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전설의 술, 또 등장. (2) >
8, 전설의 술, 또 등장. (2)
화북장주인 은호탁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논할 것처럼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하나 이훤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잇지 못했다. 회귀 전에는 귓등으로 흘렸던 정보가 비온 뒤의 죽순처럼 솟구쳤다.
‘화북장, 금분세수, 그리고 뭐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회귀 전 이 시기의 이훤은 화산을 내려오지도 못한 말단 관도였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소식은 전해 들었으며 진위 파악도 불가능했다.
‘엄청 좋은 거였는데.’
이훤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만 가물가물할 뿐 선명하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쯧, 하긴 정신이 없기는 했지.’
죽자마자 이십 년 전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가 비무대였다.
거기서 철천지원수였던 원가휘를 만났고, 놈을 쓰러트린 후에는 기연을 빼앗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후에는 천공혈륜겁의 성취를 3성까지 끌어올린 후 천하를 주유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립한 후의 행적은 이미 짜놓았다.
한데 이 시기의 일만은 명확하게 정리한 적이 없다.
‘원가휘의 기연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으니까. 젠장! 뭐였지?’
정신을 집중하던 중 진무관도들의 대화가 들린 건 기적에 가까웠다.
“원가휘는 언제쯤 의당에서 나온데?”
“세 달은 걸릴 걸. 아마 입춘까지는 요양해야 할 거야.”
이훤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입춘! 그래, 나도 그맘때쯤 나왔었지.’
회귀 전 이훤이 의당에서 돌아왔을 때 초도각은 어수선했다. 화산파와 인연이 있는 장원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심지어 장주가 금분세수까지 했는데 혈사를 당했다며 안타까워했다.
‘화북장이다!’
실마리를 찾는 순간 희미했던 기억의 편린이 조금씩 맞춰졌다. 한 개에 한 개를 더하는 순간 두 개를 덧붙일 수 있었고, 이어 큰 줄기가 완성됐다.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시 화북장의 멸문은 무림맹의 관심까지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분세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멸문을 당한 상황이다. 강호의 법도를 위해서라도 무림맹과 화산파, 종남파까지 합류해서 혈사를 조사했다.
‘빙화초의 흔적이 나왔다고 했지!’
북해빙궁의 신물 중 하나인 빙화초(氷花楚)는 얼음 꽃의 형상을 한 모형이다.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시원하게 만들고, 깨지면 주변 일대를 얼린다고 했다.
그 흔적이 나타났다.
결국 보물로 인한 혈사로 결론을 내렸다.
자격 없는 자가 지닌 보물은 화근이 된다는 강호의 오래된 격언만 회자됐을 뿐이다.
하나 이훤에게 있어서 빙화초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육태천화서봉주처럼 빙화초도 제대로 관리하면 인세에 드문 명주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 또한 십수 년 후 북해빙궁이 무림맹과 교류를 시작할 때 선물로 건넨 술로 인해 알려졌다. 취마라 불리던 이훤이 무림맹의 담을 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나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무림맹주의 처소를 뒤질 수는 없었다. 탈마와 함께 했음에도 겨우 술을 제조하는 비법만 겨우 건졌을 뿐이다.
‘그걸 만들어서 마시면 하루아침에 삼 성의 경지도 불가능하지 않아!’
이훤은 눈을 빛냈다.
그는 육대괴마 중에서도 탈마와 가장 친했다. 어깨 너머로 배운 도둑질의 경력만 해도 십 년은 족히 될 터였다.
‘훔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내딛던 걸음이다. 하나 지금은 선두에 선 맹염채보다 앞장서서 걷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때 유건평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늘은 이곳에서 쉰다!”
화산의 문도들은 객잔에 짐을 풀고, 각자의 시간을 허락받았다.
“이곳은 화산의 근교이니 익숙할 게다. 석식 이후 한 시진 정도 자유 시간을 줄 테니 마을을 구경하도록 해라.”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리 화산 근처의 마을이고, 사람들이 신선을 보듯 예를 표했지만 너무 허술한 것이 아닐까 싶다.
화산의 위명이 그 정도나 되는 것일까?
회귀 전 화산의 천덕꾸러기였던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관도들은 환호성을 지르지 못할 뿐 주먹을 불끈 쥐며 반겼다.
“수련이군.”
고독한 검객 놀이에 푹 빠진 사마충을 제외하면.
“아! 힘들어.”
이훤과 사마충의 짐까지 짊어진 포대웅을 빼면.
