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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9화 (19/226)

< 9, 역린(逆鱗). >

9, 역린(逆鱗).

“넌 뭐냐?”

골목 뒤를 지키던 왈패가 한껏 얼굴을 구겼다.

이훤은 잰걸음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이 새끼야! 뭐냐고?”

왈패가 뒷걸음질 치는 사이 바닥의 돌을 낚아챈 후 벽을 박찼다.

쇄애액!

이훤은 돌을 던졌다.

왈패는 생각보다 느린 속도에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한데 이훤의 얼굴이 정면에서 보였다. 자세를 한껏 낮춘 채 왈패의 지척에 이른 게다. 놀란 놈의 쇄골에 지압봉을 찍었다.

콰직!

쇄골이 부러지는 소리가 울릴 때 이훤은 달리던 기세 그대로 미끄러지며 놈의 배후를 점했다. 그리고 무릎 뒤쪽을 향해 지압봉을 꽂아 넣었다. 혈륜을 동원한 일격에 지압봉은 절반이나 무릎에 꽂혔다.

“으아아악!”

뒤늦게 왈패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늘 옆 통나무 위에 걸터앉은 놈을 제외하면 여덟이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방갓을 깊이 눌러썼다.

“으으으.”

구원자라 여겼던 것일까.

두들겨 맞고 있던 세 명이 기다시피 다가왔다.

이훤의 시선이 슬쩍 닿았다.

그들은 초도각 산하 용무관의 관도였다.

정무관과 진무관이 돈과 인성, 자질을 본다면 용무관은 철저하게 근골과 자질로 평가됐다. 그렇기에 초도각 내에서도 화산의 문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일 년 차 초도각의 관도라면 힘만 기른 멍청이나 다름없다. 실전을 거치지도 않았고, 제대로 힘을 배분하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살인까지 불사하는 왈패들에게는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용무관의 관도는 구원자를 향해 떨리는 손을 모았다.

“대협. 저, 저는 초······.”

이훤은 관도를 후려쳤다.

가슴팍을 얻어맞은 관도가 튕겨나갔다.

관도들은 영문 모를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 이훤은 관도가 비킨 자리로 향했고, 부러진 목검을 주워들었다. 애초에 무기를 챙기기 위해 시선을 줬을 뿐이다.

“어디서 보냈나?”

꼴에 대장이랍시고, 왈패 놈이 목소리를 깔았다.

하지만 이훤은 대꾸하지 않았고, 오히려 걸음을 빨리했다. 한낱 이름도 없는 왈패들에게 자신의 역린을 논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깟 놈들을 벌주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이유도 없다.

‘거슬리면 벤다.’

이것이 절름발이였던 이훤의 생존철학이었다.

탁! 탁!

발걸음이 가볍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절름발이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시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다리의 이점이 깊어질수록 분노와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죽여!”

대장의 외침에 왈패들은 동료가 당했음에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과연 화산 인근에서 왈패 짓을 할 만큼 밑바닥 종자들이다.

“후우.”

길게 숨을 흘리는 순간 온 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이 순간만은 추위도 이훤을 막을 수 없었고, 부러진 목검은 신병이기를 방불케 할 만큼 위협적이다.

‘무공은 쓰지 않으려 했건만······.’

이훤은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튕겨나갔다.

무공을 쓰면 화산의 관심을 끈다.

그것만은 피하려 했다.

하나 저것들과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 최악의 경우 누군가 찾아올 수도 있는 노릇이다.

파팟!

칠각보(七角步)라는 것이다.

상승 무학은 아니지만, 운용 자체가 어렵지 않아 어린 시절 사용했다. 무릎 관절을 비틀 듯 전방으로 달려 나가는 순간 고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아직은 육신이 혈륜의 힘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혈륜은 몸을 달궈 한순간에 고통을 상쇄시켰다.

휘리릭!

이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왈패를 마주하는 순간 부러진 목검을 역수로 쥐었다. 거칠게 부러진 목검의 결은 톱날처럼 날카롭다. 어깨로 놈의 가슴팍을 밀친 후 그대로 무릎 뒤를 쑤셨다.

촤악!

핏물이 튀기며 한 놈이 주저앉았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면 한순간 멈칫하게 된다. 쓰러진 놈 곁에 있던 왈패들이 그러했다. 가볍게 두 놈의 무릎 뒤를 긁어버렸다.

절름발이 시절 펼쳤던 칠각보와는 격이 달랐다.

그때는 대성을 했음에도 억지로 펼쳤다면, 지금은 성취가 낮음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퍽!

