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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화 (2/226)

< 1, 회귀, 최고다! >

1, 회귀, 최고다!

이훤은 죽었다.

원했던 대로 열다섯 명을 길동무로 삼았다.

결과야 어찌됐든 살아온 과정 자체가 혈로였다.

그러니 지옥행 마차의 가장 앞자리를 예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래도 괜찮았다.

이 정도면 원 없이 마시고, 원 없이 죽인 삶이다.

여한이 없으니 후련했다.

잠깐!

죽기 전에 대머리와 잡담을 나눴기 때문일까.

생각지도 못한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덕구.

그래, 반덕구.

녀석에게 빚진 만두 세 개.

그걸 갚지 못하고 죽은 게 조금은 아쉬웠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저승사자든, 악귀든 뭐라도 올 때가 지났다.

한데 그 순간 오라는 놈은 오지 않고, 예기치 못한 감각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었고, 피부는 서늘했다.

사후(死後)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지만, 이건 이상하잖아.

그때 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홍각! 산양 출신으로 초도각 이 년 차! 정무관 소속! 관도 번호 십육 호!”

누구의 외침인지 몰라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충만했다. 단어마다 끊으며 목소리를 높이니 사람들은 ‘붉은 모서리’에서 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나저나 소개 문구가 왜인지 모르게 낯이 익다.

흐릿한 기억의 편린을 뒤적여봤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그리고 답은 기다렸다는 듯 기억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의 외침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 훤!”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삭풍이 몰아치는 지옥도(地獄道)의 한복판도.

신선과 신수가 뛰어노는 대라천(大羅天)도.

예상했던 곳이 아니었다.

“여기 뭐야?”

이훤은 허리높이의 비무대 아래 선 채로 눈을 끔뻑였다.

“야! 뭐긴 뭐야. 비무대지. 빨리 올라가. 올라가라고!”

누군가 등을 힘껏 밀었다.

‘죽었는데 비무대라고?’

요즘은 지옥도 싸워서 이겨야 갈 수 있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한데 자신의 몸이지만, 낯설 만큼 굼떴다.

대신 비무대에 오르는 순간 시야가 넓어졌다.

자신을 소개한 심판관 너머로 수십 개의 깃발이 휘날린다. 그리고 그 아래 앉아서 근엄한 표정을 짓는 이들의 얼굴은 낯설었다.

하지만 저들의 복장은 낯이 익다 못해 영혼에 각인됐을 정도였다.

‘여긴······.’

이훤은 눈을 부릅뜬 채 비무대 주변을 돌아봤다.

수려한 산세가 병풍처럼 사방을 두른 가운데 다섯 개의 봉우리가 손가락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깃발에는 새겨진 선명한 두 글자.

‘화산이잖아.’

그때 비무대 아래서 으르렁거리듯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그만 두리번거려. 멍청한 표정도 짓지 마. 정무관의 이름에 먹칠을 할 셈이더냐.”

이훤은 제 할 말만 빠르게 내뱉는 중년인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자가 아닌가.

“당신은 정무관주 양통.”

“저, 저! 너 지금 내 이름을 불렀어? 일개 관도가 관주의 이름을 부르다니······.”

이훤은 양통의 짜증을 귓등으로 흘렸다.

‘관도를 돈벌이로 대하는 삼류 잡배 같은 새끼.’

그런 사람이 눈앞에서 떠들고 있다.

현실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럼 여기는 초도각에서 주최하는 월례비무겠군.’

초도각(礎道閣).

이훤이 이십 년 전 화산파에서 도망치기 전까지 몸담고 있던 장소였다.

초도각은 화산파가 만든 수련기관이다.

그리고 월마다 비슷한 수준의 관도끼리 비무를 하여 점수를 매겼다. 그중 상위에 속한 자에게 화산파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것을 월례비무(月例比武)라 했다.

이쯤 되면 과거로 돌아온 것이 확실하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무려 이십 년 전이다.

이훤의 머리는 살아 있음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팽팽하게 돌아갔다. 양통이 직접 관도들을 독려하겠다고 나선 비무라면 분명 한 해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연말 비무행사일 터였다.

이훤의 눈빛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 상대는!’

혼란을 수습할수록 또 다른 감정이 피어올랐다.

분노였다.

용암처럼 격렬하고, 해일처럼 끝없는.

이훤은 정면을 응시했다.

때마침 심판관이 반대편 모서리에 위치한 푸른 돌 판에 오르는 소년을 소개하고 있었다.

“청각! 원영검문 소속으로 초도각 이 년 차! 진무관 소속! 관도 번호 오호!”

심판관이 말꼬리를 늘이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원가휘.’

심판관이 박수를 유도하며 일갈을 내질렀다.

“원! 가! 휘!”

이훤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혼란과 분노 이후에 심장을 쥐어짜듯이 퍼져나간 감정은 바로 환희였다.

씹어뱉듯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씨발 새끼를 죽어서야 다시 만날 줄이야.”

*

이훤이 익힌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은 명칭부터 정파의 것이 아니었다. 내공을 쌓는 방법도, 활용하는 방법도 상식에 어긋났다.

하지만 이훤에게는 자신의 옷처럼 잘 맞았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취가 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천공혈륜겁을 대성할 수 없었다.

생전 그의 성취는 고작 팔 성.

이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무공임에도 팔 성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절름발이였기 때문이다.

비급의 경신술을 제대로 수련할 수 없었기에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훤은 다리를 고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나 영약을 싸들고 찾아갔던 고명한 의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릎의 근맥이 찢겼고, 세월이 흘렀기에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만 반복됐다. 처음 다쳤을 때 찾아왔다면 그래도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며 혀를 차더라.

