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두 번째 걸음. (2) >
2, 두 번째 걸음. (2)
*
이훤은 당장이라도 선유동에 들고 싶었다.
회귀 이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그런 그를 정무관주가 잡아끌었다.
‘이 인간은 또 왜 이래?’
정무관주(正武館主) 양통.
이훤에게 있어서 양통은 전귀(錢鬼)나 마찬가지였다.
부잣집 출신 관도에게서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뜯어내려고 애썼고, 그걸 위해 각종 편의를 봐주었다. 반면 이훤과 같은 관도들에게는 조금만 규칙을 어겨도 큰 벌을 내리곤 했다.
따뜻함? 그런 건 돈을 줄 때나 우러나오는 감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왜? 이놈아!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패면 어떻게 해? 원영검문이 어떤 곳인지나 아느냐? 문도가 오십 명이 넘어. 게다가 소문도 그리 좋지 않단 말이다.”
이훤은 혀를 찼다.
아니나다를까 부호의 눈치를 보는 모습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제가 원영검문의 내부 사정을 어떻게 압니까.”
“이놈아! 그쪽에서 못된 마음을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어.”
원가휘가 하던 짓을 떠올리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나 그 또한 이미 대비책을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
“하아, 나도 모르겠다. 일단 얼른 따라와.”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주방은 왜?’
양통은 호들갑을 떨며 숙수를 불러냈다.
“방 숙수! 방 숙수!”
“저녁은 아직 멀었어. 낮잠 좀 자려고 했더니 무슨 난리야. 어디서 전쟁이라도 났는가?”
“그게 아니고 이놈이 사고를 쳤어.”
“누구였더라?”
“이훤. 십육 호. 아니 글쎄 이놈이······.”
빨래터의 아낙도 저처럼 수다스럽지는 않으리라.
“허허, 어떻게 원영검문의 소문주를 이겼지? 신기한 일이네. 그나저나 폐관 칠 일이면 하늘이 도우셨구먼.”
“하여간 일이 그렇게 됐어. 이놈이 칠 일 동안 동굴 속에 있어야 하니 몸보신 좀 하게 닭 한 마리만 빨리 고아 봐.”
“저 놈이 십육 호면 해줘야지. 잠깐만 기다리게.”
방 숙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주방으로 향했다.
이훤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야?’
그는 양통과 좋은 기억이 전무했다.
매일 같이 벌을 서고, 수련을 강요당했을 뿐이다.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출세를 위해 비정하게 구는 작자가 아니었던가. 한데 닭 날개도 아니고, 한 마디를 통째로 끓이라니.
이훤은 멍 하니 양통을 응시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눈앞에 닭 한 마리가 나왔고, 어느새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저녁 전에만 선유동에 들어가면 문제될 것이 없어. 그러니 천천히 먹어도 된다.”
양통은 망이라도 보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반면 이훤은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쉼 없이 먹고, 마셨다. 원가휘와 싸우면서 소진했던 체력이 빠르게 채워지는 듯했다.
“하아.”
“벌써 배부르냐?”
이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술이 고팠다.
원가휘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니 주충(酒蟲)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게다.
하나 양통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슬쩍 화제를 돌렸다.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물어볼 만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 아닌가.
양통이 인자한 표정을 짓고, 닭은 내어주며, 대신 망을 봐주는 광경을 예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자신의 승리로 인해 대우가 바뀌었나 했다.
관도의 승급 횟수는 관주의 승진을 의미할 터.
하나 양통의 표정은 진짜였다.
오랜 강호의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양통의 안타까움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더 의아할 수밖에.
양통은 이훤이 빤히 쳐다보자,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뭐가? 흰소리하지 마. 쳐다보지도 마. 빨리 먹고 선유동으로 갈 준비를 해야지. 요즘 날씨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준비를 잘 해야 해.”
그러면서도 사주경계를 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훤은 양통에 대한 생각을 접고, 음식에 집중했다.
어차피 스쳐지나가는 인연.
그에게 내어줄 추억 따위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보다 선유동에서 할 일을 생각하면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 우선이다.
“잘 먹겠습니다.”
*
끼익-
나무를 덧대어 만든 문이 닫혔다.
자물쇠도 없다.
관도에 대한 신뢰 때문은 아닐 게다. 허락 없이 동굴을 벗어났다가 걸리는 순간 퇴출이라는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열고 나가보라는 함정일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훤은 위쪽에서 희미하게 들이치는 달빛에 의지하여 동굴 내부를 둘러봤다.
“쯧, 이딴 곳이 선유동이라니.”
화산에는 도관과 동굴이 사방에 가득했다.
곳곳에 주인이 있었고,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바로 화산파였다. 간혹 화산의 문도들은 주인 없는 도관이나 동굴을 수색하곤 했다. 혹시나 선대의 유산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게다.
반면 선유동(仙遊洞)은 누구도 찾지 않는 장소였다.
멋들어진 이름과 달리 본래 도인들에게 밥을 팔던 곳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신선들이 노니는 동굴이라는 이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지금의 선유동은 초도각의 관도가 벌을 받는 장소로 역할이 바뀌었다.
당연히 환경은 열악했다.
“듣던 것보다 더 별로네.”
전생의 이훤은 선유동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처럼 뒷배 없고, 자질이 부족한 관도에게 벌이란 곧 퇴출을 뜻했다. 그렇기에 양통의 부당한 대우에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입을 닫고 지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처음 마주한 선유동의 내부는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텅 빈 동굴에는 냉기(冷氣)가 가득했다.
어쩌면 밖보다 더 추운 것처럼 느껴졌다.
“후우.”
이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팔다리를 흔들며 온도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코딱지만 한 내공을 사용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꽈드득!
짧은 시간에도 몸이 굳을 만큼 허약한 몸뚱이라니.
