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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3화 (23/226)

< 10, 영약보다 술이지. (3) >

10, 영약보다 술이지. (3)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급하기는 엄청 급한 듯했다.

이훤에게 있어서 소궁주는 꼬마에 불과했다.

그러니 강호를 모르는 그녀의 마음 상태가 훤히 보였다.

두렵고, 의아하고, 조급하고, 짜증났겠지.

‘몸이 달았네.’

이훤은 어느새 칼자루를 쥔 사람처럼 말을 아꼈다.

그러자 결국 소궁주가 먼저 거래를 제안했다.

“후우! 나는 빙정을 다룰 수 있는 몇 가지 재료를 알고 있어. 하지만 방법을 몰라. 만에 하나 네가 그 방법을 얘기한다면 네 목숨을 살려주마.”

“그냥 끌고 가서 고문이라도 하지 그래?”

거래 조건으로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빙궁이 새외에 있다고 해서 사마외도는 아니야. 대신 거래를 하자. 네가 옳다면 빙화초를 줄게.”

이훤이 평소 쓰는 말에 의하면 술병의 주둥이가 이쪽으로 완전히 넘어온 형국이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듯 말을 이었다.

“녹여서 증명해야 한다며.”

이훤의 퉁명스런 한 마디에 소궁주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두 개야.”

역시 궁지에 몰아넣어야 진실이 밝혀지는 법이다.

소궁주는 아랫입술을 슬쩍 물더니 가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조금 내렸다. 그녀의 또래보다 풍만한 가슴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의 중앙 부근에는 옥비녀의 빙화초보다는 작지만, 손톱 두 개 크기의 조각이 꿰매져 있었다.

장신구라는 원래 목적에 충실한 빙화초였다.

이훤은 탄식했다.

“아! 그 귀한 걸 왜 숨기고 다니지?”

빙화초를 너무 뚫어지게 쳐다봐서일까.

소궁주는 얼굴을 붉히더니 다시 검을 겨눴다.

“거, 거래 조건으로는 충분하지?”

“그래, 좋아. 일단 질 좋은 석회와 다섯 번 이상 거른 정수가 필요해. 그리고 벌꿀이 필요해. 명심해! 수수는 안 돼. 반드시 벌꿀이어야 해. 그리고······.”

이훤은 재료를 거론했고, 소궁주가 간간히 맞장구를 치듯 몇 가지를 추가했다. 서른 가지가 넘는 재료를 밝히던 중 이훤만 아는 비전이 세 가지 추가됐고, 잠시 후 빙정을 녹일 수 있는 방식까지 전해줬다.

“어때?”

“그럴 듯해. 이대로라면 진짜 빙정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됐지?”

이훤은 옥비녀를 주우려 했다.

그 순간 소궁주가 연못을 박차고 튀어 오르더니 검으로 목을 겨눴다. 달궈진 몸에서는 향유와 향낭으로 인한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사람의 체취가 좋은 향기와 어우러졌을 때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이훤은 목을 꺾어 검 끝을 피한 상태였다.

반면 소궁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이훤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지압봉을 끼고, 단전 부분을 노렸기 때문이다.

“무슨 무기가······.”

소궁주는 지압봉에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 듯했다. 하나 이훤은 그녀가 검을 거두자, 천연덕스럽게 지압봉을 챙겼다.

“내 비장의 한 수지. 그나저나 좀 떨어져 줄래. 물 떨어지잖아.”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너, 엄청 짜증나.”

“짜증나서 옥비녀를 못주겠다는 거야?”

이훤의 말에 소궁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눈으로 직접 가루를 만들어서 보여줘. 재료는 내 쪽에서 준비할게. 내일 이 시간에 내 처소로 와.”

아리따운 여인이 늦은 밤 초대를 한다면 만사 젖히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사내란 족속이다.

하나 이훤은 달랐다.

그는 소궁주의 가슴을 가리킨 후 옥비녀를 가리켰다.

“작은 거 말고, 큰 걸로 줘.”

“크흑! 알았어.”

이훤은 검지를 펴고 말했다.

“한 가지 더. 장소는 내가 정한다.”

*

소궁주는 오랜만에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이훤이 거론했던 재료를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한 게다. 다행히 화북장은 대규모 연회를 열기 위해 온갖 재료를 구비해놓은 상태였다. 그 결과 약속 시간 전 이훤이 말했던 모든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준비는 끝났나요?

호위대주는 두 대의 수레를 확인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말씀하신 대로 모두 준비했습니다. 한데 저 쪽의 물건은 아무리 봐도 재료가 아닌 듯한데요?”