마른 하늘에 날벼락.

이훤이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이었다.

화산에서 자신을 진료한 의원은 뼈만 부러졌을 뿐 다른 상처는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뼈가 붙은 날부터 평소처럼 움직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연히 알게 됐다.

원가휘와 의원의 관계.

즉 이훤의 전생은 원가휘로 인해 심하게 비틀리면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원. 가. 휘.”

심판관과는 다른 의미로 놈의 이름을 곱씹었다.

불과 세 글자를 읊조리는 사이 비참했던 젊은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원가휘 또한 이훤의 읊조림에 반응하듯 매서운 눈빛을 발산했다.

전생에는 몰랐다.

놈의 눈빛에는 미약하나마 살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피냄새가 나는 것 같네.’

심판관은 두 사람을 번갈아보더니 히죽 웃으며 외쳤다.

“정무관 십육호 이훤과 진무관 오호 원가휘의 비무!”

그는 버릇처럼 말꼬리를 늘인 후 있는 힘껏 일갈을 내질렀다.

“시작!”

“으아아아아!”

이훤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용맹하게 내달렸다.

‘어?’

그런데 너무 느린 거 아닌가.

두 다리가 멀쩡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굼떴다.

뒤늦게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지금의 이훤은 광야제나 취마라 불리며 만인을 두렵게 했던 초절정의 고수가 아니었다. 초도각 내에서도 하위에 속한 평범한 관도였다.

그러니 거리를 좁힌 것은 오히려 실책이다.

이훤이 황급히 속도를 늦추려는 찰나 원가휘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쉭! 쉭!

갈지(之)자로 양 발을 밀어내는 모양새가 보법을 펼치는 듯했다. 그는 이훤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목검을 뽑으며 그대로 횡 베기를 펼쳤다.

촤악!

맹렬한 기세의 베기.

저대로 맞았다가는 뼈에 금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동작이 컸기에 피할 공간은 충분했다.

상식적으로 물러서는 것이 옳다.

한데 이훤은 오히려 원가휘와의 거리를 좁혔다.

쉭쉭쉭!

원가휘는 베기를 시도한 후 그대로 몸을 날려 이훤이 있던 공간을 세 번이나 찔렀다. 그 결과 두 사람이 합을 맞춘 것처럼 절묘하게 위치가 바뀌었다.

관중은 환호했다.

하나 이훤의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접근하지 않고 물러났다면 세 번의 찌르기를 몸으로 받아내야 했으리라.

반면 원가휘는 눈에 불을 켜고, 이를 갈았다.

“하! 쥐새끼 같은 놈. 네까짓 게 화륜검법을 피해?”

놈은 으스댈 만 했다.

이 시기의 이훤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원가휘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죽었다가 깨어났지.’

이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생의 경험이 덧씌워졌다.

원가휘는 이훤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다고 여겼나 보다.

“크큭! 하긴 내가 흥분을 해서 한 방에 끝낼 뻔했네. 그동안 내 앞에서 걸리적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안 되지. 신분의 격차를 영혼에 새겨주마.”

놈은 윗사람이 훈계하듯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훤은 흔들림 없이 원가휘의 전신을 눈에 담았다.

‘지금 당장 강해지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자신의 현 상태를 냉정하게 파악하는 먼저였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다면 놈을 쓰러트리는 건 젓가락을 부러트리는 것처럼 쉬우리라.

“일단 한 대 맞아라!”

원가휘는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다.

놈이 펼치는 검법은 원영검문의 대표 무공인 화륜검(化輪劍)이다. 수레바퀴처럼 원을 그리고, 원심력을 활용해 채찍처럼 초식을 이어가는 것이 요체였다.

이훤은 이미 전생에서 원가휘에게 복수하기 위해 원영검문의 모든 비급을 독파하지 않았던가. 아쉽게도 놈이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복수를 하지 못했다.

‘이 초에서 사 초로 이어지는······.’

원가휘가 아무리 독사 같은 마음씨를 지녔다고 해도 무공은 또래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렇기에 초식과 초식이 이어질 때 빈틈이 훤히 드러났다.

‘어깨.’

하나 지금의 이훤으로는 놈의 어깨를 공격할 속도가 부족했다.

‘옆구리.’

체력 부족으로 큰 타격을 주지 못할 터였다.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몰릴 수도 있다.

‘사 초로 이어지면 육 초로 연계하는 것이 정석!’

이훤은 빈틈을 무시한 채 자세를 바로 했다.

예상대로 원가휘의 목검이 바람을 쪼개며 내리꽂혔다.

이훤은 고갯짓만으로 가볍게 목검을 피했다.

‘이제 찌른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목검을 잡아당긴 후 있는 힘껏 찔렀다.

오른손잡이이기에 왼쪽이 훤히 열렸다.

이훤은 기다렸다는 듯 놈의 왼쪽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었다. 이십 년의 지식과 눈치, 그리고 비정함으로 똘똘 뭉친 무릎이 옆구리에 꽂혔다.

빠각!

미세한 파열음이 전해진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했다.

역시 팔꿈치와 무릎은 언제나 최고다.

원가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주춤거렸다.

“아흐, 네가 어떻게······. 감히 내 몸에 손을······.”

혼란스런 눈빛,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신음.

그 모든 것이 이훤을 고양시켰다.

‘하아! 회귀, 최고다!’

< 1, 회귀, 최고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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