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기연 강탈. (2) >
3, 기연 강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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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은 취마(醉魔)라는 별호가 좋았다.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술에 취해 제멋대로 사는 그에게 제격인 별호였다.
그러니 강호의 기피대상이었다.
한데 그런 자가 여섯 명쯤 됐다.
하여 육대괴마(六大怪魔)라 불렸다.
하나같이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거리가 멀었고, 분란을 일으키는 해충과 같았다. 거기에 더하여 육대괴마는 저마다 괴벽을 지녔다. 이훤에게 주사(酒邪)가 있다면 탈마에게는 도벽(盜癖)이 있었다.
이훤이 밤낮을 술을 마셨듯 탈마는 도둑질을 밥 먹듯이 했다.
어느 날 녀석이 이훤에게 낡은 책을 건넸다.
‘능가아발다라보경’의 진본이란다.
그리고 그것은 소림의 무학 중 안정적인 심법으로 유명한 혼원일기공의 전반부이기도 했다. 탈마는 이훤의 근맥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둑질을 했단다. 하나 소림의 무학으로도 오래 전에 찢긴 근맥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고마웠다.
- 예끼, 이놈아. 가져오려면 역근경을 훔쳤어야지.
- 얼씨구, 지금이라도 장경각에 한 번 다녀올까?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또 밤새도록 술을 마셨던 기억이 뇌리에 선연했다.
‘고맙다.’
이훤은 과실의 영기를 단전에 갈무리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면 대가 없는 호의가 비단 덕구의 만두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씁쓸했다.
회귀하기 전 얼마 동안 탈마를 보지 못했다.
녀석은 도둑놈 주제에 남을 의심할 줄을 몰랐다.
분명 소마에게 제일 먼저 죽었겠지.
“으으으.”
이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음을 흘렸다.
탈마의 죽음과 소마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평정심을 잃었다.
황급히 혼원일기공의 구결을 읊조렸다.
미약한 내공이 혈도를 자극하는 순간 심신이 안정됐다.
하나 생각만큼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식도를 타고, 위를 지나며 퍼져나갔던 영기가 몸 밖으로 조금씩 흩어졌다. 정신을 집중하여 구결을 읊조렸음에도 단전에 쌓이는 내공은 미약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운기조식을 머릿속으로 지웠다.
그저 입구가 좁은 통에 물을 담듯 축기만 염두에 뒀다.
지금은 그저 할 수 있는 일만 집중했다.
‘욕심 부리지 말자.’
본래 내공 수련은 기를 인지하는 양기(養氣), 모으는 축기(畜氣), 돌리는 운기(運氣)를 기본으로 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내공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중 양기를 체득하는 건 감(感)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기에 대한 감응력이 떨어지면 상승 심법을 익혀도 대성하기 힘들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복 받은 상태잖아.’
다행히 이훤은 전생을 통해 양기에 대한 감이 충만한 상태였다. 그건 원가휘와 싸웠을 때의 눈썰미처럼 회귀했다고 해서 사라지는 능력이 아니었다.
양기는 자연스럽고, 운기는 포기했다.
그렇기에 이훤은 축기에만 신경을 썼다.
수십 년의 강호행을 통해 갈고 닦은 집중력과 인내심이 빛을 발했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코딱지만한 단전에 담고, 또 담았다.
그리고 마침내 전신을 휘감았던 열기가 자취를 감췄다.
“후우.”
이훤은 호흡을 갈무리하며 눈을 떴다.
비록 운기조식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랫배가 든든했다.
얼마나 축기했을까?
반 갑자는 넘길 수 없었다.
그래도 목표했던 삼 할은 초과했다.
‘20년 남짓인가.’
우두둑-
이훤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전신의 뼈마디가 비명을 내질렀다. 하나 고통은 오래 가지 않았고, 숙면을 취한 것처럼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오후후후후! 오후우!
원숭이들은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동그랗게 말고 울부짖는다. 동시에 박수를 치면서 펄쩍펄쩍 뛰는 모양새가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야단법석이다. 죽은 대장 원숭이도 실패했던 일을 이훤이 해냈다고 여겼나 보다.
이훤은 히죽 웃었다.
“어, 고맙다.”
그렇다고 새로운 대장으로 여기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이훤은 시끌벅적한 원숭이들을 뒤로 하고, 남아 있는 과실을 바라봤다.
“쯧.”
이제야 원가휘의 기연에 대한 전모를 알듯했다.