“아악!”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부러진 목검의 결이 어느새 뭉툭하게 변했다.

무릎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놈이 떨어트린 단도를 잡았다. 낚아채는 순간 역으로 쥐었고, 쓰러진 놈을 억지로 일으켰다. 손을 놓는 순간 놈이 주저앉았고, 그 사이를 노려 무릎 뒤를 베었다.

촤아악!

이훤은 손바닥 보다 조금 긴 단도를 휘돌리며 다시 한 번 내달렸다. 차디찬 바람은 상쾌했고, 두 다리로 밀어내는 대지의 반발력은 그를 가볍게 했다.

“어! 어!”

이쯤 되니 왈패들도 뭐가 잘못됐다고 느꼈으리라.

처음부터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뻔했다.

이훤의 싸움은 강호의 고수보다 뒷골목 흑도처럼 투박하고, 거칠었다. 별다른 기술 없이 효율적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건 왈패들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그러니 상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잡지 못한 채 이훤을 마주해야 했다.

단도라서 참 잘 됐다.

몸을 돌린 놈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동료와 같은 신세로 만들어줬다. 녹슨 녀석 치고는 제법 베는 맛이 충만했다. 여섯 번째 놈은 넋을 놓았고, 일곱 번 째 놈은 대장을 쳐다봤으며, 마지막 녀석은 도망치려다 무릎 뒤를 잘렸다.

남은 건 한 놈.

고만고만한 놈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했을 뿐이다.

그는 한 쪽 눈가의 기다란 흉터가 무색할 만큼 구르듯 통나무 아래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

이훤은 그대로 두목의 턱을 걷어찬 후 놈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 뒤에 비수를 있는 힘껏 꽂아 넣은 후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끈했던 열기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훤은 공터 곳곳에서 신음과 비명을 흘리는 왈패들을 보며 물끄러미 응시했다. 뒤탈이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며 그 안에는 용무관도들 생사까지 포함되어 있는 상태였다. 역린을 자극 받아 손속의 잔인함은 물론이고, 무공까지 사용했다. 자칫 잘못되면 귀찮아질 공산이 농후했다.

‘흐음, 화북장에 가야 하는데 말이지.’

불현 듯 살인멸구(殺人滅口)를 떠올렸다.

모두 죽이면 오늘의 일은 묻힌다.

하지만 맹염채를 비롯한 이대제자들은 용무관도들의 죽음을 좌시하지 않을 게다. 결국 용의자를 찾다보면 하오문과 개방에도 의뢰가 들어갈 것이고, 자칫하면 이훤에게까지 혐의가 돌아올 터였다. 무엇보다 이런 일로 화북장에 가지 못한다면 큰 손해가 아닌가.

갑작스레 회귀 전 취마의 삶이 떠올랐다.

죽이고 싶으면 죽였고, 버리고 싶으면 버렸으며, 마시고 싶으면 마셨다. 세상의 법도와 규칙은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았다.

그런 삶이 취마였고, 광야제의 전부가 아니던가.

‘차라리.’

이대로 어디론가 떠나버릴까도 생각했다.

술도 마음대로 마시고,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천공혈륜겁을 수련하는 게다. 초도각도, 유건평도 신경쓰지 않고 느긋하게 말이다.

하나 금세 포기했다.

술은 돈이 있어야 마시고, 강호에서 적당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안전하게 수련할 수 있는 곳이 하늘 아래 어디 있겠는가.

약자에게 있어서 강호란 지옥이다.

이훤은 천공혈륜겁을 가졌을 뿐 고수가 아니지 않은가.

일 성의 성취로는 뒷골목 왈패들을 상대하는 것이 고작이다. 자연스레 회귀 전 화산을 등졌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도망친 이후 하루도 편안히 잠들 수 없었다.

객잔의 점소이도, 산속의 나무꾼도 해가 지면 돌아갈 곳이 있을 터였다. 하나 이훤은 죽는 그 순간까지 천하를 떠돌아야 했다. 뿌리가 없었고, 엉덩이를 붙일 공간이 없었다.

‘진짜 빨리 강해지든가 해야지.’

오늘 따라 술 한 잔이 간절했다.

하루 빨리 기연에 연연하지 않는 절대고수가 되어 떵떵거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훤은 해맑게 웃으며 용무관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구하러 왔어. 이제 돌아가자.”

*

이훤은 유건평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한 차례 폭풍이 몰아친 듯 용무관도 세 명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 유건평은 탁자에 앉은 채 식은 찻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용무관도들 향해 손을 내저은 후 이훤을 향해 말했다.

