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취마(醉魔)의 정무관 점령. (2) >
5, 취마(醉魔)의 정무관 점령. (2)
*
이훤은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부드럽게 굴곡진 몸매에 향긋한 내음이 가득하다.
오래 전에 헤어졌던 연인을 마주한 듯했다.
그만큼 애절했기에 눈앞에 있음에도 섣불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혹여나 건드리는 순간 환영이었던 것처럼 안개가 되어 흩어질까 봐 두려웠다.
“아.”
야릇한 탄성이 절로 흘러나온다.
사마충은 인상을 쓰더니 우악스러운 손길로 호리병의 마개를 뽑았다.
“뭐, 뭐 해? 킁, 고사 지내?”
이훤은 한층 더 짙어진 주향에도 미간을 좁혔다.
“에라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놈아.”
“욕, 욕 하지 마!”
이훤은 사마충의 투덜거림을 귓등으로 흘린 채 술병을 받아들었다. 술 병을 잡고 주향을 깊이 들이마셨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청했던 술병이다.
하나 사마충은 포대웅에게 귀엣말을 했고, 잠시 후 술병이 눈앞에 나타났다. 출처를 물어보니 생필품을 운반하는 노인에게 뒷돈을 줬단다.
돈의 힘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막강했다.
이훤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한참동안 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다시 마개를 깊이 박아넣고 품 안에 술병을 챙겼다.
“아! 포대웅이 그러더라. 무복하고 생필품도 사제로 준비해준다며?”
사마충은 고개를 끄덕인 후 양칠을 보며 턱짓했다.
“쟤도?”
이훤은 양칠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뒤로 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 것만. 최고급으로.”
“알, 알았어. 그럼 거래대로······.”
사마충은 몸이 달았는지 당장 배움을 청했다.
이훤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그 전에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뭔데?”
검지로 입을 막았다.
“어?”
“말하지 마.”
사마충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은 한없이 진지하거늘 이훤은 아직도 장난을 친다고 여긴 게다. 하지만 이훤은 사마충이 불만을 토로할 사이도 없이 말을 덧붙였다.
“눈은 마음의 창이고, 입은 기운의 출구라 했어. 바른 구조에 적당한 힘으로 입을 여닫아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 운기조식 중 조식의 기본이야. 하지만 너는 말을 너무 더듬어. 사실 네가 말더듬이라는 건 너무 심한 단점이야. 우습게 보이는 건 둘째 치고, 운기조식을 해도 제대로 된 효과를 보기 힘들어.”
“말도, 후, 안 돼! 나를 가르친, 어! 무인은.”
이훤은 혀를 찼다.
“야! 돈 받고 가르치는 놈한테 뭘 바라는데?”
양칠은 술을 받고 가르치려는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항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신하게 입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잘 들어! 원가휘는 절대 고수가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도 마찬가지야. 나와 원가휘의 차이가 뭐냐고? 눈썰미와 호흡이다. 네가 입을 닫으면 호흡이 해결 돼? 그 이유로 부족해?”
물론 상당 부분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훤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상승 무공의 구결과 초절정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깨달음이 가득했다. 사마충을 손 봐서 원가휘를 이기게 만드는 건 혈륜으로 내공을 쌓는 것만큼이나 손쉬웠다.
‘말 더듬는 걸 듣는 것도 곤욕이야.’
사마충은 금세 설득됐다.
확실히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을 쥐락펴락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자! 지금부터 말하지 마.”
사마충은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양칠을 가리켰다.
“쟤, 쟤도! 어, 그러잖아.”
이훤은 어느새 입을 닫고 있는 양칠을 보며 혀를 찼다.
“쟤는 그냥 주눅이 들어서 그런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양칠은 언제부터인가 이훤에게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초도각에 입문한 이후 따돌림을 당하다 보니 말수가 적어졌을 뿐이다.
“양칠, 무도십팔칙을 외워봐.”
이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칠은 무도십팔칙을 눈으로 보고 읽는 것처럼 줄줄 외웠다.
“똑똑하네.”
양칠은 이훤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는 해야 내 수발을 들지.”
함박웃음은 지워지고, 울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쟤가 원가휘랑 싸울 것도 아니잖아. 내 거래 조건은 몇 가지 조언을 해주는 거야. 더 바라지 마라.”
잠시 후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일단 한 번 덤벼봐.”
이훤은 손바닥 길이의 나무토막을 신병(神兵)이라도 되는 것처럼 휘저으며 말했다.
사마충은 목검을 늘어트렸다가 한 순간 차올리며 덤볐다. 움직임이 관도들보다야 낫지만, 애초에 자랑할 만한 실력도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게 강검이네.”
이훤의 예상처럼 사마충의 검법은 정직했다. 대신 최소한의 힘을 사용하여 최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검로(劍路)였다.
하나 장단점이 명확했다.
맞으면 대박이지만, 안 맞으면 헛수고였다.
