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화 (1/226)

서(序).

흥미진진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 화산파에서 야반도주 한 이후로 가장 재미있는 하루였다.

배신, 위기, 그리고 환희.

이 모든 것이 하루 동안 일어났다.

믿었던 의제(義弟)의 배신으로 모든 것이 시작됐다.

그로 인해 천라지망에 갇힌 것이 위기였다.

그렇다면 환희는 언제였을까?

일단 천라지망에서 벗어날 때는 아니었다.

바로 온몸에 피갑칠을 한 채 도주하던 중 발견한 주인 없는 술 항아리를 목욕하듯 들이부었을 때였다.

꿀꺽! 꿀꺽!

이훤은 술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한껏 미소 지었다.

“이건 진짜 좋은 술이다.”

그러나 행복한 표정과 달리 몸은 만신창이였다.

살점은 먹다 남은 잔반처럼 너덜거렸고, 피는 실처럼 쉼 없이 흘렀다.

이훤은 그래도 좋았다.

그에게 술이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술을 마시는 순간 의제의 배신과 추격자들의 존재마저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아! 천당이 따로 없군.”

술주정뱅이처럼 히죽거리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동시에 검붉은 핏물이 폭포처럼 흘렀다.

“우웩!”

중독된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천라지망을 탈출하자마자 나타난 초옥이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천금(千金)을 줘도 구하기 힘든 귀한 술이 항아리 째 놓여 있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함정이다.

세 살 아이도 걸리지 않을 만큼 허술한 함정.

하나 이훤은 당연하다는 듯 걸렸다.

술이 있으니까.

술이 거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마셨을 뿐이다.

오죽하면 이훤의 별호가 취마(醉魔)겠는가.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이건 산공독이고. 쩝, 폐비산도 섞었네.”

불만 섞인 투정도 잠시.

그는 침과 섞인 검붉은 가루를 뱉은 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학정단에 표류사까지! 미친놈들아! 이 좋은 술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해독과 중독이 이어질 때마다 몸뚱이가 비명을 질렀다.

하나 이훤은 술독이 빌 때까지 음주를 멈추지 않았다.

“크아! 그래도 좋았다.”

빈 항아리를 내려놓으며 내뱉은 우렁찬 외침.

야심한 정적을 깨고, 불청객을 불러들이기에 제격이다.

스윽-

초옥 주변에서 한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열다섯 명.

그중 인상이 좋은 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 나섰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생과 사를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의제였다. 그리고 항상 웃는 낯이라 하여 소마(笑魔)라 불리던 놈이다.

“형님이라면 이 와중에도 마실 줄 알았소.”

“이 귀한 걸 잘도 구했구나.”

“입버릇처럼 중얼거리지 않았소. 취금향을 마실 수 있으면 죽어도 좋다고.”

이훤은 소마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걸 아는 놈이 취금향에 잡스러운 걸 많이도 넣었더라. 그나저나 술은 이게 끝이냐? 네 친구들도 한 병씩 내놔야지.”

소마를 제외한 열네 명은 말없이 포위망을 구성했다.

몇몇은 동료였고, 몇몇은 적수였다.

그리고 몇몇은 복면을 써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술도 없이 온 거야?”

이훤과 눈을 마주친 복면인이 미간을 좁혔다.

“저 술주정뱅이 새끼! 이런 상황에서도 술을 찾는 걸보니 아주 뇌까지 술에 절어버렸구나.”

“뇌가 곤죽이 된 건 너지. 복면만 쓰면 뭘 하냐? 도관 자국이나 가리지 그랬어. 이마에 자국이 선명하네. 에라이! 말코도사야! 정파인 주제에 사마외도랑 어울려서 잘하는 짓이다. 네 사조가 천당에서 구름을 치고 후회하다가 구멍을 내서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그러느냐?”

“뭐? 뭐!”

“네 옆에 있는 대머리는 땡중이잖아. 계인 자국은 뭐로 지운 거야? 진흙이야? 물감이야? 아니, 구파면 돈도 많을 텐데 준비 좀 제대로 못하냐?”

도사는 참지 못하고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닥쳐라! 절름발이 놈이 세상을 원망하여 공적이 되었으면 알아서 목을 내놓아야지. 감히 땡중과 말코라니! 정녕 시신조차 제대로 남기고 싶지 않은 게냐?”

이훤은 숨을 쉴 때마다 검붉은 핏물을 토해냈다.

그러나 갑작스레 탄성을 흘리며 외쳤다.

“생각났다! 말끝마다 ‘감히’를 외치는 도사가 있었어. 물론 나한테 얻어맞고, 개처럼 기어서 도망쳤지. 어디 문파였더라.”

“닥, 닥쳐라! 누가 개처럼 기어서 가.”

복면인들과 달리 사마외도는 실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훤을 죽이기 위해 뭉쳤지만, 그 후에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눠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때 소마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술로 얽히지 말고, 술을 마실 때 자리를 피해야 하며, 술에 취했다면 유언을 남겨라. 취마에 대한 평이지요. 길게 말을 섞어봤자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 끝냅시다.”

무인들의 기세가 일변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취마를 갈가리 찢을 것처럼 흉흉한 살기가 퍼져 나왔다.

“놈은 경공을 펼칠 수 없소.”

“절름발이니까 당연하겠지. 서서히 말려 죽입시다.”

이훤은 적의 도발에 헛구역질을 했다.

검붉은 핏물이 덩어리 지어 줄줄 흘렀다.

“하아.”

