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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8화 (8/226)

< 4,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

4,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이훤은 삼 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불을 둘둘 말고 추위에 떨면서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심법도 알고 있고, 내공도 반 갑자나 존재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울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 축냈다.

냉기가 뼈마디를 찔렀어도 참았다.

천공혈륜겁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버텨야 했다.

“으아.”

이훤은 선유동의 문을 열고 나섰다.

고난 속에서 기연을 얻어내고 탈출하는 길이다.

온 세상의 축복을 받아도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 밖의 세상은 삼 일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 씨! 비 오네.”

겨울비다.

이훤은 용도를 다한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정무관으로 향했다.

“어! 이훤이다.”

“벌써 나왔네? 원가휘를 이겼는데도 멀쩡하네.”

이훤과 원가휘의 비무.

화산파는 물론이고, 강호 전체에 코딱지만큼도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만큼 하찮은 승부가 아니었던가. 하나 초도각의 관도들에게는 천지개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훤은 길을 걷다가 멈췄다.

그러자 웅성거림이 단박에 잦아들었다.

“화 난 것 같은데?”

“우리랑 격이 다르니까 기분 나빴을 수도 있지.”

하나 실상은 달랐다.

‘내 숙소가 어디였더라?’

이십 년 만에 돌아온 초도각이다.

이훤은 이불 사이로 서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리고 가장 왜소한 체구를 한 관도에게 손짓을 했다.

“어, 어?”

“안내해.”

“응?”

“내 방.”

관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앞장섰다.

이훤의 등 뒤로 온갖 투덜거림이 꽂혔다.

“쳇! 벌써부터 잘난 척 하는 건가.”

“시동이라도 부리겠다는 거야. 뭐야?”

다행이다.

방도 못 찾는 바보보다 재수 없는 쪽이 나았다.

관도는 이훤에게 방을 안내한 이후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 제가 뭐 도와줄 게 있을까요?”

“이름이 뭐냐?”

“양칠이요.”

기억에 없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쥐뿔도 없는 배경의 가난한 관도임을 알 수 있었다.

양 씨 집안의 일곱째라면 더 볼 것도 없지.

양칠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옆방이 제 숙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응, 가봐.”

녀석은 문턱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이 형은 좋은 사람 같아요. 제가 입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친한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먼저 말도 걸어주고······.”

“가라.”

이훤은 혼자가 되는 순간 젖은 이불을 집어던지고, 침상에 몸을 던졌다.

“아! 따뜻해. 따뜻해. 이 온기야 말로 진짜다!”

화로에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짙어질수록 점점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

‘하아, 좋긴 좋구나.’

눈이 감길수록 회귀 전의 생활이 스쳐갔다.

화산을 등진 후 노비가 되어 팔려갔고, 이상한 투기장에서 시체를 치우기도 했다. 고수가 된 이후에도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항상 주변을 살폈고, 낯선 자를 경계했다. 침상에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마외도 취급을 받고, 뒷배가 없으니 평온한 날은 없다시피 했다.

한데 회귀 이후는 달랐다.

이훤을 노리는 자도 없고,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더도 말고 지금처럼만 살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화산에서 그냥 사는 것도······.’

그 순간 이훤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건 아니지.

향후 강호에서 벌어질 일을 자세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건너건너 전해 들었다. 게다가 전과 달리 다리도 멀쩡했고, 멋들어지게 보법을 펼치는 것도 가능했다.

“내게는 뭘 해도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

그런 존재가 화산에 뼈를 묻는 다고?

기가 차고,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화산의 제자로 장문이 되는 것과 천공혈륜겁을 통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빠를까?

“후자겠지.”

만에 하나 천하제일인이 된다면 암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만큼 술을 마시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번 생에서야 말로 진짜 술독에 빠져 죽는 거다.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몸을 풀었다.

우두둑-

“자! 그럼 이제 굶어 볼까.”

*

초도각주는 언제나 그렇듯 인자한 표정으로 관도들의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는가?”

진무관주가 기다렸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각주, 선유동 폐관을 끝낸 게 벌써 오 일 전입니다. 한데 이훤, 그놈은 아직도 백팔계를 청소하지 않고 있어요. 이것이야 말로 유리검 유 대협의 처결을 거부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당장 놈을 끌어내서······.”

초도각주가 손바닥을 보였다.

“사견은 나중에. 정무관주는 이번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기세등등한 진무관주와 달리 정무관주 양통은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훤이 고뿔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어서요. 선유동에서 나온 이후부터 아예 곡기를 끊었습니다.”

초도각주는 미간을 좁혔다.

초도각은 화산파의 지원과 관도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됐다. 하나 본산의 지원은 목검과 무복과 같은 생필품이었고, 건물의 보수나 생활 자금은 모두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형편이다.

그렇기에 관도들도 운영에 한 손을 보탰다.

