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사부작. 사부작.
눈을 밟고 걸을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이훤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사부작거렸다.
“좋네.”
수목이 하얗게 변했지만, 조금도 춥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에는 천을 덧댄 방갓을 썼고, 무복과 솜을 넣은 배자(背子)까지 걸쳤다. 거기에 더하여 피풍의를 둘렀으니 방안에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모두 사마충이 신년 선물이라며 준비해준 것이다.
사마충과의 거래는 그렇게 끝났다.
가끔 녀석의 자세를 손봐주거나, 궁금한 것을 해결해주면 추가로 수당을 받는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이훤은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웃었다.
“진짜 좋구나.”
회귀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취마나 광야제라 불리며 모두가 두려워했지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언제나 적의 습격이나 살수의 접근을 살폈다. 심지어 동료라 부르던 자도 의심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술을 마시며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를 때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피곤한 삶이었다.
고수가 되기 전에는 더 심했다.
천공혈륜겁을 얻기 전에는 노비였으니 하루하루 살기 위해 애썼고, 얻은 후에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과정을 털어놓으면 매담자들이 몇 년 동안 떠들 만큼은 될 터였다.
그때 얻은 것이 처세술과 눈치, 화술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더라.
그중 최고가 바로.
“쯧, 노인네 복수할 때가 가관이었지.”
이훤은 옛일을 추억하며 혀를 찼다.
이름 모를 노인은 천공혈륜겁을 건넬 때 세 명을 죽여 달라고 했다. 하나 세 명을 죽이느라 보낸 시간만 오 년이다. 따지고 보면 길지 않은 인생에 취마라 불리며 제멋대로 산 건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한데 회귀 하고 나니 이처럼 좋을 수가 없다.
아무데서나 밥을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자고, 아무데서나 하고 싶은 걸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위험하거나, 쫓기지 않았다.
초도각의 관도들이 시비를 걸어봤자, 살심보다 우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엇보다 작은 귀찮음을 감수할 만큼 화산이라는 벽은 안정적이다.
그래, 안정에서 비롯된 여유.
회귀 전 이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그러니 눈 덮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슬슬 조심해야겠네.”
이훤은 저 멀리 우뚝 솟은 두툼한 봉우리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저곳이 바로 화산의 주봉(主峰)인 연화봉이다. 주로 본산이라 칭하는 화산파가 위치한 장소였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화산파의 제자를 만날 수도 있다.
하나 이훤은 주의할 뿐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화봉으로 향하는 길만 해도 수십 개였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또한 설령 마주한다고 해도 길을 잃었다고 하면 해결될 터였다. 어찌됐든 이훤은 여전히 초도각 산하 정무관의 하급관도가 아니던가.
“이쯤 해서 갈림길이 나올 텐데.”
이훤은 종이를 꺼냈다.
사마충에게 얻어낸 화산의 지형도였다.
물론 본산이나 화산오봉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그저 몇 개의 길이 그려졌고, 버려진 도관들의 위치를 그렸을 뿐이다.
“저기네.”
이훤은 히죽 웃으며 갈림길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수련을 위해 초도각을 나섰다.
혈륜은 육신에 완벽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고, 존재 유무조차 희미해졌다. 그것은 곧 천공혈륜겁의 수련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이기도 했다.
이훤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찾는 장소는 영산(靈山)의 영기(靈氣)가 뭉치는 곳이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는 명산을 돌아다니며 수련할 곳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무당산에 숨어들었다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했고, 숭산을 오르려다 매타작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중원오악 중 서악(西嶽)이라 불리는 도가의 명산이 아니던가. 화산파가 생기기 이전부터 수많은 구도자들이 화산에 굴을 파고, 도관을 지었다. 저마다 좋다고 생각하는 장소를 차지한 게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가 과거에는 천여 개에 이르렀다.
하나 이훤은 이 또한 고민하지 않았다.
그 많은 동굴과 도관은 모두 유명세를 잃었고, 사대동천(四大洞天)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곳에서 수련을 한 자들은 하나 같이 강호사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만큼 대단한 장소라면 당연히 영기가 가득할 터였다.
갈 곳은 이미 선택했다.
