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약속된 시간이 지났다. 사이는 한 시간을 넘기고도 무려 삼십 분이나 더 거대한 실드를 펼쳤다. 기사들의 공격에 의해 가시가 줄어들어 보호할 면적이 적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기사들과 신관들이 수없이 많은 검기과 신력들을 쏟아부었지만 고치는 그들의 공격에 익숙해졌는지 방어까지 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생명체가 학습 능력까지 있는 걸 보자 사람들이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장기전으로 들어가게 되자 쉬는 시간도 필요했기에 사람들은 순번을 정해 고치를 공격하기로 했다.
두 번째 순서인 기사단이 쉴 새 없이 고치를 향해 검기를 날리고 있었다. 새까만 고치는 그들의 공격에 주춤하며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았다. 그때만 해도 뻗어 나간 가시의 반절 정도가 사라진 상황이라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커헉…!”
고치가 수평이 아닌 사방으로 삐죽빼죽한 가시를 펼쳤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밤송이 모양 같아 보였다. 고치는 순식간에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갑주를 뚫고 기사들의 살을 파고들었다. 공중에 떠 있던 기사들이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스러졌다.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던 공작과 카이난, 엘리샤가 그 모습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한 번에 수많은 전력을 잃은 사람들의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누군가의 외침에,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에 정신을 놓고 탈주하는 자들도 있었다. 탈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관과 시종들이었다. 공작의 부관이 인상을 찡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잘 훈련된 기사들은 동료의 죽음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부복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리할까요?”
공작이 침통한 표정으로 공중에 꿰인 부하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망친다고 해도 남은 길은 없다는 건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게다. 다음 기사들을 준비시켜라. 이번엔 나도 함께한다.”
공작은 죽음을 결심한 듯 의연한 눈빛이었다. 상관이 먼저 나서자 기사들 역시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은 채 플라잉 마법을 받기 위해 마법사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울컥, 사이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왈칵 쏟아졌다. 공작이 놀라 사이에게 달려갔다.
“사이, 괜찮나?”
“…그냥 재채기입니다.”
“누가 재채기로 피를 토해! 심각한 거지?”
평소에는 약한 척을 하면서 마법에 한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허세를 부린다. 공작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이를 바라보았다. 사이는 안달복달하는 공작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지 피가 묻은 입가를 닦아 내며 씩 웃었다. 사이의 새하얀 손등 위로 새빨간 핏자국이 묻어났다.
“일단 여기에서 나와. 조금 쉬어야 해. 대체할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공작이 기사들에게 플라잉 마법을 걸어 주는 마탑의 마법사와 아이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돼요.”
“무슨… 소리지?”
“이 마법진, 생명력을 소모해 마력을 증폭시키는 거거든요. 시전자의 생명력을 다 쓸 때까지는 절대, 나갈 수가 없어요.”
말인즉슨 사이는 이 마법진 안에서 죽을 때까지 나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사이의 말을 알아들은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이는 한 시간 반 전부터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생명력을 담보로 제국을 지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멋있잖아요.”
사이의 말에 두통이 오는지 공작이 이마를 짚었다. 그런 공작을 보며 사이가 히죽 웃었다.
“나중에 저 역사서에 한 줄 꼭 써 주는 겁니다. 한 줄은 아니고 열 줄은 써 주셔야 해요. 희대의 천재 마법사 사이 메이트리븐, 제국을 지키고 잠들다. 그의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은색이었으며, 루비같이 붉은 눈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꿰뚫어 보았다. 또한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닮은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뻔뻔스럽게 제 외모를 극찬하는 사이를 보며 공작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이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웃으라고 말씀드린 건데.”
“너는 정말….”
공작은 무어라 한 소리를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센 척을 하고 있지만 사이의 이마에서는 땡볕 더위에 있는 것처럼 땀이 연신 흐르고 있었고, 입술은 빙하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런 사이를 바라보는 공작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이는 그런 공작에게 웃기를 종용했다.
“아, 빨리 웃어 주세요. 공작님은 그래도 웃는 게 제일 잘생겼으니까 제가 또 그 외모에 눈이 번쩍 뜨여서 좀 더 버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웃음이 나오겠나?”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면요?”
“하….”
