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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2화 (22/226)

< 10, 영약보다 술이지. (2) >

10, 영약보다 술이지. (2)

잘만 하면 빙화초를 스스로 떼어놓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지니고 있는 물품이라면 불가능해도, 옷을 벗어놓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훔칠 수 있지 않은가.

소궁주는 호위를 설득했다.

“화북장주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와 의남매로 지내셨어요. 북해의 영역 밖에서 제가 믿을 사람은 그분이 전부입니다.”

또렷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마치 아침 이슬이 풀잎을 타고 흐르듯 잔잔한 목소리에 보통 사람이라면 연심이 피어오를 만큼 매혹적이다.

‘말 좀 빨리 해.’

이훤은 반면 초조하기만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 분은 저 때문에 금분세수라는 강수를 두셨어요. 외부의 시선을 끌지 않고 종남파나 화산파의 고인들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요. 그 분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기회를 주시려고 해요. 그렇다면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서 명문거파를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데 제 꼴이 어떤가요?”

“아가씨는 언제나 아름다우십니다.”

지랄도 풍년이로구나.

이훤은 호위의 애틋한 감정을 육포처럼 씹으며 대화가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그들에게 저는 북해빙궁의 암투에서 밀려난 여자일 뿐이랍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탓을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최소한 북해빙궁의 품격만은 잃지 않으려는 소소한 발악이랍니다. 격에 맞는 몸가짐으로 그들을 대한다면 분명 무림맹까지의 안전을 책임질 거예요.”

북해빙궁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여자였다.

그때 야산 쪽에서 무인들이 내려왔다.

“온양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쪽은 발길이 끊긴 곳이라 사람의 흔적 자체가 없습니다.”

결국 호위가 길을 연 듯했다.

“제가 여인이었다면 아가씨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했을 텐데······.”

끈질긴 녀석이다.

저런 놈은 여자한테 인기가 없을 텐데.

“호호, 그렇다고 함께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오히려 소궁주가 능수능란하게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알겠습니다. 모두 모여라. 지금부터 온양지로 향하는 입구를 통제한다. 아가씨는 최대한 빨리 볼 일을 끝내시고 돌아오십시오.”

“고마워요.”

이훤은 호위들이 모여서 경계 방식을 논의하는 순간 양병전을 벗어나 야산에 이르렀다.

“여기인가?”

나뭇가지만 밟고 도착한 곳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존재했다. 온양지(溫陽池)라는 이름처럼 한겨울임에도 연못 근처에는 온기로 인해 희미한 안개가 퍼져 있었다.

‘저쪽에서 오면 자연스럽게 연못을 한 번 살필 테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면 옷은 이쯤에······.’

자신이 목욕을 한다는 가정 하여 시연을 해봤다.

그 결과 소궁주가 옷을 내려놓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소를 골라냈다. 연못 입구와 인접한 넓은 바위 위였다. 하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탈마가 그랬다.

도둑질을 할 때에는 항상 상대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리고, 환경이 다르기에 똑같은 상황에서도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대는 여자였다.

‘몸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를 본능적으로 꺼리겠지. 그렇다면 물속에 들어가기 편한 곳에 옷을 벗어놓을 거야.’

이훤은 소궁주가 되었다는 가정 하에 연못 주변을 살핀 후 한 곳을 골랐다. 그리고 그곳에 몸을 숨기고, 다시 한 번 귀호영체술을 펼쳤다.

바스락-

잠시 후 희미한 발소리와 함께 그녀가 등장했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은 먹물처럼 까맣다. 반면 얼굴과 드러난 양손은 눈처럼 새하얗다. 거기에 더하여 옥을 박아 넣은 것처럼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와 달빛을 베어버릴 듯한 콧날, 그리고 홍시를 닮은 입술이 눈에 띄었다.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는 표현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이훤은 빠르게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그리고 이내 탐욕스러운 눈빛을 번뜩였다.

‘있다.’

소궁주가 꽂고 있는 옥비녀의 머리 부분이 얼음 꽃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훤의 머릿속에서 소궁주의 얼굴은 사라졌고, 옥비녀만이 거대하게 확대되어 그려졌다.

저건 장신구가 아니라 주정(酒精)이다.

만약 빙화초에서 빙정을 분리하고, 그걸로 만들어낸 주정이라면 한 방울만 뿌려도 맹물이 술처럼 변하리라.

‘벗어라. 빨리 벗어.’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생각과 눈빛.

하지만 이훤은 순수했다.

소궁주는 이내 이훤의 강렬한 염원에 화답하듯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예상대로 연못의 얕은 부분 쪽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좋았어!’

그녀가 머리를 먼저 풀었다면 옥비녀가 밑에 깔렸을 터였다. 그렇기에 순수하게 옷을 먼저 벗는 것에 환호했을 뿐이다. 잠시 후 옷가지가 곱게 개여서 바위 위에 놓였고, 마침내 달빛마저 빨아들일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옥비녀가 옷 위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만 움직여서 손을 최대한 뻗으면 잡힐 듯했다.

하나 참았다.