체질 개선이 시급했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곳의 기연을 반드시 얻어야 해.’
이훤은 몸이 풀리자마자 양통이 준비해준 나뭇가지를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짚단을 넣은 이불과 요를 깔아놓으니 그나마 몸을 누일만한 공간이 완성됐다.
이훤은 양통이 챙겨준 봇짐을 풀고 혀를 찼다.
“뭐 이런 걸 넣어놓은 거야?”
양생보록(養生寶錄)과 무도십팔칙(武道十八則).
거창한 이름과 달리 도인의 마음가짐과 화산파 제자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적어놓은 책자였다. 화산 근방을 유람 온 이들이 기념품 삼아 사갈 정도로 흔한 물품이다.
“쯧, 이런 거 보려고 회귀한 거 아니다.”
이훤은 책을 대충 던져놓은 후 이불 위에 대자로 누웠다.
털썩!
냉기가 한 차례 더 몰아쳤다.
춥기는 더럽게 춥다.
화산이 위치한 섬서성은 장강 이북에서도 변경에 가까웠기에 칼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나 그렇기에 회귀했음이 온몸으로 체감됐다.
“진짜 돌아왔군.”
회귀 순간부터 정신이 없었고, 원가휘를 두들겨 패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이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실을 직시했다.
왜? 어떻게?
이딴 건 궁금하지도 않았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돌이킬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지난 수십 년의 강호행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심지어 가장 원했던 순간으로 돌아왔으니 하늘을 향해 구천 배라도 올리고 싶은 심경이다.
“쩝, 이런 날에는 술 한 잔 하면 딱 인데······.”
일단은 참자.
지금의 이훤에게 있어서 화산파란 가장 안전한 방패막이였다. 화산파를 뛰쳐나가는 순간 노비로 팔려나가거나 엄한 일에 엮여 비명횡사할 상황이 아닌가.
이훤이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전생의 그를 그로 있게 만들어 준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을 수련하는 것이다.
“반 갑자. 딱! 30년의 내공만 있으면 입문할 수 있어.”
기본도 부족하고, 한 쪽 다리를 절던 반편이 무인을 초절정의 고수로 탈바꿈시켜준 무공이다.
게다가 한 번 걸어본 길이 아닌가.
기본기를 다지고, 다리까지 멀쩡하다면 이번에는 달리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전생의 벽이었던 팔 성.
그것을 넘어 십이 성, 대성(大成)도 꿈은 아니었다.
“그러려면 기연부터 얻어야지.”
이훤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서도 유건평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원가휘는 이훤을 반병신으로 만들어놓고 폐관 삼 일이라는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이훤이 실의에 빠졌다.
강한 놈만 챙겨주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한데 원가휘가 폐관을 끝냈을 때 이훤은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기분을 맛봤다.
“다시 떠올려도 기분 엿 같네.”
놈은 선유동에서 나왔을 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공이 진일보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박에 직계의 눈에 띄었고, 이훤과는 얼굴을 마주할 사이도 없이 본산에 올라 화산파의 제자가 됐다.
모두가 궁금해 했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원가휘가 선유동에서 영약 두 개를 얻었고, 그중 한 개를 복용했다는 소문이 전부였다. 남은 한 개의 영약은 아마 평소 줄을 댔던 화산의 제자에게 바쳤으리라.
그 대가로 빠른 본산 입성이 가능했겠지.
“그게 어디 있느냐가 관건인데······.”
이훤은 선유동 내부를 둘러봤다.
도인들에게 밥을 팔던 곳이기에 제법 널찍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텅 빈 공간이었다. 울퉁불퉁한 벽을 여기저기 만져봤지만, 무언가가 있을 만한 장소는 없다시피 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추위만 더욱 심해진다.
“하아, 하아, 추워.”
당장이라도 이불 속에 숨고 싶었다.
하나 이내 다짐을 하듯 읊조렸다.
“아니지. 단 한 번의 기회도 놓칠 수 없어.”
지난 이십 년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지 않았던가.
몇 가지만 설명해도 심약한 자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가진 돈을 죄다 내어줄 만큼 서글픈 이야기였다. 앞으로 이훤이 마주해야 할 강호는 다리를 고쳤다고 안주하기에는 너무 냉혹했다.
잊지 말자.
강호의 낭만과 사랑은 강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약자에게 강호란 존재 자체가 지옥이며,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기관 진식의 유무부터.”
이훤은 울퉁불퉁한 벽을 세심하게 확인했다.
지난 이십 년간 누적된 강호의 경험은 상당한 눈썰미를 선물해줬다. 이런 능력은 회귀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위적인 부분이 반드시 있을 거야.’
하나 몇 번을 돌아봐도 눈에 띄는 곳이 없다.
다음으로 동굴 내에서 어색한 장소를 찾았다.
뜬금없이 경구가 새겨져 있거나, 구조 상 들어가야 할 곳인데 나와 있는 경우를 살폈다.
이번에도 실패다.
“후우.”
오히려 대책 없이 동굴 안을 빙빙 돌았더니 체온만 하락했다. 칼바람처럼 피부를 스쳐가는 냉기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원가휘 같은 새끼도 찾은 기연이거늘······.”
비교 대상이 너무 별 볼 일 없다.
실망이나 안타까움 대신 자괴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보물을 찾아도 내가 몇십 번은 더 찾았는데 원가휘 같은······.”
이훤은 투덜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장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다.
“아!”
바로 눈 높이였다.
원가휘가 찾아낸 기연을 강탈하려면 원가휘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다. 쥐뿔도 없는 놈이 얻은 기연이기에 생각보다 쉬운 곳에서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짝!
이훤은 양 손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바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서서히 원가휘가 되었다.
< 2, 두 번째 걸음.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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