그가 가리킨 수레에서는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진동을 했다.

소궁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술꾼이잖아요. 술하고 고기가 먹고 싶었나 보지요.”

그녀는 방갓을 쓰고, 품이 헐렁한 옷을 걸쳤다.

호위대주는 그 모습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저는 아가씨께서 장원 밖으로 나가시는 게 걱정됩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에서는 호위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봤자 취객들이잖아요.”

“설룡당의 존재가 걱정 됩니다.”

소궁주는 타이르듯 말을 건넸다.

“어차피 화북장주가 금분세수를 끝내야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러니 손해 볼 일은 없어요.”

호위대주는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염충.”

“네, 아가씨.”

“당신이 나와 함께 한 시간이 벌써 십 년입니다. 그러니 내 상황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궁주께서는 후계 다툼에 관하지 않아요. 그러니 저와 오라버니는 풍전등화의 상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빙령단을 복원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호위대주 염충은 빙령단(氷令丹)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빙궁의 영약 중 최상의 존재인 빙령단을 복원할 수 있다면 중립을 취한 이들을 모조리 끌어들일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다른 쪽의 궁도들 또한 동요할 터였다.

빙령단은 그만큼 궁도들에게 중요했다.

“희미한 희망이겠지만,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잠시 후 그녀와 호위들을 필두로 세 대의 수레가 화북장을 빠져나왔다.

소궁주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저기네요. 초록 깃발이 꽂힌 다음 천막에서 보기로 했어요. 봐요. 아무 일도 없잖아요.”

하나 그녀의 얼굴은 금세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눈앞에는 마치 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수십 명의 사내들이 뒤엉켜서 난리였다.

한 겨울에 웃통을 벗은 두 남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힘 싸움을 했고, 누군가는 진흙탕 위를 구르며 깔깔거렸다. 그 사이에서 도박을 하는 이도 있었고, 심지어 술병을 물고 잠든 이까지 있었다. 제대로 된 의자도, 탁자도 없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술만 마시겠다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호위대주가 본능적으로 소궁주의 앞을 막았을 정도였다.

“왔어?”

그때 이훤이 덩치들 사이를 비집고 나타났다.

소궁주는 더듬거리며 사내들을 가리켰다.

“저게 다 뭐하는 거야?”

“아! 나도 몰라. 그냥 즐겁잖아.”

“나는 지금 빙궁의 존폐를 걸고, 너를 찾아온 거야.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을...”

이훤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난 빙궁의 궁도가 아니고, 술을 만들고 싶을 뿐이야. 그 조건으로 너와 거래를 한 거야. 빙궁이 망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소궁주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분했지 숨을 쉴 때마다 면사가 펄럭일 정도였다.

“장소는 준비했으니 걱정 하지 마.”

“걱정 안 하게 생겼니?”

“내가 문제를 내지. 바늘을 숨기려면 어디에 숨겨야 할까?”

갑작스런 수수께끼에 소궁주는 본능적으로 대꾸했다.

“짚단.”

“정답! 그러면 술을 만들려면 어디서 만들어야 들키지 않을까?”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소궁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술꾼들을 가리켰다.

이훤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고. 뒤쪽에 자리를 비워뒀어. 네가 봐도 질색을 할 정도면 당분간 그쪽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소궁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쳇! 생긴 것 답지 않게 섬세하기는.’

이훤은 그 사이 코를 벌름거리며 제멋대로 수레에 올랐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다니 대뜸 술꾼들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약속했던 술이다! 너희들은 평생 못 마실 엄청 좋은 술이야! 마셔라!”

술꾼들은 일개미가 여왕개미의 명령을 받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훤이 수레를 손으로 가리키자, 모든 행동을 중지하고 수레에 실린 짐을 날랐다.

“우어! 이 냄새! 이런 게 술이라는 건가?”

이훤은 자신을 향해 엄지를 추켜세우는 술꾼들 향해 말했다.

“앞으로 똥쟁이라고 부르면 술 안 준다!”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예, 대형!”

소궁주는 자신이 하루종일 준비한 재료가 찌그러진 철 그릇 안에 뒤섞이는 걸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화북장주가 연회에서 사용하려던 술을 절반 이상 흘리며 마시는 자들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하나 그녀의 생각과 상관없이 정체모를 요리가 만들어질 때마다 술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이끌리듯 또 다른 술꾼들이 몰려왔다.

‘이게 바로 아비규환인가?’

이훤은 소궁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들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줄 거야. 가자.”

< 10, 영약보다 술이지.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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