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2) >
4,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2)
*
회귀 전의 일이다.
이훤은 화산파를 등졌을 때 빈털터리였다.
코딱지만한 단전과 이류검법이 될 법한 몇 개의 초식을 제외하면 가진 것이 없었다.
세상 물정에도 어두웠다.
호의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노비행이다.
몇 년 후 주인의 뒤통수를 짱돌로 내려치고, 다시 한 번 도망쳤다.
추노꾼과 사냥개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이훤은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이미 중상을 입고 생사가 불분명했다.
그는 아사 직전의 이훤에게 천공혈륜겁을 건넸다.
반 갑자의 내공은 노인이 주었고, 며칠 동안 밥을 굶은 이훤의 몸은 대법을 익히기에 최적화된 상태였다.
- 인체의 신비는 무한하다.
- 몸이 허약해지면 살아남기 위해 내공을 탐한다.
- 하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내공 또한 스스로를 지키기 때문이다.
- 허약한 몸은 기운의 덩어리인 내공을 이길 수 없다.
- 하지만 그때 구결을 왼다면 육신이 우위에 선다.
- 내공은 단전이 아니라 핏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 그래, 단전이 아니라 너 자체를 단전으로 삼는 것이다.
노인이 내공을 전수하며 알려준 과정이었다.
한데 듣는 것만으로도 방문좌도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천공혈륜겁을 어디서 얻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마교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마외도의 무공이니 익히지 않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파의 영역에서 마공을 익힌 채 돌아다니다가는 공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때 노인의 대꾸가 바로 우문현답이었다.
‘그런 논리라면 소림이 마도에서 빼앗아 장경각 안에 숨겨 놓은 비급은 모두 정공이냐고 되물으셨지.’
식견이 부족한 이훤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천공혈륜겁은 정사마(正邪魔)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제 사(四)의 무공이라고 이해할 뿐이다.
“내가 이해했다고 해서 남도 이해하는 건 아니지.”
이훤은 혈륜을 완성하자마자 양 손으로 눈을 비볐다.
동경과 수면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눈동자는 평소와 같았다.
‘다행히 전과 똑같군.’
그는 그제야 침상에 몸을 누인 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삼 성에 이르면 가장 먼저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핏속을 타고 흐르는 내력의 힘이 안구를 충혈 시켜 붉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화산을 떠나야 했다.
눈이 빨간 것을 좋게 볼 사람은 없다.
이훤조차 ‘누가 봐도 사파의 무공 같네.’라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짓지 않았던가. 하나 삼 성의 경지만으로도 강호를 종횡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때까지는 안심이야.’
방심이 아니라 안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공혈륜겁은 단전을 거치지 않고, 혈맥을 따라 내공을 휘돌렸다. 그러니 누군가 이훤의 맥문을 잡아 단전을 확인해도 천공혈륜겁의 존재는 밝힐 수 없다. 어찌됐든 단전이 텅 비었을 뿐 깨끗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지내는 것이 가능했다.
이훤은 기지개를 켠 후 중얼거렸다.
“자! 이제 수련을 해 볼까.”
동시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코를 골았고,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놀랍게도 이 또한 수련의 일환이다.
사람의 몸은 심장을 통해 끊임없이 피를 빨아들이고, 내뿜는다. 그러니 핏속에 담긴 내공 또한 하루 종일 알아서 혈도를 따라 움직였다.
즉,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성취가 올랐다.
밥을 먹어도, 똥을 싸도, 뛰어도, 걸어도, 누워서 잠을 자도 운기조식은 계속됐다. 아닌 말로 죽기 전까지는 알아서 성장하는 것이 바로 천공혈륜겁의 가장 큰 공능이었다.
“아! 좋아. 술 맛있어. 내가 다 마실 거야.”
밤새도록 기분 좋은 잠꼬대가 숙소 내를 맴돌았다.
*
회귀한 이후 가장 편하게 보낸 밤이었다.
최소한 천공혈륜겁에 입문한 이상 화산 내에서 눈 먼 칼에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밥, 세 공기 먹어야지.’
술을 못 마시는 만큼 밥으로 채워야겠다.
