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영약보다 술이지. >
10, 영약보다 술이지.
술꾼들은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목소리의 높이가 다름에도 대화가 통했다. 그들은 이훤의 돈으로 술을 마시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술자리를 즐겼다.
“끄어! 우리 물주는 어디 가셨나? 야! 네 형님, 어디 가셨냐?”
“몰라, 어디 갔나 보지.”
“언제 갔는데?”
일각 정도 된 듯했다. 아니, 금방인가?
술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박장대소를 했다.
“알게 뭐야. 똥이라도 싸러 갔나 보지.”
“야! 술 떨어졌다. 똥쟁이 물주를 찾으러 가자!”
다 같이 일어나서 숲이라도 뒤질 기세였다.
술꾼은 이훤이 주고 간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돈이야 넘쳐 나지!”
“이봐! 술 가져와. 술이다! 똥쟁이가 술을 산다!”
“똥쟁이가 사는 술은 향기롭지.”
되도 않는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이각 전 사라진 이훤은 방금 똥을 싸러 사라진 걸로 결론이 났다.
비단 이곳만의 사건은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는 등을 보인 채 뻗어버린 취객을 이훤이라 여겼고, 도박판에서는 부족한 돈을 얻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람이 되었다. 최소한 세 무리의 주객들 사이에서 이훤의 부재가 묻혔다.
스륵-
그리고 그 시각 이훤은 천막촌을 지나 화북장의 담장을 앞두고 있었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기는 순간 절묘하게 주변 환경과 어우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훤의 복장은 처음과 전혀 달랐다.
도박판과 술판을 전전하며 따고, 뺏고, 선물 받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코까지 가려지는 복면도 둘렀다. 새로 갈아입은 옷이기에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담장을 살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잠시 후 두 명의 무인이 담장을 따라 나타났다.
저들은 반 각 후 다시 이곳을 지날 터였다.
이훤이 그것을 알면서도 기다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 술 냄새가 진동을 하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술판이 벌어졌는데 우리는 뭐하는 거지?”
“저 놈들은 돈을 쓰고, 우리는 벌고. 그 차이지.”
화북장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속내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때 앞장 선 무인이 코를 막았다.
“아! 젠장, 이거 토사물이잖아. 어떤 새끼가 여기까지 와서 이 지랄 해 놓은 거야.”
이훤이 미리 담장 근처에 뿌려놓은 토사물이다. 들판 전체에 취객이 즐비했다. 토사물을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잠깐! 누가 침입한 걸 수도 있어.”
앞선 무인은 인상을 쓰면서도 순순히 한쪽 무릎을 굽혔고, 경계를 하던 무인이 밟고 올라섰다. 그는 담장 너머를 슬쩍 살피더니 안심하며 내려왔다.
“멀쩡해. 그냥 토만 하고 갔나 보다.”
이훤의 눈빛이 번뜩였다.
예상대로 담장 너머에 무슨 장치를 해놓은 듯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이 없다고 담장을 넘었다가는 곤욕을 치렀으리라.
‘후훗, 나중에 탈마 녀석을 만나게 되면 석 잔의 술을 사줘야겠다.’
이제 저들이 지나간 후 담장을 넘기만 하면 됐다.
한데 무인들의 대화가 예사롭지 않았다.
“하아, 하루라도 빨리 한가해졌으면 좋겠다.”
“걱정마라. 위쪽에서 쉬쉬하기는 하는데 장주님의 금분세수만 무사히 마치면 장기 휴가를 준다고 하더라. 휴가비도 잔뜩 책정해놨단다.”
“엇! 그 소문이 진짜였냐? 한 달 정도는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그거야 가봐야 아는 일이고.”
두 사람은 흙으로 토사물을 대충 덮은 후 한결 밝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장기 휴가를 준다고?’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화북장주가 아무리 호인이라고 해도 장원의 무인들에게 장기 휴가를 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 경우는 하나뿐이다. 장주와 식솔들이 아예 장기간 장원을 떠나 어딘가로 향할 때였다.
‘금분세수는 연막이라는 게 확실하군!’
아무래도 화산파와 종남파를 비롯해 무림맹에 속한 명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자구책인 듯했다.
이훤은 좌우를 살핀 후 담장 앞에 섰다.
혈륜을 자극하는 순간 전신이 후끈해졌고,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단순히 내공의 증진뿐 아니라 근골 자체가 성장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별다른 단련 없이도 체력이 몇 배는 좋아질 터였다.
이훤은 조심스럽게 담장에 올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를 살폈다.
달빛에 의지해서 한참동안 안력을 돋우니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있다. 거미줄처럼 늘어진 줄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방울과 함께 나무토막이 연결됐다. 소리로 경계하고, 나무토막에서는 아무래도 화살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다.
‘탈마, 최고고요.’
이훤은 담장 아래 내려선 후 덤불로 향했다.
몸을 숨긴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에는 하오문에서 확인했던 화북장의 구조도가 그림처럼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장소들을 통해 구조도가 틀리지 않았음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긴장이 되기는 하네.’
지금 이 순간에도 건물 어귀마다 무인들이 돌아다니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봤을 때 이훤이 저들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고, 목표물을 탈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훤이 빙화초를 탐한 데에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탈마였다.
도둑질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닌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도둑질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한데 어린 시절 지역에서 유명한 방파에 숨어들어 방주의 신물을 훔쳤다는 말만은 믿을 수 없었다. 그때 탈마가 꺼내든 것이 바로 귀호영체술이다.
