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2) >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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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뛰었다.
아마 회귀 이후 이렇게 오래 뛴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피풍의를 풀고, 배자를 벗었다.
온 몸에 땀이 가득했다.
그래도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일성에 이르렀기에 한참을 달렸어도 지치지 않았다. 무조건 서현동에서 멀어지려다보니 알 수 없는 곳에 이르렀다. 나무는 대침을 거꾸로 박아놓은 것처럼 하늘을 찔렀고, 수풀은 무릎까지 차올랐다. 이러다가 해라도 지면 산속에 갇힌 채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아! 쓸데없이 바빠지네.”
이훤은 혀를 차며 주변을 살폈다.
회귀 전의 대부분을 도망치며 살다보니 산속에서 길을 찾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간단했다. 같은 종이면서 비슷한 크기의 풀과 관목을 뽑았다. 그리고 뿌리에 물기가 많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깐 걸었을 뿐임에도 물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뼈가 시릴 정도로 맑은 냇물을 발견했다.
이대로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분명 초도각이 나올 터였다.
“길 찾기야 우습지.”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일까.
천공혈륜겁을 수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때가 됐기 때문일까.
부지불식간에 허기가 밀려왔다.
이훤은 길을 찾은 김에 바위에 잠시 앉아 손목 굵기의 대나무 통을 열었다. 그 안에는 사마충이 간식으로 먹으라며 선물해준 육포가 가득했다.
장강 인근에서 없어서 못 판다는 육포였다.
고관대작이나 명문의 수뇌부들은 같은 무게의 은을 주고 사서 먹을 만큼 맛이 좋단다.
이훤은 육포를 꺼내려다 입맛을 다셨다.
본래 술안주로 먹었어야 하는 녀석이 아니던가.
“하아! 참자.”
새벽부터 양칠이 받아온 이십일향주가 침상 아래 잠들어 있을 터였다. 그 녀석을 따고, 이 녀석을 먹으면 금상첨화일 듯했다.
“그래, 잠깐 굶는다고 안 죽어.”
이훤은 육포 대신 손으로 냇물을 떴다.
목이나 축이고 돌아가려는 게다.
“아으으으으!”
냇물은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식도의 형태가 저절로 그려질 만큼 차가웠다. 두 번 마셨다가는 발끝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아우! 무슨 물이 이렇게 차가워?”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옮겼다.
하나 점차 빨라지던 걸음은 이내 느릿하게 변했고, 이내 아예 멈춰 섰다.
“음.”
추억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입안에서 느껴졌다.
“이건, 수수 냄새인데. 왜 시냇물에 수수 향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훤은 알 수 있다.
수수는 술의 원료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훤에게 수수향이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혀를 굴릴수록 표정이 밝게 변했다.
“보리 냄새도 나네. 콩도 넣었나? 그렇지! 콩이다.”
고금제일의 보검을 감정하듯 신중했다.
회귀 전 소마가 함정을 파놓은 취금향을 마실 때에도 이처럼 진지하지는 않았다.
“과일? 아니야. 나무껍질 쪽 같은데.”
이훤은 황급히 돌아서서 냇물을 퍼마셨다.
몸이 식어갈수록 표정은 밝다.
잠시 후 난제를 푼 사람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지! 이건 싸리나무다.”
엄청난 실마리를 잡았다.
싸리나무를 이용해 만든 술은 서봉주다.
서봉주(西鳳酒)는 백주(白酒)의 일종으로 맑고, 투명하며, 부드러운 맛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회귀 전 이훤도 산서성 인근을 지날 때면 빼놓지 않고 서봉주를 마시며 풍류를 논했다.
한데 평범한 서봉주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서봉주가 제아무리 명주라고 해도 냇물에 섞인 후 향을 뿜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운 술인가? 내가 모르는 조제법이 있을 리 없는데······.”
이훤은 단호했다.
회귀 전 호사가들은 취마보다 강한 자를 열 명 이상이라고 평했다. 그렇게 평이 박한 자들도 술을 논할 때만은 취마를 으뜸으로 쳤다.