사대동천 중 노군동(老君洞)은 화산파의 금지인 낙안봉 아래였다. 무엇보다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접근이 쉽지 않을 만큼 험준한 곳에 자리했다.
‘거기 가려다가는 떨어져서 죽어.’
태극동(太極洞)의 위치는 화산파 본산인 연화봉 근처였다.
‘걸리면 인생이 꼬일 수도 있어.’
남은 곳이 왕자동과 서현동이다.
그중 서현동(西玄洞)이 초도각과 가장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도가의 사대동천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정도로 버려진 장소였다.
“다 온 것 같은데.”
잠시 후 쌓인 눈을 발로 밀어내니 거무스름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풀은 다른 곳과 달리 높고 무성한 나무가 드물었다. 게다가 흙은 퇴비라고 해도 좋을 만큼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회귀 전 영산을 찾아다니며 수련할 때마다 마주했던 광경이다. 어디선가 주변의 영기를 빨아들이면 일대는 황폐화가 진행됐다.
그 어디선가가 바로 서현동일 터였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훤은 넝쿨과 이끼 사이로 깊이 새겨진 서현동이라는 세 글자를 확인했다. 사대동천이라는 위명과 달리 서현동은 넓지 않았다. 대여섯 명이 들어가면 가득 찰 만큼 좁았고, 천장은 울퉁불퉁하게 깎인 돌로 인해 허리를 펼 수 없었다.
“훗! 다시 하는 건데도······.”
긴장이 되지 않는다.
그는 적당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스스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혈륜의 특성 상 별다른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반 쯤 감은 채 천공혈륜겁의 구결을 읊조리면 됐다.
고금을 통틀어 이처럼 쉬운 수련법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팔 성 이상은 해본 적이 없지만.’
이훤이 잡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혈륜은 몸을 뜨겁게 만들만큼 빠르게 휘몰아쳤다. 천공(天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혈륜(血輪)이 발동하는 순간 주변 대기가 요동을 치는 것만 같았다. 예전의 기억을 되새겨보면 자연지기를 흡수하는 과정이 이러했다.
솨아아아아아-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피풍의가 조금씩 펄럭였다. 이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 뿐 아니라 드러난 모든 부위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빨갛게 변했다.
솨아아아아아-
잠시 후 역순(逆順)으로 제 모습을 찾았다.
이훤이 눈을 뜨는 순간 예전과 같이 붉은 기운이 눈가를 한차례 물들였다가 사라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하나 당사자만은 확신했다.
‘이제 일 성이다.’
이훤은 회귀 전 팔 성에 도달할 때 여덟 번이나 이런 상황을 반복했음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성취가 오를수록 육체 개조는 물론이고, 환골탈태에 준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때 여기서 했으면 그래도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이훤은 눈이 쌓인 양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들어가기 전과 비교하면 이제 이각 정도 지났을 뿐이다. 회귀 전 일 성에 도달했던 시간보다 세 배 이상 빠른 듯했다.
이훤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쯧쯧, 이런 대단한 곳을 버려두니 화산파가 망하지.”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움켜쥐었다. 힘을 주는 순간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뼈와 근육의 밀도가 배가됐다.
“으으으.”
하나 돌멩이는 으깨지지 않았다.
회귀 전과 마찬가지였다.
대신 손목보다 조금 얇은 나무를 움켜쥐는 순간 파열음이 들려왔다.
콰직!
눈이 내린 탓에 물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으깨졌다.
앞으로는 목검 정도는 피하는 대신 잡아서 아예 부숴버려야겠다.
“나쁘지 않네.”
이훤은 미련 없이 서현동을 나섰다.
이제 이 성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눈에 띄지 않고, 은인자중하며 삶을 즐기면 될 터였다.
그러던 중 눈발을 뚫고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다.
“개소리?”
화산에서 개를 끌고 돌아다니는 자가 평범한 사람일 리 없다. 게다가 개는 외인의 침입을 눈치 챈 듯 쉴 새 없이 짖기 시작했다. 개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 속도가 경공을 펼치는 것처럼 빠르다.
‘뭐야? 저건!’
이훤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 돌을 밟고 뛰었다.
걸리는 순간 귀찮아진다.
< 7, 술 한 병에 세상이 변했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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