한데 며칠 사이 정무관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
“이훤이다. 이제 나왔네.”
“원가휘를 때린 게 미안해서 밥도 안 먹었다며?”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사람이었어?
“그건 모르겠고, 표정이 밝은데?”
“이 형은 좋은 사람이야. 이름만 멋있는 게 아니라고.”
“양칠, 네가 뭘 안다고 나서. 넌 빠져.”
이훤은 기분 좋게 숙소를 나섰다가 멈칫 했다.
그러고 보니 칠 일 동안 굶은 상태였다.
미소를 지우고, 어깨를 늘어트렸고, 흐느적거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엇! 너 살아 있었구나?”
식당의 책임자인 방 숙수가 아는 체를 하며 물었다.
“아, 네.”
한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양통이 네 편을 많이 들어줬어. 걱정도 많이 했고.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하렴.”
이훤은 밥그릇을 든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정무관주인 양통에 대한 기억은 돈을 밝히는 삼류 잡배가 전부였다. 그런 자가 편을 들어주고, 걱정을 해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꼴을 보라고.’
이훤은 식당 내부를 보고 혀를 찼다.
정무관도들은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쪽은 질 좋은 무복을 걸친 채 밥과 국을 양껏 먹었고, 다른 쪽은 여기저기 헤진 무복을 입고 끼니를 때웠다.
돈을 많이 바친 관도와 그렇지 않은 관도였다.
그리고 저렇게 나눠놓은 게 바로 양통이었다.
이훤은 자신의 그릇을 내려다봤다.
며칠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제법 많은 양을 담아줬다.
‘양통 주제에 감사는 개뿔!’
코웃음과 함께 양통에 대한 의문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계획대로 밥을 세 그릇 비웠다.
본래 초도각의 관도들은 오전에 수련을 하고, 낮에는 밭을 갈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겨울 날씨에는 밭을 일구는 대신 개인 정비를 허락했다.
재량껏 보내라는 의미였다.
‘낮잠이나 잘까?’
지금 이 순간에도 피는 온 몸을 휘돌았다.
그렇기에 뭘 해도 좋았다.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천공혈륜겁이 적응하도록 그냥 두는 편이 최선이다.
그렇기에 결론은 낮잠이다.
하나 이훤은 숙소를 코앞에 두고 미간을 좁혔다.
“야! 뭐하냐?”
낯선 녀석이 양칠의 뒷목을 잡고 욕을 퍼붓고 있었다.
“어! 이훤이네.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관도라는 것을 제외하면 생면부지인 놈이다.
이훤은 놈이 건들거리면서 말을 걸었지만, 양칠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식당 근처에 있지 않았냐?”
“어, 나? 응.”
“밥 먹을 때 안 보이던데.”
“그게······.”
대답은 관도에게서 나왔다.
“아! 내가 너 좀 찾으려고 대화 좀 했지. 네 옆방이라며? 그냥 밥 먹으러 갔다고 하면 될 텐데 말이야. 말을 안 하더라고.”
이훤은 그제야 관도를 바라봤다.
덩치도 좋고, 눈매도 부리부리했다.
힘깨나 쓰게 생긴 녀석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억에 없다.
“너 뭐냐?”
“같은 정무관 식구끼리 이러기야? 나 정무관 4호, 포대웅이잖아. 설마 며칠 골골 댔다더니 잊어버린 거야?”
이름을 들었지만, 여전히 낯설다.
“됐고. 나를 왜 찾아?”
포대웅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충이가 너 좀 보자고 하더라. 원가휘, 그 새끼는 나도 조만간 밟아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네가 선수를 쳐서 그런지 충이가 관심을 보이더라고.”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저자의 삼류 왈패들이나 내뱉을 법한 말투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화산의 정식 문도는 아니지만, 초도각 자체는 화산파가 운영했다. 한데 어째서 저런 망종이 거리낌 없이 나댈 수 있는 걸까.
“아! 기억났다.”
“그래, 이 포대웅을 네가 잊으면 안 되지. 석 달 전 비무에서 내가 너한테······.”