맹염채는 이층 방으로 향했고, 유건평과 청색비 정표는 후원으로 향했다. 아마도 화산을 내려오며 다퉜던 무리에 대한 비무를 할 것이다. 반면 도학사인 청요자는 근방의 학당으로 떠났다. 학당을 다니는 꼬마들의 고막에서 피가 철철 흐를 것을 떠올리면서 명복을 빌어줬다.
“충이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라는데.”
사마충의 명령을 받은 포대웅의 물음이다.
이훤은 손을 내저었다.
“나는 할 일이 있어.”
기왕지사 하산한 김에 확인해야 할 사안이 있다.
저녁을 먹고, 슬그머니 객잔을 빠져나왔다.
그는 마을의 초입으로 향했다.
그리고 초입에 위치한 표지석에서 흔적을 찾았다.
‘역시 화산 근처에 이놈들이 없을 리 없지.’
이훤은 입꼬리를 올린 후 발길을 돌렸다.
그는 마을이 익숙한 듯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았고, 골목길 또한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준비했던 방갓을 쓰고, 목도리를 끌어올려 하관을 가렸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도축장이다.
“고기 다 팔았수.”
상체를 드러낸 채 칼에 묻은 피를 씻던 장년인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이훤은 괘념치 않고 거리를 좁히며 읊조렸다.
“겨울바람에 삭힌 오리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북경의 오리는 비교도 할 수 없다지.”
장년인이 멈칫했다.
“오리 고기가 다 그 맛이지. 별 차이 없소.”
“나는 오리의 왼쪽 다리를 좋아하오.”
이훤의 영문 모를 소리에 장년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군. 나는 오른 다리를 좋아하는데. 사이좋게 먹을 수 있겠구려. 어디서 왔소?”
“남쪽 추운 곳.”
장년인은 칼을 내려놓고 광목천으로 손을 닦았다.
“멀리서 왔구려. 들어오시오. 차나 한 잔 내어드리리다.”
이훤은 도축장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문 뒤에는 칼을 든 자가 대기했고, 방의 모서리마다 그림자에 몸을 숨긴 자들이 손을 소매에 넣은 채 출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갑 급이 좋긴 하군.’
장년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장비 치워라. 갑 급 고객이시다. 정중하게 모셔라.”
그러자 무인들이 물러나며 도축장 뒤편의 문을 열어줬다. 그곳에는 도축장과 어울리지 않는 행색의 문사가 대기 중이다.
그는 만만에 웃음을 띈 채 말했다.
“하오문 화음 지부의 장이라 합니다. 갑 급 고객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훤은 그를 따라 움직였다.
회귀 전 이훤은 하오문의 중요 고객 중 한 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에 퍼져 있는 명주(銘酒)의 위치를 어찌 한 사람이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큰 돈을 들여 술의 원산지를 찾고, 장인을 발견했다.
그렇게 얻어낸 자격이 하오문 갑 급 고객인 셈이다.
한데 갑 급의 신분이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통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본래 하오문은 음어를 주기적으로 바꿨다. 그러나 갑 급의 믿을 수 있는 고객에게는 동일한 음어만을 사용했다. 회귀 전 이훤이 갑 급의 음어를 들을 때 하오문 강남 지단주는 삼십 년 간 음어가 바뀌지 않았음을 자랑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한 번도 음어가 흘러나간 적이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 말 이제는 믿어주지.’
이훤은 빙긋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장 문사는 차를 내오며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마을에 드나드는 분들은 모두 확인을 하고 있는데 고객께서는 은밀하게 오셨나보군요.”
저들은 화산의 도착을 알고 있을 것이고, 이훤의 인적사항도 파악했을 터였다. 하나 설마 어리고, 기록도 없는 이훤이 갑 급 고객일 것이라고는 죽을 때까지 알아차릴 수 없으리라.
“내 행적을 그대에게 알려야 하나?”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장 문사는 갑 급 고객에 대응방안에 맞춰 움직였다.
하오문의 갑 급 고객이라면 정사마(正邪魔)를 가리지 않고, 한가락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지부 전체가 가루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될는지요?”
“화북장주의 행적과 최근 화북장을 드나든 사람들의 명단을 주게.”
이훤의 말의 장 문사는 미간을 좁혔다.
“정확한 내용은 시일이 걸립니다. 언제까지 해드리면 될까요?”
배려하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훤의 행적을 파악하려는 수작이다.
