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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0화 (20/226)

< 9, 역린(逆鱗). (2) >

9, 역린(逆鱗). (2)

맹염채는 다음날 객잔을 떠나기 전 왈패와의 사건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너털웃음을 지으며 잘했다는 말로 사건을 뒤로 했다.

호탕한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이훤으로서는 화제에서 멀어질수록 손해 볼 것이 없다.

그 후로는 걷고, 또 걸었다.

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마을에 도착하면 잠을 잤다.

화산을 내려온 후 삼 일째.

이훤은 화북장의 영역에 들어섰다.

“맹 숙부!”

맹염채는 마중나온 청년을 보고 탄성을 흘렸다.

“자경이로구나. 네가 언제 이리 장성했느냐? 네 아비가 은거해도 화북장의 내일은 밝기만 하구나.”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일은 밝을지 몰라도 두 달 후면 멸문합니다.’

은자경은 마차의 문을 열며 대꾸했다.

“맹 숙부께서는 뵐 때마다 젊어지시는 듯합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확실히 호북장과 화산파의 관계는 얕지 않았다.

마차는 한 대였지만, 뒤로 커다란 수레를 두 대나 끌고 왔다. 한데 청요자는 마차가 아닌 수레로 향했다. 오랜만에 시간이 났으니 관도들에게 독경을 해주겠다는 게다. 유건평은 이훤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마차의 빈자리에 태웠다.

노골적으로 이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맹염채와 정표는 호기심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건평 정도 되는 이가 문도도 아닌 관도를 챙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반면 이훤은 고막에서 피가 흐를지도 모를 관도들의 명복을 빌어주며 냉큼 마차에 올랐다. 화북장주 은호탁의 장자, 은자경과의 대화를 엿듣다보면 괜찮은 정보가 흘러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은자경은 예기치 못한 동행에 눈을 끔뻑였다.

“숙부.”

어쩔 수 없이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이훤으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의 상황이다.

혈륜을 자극하는 순간 오감이 극대화되며 희미하게나마 은자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원에 도착하시면 장주께서 은밀하게 뵙고자 하십니다.”

“금분세수를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뭣 하러.”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알았다.”

맹염채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이훤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있구나!’

하오문에 다녀온 이후부터 내심 예상했던 바였다.

어쩌면 금분세수 자체가 원했던 일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행사일 수도 있음을 말이다. 그렇다면 빙화초와 금분세수 사이에 연관이 있을 터였다.

‘이제 관건은 훔치는 건데······.’

이훤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오문의 정보에는 기본적으로 화북장의 건물 배치도도 함께 했다. 구파오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장원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렇기에 중요한 물건을 숨길만한 장소도 많지 않았다.

탈마(奪魔)에게 배운 재주를 바탕으로 의심되는 장소를 몇 곳 정도 골라냈다.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

마차를 타고 조금 달렸을 뿐이다.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이훤은 슬쩍 창문을 열었다가 미간을 좁혔다.

‘뭐가 이리 많아?’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화북장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상가에도 온통 붉은 깃발이 펄럭였고, 오가는 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화북장의 신표를 단 채 떠들썩했다.

“아! 본장에서 나눠준 홍기와 홍표입니다. 깃발이 매달린 곳에서 표식을 한 사람이 물건을 사면 값의 일 할을 제해주지요. 차액은 모두 본 장에서 메워주기로 했습니다. 지역 상권도 활성화되고, 모두가 즐거워하니······.”

맹염채는 역시 내 친구라며 호방하게 웃었다.

하나 이훤은 허장성세(虛張聲勢)라는 네 글자를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저 멀리 장원을 마주했을 때에는 자신의 예상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과연.’

화북장 자체는 넓지 않았다. 하오문의 정보와 같았다. 하나 장원 외부에 수많은 천막을 깔았고, 수많은 가건물을 세웠다. 곳곳에 음식을 즐기는 이들로 붐볐고, 도원경처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탈마의 말 대로네.’