인간의 탈을 쓴 곰 새끼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이훤이 기억한 것은 회귀하기 전 초도각의 상황이었다.
초도각 내에 정무관과 진무관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가장 뛰어난 관도만 모아놓은 용무관을 논외로 치면 두 곳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정식 문도도 되지 못한 것들이 뒷배만 믿고, 사조직을 만든 후 암암리에 싸움질까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초도각 내에서는 기부금 때문에라도 큰 사고가 아니면 불문에 붙였을 정도였다.
“쯧.”
지나고 나면 부끄러워서 이불을 걷어찰 일이다.
하나 지금은 저 놈들이 제 세상인 양 으스댈 시기였다.
“그러니까 충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가서 충성 서약이라도 하라는 거야?”
포대웅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충성은 너무 나갔고. 그냥 함께 놀자는 거지. 네 방의 가구랑 목검도 사제로 준비해줄게. 일단 의식주가 달라질 거야. 너도 손해 볼 건 없으니······.”
탁!
이훤은 포대웅의 손을 쳐내며 양칠의 뒷목을 잡아챘다.
양칠은 포대웅에서 이훤으로 손이 바뀌었을 뿐이지만, 한결 안정된 표정을 지었다.
“몇 대 맞았냐?”
“아, 아니야.”
아니긴 개뿔.
옷이 진흙투성이인걸 보니 대여섯 번은 굴렀으리라.
“야! 이훤. 뭐하는 거야?”
포대웅은 코웃음을 치더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지만 미처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상체가 낫처럼 꺾이며 신음을 흘렸다.
“끄어!”
이훤은 슬쩍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이래도?”
양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녀석은 손가락까지 펼쳐가며 외쳤다.
“아홉 대 맞았어!”
반면 포대웅은 시뻘게진 얼굴로 인상을 썼다.
“너! 미쳤냐? 우리 비룡회를 상대로······.”
개소리를 지껄였으니 한 대 더.
퍽!
이훤의 주먹질에 포대웅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을 잇지 못했다. 칠 일 동안 굶은 녀석의 주먹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한 대 맞는 순간 정신이 혼미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더듬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어, 어떻게?”
“이게 다······. 후우, 그런 게 있다.”
천공혈륜겁의 공능을 자랑할 가치도 없는 놈이다.
이훤은 회귀 전 천공혈륜겁을 전수받고, 다음 날 아무 준비 없이 추노꾼 여섯 명을 묻고, 사냥개 세 마리를 끓여 먹었다. 추노꾼의 허리에서 빼낸 술병을 반주 삼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선연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술에 빠졌을지도.
이훤은 주충이 발광을 하자, 입맛을 다셨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울분까지 더해서 때려야겠다.
“자! 여덟 대 남았다.”
양칠은 이훤의 실수를 정정 하지 않았다.
그저 팔십 대가 아님을 아쉬워 할 따름이다.
“죽어!”
“죽는 건 너고! 감히! 양칠을 건드려?”
퍽! 퍽! 퍽!
이훤의 외침에 양칠은 눈시울을 붉혔다.
며칠 동안 이훤의 수발을 들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자신의 예상처럼 이훤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
“양칠이 누구 거야?”
퍽!
“아으으, 미안해. 양칠은 양칠이야. 자기 거지.”
“틀렸어!”
퍽!
양칠은 눈을 끔뻑였다.
대화의 방향이 조금은 이상했다.
반면 포대웅은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아니야. 아니야. 양칠은 네 거야.”
이훤은 히죽 웃으며 주먹을 내리꽂았다.
빠각!
턱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포대웅이 허물어졌다.
이훤은 히죽 웃으며 양칠을 불렀다.
“뭐해? 이 새끼 끌고, 비룡회인지 뭔지가 모이는 곳으로 안내해.”
“내가?”
“당연하지. 개를 팼으니까 이제 개 주인을 만나야지.”
양칠은 울상을 지었지만, 군말 없이 앓는 소리를 내며 포대웅을 잡아끌었다.
이훤은 그런 양칠을 뒤따르며 미간을 좁혔다.
‘대가리 몇 명 걷어내면 당분간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 4,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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