“이런 허접한 곳에서 기대도 하지 않았네. 제대로 된 것을 보고자 했으면 여산의 화청궁으로 갔겠지.”
장 문사는 이훤이 섬서성의 총괄지부를 거론하는 순간 더욱 자세를 공손히 했다.
“말씀하신 것 위주로 준비하겠습니다.”
일각 후 이훤은 두툼한 종이 뭉치를 펼쳤다.
‘무림맹 시절 두각을 드러내다가 갑작스레 사 년 정도 한직에 머물렀네. 이 새끼들 이거 공작조 편성할 때 많이 쓰는 방식인데. 오호! 주로 장성 쪽의 관리직을 역임했네. 이러면 북해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좋은 정보를 발견했다.
‘그 후는 별 일없고,’
이훤은 종이를 넘기다가 장 문사의 시선을 느꼈다.
의뭉스러운 놈이라 끝까지 의구심을 풀지 않는 듯했다. 이훤은 혈륜을 휘돌리며 손가락 끝에 힘을 줬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탁자를 찍었다.
톡! 톡! 톡! 콰직!
열 번쯤 찍었을까.
탁자의 귀퉁이가 쪼개져서 흩어졌다.
“흠!”
장 문사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이훤은 그 후에야 마음 편히 정보를 살필 수 있었다.
‘화북장 시절은 별 것 없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미심쩍은 부분이 또 등장했다.
화북장주는 본래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는단다. 한데 금분세수를 준비하며 평소답지 않게 많은 돈을 쓰며 호사스러움을 자랑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의도하여 일부러 시선을 끄는 것일 터였다. 하여 이목을 끌기 전의 행적을 확인했다.
‘밤늦게 표국의 마차가 들어갔다고 나왔다라.’
온갖 물건을 옮기는 표국의 특성 상 시간과 물품에는 제한이 없었으리라. 하나 이미 빙화초를 염두에 뒀기에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좋아. 눈으로 먼저 확인하자.’
그리고 기회가 되면 훔친다.
이훤은 결심을 하고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를 터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문도들은 대인을 기억하여 조금의 결례도 범하지 않을 겁니다.”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는 치르지 않았다.
장 문사의 말처럼 갑 급 고객은 첫 방문 지부와의 거래가 무료였다.
“훗! 영여광주를 믿겠네.”
영여광주(影如光主)는 ‘그림자는 빛의 주인과 같다는 뜻’으로 하오문주를 의미했다. 그리고 갑 급 고객이 떠날 때 무료로 정보를 제공했음에 감사하는 의미로 남겨야 하는 음어였다.
장 문사는 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예를 다해서 보내드려라.”
이훤은 객잔으로 돌아가며 히죽 웃었다.
강제로 시작된 하산이 마치 기연을 찾으러 가는 여행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음조차 기분 좋게 들려왔다.
“이 새끼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놈들을 생각하니 부럽기만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술만 마시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대 화산의 문도가 될!”
이훤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대 화산의 문도니까 누가 됐든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어린 새끼들이 남의 구역에 와서! 어! 뒈지고 싶냐?”
뒷골목 왈패들에게 얻어맞는 걸 보니 화산의 문도라는 건 거짓말인 듯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일에 쓸데없이 개입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한 시라도 빨리 화북장으로 향하고만 싶었다.
“죽어! 죽어!”
누군지 몰라도 오늘 일진이 사나웠나 보다. 하루의 울분을 쏟아내는 매타작 소리만으로도 희열이 전해졌다.
“아우, 추워! 얼른 돌아가서 뜨끈한 술 한 잔 해야겠다.”
이훤은 술 생각에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대형, 그냥 죽이면 뒤처리가 귀찮습니다. 애들이 이런 날씨에 산까지 가서 버리고 올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그냥 병신으로 만들어버리지요.”
“크하하! 그거 좋네. 야! 뒤꿈치를 잘라라. 감히 어르신을 앞에 두고 똑바로 서서 지껄이는 모양새가 참으로 버릇없어 보이더라.”
이훤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예이! 절름발이가 되면 구걸을 하러 와도 내쫓지는 않으마. 하지만 버릇없이 굴면 평생 두 발로 기어 다녀야 할 것이야!”
“크하하! 내 침이 곧 영약이니 맛 좋은 밥을 내어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절름발이 주제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지는 못하겠지.”
이훤은 걸음을 멈췄고, 그대로 돌아섰다.
꽈드득!
< 8, 전설의 술, 또 등장.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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