가볍게 피하면서 나무토막으로 사마충의 손목 안쪽을 눌렀다.
“으윽!”
사마충은 목검을 놓친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나 원가휘나 마찬가지야. 눈에 훤히 보여.”
“원래, 어! 원래 실력을 숨겼던 거야?”
“말하지 말라니까. 그저 예전부터 너희들을 유심히 지켜봤을 뿐이야.”
거짓말이다.
하나 사마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이훤의 말에 사마충은 인상을 썼다.
“어차피 원가휘는 봄까지 요양해야 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 방금 네 초식에서 손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력만 생겨도 충분해. 네 일검을 누가 막을 수 있겠어?”
이 또한 거짓말이다.
사마충은 얼굴을 붉히며 기분 좋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 그럼 내일! 어, 여기서?”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 백팔계 청소하러 가야 한다. 내일 점심 먹고 와.”
“알았어.”
사마충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고, 고마······.”
“우린 거래한 사이야. 그럼 감정은 넣지 말자.”
줄 건 주고, 받을 걸 받으면 되는 게다.
이훤은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삼 성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초도각을 떠날 예정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짐이 달라붙는 건 처음부터 사양하고 싶었다.
사마충이 갑작스레 소리를 질렀다.
“고마워하지 않겠다고 했어. 거래니까 으스대지 말라고 경고하려고 했다!”
어린 녀석이랑 얽히니까 벌써부터 피곤했다.
이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품 안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녀석을 깨워서 즐길 생각을 하니 어느새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네 이름은 앞으로 초향주야. 회귀해서 처음 함께 한 술이라는 의미지. 잘 부탁한다.”
그 날 밤 이훤은 초향주(初香酒)와 함께 뜨거운 시간을 보냈고, 어제와 다름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
백팔계(百八階)는 화산의 초입에서 초도각으로 향하는 백팔 개의 계단을 의미했다. 하나 화산파로 향하는 계단은 따로 있었고, 백팔계는 오롯이 초도각 때문에 만들어진 계단이다.
그러니 평상시에는 오가는 이가 전무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백팔계를 사용한 건 초도각의 입관식 때였다. 아마 졸업식이나 다음 기수가 입관하기 전까지는 버려진 채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백팔계는 살얼음이 끼고, 젖은 낙엽이 가득했으며, 관리가 되지 않아 울퉁불퉁했다.
“하여간 보여주기 식 공사가 다 이렇지.”
하지만 이훤에게는 오히려 좋은 수련 장소였다.
적당한 크기의 돌을 깔아놓고, 사이사이에 흙을 채웠다. 그러니 계단의 넓이와 크기는 제각각이었고, 겨울 날씨로 인해 미끄러웠다.
“아! 후끈하구만.”
계단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피가 격렬하게 회전했다.
이런 식으로 혈륜(血輪)이 혈도와 혈맥을 자극할수록 내공은 조금씩 쌓일 것이고, 몸뚱이 또한 저절로 체질 개선이 될 터였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유건평의 명령으로 인해 이훤이 청소 하는 시간에는 백팔계 출입이 금지됐다. 그렇기에 사마충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매일 같이 찾아왔다. 녀석의 빈틈을 없애고, 눈썰미를 기르는 일이 계속됐다. 확실히 사마충은 말수를 줄인 이후 몸놀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여섯 개의 초식을 펼치는 동안 호흡이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네. 하지만 네 번째 초식과 다섯 번째로 이어질 때 빈틈이 보여.”
“알아.”
녀석은 며칠 사이에 과묵하게 변했다.
필요한 말만 하고, 말이 길어질 것 같으면 아예 글을 써서 뜻을 전할 정도였다.
이훤은 사마충에게서 오늘 치 술을 받아들고 히죽 웃었다.
“반갑다. 네 이름은 십일향주야.”
사마충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오랜만에 길게 말을 건넸다.
“네가, 어! 의협이나, 우정을 따지면서 모두가 함께 성장하자는 말을 했으면. 큭, 믿지 않았을 거야.”
“뭐라는 거야?”
“세상은, 킁! 그렇게, 어! 아름답지 않으니까.”
이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초도각을 졸업하고 본산의 제자가 되는 애들이 몇이나 될까? 정무관은 글렀어. 진무관도 비슷할 걸. 용무관에서나 한 두어 명 입문하겠지. 강호의 명문거파라는 곳은 말이야.”
옛 일을 추억하듯 목소리에 깊이가 담겼다.
“비인부전이라 해서 자기들만의 기준으로 모든 걸 결정해.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곳이 아니야. 태생적으로······.”
이훤은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백팔계 중턱에서 낯선 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마충 또한 뒤늦게 관도들을 발견하고 목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네가 이훤이냐?”
이훤은 관도들의 소매에 새겨진 표식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진무관이냐?”
세 명의 관도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어, 그래. 원가휘가 안부 전하라더라.”
< 5, 취마(醉魔)의 정무관 점령.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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