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두 번째 걸음. >
2, 두 번째 걸음.
월례비무는 중단됐다.
유건평은 관도들을 돌려보내고 온 초도각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료 좀 봅시다.”
- 원가휘, 초도각 산하 진무관 서열 7위.
- 이훤, 초도각 산하 정무관 서열 27위.
월례비무는 결과만큼 과정도 중시했다.
그렇기에 비슷한 수준의 관도끼리 배정하여 비무를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 두 사람의 서열만 봐도 비무의 배정은 상당히 불합리했다.
하지만 유건평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원가휘의 자료를 대충 넘긴 후 이훤의 자료를 뚫어져라 살폈다.
‘이훤은 원가휘를 이길 수 없다. 어떻게 이긴 거지?’
눈으로는 자료를 보고, 머리로는 비무를 복기했다.
“흐음, 부족한 체력을 임기응변으로 대체했고.”
초도각주가 말을 받았다.
“감이 좋군요.”
“빈틈을 발견했을 때도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면 아까워하지 않고 물러선다.”
“호오, 판단력도 좋네요.”
저 나이의 관도가 지니기 힘든 재주였다.
추임새를 넣던 초도각주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관심이 생기셨습니까?”
진무관주는 눈을 부릅떴다.
“각주님! 제 제자가 죽을 뻔 했습니다.”
제자가 두들겨 맞았는데 사람들은 때린 놈에게 관심을 두니 속내가 불편했으리라.
“어허.”
하나 초도각주의 한 마디에 진무관주는 입을 닫았다.
각 관의 관주는 속가의 제자로 무관을 운영했던 자들이다. 그러니 화산의 직계가 방귀라도 뀌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만큼 격차가 컸다
게다가 유건평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해는 금물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겉으로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있었다면······.’
유건평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원가휘의 검법은 화륜검, 원영검문의 독문무공이다.
한데 이훤이 화륜검법을 알고 있다면 상당 부분 의문이 해소됐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훤이 적재적소에 써먹었다는 것만 염두에 뒀다.
“흐음.”
침음을 흘리다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늦었네.”
초도각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역시 자료를 보았다.
이훤의 평가서는 근골 사급, 자질 삼급이다.
정무관 내에서도 중하위권을 맴돌 만큼 자질이 부족했다. 초도각 전체에서 따지자면 명백하게 하위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군요.”
초도각주는 더 이상 유건평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훤은 이미 한계가 보였다.
영약으로 목욕을 하거나, 공전절후의 무학이라도 전수받지 않는 한 이류의 끝에서 평생 헤맬 것이 분명했다.
유건평은 혀를 찼다.
‘비무의 시작과 끝을 조율했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사제가 알아서 정리하게.”
초도각의 일이니 처벌 또한 맡기려는 의미였다.
한데 돌아서던 그가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비무의 처음과 끝은 물론이고, 과정까지 뇌리를 스친 게다. 이훤은 비무가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의 손해도 보지 않았다.
‘이기는 건 당연했다. 거기에 더하여 자신의 체력 안배까지 해냈다는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개 관도가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자신을 관조해봤던 고수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단순히 감과 판단력만이 아니라는 건가?’
유건평이 돌아서서 혼절한 이훤을 응시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그러니 확인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 화산의 문도로서 올바른 행위일 터였다. 쥐뿔도 없는 관도에 대한 관심이 호기심 수준으로 올라갔다.
“깨워라.”
*
눈을 떴을 때 유건평이 앞에 있었다.
이걸로 첫 걸음은 나쁘지 않았던 셈이다.
‘유리검 유건평.’
생각해 보면 전생에 무던히도 원망했던 사내였다.
그는 화산의 이대제자지만 도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잘 벼려 놓은 칼과 같은 인상.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놓고 호불호를 정하는 전형적인 무인이다.
아니, 무인보다, 낭인에 가까웠다.
유건평은 이훤의 다리가 부러졌을 당시 짧게 상황을 정리했다. 강자존은 강호의 섭리고, 불가와 도가를 떠나 강호에 발을 들였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 덤으로 잘 치료해주라는 말을 남기기는 했다.
능력 없는 자를 대하던 태도.
그 비정함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어찌됐든 그날의처벌로 인해 이훤과 원가휘는 더욱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제 나를 위해서 그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이훤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무미건조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초도각 산하 정무관 소속 이훤. 맞느냐?”
