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영약보다 술이지. (4) >
10, 영약보다 술이지. (4)
공터 뒤쪽으로 소궁주를 이끌었다.
“당분간 이쪽에서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대형이라 불리는 걸 보니 저들은 다 네 수하들인가?”
“아니. 처음 보는데. 이름도 몰라. 우리 바닥은 술 사주면 형이지. 너네도 예쁘면 언니잖아. 안 그래?”
“그렇지도 않지만, 따지고 싶지도 않네.”
“잘 생각했어. 빙화초나 줘.”
이훤은 소궁주를 조수처럼 대했다.
소궁주는 옆에서 모든 과정을 기억해야 했기에 이번만은 따지지 않고 순순히 말을 들었다.
“이봐! 방법은 대충 들었지. 빨리 준비해.”
호위대주는 이훤의 명령에 이를 갈았지만, 소궁주의 눈짓 한 번에 말 잘 듣는 개가 되었다. 잠시 후 작은 화구가 만들어졌고, 주변에 얇은 천을 둘러 바람을 막았다.
“빙화초에서 빙정을 분리하려면 이렇게······.”
이훤은 빙화초의 결을 살피다가 숯처럼 바짝 타고 있는 나무토막을 들었다. 그리고 빙화초의 결을 확인한 후 바짝 타버린 나무토막을 가져다 대려 했다.
“잠깐! 그걸로 진짜 되는 거야?”
소궁주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실패하면 죽일 거잖아.”
이훤이 싱글벙글 웃으며 하는 말에 소궁주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본성은 나쁘지 않은 듯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사과할 말을 찾는 듯했다.
“취객이라고 막 나갈 것이라 생각지 마. 나는 술에 취할 때 가장 정신이 맑거든.”
미안한 마음이 사라질 만큼 어처구니 없는 대꾸였다.
소궁주가 할 말을 찾는 사이 이훤은 예고도 없이 나무토막을 썼다. 그 순간 기적처럼 빙화초가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고, 투명한 방울 같은 것이 특별히 준비한 은쟁반 위에 늘어졌다.
“고작 해야 축양나무로 이게 가능했다니······.”
“이건 빙궁의 비전이잖아. 그러니 빙궁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을 활용할 리 없지.”
이훤은 자랑을 늘어놓은 후 가르치듯 말했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집중해야 해.”
“네. 아니, 응.”
소궁주는 잔뜩 긴장하여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빙정은 한 때 북해빙궁주가 암기로 사용했을 정도였다. 빙정이 몸에 파고들면 죽을 때까지 녹지 않고, 한기에 시달려야 했다.
이훤은 말과 달리 국자로 국을 휘젓듯 대충 구리 젓가락을 들어 빙정을 굴렸다. 빙정은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를 밀어냈다. 하나 빙정 위에 석회를 뿌리는 순간 마치 극이 바뀐 것처럼 서로 겹쳐졌다.
그렇게 뭉쳐든 빙정에 벌꿀을 부었다.
“드디어 청천천화주를!”
“드디어 빙령단을!”
두 사람은 각자의 소원을 빌며 빙정이 벌꿀과 섞이기를 기다렸다. 일각 쯤 지났을까. 기름과 물처럼 섞이지 않던 빙정이 갑작스럽게 옅어졌다. 벌꿀과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됐어!”
소궁주는 이훤의 팔을 잡고 방방 뛰었다.
그녀는 이훤이 슬쩍 팔을 빼내고서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중요해. 누가 할 거야?”
이제 벌꿀을 얼려야 했다.
극점까지 얼린 후 깨버리면 벌꿀은 두 종류의 가루로 흩어진다. 금색과 은색, 이 중 은빛 가루가 바로 빙정의 부산물이었다.
“내가 할게.”
소궁주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무공은 호위대주인 염충이 더 강할 것이다. 하나 가주의 직계만 익히는 무령빙공(霧靈氷功) 쪽이 냉기의 집중도를 올려줄 터였다.
염충과 호위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이훤은 짚단에 기댄 채 미리 준비한 술을 꺼냈다.
“여기서 실패하면 내 탓 아니야.”
“조용히 해!”
이윽고 소궁주의 양 손은 손끝부터 하얗게 번들거렸다. 무령빙공으로 인해 한기가 흘러나왔고, 빙궁의 직계들만 구현할 수 있다는 소수(素手)로 그릇을 감쌌다.
“하아.”
그녀가 숨을 뱉는 순간 주변에 서리가 이는 듯했다.
‘머리카락이 그대로인 걸 보면 삼 성, 내지는 사 성 정도인가. 제대로 싸우면 내가 지겠네.’
이훤은 어느 순간부터 회귀 전의 경험을 전력으로 치지 않았다. 그것은 비장의 한 수가 되어야 했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그만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냉정하게 자신의 현재 상태를 평가할 수 있었다.
술을 두 병쯤 비웠을 때다.
한순간 훈풍이 얇은 천을 비집고 휘몰아쳤다.
소궁주가 냉기를 발산한 후 기를 갈무리는 과정이다. 대기를 빨아들여 단전을 채우니 주변의 온도가 올라가는 건 당연했다.
한 번만 펼쳐도 누구나 기억할만한 특징이다.