공작은 수많은 말들을 삼키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입술 끝을 말아 올리려고 했지만, 안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지 결국 입술 끝에 경련만 일 뿐이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이었지만 사이는 그런 공작을 이해한다는 듯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저 그래도 좀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 시간 반이나 버텼다고요. 드레곤도 이런 건 못 할걸요.”
“목숨 걸고 보여 주지 않아도 네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아.”
“아, 빨리 알려 줬으면 이런 건 안 했을 텐데요.”
농담하는 사이를 보며 공작이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웁.”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사이의 속에서 다시 피가 솟구치는지 황급히 공작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니 여기에 토해.”
도리도리, 사이는 피를 머금어 동그랗게 부푼 볼로 고개를 저었다.
“빨리-!”
“으읍… 욱.”
그러나 이어서 피가 또 쏟아져 나오는지 결국 공작의 건틀렛 위에 새빨간 선혈을 쏟아 냈다. 헉, 헉 슬슬 숨쉬기도 벅찬지 거친 숨을 씨근거리던 사이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고인 눈물을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었다.
“스승님! 괜찮으신 겁니까?”
공작과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먼저 플라잉 마법을 걸어 기사들을 출정시킨 아이작이 그들 사이로 급히 달려왔다. 아이작의 지목에 사람들에게 시선이 쏠리자 사이는 그 와중에도 클린 마법을 걸어 제 외모를 단정히 다듬었다.
“남 걱정할 시간 있으면 네 실력이나 정진하려무나. 내가 지켜보니까 너, 아직 멀었어.”
사이의 새침한 말투에 아이작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우리가 남입니까? 그것보다 마법 과하게 써서 피 토한 사람이 클린 마법을 또 왜 써요! 다 같이 먼지 구덩이에 꾀죄죄하게 있는 처지에! 미쳤어요?”
“그럼 네가 나냐? 그리고 남들 더럽다고 내가 깨끗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니? 역사서에 나오려면 마지막까지 잘생겨야 한다고!”
“공작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라고 그냥 말하지 그래요!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돼요?”
“야! 너 이 새끼 이리 안 와! 어디 키워 주고 가르쳐 줬더니 버르장머리 없게 굴어!”
“스승님이 나와 보시든가요! 그러게 누가 이딴 마법진을 그려서는 바보같이 목숨을 걸어!”
둘은 씨근덕거리며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다투었다. 공작이 그런 둘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아이작은 흥분을 가라앉히자마자 침울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죽습니까?”
“그래! 이 거지 같은 세상 보기 싫어서 뜬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의 목소리는 묘하게 후련해 보였다. 그런 사이에게 아이작이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런데 그 거지 같은 세상은 왜 지키고 가는데요! 평소에는 그렇게 못돼 처먹은 인간이!”
“와, 마른자리 진자리 깔아 가며 가르쳐 놨더니 말하는 본새 좀 봐라. 공작님, 저 죽으면 쟤는 죽든 말든 제 무덤에 꼭 같이 묻어 주세요. 저승에서 참교육 좀 시켜야겠습니다.”
“언제 당신이 마른자리 진자리 깔아 놨어! 매일 당신 때문에 진흙탕에서 굴렀으면 굴렀지. 그리고 죽었는데 뭔 참교육이에요? 계급장 떼면 당신이나 나나 똑같아!”
“칵, 진짜! 정신 사나우니까 저리 비켜!”
“그깟 실드 하나 유지하는 데 얼마나 힘들다고 그래요? 나는 저기 서른 명 전부한테 플라잉에 실드 걸어 주고도 말짱한데.”
그깟 실드라기엔 수도의 대부분을 뒤덮은 거대한 실드였지만 아이작은 스승의 업적을 폄하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사이 역시 아이작이 행한 마법에 대해 깎아내리기 여념이 없었다. 둘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다투면서도 능숙하게 마법들을 펼쳤다. 공작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도 뭐해 결국 다른 마법사에게 플라잉 마법을 걸어 달라 해 고치를 향해 올라갔다.
둘만 남고 소강상태가 되자 아이작은 침울하게 사이에게 물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요.”
“사흘 밤낮.”
“아, 진짜! 그런 거 말고 진짜로요.”
“…앞으로, 5분.”