놈은 존장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영약을 진상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첫 과실만 먹고도 죽다 살아난 경험을 했으리라. 다른 하나가 욕심나지만, 차마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 몸만은 끔찍이 아끼던 놈이 아니던가. 그러니 버린다는 기분으로 화산파에 바쳤을 터였다.
“하지만 내 상황은 다르지.”
이훤은 화산파의 상승 심법에는 비견할 수 없지만, 쓸 만한 종류를 여럿 알고 있었다. 그걸 통해 반 갑자의 내공만 쌓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였다.
어차피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후우.”
이훤은 마지막 과실에 손을 뻗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 과실을 복용함으로서 더도 말고, 딱 10년의 내공만 쌓을 수 있으면 족했다.
우끼! 우끼이.
원숭이들의 만류가 처음보다는 약해졌다.
한 번 성공했으니 지켜보겠다는 의미인가 보다.
그래도 놈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빛내니 어딘가 모르게 힘이 됐다.
“크큭. 내가 미쳤구나.”
이훤은 히죽 웃으며 과실을 땄다.
두 번째였기 때문일까.
일련의 과정은 한층 자연스러웠다.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
가부좌를 트는 것과 동시에 들뜬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목표량을 정해놨기에 외부로 영기가 흘러나가도 개의치 않았다.
‘무엇을 해도 전보다 낫다. 그러니 소유하려 하지 않고, 탐닉하지 않고, 질시하지 않으며, 물아가 분리 됨을 인정한다면······.’
축기가 이어질수록 호흡이 가늘어졌다.
한데 어쩐지 정신이 혼미했다.
회귀하기 전에도 이처럼 심도 깊이 능가아발다라보경을 깨우치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혼원일기공으로 대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혼원일기공을 대신해 불경의 의미가 대두되었다. 마치 빨려들어가듯 집중력이 극에 달하는 순간 누군가 등을 밀쳤다. 그러자 외부의 것이 눈에 보였고, 심지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신마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스스로를 관조하는 심상(心像)의 상태에 빠진 것이다.
‘맙소사.’
이훤은 구결의 읊조림을 멈추려 했다.
본래 깨달음이란 몸이 아닌 마음에 새겨지는 법.
그렇기에 회귀를 했다 해서 초절정 고수의 깨우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데 지금 이훤의 몸뚱이는 심상을 받아내기에는 너무도 허약했다. 자칫 하면 주화입마에 빠져 이지(理智)를 상실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빌어먹을!’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가 될 줄이야!
잡념이 필요했다.
불가에서 말하는 마귀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술이다.
이훤은 심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귀 전까지 마셨던 모든 술을 떠올렸다.
‘금존청은 알싸하면서 향이 깊지. 하지만 죽엽청의 알싸함에는 미치지 못해. 대신 향은 금존청과 백묵노주가 수위를 달리잖아. 언제였더라? 월향이가 따라주던 백묵노주가 일품이었는데······.’
관조를 통한 심상 상태라는 것조차 잊었다.
그리고 이훤이 축기를 하던 중 혀를 날름거렸다.
입술을 핥는 순간 도자기가 깨지듯 심상 상태가 산산조각 났다.
우웨웨웩!
이훤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땅을 짚을 힘도 없었기에 널브러진 채 토하고, 또 토했다. 토사물에 얼굴을 묻은 상태에서 눈물과 콧물, 침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으어어어어어.”
이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희뿌옇던 시야가 맑아지면서 오감이 제자리를 찾았다. 동시에 냉기가 전신을 침습하면서 체온을 떨어트렸다.
“하아, 추워. 진짜 비명횡사할 뻔 했네.”
이훤은 꽁꽁 얼은 팔다리를 풀며 축기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반 갑자에 준하는 내공이 느껴졌다.
우호호호호호호!
원숭이들은 수액을 핥는 대신 바람을 먹으려는 것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이훤의 몸이 담아내지 못한 영기를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훤은 원숭이들을 뒤로 한 채 공터를 벗어났다.
얻을 건 다 얻었다.
첫 째로 반 갑자의 내공이다.
둘 째는 의도하지 않게 심상을 경험했다.
절정의 고수가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야 말로 내공과 깨달음이 아니던가.
이훤의 입꼬리는 선유동에 도착할 때까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기연은 바로 회귀로구나.”
그렇게 삼 일이라는 시간이 쏘아 놓은 화살처럼 흘렀다.
< 3, 기연 강탈.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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