이쯤 되면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훤은 지음(知音)을 찾은 것처럼 밝은 표정으로 냇가를 거슬러 올랐다.
상류를 오르다 보니 묘한 장소가 보였다.
냇물이 합쳐지면서 생겨난 작은 삼각지에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날벌레가 가득했다. 한겨울에 날벌레가 눈에 보일 정도로 모였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파팟!
잠시 후 천공혈륜겁이 이번 세상에 최초로 모습을 공개했다. 몸속의 피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뼈와 살을 응집시켰다.
그렇게 강해진 손으로 얼어붙은 땅을 팠다.
팍! 팍! 팍!
마치 곡괭이질을 하듯 땅이 움푹움푹 패였다.
그러던 중 한순간 회색 가루가 나타났다.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맛을 다셨다
‘있다. 있어!’
원가휘의 기연을 강탈할 때에도 이처럼 흥분되지는 않았다. 이훤은 조심스럽게 회색 가루를 걷어낸 후 거칠게 숨을 흘렸다. 회색 가루 아래 짚단 같이 보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싸리나무임을 알 수 있었다. 싸리나무 가지를 걷어내는 순간 폭발적인 주향이 휘몰아쳤다.
“아아! 이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주해라니!”
술꾼은 귀환 술이 담긴 통을 가리켜 주해(酒海)라 했다. 마개를 여는 순간 술의 바다가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이훤은 주해를 파내기 전 통을 살펴봤다.
계란 흰 자와 돼지 피를 접착제로 써서 만든 통이다. 이제야 이훤은 자신이 밝히지 못한 마지막 냄새의 출처가 계란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이훤은 잠시 후 한 숨을 흘렸다.
“아! 딱 봐도 삼십 년은 되어 보이는 걸?”
오랫동안 묻혀 있던 술통의 틈이 벌어지며 술 향기가 퍼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술도 조금씩 흘러나왔으리라. 술이 상하는 건 둘째 치고,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후우.”
이훤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술 냄새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알게 됐다.
눈앞의 술은 서봉주이되 서봉주가 아니었다.
회귀 전 이훤은 단순히 술을 마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술의 유례까지 해박했다. 술을 마시면서 할 수 있는 건 자랑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비전이 끊긴 육태천화서봉주다!”
그가 제조법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회귀 전 그가 술을 즐길 때만 해도 눈앞의 술은 제조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저 술을 마신 자들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훤은 몇 개의 시와 구절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남긴 기록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
“아아! 회귀하니까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어쩌면 눈앞의 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마지막 육태천화서봉주(六兌天花西鳳酒)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훤은 갑작스레 수전증이 생긴 것처럼 손을 떨며 주해를 꺼냈다. 밀봉된 마개를 뽑는 순간 이성이 날아갈 뻔했다.
그만큼 엄청난 향기였다.
그는 경건한 자세로 술병을 기울여 목구멍에 술을 흘려넣었다.
- 입 안에 머금는 순간 여섯 번 자극을 하고.
황홀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 마시는 순간 식도는 기름진 대지가 되니.
몸속에 퍼져나가는 열기를 느끼며 한 숨을 내쉬었다.
- 눈 내리는 어느 날 너를 만났도다.
이훤이 가장 좋아하는 시구(詩句)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아! 좋다.”
그리고 다시 주해를 기울이려 했다.
하나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반 병 이상 남았던 술을 어느새 다 마셔버린 것이다.
희미한 기억을 되새겨보니 방금 읊조렸던 시를 열 번 이상 더 외운 듯했다.
“한 겨울의 꿈과 같으니 다시 만나기 힘들다고 했었지. 그만큼 귀한 술이라 했어. 하나 아쉽지 않다.”
이훤은 웃었다.
시의 내용처럼 육태천화서봉주는 사라졌지만, 몸 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술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육태천화서봉주를 마신 기억이 선명했다.
이훤은 사마충이 준 육포를 질겅이며 읊조렸다.
“하아, 회귀하기를 잘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한데 반대편 저 멀리 서현동에서 들었던 개소리가 울렸다.
컹컹!
이훤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하! 저 놈의 개새끼! 내가 술안주로 잡아먹던가 해야지.’
<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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