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3) >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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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의 중심지이자, 요처는 당연 진무궁(眞武宮)이다.
모든 대소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장소였다.
평상시에는 안건이 많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화산파가 비주류로 밀려난 이후 더더욱 그러했다. 구파가 화산을 비호하기는 했으나, 쇠락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여 오늘도 강호의 안위를 논하는 안건 대신 섬서성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일대제자인 만무각주가 발언권을 청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만무각(萬務閣)은 화산파의 대외업무 중 섬서성 쪽을 총괄했다.
“오늘 낮에 들어온 소식입니다. 화북장의 은 장주가 은퇴 날짜를 잡았답니다.”
장로들은 탄성을 흘렸다.
“허어, 은 장주라면 이제 갓 육십을 넘기지 않았는가. 벌써 은퇴를 하다니 늘그막에 본 손녀가 좋기는 한가보군.”
화북장주인 은호탁은 한 때 무림맹에 적을 두고, 이십 년 가까이 강호를 종횡한 명숙이다. 그는 화산파와 친분이 깊어 말년에 쉴 곳으로 섬서성을 택했다. 그리고 화산의 북쪽에 산다 하여 화북장(華北莊)을 세웠다. 최소한 화산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달려와 도와줄 정도의 친우였다. 그렇기에 장로들은 은호탁의 은퇴를 축하하며 담소를 나눴다. 그도 그럴 것이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는 말처럼 강호인의 말로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그러니 사지육신 멀쩡하게 말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복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다.
“공개적으로 알린 것으로 보아 금분세수를 하려는 셈인가?”
“그렇습니다.”
금분세수(金盆洗手)는 양 날의 검이다.
보통 자신의 은퇴를 공개적으로 널리 알린 후 길일을 받아 잔치를 연다. 그리고 금 대야에 손을 씻음으로 은퇴를 알렸다.
이 부분이 중요했다.
금으로 만든 대야에 손을 씻는 순간 강호의 은원은 모두 사라진다. 그렇기에 은혜든 원한이든 그 자리에서 모두 해결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니 악행을 저질렀던 자라면 금분세수와 같은 행위를 꿈도 꿀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삶에 자신 있는 자만이 만천하를 향해 은퇴를 고할 자격이 주어졌다.
장로들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은 장주라면 금분세수를 할 자격이 있지. 그렇다면 본파도 명예로운 은퇴를 축하하러 가야겠군.”
“칠 사제는 가야 할 테고, 축하단의 규모는 어느 정도 생각하는가?”
일대제자 중 일곱째인 맹염채는 폭소를 터트렸다.
“그럼요. 제가 가야지요.”
맹염채는 도가의 제자 치고는 체구가 좋았다.
무엇보다 거칠게 기른 수염으로 인해 도복만 벗으면 나무꾼처럼 보였다.
“은호탁, 그 친구는 돈을 빼면 볼 것이 없지. 그러니 몇 명을 데리고 가도 괘념치 않을 게야. 만무각주는 편하게 인원을 구성하게.”
축하하는 자리에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
하나 만무각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화북장에 가면 은 장주와의 인연을 생각하서 사나흘은 묵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오가는 시간까지 열흘 정도 걸립니다. 연초다 보니 본산 내에서 그 정도로 시간을 뺄 수 있는 제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장로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은 많은데 할 사람이 없다.
이 또한 화산의 쇠락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때 말석에 앉은 이가 손을 들었다.
초도각주였다.
본래 진무궁의 회의는 일대제자들만 참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초도각의 경우는 예외였다. 화산의 견습문도를 관리하는 일에 일대제자를 투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대제자가 각주를 맡았고, 진무궁 회의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소요자는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래 사질의 뜻은 어떠한가?”
그는 장문인의 허락을 받고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백례경에서 이르길 축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눈으로 끝난다 했습니다. 그러니 맹 사숙만 가신다고 해서 은 장주께 무례를 범하는 건 아니겠지요. 무엇보다 은 장주의 명성이면 손님도 많을 겁니다. 괜스레 많은 사람이 가서 번잡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빈말이지만 장로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장문인은 말 잘하는 사질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초도각주는 말을 덧붙였다.
“맹 사숙을 단주로 해서 이대제자 두엇 정도면 기본은 갖췄다 할 것입니다. 사백과 사숙들께서도 아실만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산의 도학이 맥을 이어가는 건 사질과 같은 사람들이 힘을 써주기 때문이야. 무리가 아니라면 들어주겠네.”
“이번 행렬에 초도각의 관도들도 동행했으면 합니다.”
장문인을 비롯해 장로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있는 이들은 초도각의 관도들을 문도라 여기지 않았다.
“흐음.”
“녀석들은 정식 문도가 아니지요. 하여 화산파의 무복을 입히지 않을 겁니다. 다만 세상 구경을 하며 눈을 넓히고, 가슴에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다면 본 파에도 손해는 아닐 것입니다. 속가의 제자들을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장문인은 장고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세상 구경하고, 맛있는 걸 먹어서 나쁠 건 없지. 다만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 사질이 선별하여 결정하게.”
초도각주는 고개를 숙이며 빙긋 웃었다.
“장문인과 여러 존장들의 배려에 감사를 표합니다.”