그는 육대괴마 중 탈마(奪魔)와 가장 친했다.

당연히 술자리도 잦았다.

그렇기에 비밀마저 주고받을 만큼 서로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나눴다. 탈마는 주로 도둑질한 기술이나 경험을 털어놓았다.

- 형님, 부자는 돈이 많으니 항상 경계가 삼엄할 것 같잖아요? 그건 진짜 부자나 그렇고, 대부분 무언가 숨기는 자들은 계륵과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비기(秘技)가 취마에게 전해졌다.

이른 바 숨기고 싶으며 경계를 강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섣불리 표국이나 문파의 힘을 빌리면 늑대 대신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형국이다. 그렇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린다. 그럴 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허장성세였다. 늑대를 경계하기 위해 호랑이 대신 수백 마리의 개를 풀어놓는 것이다.

눈앞의 화북장처럼 말이다.

무인을 비롯해 상인과 관리까지 뒤섞인 외곽은 일견하기에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하나 이훤에게는 저들이 모두 쓸모 없는 경비견처럼 느껴졌다.

냉정하게 화북장을 바라봤다.

묘하게 고즈넉했고, 깃발조차 외부보다 적었다.

화북장의 자체 무력이 없다시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리라.

- 그런 곳을 터는 것이야 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지요.

이훤은 그제야 마차의 보료에 몸을 묻었다.

오늘 밤부터 바쁘게 움직이려면 미리부터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허리 펴라.”

“네.”

유건평의 나직한 한 마디에 허리는 직각이 됐다.

“건평아.”

“예, 사숙.”

“화북장에 도착하면 관도들은 외곽에서 즐기라 하고,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정표는 외곽에서 관도들을 좀 챙겨주거라.”

맹염채의 말에 유건평과 정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천막촌에 도착했고, 이제부터는 걸어야 했다.

이훤은 관도들에게로 돌아간 후부터 맹염채와 이대제자들을 살폈다.

그때 누군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이훤이지. 그제는 고마웠어. 네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생각만 해도······.”

이훤은 몰랐지만, 상대는 용무관도였다. 하나 그것을 알 리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서늘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너 돈 많아?”

용무관도는 눈을 끔뻑였다.

“아, 아니.”

“그럼 꺼져.”

지금은 맹염채의 행적을 쫓는 것이 우선이다.

용무관도는 멀어지는 이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곁으로 동료들이 다가왔다.

“야! 뭐래? 좀 친하게 지내자고 해봤어?”

“돈 있냐고 묻던데? 없다니까 꺼지라더라.”

“뭐야? 좋게 봤는데 성질이 더럽네.”

그때 가만히 있던 관도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이훤에게 가슴을 걷어차인 관도였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우리를 일깨우려는 것 같아.”

“너는 얻어맞기까지 했으면 그런 말이 나와?”

“우리는 화산의 문도가 되기를 꿈꾸잖아. 그러려면 강해져야 해. 더 열심히 하고, 더 치열하게 매달려야 해. 요즘 화산의 분위기를 봐봐. 문도가 되려면 뭐가 필요하지?”

“돈, 그리고 자질?”

관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에게 돈이 없다면 실력을 키우라는 뜻으로 말한 게 분명해.”

“너무 네 마음대로 해석하는 거 아니야?”

“생각해 봐. 이훤은 우리를 몇 번이나 무시했지만, 실력을 탓하지 않았어. 나는 우리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라 믿는다. 저기를 봐봐. 사마충이라지? 저 녀석은 이훤과 어울리기 위해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수련을 한단다. 이훤이 저렇게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는 걸 본 적 있어? 합당한 자격을 갖춘 후 우리가 다가서면 분명 친해질 수 있을 거다.”

다른 관도들은 이훤과 사마충의 모습을 보다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마충이 했는데 우리가 못할 건 없지.”

“이훤이라면 장차 화산의 문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평생 봐야 할 사이인데 우리도 뒤쳐질 수 없지.”

