여겨지는 존재가 온몸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맹염채가 뒤늦게 유건평과 정표를 이끌고 나타났다.
“이 녀석! 예를 표하거라. 매화검주시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화산에서 매화(梅花)라 불리는 자는 오로지 화산제일검 (華山第一劍)뿐이다. 매화검주는 윽박을 지르듯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그리고 네가 훔쳐 마신 술의 주인이시다.”
이번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 10, 영약보다 술이지. (5)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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