강호의 명문거파라 불리는 곳의 상승무공은 엄청난 위력을 동반했다. 산을 쪼갠다는 비유가 있을 정도이니 더 말 해 무엇 하랴. 그런 상승무공은 대부분 고유의 흔적을 남겼다. 마치 이곳에 누가 다녀갔음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화산은 뭐였더라?’
그때 소궁주가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섰다.
“된 것 같아요.”
이훤은 갑자기 존대를 하는 소궁주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깨보기 전에는 몰라.”
“칫! 깐깐하기는.”
갑자기 친근한 척도 한다.
꼬마가 그래봤자 귀찮기만 할 뿐이다.
이훤은 소궁주가 얼려놓은 접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접시에 얇게 펴놓은 벌꿀은 마치 얼음처럼 번들거렸다. 수포가 들어간 곳이 없는지, 색이 다른 곳은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훤이 물러나는 순간 호위대주가 검을 뽑았다.
“제대로 가루가 나오면 진짜 술을 만들 거야?”
“네게는 빙령단의 재료겠지만, 내게는 천화빙화주를 만들 수 있는 주정이야.”
소궁주는 남몰래 탄성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아예 존경심마저 느껴지네.’
그 순간 호위대주가 검을 휘둘렀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얼어붙었던 벌꿀이 쪼개졌다.
이번만은 이훤도 소궁주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회귀 전에도 그처럼 갈구하던 청천빙화주의 주정이 아닌가. 잘 만들어졌기를 바라며 조금씩 다가서려는데 소궁주가 한 발 먼저 탄성을 흘렸다.
“됐어! 됐어! 됐어요! 이제 무림맹의 도움을 바라지 않아도 돼! 집에 돌아갈 수 있어! 집에 간다고!”
그녀는 이훤을 껴안을 듯한 기세로 방방 뛰었다.
그로 인해 정작 이훤은 흥이 깨져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금빛 가루와 은빛 가루를 확인했다.
“아! 너는 어제도 그렇고, 무슨 여자애가 외간 남자를 가리지 않아?”
소궁주는 이훤의 투덜거림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마도 추워서 꽁꽁 싸매고 다니다 보니 맺힌 게 많았나 보지요.”
“됐다. 약속한 거나 줘.”
이훤이 손을 내밀었다.
소궁주는 호위대주에게 가루를 챙기라고 명령한 후 옥비녀를 뽑았다 그 순간 돌돌 말려 있던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그로 인해 한 번 더 폭발적인 방향이 퍼져 나왔지만, 이훤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옥비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이거면 몇 병이나 만들 수 있을까?”
소궁주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진짜 승부욕 생길 정도로 자존심을 건드리네.’
하나 호위대주 염충은 평소와 달리 주인의 심기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그는 은쟁반에 담긴 은빛 가루를 보며 부르르 떨었다.
“크흑! 아가씨. 감축 드립니다. 드디어 집에 돌아가실 수 있게 되었군요.”
*
두툼한 털옷으로 중무장한 사내가 언덕 위에 올랐다.
잠시 후 다섯 명에서 열 명씩 무리를 지은 자들이 사내의 뒤를 따라 자리했다.
“화북장이라고?”
“확실합니다. 장주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소궁주의 어머니 쪽과 관련이 있더군요. 소궁주의 행적은 화북장 방향에서 끝났으니 분명 저 곳에 있을 겁니다.”
사내는 북해빙궁의 외단 소속 설룡당(雪龍堂)의 당주였다. 그리고 북해에서부터 백일 가까이 소궁주를 쫓고 있었다.
“겨우 찾았거늘······.”
설룡당주는 한 숨을 흘렸다.
언덕 아래에는 마치 대도시를 방불케 하는 불야성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화북장주의 금분세수가 있을 것이라는 수하의 보고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인의 장막을 과할 만큼 펴놨군요. 저희가 등장하면 아무래도 세인의 눈에 띌 겁니다.”
설룡당주는 시시각각 도착하는 수하들의 보고를 통해 생각을 정리했다.
“소궁주라는 혼자 살겠다고 오라비를 버리지 않을 게다. 아무래도 화북장주를 통해 종남과 화산의 도움을 받고, 나아가 무림맹까지 움직이려고 할 것이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훗! 가능할 리가 있나. 북해의 용사들과 달리 구파오가라는 작자들의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아는가? 식객으로는 받아줄지언정 돕겠다고 나설 리가 없다.”
“어찌 하시렵니까? 금분세수가 끝나면 움직일 겁니다. 아무래도 화산이나 종남 쪽으로 이동한 후 무림맹과 접촉할 듯싶은데요.”
설룡당주는 결심을 내렸다.
“어느 쪽이든 확인되는 대로 움직인다. 어차피 소궁주는 살려서만 데리고 가면 되니까. 그러려면 한두 달쯤 걸리려나?”
그는 화북장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수하는 익숙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가는 길에 아주 지워버리겠습니다.”
“좋아. 실행하라.”
대주의 만족스런 한 마디를 끝으로 주변이 부산스럽다.
“대주의 명이다. 일조와 이조는 종남산으로 가는 길목을, 삼조와 사조는 화산으로 가는 길을 살핀다. 오조는 중앙에 대기하다가 소궁주의 신병이 확인되는 순간 합류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 10, 영약보다 술이지.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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