“가자! 수련하러 가자!”

“그래, 가자! 가자!”

사마충은 떠들썩하게 자리를 뜨는 용무관도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훤은 사마충의 턱을 억지로 잡아당겨 얼굴을 마주했다.

“돈 좀 줘봐. 빨리.”

이훤의 재촉에 사마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포대웅이 황급히 달려오더니 소매에서 조막만한 주머니를 꺼냈다.

“다 내 놔.”

“우리도 사 먹어야 하는데······.”

포대웅은 소매를 뒤집힌 채 비상금을 탈탈 털리고는 울먹였다. 하나 이훤이 눈을 흘기는 순간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런데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런가. 소화가 안 되네. 그냥 저녁이나 먹어야겠다.”

이훤은 두 사람을 뒤로 하고 황급히 천막 사이를 가로질렀다. 다행히 맹염채와 유건평은 아직 정문을 지나지 않았다.

“대협! 대협!”

아직은 정식 문도가 아니기에 사문의 호칭을 쓸 수 없다. 하나 맹염채는 이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을 기다려줬다.

“이훤이라고 했던가. 무슨 일이더냐?”

젠장! 일대제자에게 이름을 각인시켰네.

이훤은 속내를 숨기고 헤죽 웃으며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혹시 안에서 필요하실까 해서요.”

“크하하하! 내게 잘 보이려는 게냐? 그래봤자 소용없단다. 초도각의 일은 모두 이 녀석과 소요자의 권한이거든. 그래도 마음만은 받으마.”

강호의 고수가 되면 푼돈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이름값만으로도 술과 밥을 내어줄 사람들이 줄을 섰다. 특히 정파의 명망 높은 고수라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심지어 이곳은 맹염채의 친우인 은호탁의 장원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훤이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린 까닭은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때 서늘한 시선이 귓가에 꽂혔다.

유건평이다.

그는 이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가 하는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 이곳에서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재밌게 즐기고 있거라.”

맹염채와 유건평은 정문을 지났다.

이훤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을 배웅했다.

하나 눈동자는 슬그머니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쪽은 가주의 처소가 아닌데. 제 삼의 장소에서 만나려는 건가. 어! 저건······.’

마당 한 쪽에서 맹염채를 기다리는 자들이 보였다. 방갓을 깊이 눌러 썼고, 녹빛 장삼에 장검을 한 자루씩 패용했다. 하나 이훤은 회귀 전의 경험으로 저들이 종남파의 무인임을 알아차렸다.

‘화산과 종남, 두 곳과 동시에 열리는 회합은······.’

끼이익-

문이 닫히면서 화북장 내부의 고즈넉함은 사라지고, 천막촌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온 몸을 휘감았다.

‘열심히 하시고, 나는 나대로 열심히.’

이훤은 발걸음도 가볍게 관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청색비 정표는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관도들을 풀어줬다.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놀고, 적당히 즐겨라. 다만 화산의 이름을 무겁게 여기고, 행동하여라. 알겠느냐?”

“예!”

이훤은 따로 움직였다.

그가 취객들이 모여서 알음알음 노름을 하는 곳으로 향했다. 정표는 ‘적당히’를 강조했지만, 이훤은 누구보다 눈에 띄게 놀 생각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껏 눈도장을 찍어놓는다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의심받지 않으리라.

“형장! 그 술, 나도 함께 마십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누구보고 형장이래?”

돈 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그래서 안 마실 거요?”

취객들은 이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줬다.

“하하하! 술 좋아하면 사해가 동도지. 내가 실수를 했으니 자네의 동생이 되어 석 잔의 술을 받겠네.”

이훤은 술병을 받고, 따라주는 대신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목울대만 꿀꺽이며 한 병을 통째로 비워버렸다.

“크아! 좋다.”

이것만은 진심이다.

그리고 그가 돈주머니를 푸는 순간 죽마고우가 스무 명 정도 늘어났다.

< 9, 역린(逆鱗).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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