아침에 수련을 하고, 오후에 밭을 갈며, 저녁에는 경전을 외웠다. 그렇기에 다른 건 몰라도 관도들이 밥걱정은 하지 않을 터였다.

한데 한창 자랄 나이에 곡기를 끊다니.

“오 일 동안 진짜 밥을 먹지 않았습니까?”

“조석으로 물만 조금씩 마십니다. 며칠 사이에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변했더군요. 사실 녀석은 백팔계를 청소하겠다고 나섰지만, 제가 만류했습니다. 이 날씨에 자칫 잘못하면 송장을 치울 것 같아서요.”

정무관주는 연거푸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인정에 호소하는 모양새가 조금 있으면 눈물이라도 쏟아낼 기세였다.

진무관주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원가휘는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었다. 무릎이 부러진 탓에 한 계절은 요양을 취해야 한단다. 심지어 근맥에도 문제가 생겼다. 자칫 잘못하면 초도각을 졸업할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 수도 있었다.

“제 제자인 원가휘는 이미 반송장입니다! 가뜩이나 처벌도 약해서 진무관 내에 소문이 흉흉합니다. 한데 스스로 곡기를 끊은 녀석을 염려해서 벌을 미룬다니요!”

초도각주가 한 번 더 진무관주를 만류했다.

“잠깐! 이훤도 원가휘의 상태를 알고 있습니까?”

정무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유동에서 나오자마자 제가 알려줬습니다. 녀석도 깊이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애초에 원가휘를 그렇게 만들 실력도 없는 녀석이었어요. 운 나쁘게 사고를 쳤으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요! 마음고생이라니.”

진무관주는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한데 초도각주는 별다른 반응 없이 침음을 흘렸다.

“흐음, 그런 거였던가.”

“네?”

“오래 전 본산의 제자가 되었을 때 사형과 비무를 했던 적이 있소이다. 사형은 당연히 나를 봐줬지요. 한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분위기에 취하여 사형을 다치게 한 적이 있소.”

“아, 아니. 각주. 잠시 만요.”

진무관주의 만류에도 초도각주는 옛일을 추억하듯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무관주는 마치 소리꾼이라도 된 것처럼 초도각주가 말을 쉴 때마다 추임새를 넣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각주께서 심려가 크셨겠습니다.”

“그랬지요. 벌을 받았지만, 마음이 편해지지 않더이다. 사형은 여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거든요. 그 후로 사형이 완치될 때까지 밥이 넘어가지 않더이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고, 흙탕물을 마시는 것 같았지. 아마 이훤, 그 아이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소.”

“······.”

진무관주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정무관주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을 이었다.

“제자가 그런 마음으로 곡기를 끊었는데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진무관주는 헛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이 짠 건가? 뭐 이렇게 잘 맞아.’

초도각주가 말을 이었다.

“이훤은 감과 판단력이 좋았소. 하나 육신이 내면을 따라가지 못했지. 심신이 부조화를 이뤄 마음에 병이 생긴 듯하니 정무관주가 잘 다독여주시오.”

“각주! 그런 식으로······.”

정무관주 양통은 우렁찬 소리로 대꾸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각주. 제가 잘 다독이겠습니다. 진무관주. 그대의 배려도 잊지 않겠소이다. 제가 많이 배운다는 자세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 저.”

초도각주가 박수를 쳤다.

“훈훈하군요. 잘 해결되었으니 모두 돌아가세요. 이제 슬슬 저녁 독경 시간입니다.”

*

금식 칠 일 째.

이훤은 수저를 들 힘도 없었다.

‘아! 진짜 죽을 것 같다.’

그래서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마침내 천공혈륜겁에 입문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공혈륜겁의 구결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단전의 내공이 꿈틀거렸다.

그 순간 몸뚱이가 비명을 질렀다.

곡기를 끊은 탓에 몸뚱이가 운기조식 자체를 버텨내지 못하는 게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주화입마에 걸려 폐인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훤은 육신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운기조식에 열중했다. 마침내 단전에서 솟구친 내력이 혈맥을 타고 휘돌았다.

고통은 배가 됐다.

마치 몸뚱이가 찢기는 듯하다.

그러던 중 묘한 일이 일어났다.

혈맥을 타고 휘돌던 내공이 사지백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몸뚱이가 살기 위해 내력을 억지로 빨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혈맥을 타고 휘돌다가 단전으로 돌아갔어야 할 내공이 점차 자취를 감췄다.

한 올, 또 한 올.

반 갑자의 내공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더, 더, 더!’

마침내 단전에는 한 올의 내공도 남지 않았다.

아랫배의 포만감은 공허함으로 변했다.

반면 이훤의 안색은 점차 밝아졌다.

내공을 피에 담아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휘돌리는 혈륜(血輪)의 과정이 완성된 게다.

솨아-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이훤의 눈동자가 한 차례 불그스름하게 번뜩였다.

“하아.”

회귀 십일 차.

드디어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에 입문했다.

< 4,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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