“별 말을. 그나저나 다른 안건은 없는가?”
그때 진무궁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이 기억하는 한 화산파의 경내에서 개를 끌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장문인. 노군께서 온 듯 합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장문인은 빙긋 웃었다.
“하하! 사형께서 어인 일로 연화봉에 오셨을 꼬.”
그는 장문인의 체통도 잊고, 진무궁을 뛰쳐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경계를 서던 문도들이 허리를 숙인 채 예를 표하고 있었다. 장문인은 예를 표하며 기분 좋게 외쳤다.
“대사형!”
노군(老君)이라 불린 노인은 장문인의 사형이자, 스스로 장문인의 자리를 포기한 기인이었다. 그는 유독 친분이 깊었던 사제를 보며 빙긋 웃은 후 대뜸 본론을 꺼냈다.
“하하! 반갑네. 그나저나 누가! 내 술을 훔쳐마셨네.”
장문인의 밝은 표정이 산산조각 났다.
노군에게 술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충격은 배가됐다. 하물며 자신을 찾아와 하소연을 할 정도면 평범한 술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연화봉을 떠나고, 십 년 만에 돌아와서 찾는 술이었다.
장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훔치다니요. 누가? 아니, 어떤 술을?”
“그 술을 훔쳐갔네. 내가 처음으로 만든 술! 삼십 년 전 자네와 함께 묻었던 그 술이 사라졌네.”
노군의 일갈에 장문인은 물론이고, 안에서 귀를 기울이던 장로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로들은 황급히 서로를 살폈다.
화산의 기풍 상 술을 권하지는 않으나, 금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장로들 중에도 술을 즐기는 자가 많았고, 제자에게 술을 가르친 이도 있었다.
‘아니지?’
‘미쳤는가. 설마 자네?’
‘제 명에 죽고 싶으면 그럴 리가 없지.’
장문인 마른 입술을 축이며 부정했다.
“사형, 저는 아닙니다.”
“알아. 자네였다면 이 녀석이 벌써 짖었겠지.”
장문인은 노군의 곁에 있는 대형견을 바라봤다.
삽살개처럼 땅에 끌릴 만큼 기다란 털을 늘어트렸다. 하나 덩치는 늑대에 비견할 만큼 거대했다. 아마 노군의 키가 조금만 작았다면 타고 다닐 수도 있을 터였다.
“아! 안주라면 금방 범인을 찾을 수 있겠군요.”
노군은 고개를 끄덕인 후 진무궁을 보며 말했다.
“그렇지. 술을 마신 놈은 이놈의 코를 피할 수 없어. 그러니 안에 있는 녀석들 좀 불러주게. 화산을 등진지 벌써 십 년, 존장들에게 부끄러워 차마 진무궁에는 들어갈 수가 없구나.”
장문인이 허락하자, 안에서 장로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왔다. 어린 시절 저마다 노군과의 즐거운 기억이 가득했다. 노군은 그런 사제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안주가 짖지 않는 한 저들 모두 용의선상을 벗어난 것이다.
“하하! 장로가 되었으면 체통 좀 지켜라.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게야? 너는 아직도 제자한테 속옷 빨래를 시킨다면서? 조심해라. 말년에 제자한테 버림받고, 울면서 찾아오지 마.”
장문인은 내심 안도했다.
행여 사제들 중 한 명이 범인이었다면 이처럼 화기애애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쨌든 술에 대한 집착만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좋은 사형이 아니던가.
“대사형, 진무궁이 불편하시면 제 처소로 가시지요. 제가 낙안봉으로 찾아간 것이 사 년 전입니다. 못 다한 얘기도 하시고······.”
노군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으로 미루세. 지금은 범인을 찾아야 해. 감히 그 술이 어떤 술인지 알고! 안주와 함께 화산의 경내를 몇 바퀴 돌 생각이야. 괜찮겠는가?”
장문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화산제일검께서 가시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범인을 반 죽여 놓고, 한 번 찾아오겠네. 그때 삼일 밤을 지새우며 담소를 나누세.”
노군은 그 말을 끝으로 추노꾼처럼 사방을 살피며 안주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저분께서 노군동주를 자처하시는 매화검주시군요.”
장문인은 초도각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삼십 년 전 혈유교가 발호하여 섬서성을 피로 물들일 때 홀로 대적하여 정파를 지켜내셨지.”
“세간에 알려지길 사대동천 중 노군동(老君洞)이 금지로 정해진 건 험준한 낙안봉의 출입을 막기 위함이라더군요. 하나 오늘 바람과 같으신 모습을 보니 낙안봉이 금지가 된 것도 대사백께서 노군동에 머물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장문인은 뿌듯함에 빙긋 웃었다.
“화산이 쇠락했다고 해도 유일하게 매화의 별호를 받으신 분이다. 그런 분께 낙안봉 정도는 떼어드려도 되지 않겠는가?”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초도각주는 본산을 등지고, 초도각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조만간 있을 강연 때 매화검주(梅花劍主)의 일화를 전하면 관도들도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은 장주의 은퇴식에는 누구를 보내야 할꼬?’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명 정도는 초도각에 도착하기 전에 골라낼 수 있었다.
<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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