한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상체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거늘 무인들은 황급히 병장기를 뽑거나,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크큭, 이 몸이 어린 시절에 다리 근맥이 찢어져 병신이 된 건 맞아. 한데 그런 절름발이한테 겁을 먹고 물러서는 너희들은 뭐냐?”

정사마에 속한 이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훤의 위상이 그러했다.

보통 취마라 불리며 무시를 당하지만, 간간히 그가 보였던 무위는 천하에 손꼽혔다.

광야제(狂夜帝).

육대괴마의 수장이며, 천마조차 귀찮아하는 존재.

저들이 이훤을 향해 달려들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였다.

그때 이훤에게 놀림을 받았던 대머리가 나섰다.

스스로 복면을 풀자, 흰 수염이 나풀거렸다.

“잠시 소승이 광야제와 대화를 나눠도 되겠소?”

“역시 천각 대머리였군.”

노승은 이훤의 조롱에도 개의치 않았다.

“광야제, 뒤는 절벽이고, 앞은 우리요. 더 이상 무의미한 살육은 멈추는 것이 어떻겠소?”

소마가 다급히 외쳤다.

“천각대선사! 약속이 다르오.”

노승은 흐릿한 눈빛으로 무인들을 둘러봤다.

“광야제가 경공을 펼칠 수 없다지만, 저 자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 희생이 되어야 할 게요. 하나 우리는 알고 있지 않소이까? 광야제가 죽은 후 우리가 사이좋게 산을 내려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허허, 땡중 주제에 의심이 많네.”

누군가 비웃었지만, 그게 끝이다.

끝내 부정하지는 않았다.

노승은 이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지금이라도 참회를 한다면 내가 그대의 목숨만은 구해주겠네. 물론 빈승과 함께 참회동에서 평생을 보내겠다고 약조를 해야 하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공과 체력이 바닥인 상태였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진다.

하나 혀는 칼을 품은 것처럼 날카롭다.

“대머리와 함께 반성하면서 비급도 내어놓고, 보물을 숨겨 놓은 곳도 불고, 그러면 참 좋겠다. 그치? 그렇게 생명을 아꼈다면 없이 사는 자들이 고통 받을 때 네놈은 무엇을 했느냐?”

“허허, 작은 힘으로 어찌 큰마음을 이해하겠는가. 자네가 없으면 강호가 평온할 것이야. 혈겁도 멈추겠지. 그러니 나와 함께 가세. 빈승과 함께 독경을 하다 보면 자네의 과오가 얼마나 컸는지 깨닫게 될 것이야.”

“지랄하네. 이 상황에서도 위선을 떠는 건가?”

“반성하지 않는 자는 나아갈 수 없네. 돌아보면 피안이라. 지금이라도 생각해보게. 자네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후회했던 적이 없는가? 아쉬웠던 적이 없는가? 어떻게 사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네.”

이훤은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치려다 눈을 부릅떴다.

한순간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뇌리를 스쳐갔다.

“아.”

노승은 이훤의 반응을 반겼다.

“그럴 줄 알았네. 인간은 후회하며 살아가야 하는 법이라네. 그래야 나아갈 수 있지. 자네는 후회를 잊고, 반성하지 않았기에 욕념을 다스리지 못하고······.”

“덕구야.”

“뭐, 뭐라고?”

이훤은 고개를 숙인 채 헛웃음을 지었다.

“화산에서였지. 반덕구라는 녀석이 있었어. 재능도 없고, 웃기만 하고, 매일 같이 괴롭힘을 당하던 놈이었지. 그놈이 내게 만두 세 개를 줬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은 많으니까 나눠 먹자며 흔쾌히 먼저 내어주더라. 그게 강호에서 내가 받은 첫 선의이자, 마지막 호의였다.”

날선 인상의 무인이 외쳤다.

“놈! 천각대선사의 배려마저 능욕하다니! 네놈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이훤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나를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고 했지? 한데 나로서는 오히려 너희를 죽여야 모든 게 끝날 것 같단 말이지.”

마치 열다섯 명을 끌어내기 위해 고난을 자처했다는 듯한 어조였다.

“노, 놈이 심상치 않소! 죽이시오!”

하나 누구보다 빠른 것은 이훤이다.

그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땅을 접어 달렸다.

파팟!

이형환위에 버금가는 보법의 결과.

천라지망을 펼쳤던 무인들이 우르르 물러나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훤의 손은 이미 복면을 쓴 학사의 허리춤을 훑고 지나간 후였다.

“엇! 내 술.”

주인의 허락도 없이 술병의 마개가 뽑혔다.

이훤이 목울대를 움직일 때마다 독한 술이 전신을 헤집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소마가 진저리를 쳤다.

“보법을 펼칠 수 있었다고?”

때마침 이훤이 빈 병을 내던지며 히죽 웃었다.

“한 쪽 다리로 펼치려니까 꼴사납더라고. 그래서 펼치지 않았을 뿐이야. 그나저나.”

이훤은 더 이상 피를 토하지 않았다.

“이독제독이라. 술을 술로 씻어냈더니 정신이 좀 드는구나.”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깃들었다.

“천공혈륜겁이다!”

“놈이 폭주한다!”

이번에도 이훤이 빨랐다.

진원진기까지 아낌없이 뽑아 올린 그가 대지를 찍어 누르는 순간 주변 일대가 주저앉았다.

콰콰콰쾅!

작은 움직임의 여파는 대단했다.

초옥과 울타리가 무너졌고, 땅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훤(李昍)이 먼지 구름을 뚫고 비산했다.

마치 양 손에 쥔 칼에서 핏빛 기운이 날개처럼 솟구쳤다.

“덕구야! 만두 값은 지옥에서 치르마!”

< 서(序).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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