기회는 한 번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방심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노려야 했다. 왜인지 모르게 불안하지만, 혹시나 하는 미련이 남지만 누구나 눈을 감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

이훤은 소궁주가 등을 보인 채 머리를 감는 순간 움직였다. 이미 옥비녀의 위치는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방향을 맞춰 손을 뻗으면서도 귀호영체술의 운영에만 집중했다.

한데 그 순간 싸늘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누구냐?”

보통 사람이었다면 흠칫 놀랐을 터였다.

하지만 이훤은 마치 바람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 듯 자연스럽게 손을 거뒀다. 그러나 소궁주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채 노려보고 있는 순간만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소궁주는 물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지만, 정확하게 이훤을 노려봤다.

“쯧.”

이훤은 수풀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궁주의 손에 검이 들린 이상 누워서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검의 예기가 달빛으로 인해 더욱 스산하게 전해졌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훤은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가 낯선 사내에게 몸을 보였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병전에서 호위와 대화할 때처럼 여유가 넘쳐났다.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어떻게 알았지?”

소궁주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여긴 듯 순순히 대꾸했다.

“내가 익힌 심법은 아주 특수해. 예를 들면 내 장신구가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지.”

이훤은 혀를 찼다.

“장신구가 아니라, 빙화초겠지. 그리고 빙화초가 아니라 빙화초의 재료인 빙정을 감지하는 건가? 그렇다면 무령빙공이겠군.”

하마터면 탈마의 귀호영체술을 의심할 뻔했다.

그가 탈마에게 사과하는 사이 소궁주의 미간은 고랑이 패일만큼 일그러졌다.

“어차피 살려 둘 생각은 없었지만, 더더욱 곱게 죽이면 안 되겠구나.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구냐?”

“술을 좋아하는 사람.”

이훤은 딴소리를 했다.

소궁주의 실력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등을 보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녀를 흔들려고 해봤지만, 실패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는 왜 왔지? 나를 술이라고 생각할 만큼 멍청해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호위와 대화할 때부터 느꼈지만, 언행에 여유와 당당함이 배어 있었다.

“눈알 굴리지 마. 생각하지도 마라.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호위를 부르겠다. 그럼 너는 변명도 못 하고 죽어.”

이훤은 혀를 차며 옥비녀를 바라봤다.

“좋아! 빙화초를 훔치러 왔어.”

솔직히 말했는데 예상외로 동요가 느껴졌다.

소궁주가 미간을 좁힌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장신구를 훔치러 왔다는 말을 믿으라고?”

“네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몸매를 보면 의아해하는 것도 이해는 해.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빙화초로 술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빙화초가 아니라 빙정이겠지.”

“말이 이제 잘 통하네.”

“건방지게 굴지 마. 그리고 움직이지 마라.”

소궁주의 경고에 이훤은 슬쩍 들었던 발뒤꿈치를 다시 내렸다.

‘밝혀야 하나?’

이훤은 자신이 정체를 밝힐까 고민했다. 어쨌든 그녀는 화산파의 도움을 받으려고 절박한 상황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지켜본 소궁주의 성격이라면 화산의 문도임을 밝히는 순간 죽이는 대신 교섭의 제물로 쓸 공산이 컸다. 화산파에 빚을 지울수록 그녀의 뜻대로 될 테니까.

“나는 사실······.”

그때 이훤의 말과 겹치듯 소궁주가 말했다.

“잠깐! 네가 빙정을 다룰 수 있다고?”

빙정(氷晶)은 북해에서만 구할 수 있는 얼음의 일종으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여 빙궁의 직계들만 자르고, 부숴서 신물(信物)에 섞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조금 전에 빙화초로 술을 만들겠다고 했잖아.”

“그건 맞아.”

그 순간 소궁주의 검 끝이 조금 내려갔다.

이훤은 혈륜을 극성으로 휘돌려 도망치려다 멈칫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말 빙정을 다룰 수 있어?”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다룬다기보다는 녹이는 거지.”

“그게 그거야.”

“그렇다면 가능하지.”

“네가 어떻게 가능하지?”

이훤은 눈을 끔뻑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십 년 후 빙궁의 사절단이 무림맹주에게 빙화초를 녹여 만든 술을 진상하고, 취마인 자신이 맹주의 처소에서 제조법을 훔쳤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술자리에서나 떠들던 개똥 논리를 펼쳐야 했다.

“강호의 구파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역사와 무공을 전승하지. 주도를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 우리는 오래 전부터 술과 관련된 방대한 정보를 취합했지. 그중 하나가 빙정을 녹여 술을 담그는 방법이야.”

어차피 진위(眞僞) 여부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그저 소궁주의 절박한 눈빛에 도박을 건 것이다.

여차파면 화산의 문도임을 밝힐 수밖에.

한데 이훤의 예상 보다 소궁주의 반응은 격렬했다.

“녹일 수 있다고? 본궁의 직계들에게도 실전된 그 방법이 아직 존재한다는 거냐? 원로들도 십 년은 지나야 해결된다고 했던 그것이!”

빙궁주가 술을 그렇게 좋아했던가.

이훤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거론한 십 년의 세월은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빙정으로 술을 담그면······.”

그 순간 소궁주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닥쳐! 제발 술 얘기 좀 그만 해.”

< 10, 영약보다 술이지.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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