“앉아라.”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독대는 불편한데.’

유건평의 성격 상 공과(功過)는 명확했다.

어려움에 처한 동문을 구한 것은 공로였고, 사고를 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으니 과실이다. 하나 공로로 과실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앉으라고 했다.”

이훤이 맞은편에 앉자마자 유건평이 입을 열었다.

“묻겠다.”

이미 일을 저지를 때부터 사후처리를 염두에 뒀다.

설명과 변명, 거기에 비밀 한 숟가락을 섞으면 무탈할 것이라 여겼다. 무공에 대한 부분은 가전무공이라고 얼버무리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하오문에 다녀온 사실만 걸리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나 유건평의 질문은 이훤의 예상을 벗어났다.

“화산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얼떨결에 바보처럼 반문을 했을 정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의표를 찔린 기분이다.

“어려운 질문이더냐? 네 영악함을 발휘해도 좋다. 아무렇게나 대답해보렴.”

마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다.

이훤은 유건평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조금 전의 일은 묻지 않으십니까?”

하나 유건평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왈패들에게 맞았다고? 듣자하니 주루 근처에서 여인을 납치하려던 왈패들과 시비가 붙었다는군. 석회를 뿌려 시야를 가린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석회의 흔적은 내가 확인했다. 왈패를 두들겨 팼다고? 잘했다. 무공을 숨겼더구나. 원가휘를 이길 때 몸놀림은 엉망이었지만, 실전을 거친 흔적이 역력했다. 게다가 초도각주의 말에 의하면 숨겨둔 재주가 꽤 괜찮다고 하더구나.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그 순간 이훤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상대방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오늘 일이 아니라 이훤 그 자체에.

“크흠, 그보다 제 손속이 너무 과하지는 않았나요.”

유건평은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잘했다. 양민의 고혈을 빨던 버러지들을 쉽게 죽이는 것이야 말로 자비를 베푸는 거지.”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다시 물어야 하느냐?”

이쯤 되면 피할 수가 없다.

“호불호를 물어보신다면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솔직한 속내였다.

화산파를 원망하기도 했고, 화산 자체를 꺼려하기도 했다. 화산을 떠난 후 노비로 팔려가기도 했고, 절름발이라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던가. 하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을 절름발이로 만든 건 원가휘였고, 놈의 사주를 받은 의원이었다.

결국 이훤에게 필요한 건 원망의 대상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화산파는 할 만큼 했다.

능력도 없고, 뒷배도 없는 초도각의 말단 관도를 치료하기 위해 많은 약을 썼고, 석 달 가까이 의당을 내어줬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뗄 정도 없고, 붙일 정도 없는 상태였다.

“화산이 쇠락했다고 해도 명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빈 말이라도 할 법 하거늘 참으로 영악한 놈이로다.”

유건평은 그 말을 끝으로 엄지와 검지로 돌리던 술잔을 튕겼다.

핑-

팽이처럼 돌던 잔이 멈추려 할 때마다 가볍게 검지를 내밀었다. 술잔은 일정한 속도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회전했다.

기(氣)를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다.

거기에 더하여 자신의 힘을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절정의 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였지만, 지금의 이훤에게는 그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숨긴 무공을 썼으니 이제는 어쩔 생각이냐?”

“······.”

“녀석들에게 듣자하니 보법의 형은 갖췄으나, 싸움 자체는 뒷골목 왈패들 같이 거칠다고 하더구나. 자! 그럼 이제 보법만 드러낼 것이냐? 아니면 이 기회에 모든 걸 내비치겠냐? 그도 아니라면 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흉내를 내며 허송세월을 보낼 테냐?”

유건평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훤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숨기는 것이 무의미했다. 어차피 유건평은 이훤의 무공을 이류 정도로 예상할 터였다. 차라리 조금은 어울려 주는 쪽이 순탄하리라.

“아직 모르겠습니다.”

탁!

술잔이 멈췄다.

유건평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빨리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인내심이 다하면 본산에 청을 해서라도 데리고 갈 수 있어.”

호감을 표시하는 방법이 너무 거칠었다.

나중에는 따귀를 때리며 그만 맞고 싶으면 제자가 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훤은 슬쩍 상체를 뒤로 빼며 말했다.

“저는 아직 화산의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 유건평은 이훤의 되바라진 도발에도 웃기만 했다.

“그래서 다행이다. 아직까지는 경쟁자가 없으니까.”

< 9, 역린(逆鱗).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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