“네.”
“월례비무의 의의는 관도끼리 실력을 겨뤄 부족한 점을 매우는 것이다. 승급을 위한 점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한데 너는 화산의 그늘 아래서 같은 길을 가는 동료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어조가 서늘했다.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다.
하나 이훤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유건평의 혓바닥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인정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은원이 있다한들 월례비무를 통해 사적인 복수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유건평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외쳤다.
“네 죄를 알기나 하느냐?”
이훤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 죄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습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들며 말을 덧붙였다.
“파문이라도.”
유건평은 인상을 썼다.
“너는 아직 본파의 제자가 아니다. 그러니 파문을 하고, 말 것도 없다.”
“화산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미였을 뿐입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유건평은 이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나 어린놈이 눈을 피하지 않는다.
이제야 긴가민가했던 모든 의문이 풀렸다.
‘비무의 시작과 끝뿐 아니라 사후처리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가?’
화산의 일반적인 제자였다면 존장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하나 유건평은 달랐다.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훌륭한 제자란 예의 바르고, 착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고수가 되기 위해 더 치열하게.
화산을 부흥하기 위해 더 격렬하게.
자신을 불사를 수 있는 존재야 말로 화산의 훌륭한 제자라고 여겼다. 그런 그에게 이훤이란 다소 되바라졌지만, 똘똘하여 지켜볼 정도는 되었다.
“이훤이라고?”
“예.”
이훤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잠시 후 희미한 코웃음과 함께 나직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영악하구나.”
진무관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유 대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건평은 진무관주를 무시한 채 초도각주를 향해 말했다.
“내가 처결을 내려도 되겠는가?”
초도각주는 유건평의 적극적인 개입에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겼다.
“뜻대로 하소서.”
유건평은 밀린 일을 처리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정무관 소속, 이훤. 월례비무를 망친 죄를 물어 선유동 폐관 칠 일을 명한다. 대신 비무 자체에 부정행위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섭식과 수면, 대화를 허락한다.”
“유 대협! 그건 너무 약한 처벌이 아닙니까?”
폐관이라고 해봤자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홀로 칠 일 동안 지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 말까지 할 수 있다면 외롭지도 않으리라.
유건평은 진무관주의 외침을 귓등으로 흘린 채 말을 덧붙였다.
“동도에 대한 폭행에 대한 죄에 관하여도 벌을 내리겠다. 이훤을 백팔계 청소, 십오 일에 처한다. 장구 사용을 허락하고, 청소 시간에는 소개를 명한다.”
진무관주는 아예 말을 잇지 못했다.
원가휘를 반병신으로 만들어놓은 벌로 계단 청소를 하라는 말이 아닌가. 그것도 빗자루 사용을 허락했고, 청소 시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말란다.
누가 원영검문의 후계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훤의 뒷배에 장로라도 있는 건가?’
반면 정무관주는 죽은 조상이라도 만난 것처럼 연이어 공수를 했다.
“선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이훤의 머리를 억지로 누르며 어깃장을 놨다.
“뭐해? 이놈아. 빨리 감사하다고 절을 올려라.”
이훤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미간을 좁혔다.
‘저 인간이 갑자기 왜 이렇게 착한 척이야?’
관도를 돈 줄로 여기던 인간이 왜 이렇게 자신의 무사함에 감사한단 말인가.
유건평은 잊고 있었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아!”
그는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른 원가휘를 보며 말했다.
“잘 치료해주도록.”
이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십 년 동안 마음의 짐처럼 남아 있던 모든 것이 눈처럼 녹아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 잘 치료해라. 그래야 나중에 또 때리지.’
그때 서늘한 한 마디가 머릿속에 울렸다.
[내 관심을 끈 이상 능력 없는 영악함의 끝은 패가망신임을 잊지 말거라.]
지켜보겠다는 의미였으리라.
이훤이 진저리를 치며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유건평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초도각주가 인자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가지 벌을 받았구나. 무엇부터 하겠느냐?”
이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폐관부터 하겠습니다.”
“그리 해라. 정무관주. 준비해주시게.”
이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회귀한 이상 전생보다는 잘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한 첫 걸음은 잘 떼었다.
이제 두 번째 걸음을 내딛을 차례였다.
‘선유동의 기연.’
이훤은 원가휘 대신 그것을 차지하기로 했다.
< 2, 두 번째 걸음.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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