귀호영체술(龜護影體術)의 요체는 단순했다.
신체의 기능을 현저하게 늦춰, 기척을 사라지게 만드는 재주였다. 그러니 쥐뿔도 없던 탈마가 절정 고수의 눈을 피해 신물을 훔칠 수 있었으리라. 당시 탈마는 호기심을 보인 이훤에게 귀호영체술의 방법과 구결까지 알려줬다. 한데 그만의 비기를 서슴없이 알려주는 이유는 따로 있더라. 당시 탈마나 취마에게는 쓸모도 없고, 익힐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 이걸 펼치려면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해.
- 그럼 지금도 쓸 수 있잖아.
- 형님, 문제가 있소. 내공은 안 숨겨지더라고.
- 아! 그럼 쓸모가 없지.
- 그때야 내공이 일천했으니 어영부영 먹힌 거죠.
결국 반쪽짜리 귀식대법인 셈이다.
호흡만 감춰주고 내공을 드러낸다면 절정의 고수를 속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여 당시에는 술자리의 안주 삼아 몇 차례 대화했던 것이 전부였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니 귀호영체술만큼 좋은 게 없구나.’
이훤은 텅 빈 단전을 매만지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잠깐만 생각해도 머릿속에는 훨씬 더 효과적이고, 유명한 기술이 쉼 없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이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우.’
호흡의 방식은 평소와 달랐고, 혈륜마저 속도를 늦췄다. 들이마시는 건 짧고, 내쉬는 건 세 배 이상 길어졌다. 머릿속으로 구결을 읊조리며 육신의 변화를 낱낱이 파악했다. 세 번의 반복을 통해 이훤의 눈빛마저 깊이 가라앉았다.
‘양문각부터 가자.’
이훤은 수풀을 나와 기다시피 전진했다.
때로는 대놓고 걸었고, 어떨 때에는 그늘에서 그늘로 건너뛰었다. 확실히 화북장은 정상적인 문파보다 경계가 느슨했다. 어쩌면 지금쯤 회합을 하고 있을 장주 쪽에 집중됐을 수도 있다.
‘장주가 지니고 있지만 않으면 돼.’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빙화초는 북해빙궁의 신물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조각품이다. 게다가 한 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빙궁의 직계라면 누구나 한두 개쯤 지니고 있을 법한 물건이 아닌가. 겨우 그런 걸 하나 구했다고 화산과 종남의 문도들을 불러들였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이훤은 장주의 처소인 양문각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몇 개의 전각을 지나 이층 누각 앞에 이르자, 맞은 편 건물의 현판이 눈에 보였다.
양문각(陽門閣).
무인 한 명이 입구 쪽에 서있을 뿐이다.
‘아! 저건 허술해도 너무 허술한데.’
이훤은 하품을 하는 무인을 빙 돌아 양문각의 벽에 붙었다. 다행히 창은 잠겨 있지 않았고, 미끄러지듯 내부로 스며들었다.
반 각 후.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빙화초는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한기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양문각 내부는 한겨울임에도 온기가 가득했다. 비밀스런 공간에 숨겨놨을 가능성도 사라진 게다.
‘쯧.’
다시 역순으로 양문각을 빠져나왔다.
청요자는 최대 사오 일 정도는 화북장에서 머물 것이라 했다. 이제 고작해야 첫 날이 지났을 뿐이니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운이 좋으면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화북장 내부의 처소를 배정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양병전까지만 확인하고 떠나야겠다.’
화북장은 야산을 등지고, 들판과 마주했다.
그렇기에 화북장 배후에 위치한 양병전(糧兵殿)으로 향할수록 수풀이 짙어졌다. 이훤은 조금 더 빠르게 화북장의 창고라 할 수 있는 양병전으로 향했다.
하나 이곳도 허탕이다.
이훤은 달의 위치를 확인한 후 혀를 찼다.
슬슬 한계였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일 다시 올 수 있기에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한데 발을 떼려는 순간 양병전 입구 쪽에서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꼭 지금 하셔야 합니까?”
이훤으로서는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경악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매미처럼 양병전의 처마에 매달린 채 몸을 말았다.
‘고수다!’
다행히 고수는 평정심을 잃은 듯 어수선했고,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신경을 집중한 상태였다.
“저는 이런 곳에 아가씨가 머무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설룡당을 따돌려 한동안 안전하지만, 언제까지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가씨, 구룡전주를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놈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흉악한 자입니다.”
설룡당, 구룡전주, 아가씨.
이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모두 북해빙궁의 주요 직위였다.
그리고 빙궁의 양대 무력이라는 구룡전의 전주가 노리는 아가씨라면 불을 보듯 뻔했다.
‘소궁주?’
북해빙궁의 소궁주라면 강호오대미녀라 불릴 만큼 미색이 뛰어났다. 게다가 빙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빙궁 내에서도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궁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하지 않던가.
이훤은 인상을 썼다.
‘젠장! 빙화초를 저 년이 가지고 있었구나!’
빙화초는 신물이면서 장신구로 사용된다.
즉 소궁주가 직접 착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짜증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소궁주나 되는 여자의 품에서 빙화초를 훔치는 건 귀호영체술을 익혔어도 불가능했다.
‘빌어먹을!’
한데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욕을 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목욕! 탈의!
이훤의 볼이 붉게 변했다.
환희로 가득한 외침이 소리 없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좋았어!’
< 10, 영약보다 술이지.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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