사이의 말에 아이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사이는 어느새 노인처럼 말라 가고 있었다. 통통했던 손등에는 주름이 성성했고, 뼈마디가 튀어나와 보기 흉했다. 볼살이 푹 꺼지고 광대가 도드라지는 바람에 얼굴은 해골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외모를 가꾸기 좋아해 항상 완벽한 상태였던 평소 사이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작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괜히 고개를 팩 돌렸다. 소중한 사람들은 이렇게 제 곁을 다 떠나간다. 이별을 겪을 때면 아이작은 항상 어린 시절의 저로 돌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것 같았던 사이조차 이렇게, 제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 아이작이 기어코 두 줄기 눈물을 떨구었다. 이젠, 그런 건 싫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고개를 떨군 아이작이 사이가 만든 마법진을 자세히 살폈다.
“이 마법진… 아예 못 푸는 건 아니잖아요.”
“천재가 설계한 마법진을 범인이 어떻게 풀까.”
“열 명 정도 달라붙어서 반나절 정도 마나 불어넣고 풀면 될 것 같은데요?”
“당장 한 시간 뒤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뭘 열이나 붙어서 나한테 반나절이나 투자해. 됐어.”
사이는 일찌감치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 그런 사이를 한심하게 보던 아이작이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지금이 아니면 되잖아요.”
“뭐?”
“나중에 여유 될 때 풀면 되는 거잖아요.”
가죽으로 된 갈색 주머니 안에는 검은 구슬 하나가 데굴, 굴러 나왔다. 흑요석을 둥글게 가공한 듯한 검고 둥근 구슬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반짝였다. 새까만 구슬을 본 사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
“스승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아이작이 들고 있는 구슬은 사용자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마력과 생명력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쓰게 만들어 주는 구슬이었다. 3클래스 마법사조차 성을 하나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마법을 가지게 해 주지만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사이의 마법진은 누군가에 의해 해체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가지고 있지만, 그 구슬을 삼킨 사람은 100% 죽음에 이르렀다. 그 사실을 아는 사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그거 이리 내.”
“싫어요, 제가 먹을 건데요.”
“이 미친놈…! 먹지 마! 안 돼!”
“만약 살아나게 된다면, 스승님은 꼭 데이몬 도련님 편이 되어 주셔야 해요. 그분은 자기편이 무척 적거든요. 그러니까, 저 대신 스승님이라도 꼭 되어 주셔야 해요.”
“나, 그런 거 못 해. 그러니까 하지 마. 제발 다시 생각해 봐, 아이작!”
비명과도 같은 사이의 부탁에도 아이작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꿀꺽, 구슬을 삼켰다. 올라간 목울대가 도로 내려왔다. 사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는 이제 저를 걱정해 줄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스승님이 죽으면, 공작님이 슬퍼할 거 아니에요.”
“걱정해 줄 사람이 없긴 왜 없어…! 이 멍청한 게…!”
사이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구슬을 먹은 효과가 나타나는지 아이작의 흰자위에 실핏줄이 터지며 얼굴과 목, 손 할 것 없이 새파란 혈관이 도드라지게 올라왔다. 아이작이 그런 사이를 위로하듯 사이의 심장 위로 손을 얹었다.
“아직 공작님께 고백도 못 하셨잖아요.”
“너… 그걸 어떻게.”
“나 참, 제가 바보예요? 어떻게 몰라. 티 엄청 나는데.”
투덜거리는 아이작의 손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물밀 듯이 흘러들어 왔다. 심장은 마나가 다니는 가장 큰 통로이자 저장소였다. 아이작이 이미 말라붙어 밑바닥을 보이는 사이의 마나에 제 것을 쏟아부었다. 아이작의 정순한 마나가 폭포수처럼 흘러들어 왔다. 사이는 제게 쏟아지는 거대한 마나를 받으며 울부짖었다.
“으… 흑… 넌 진짜…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다.”
아이작은 말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이작의 마나에 의해 사이의 마나와 생명력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그러나 사이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못난 놈. 스승을 살리고 죽는 제자가 어디 있단 말이야. 이, 못난 놈아.
“스승님, 절대… 데이몬 도련님을 미워하면 안 돼요.”
“미워할 거다. 엄청나게 미워할 거야.”
“아, 자꾸 그러면 귀신 돼서 찾아갈 거예요. 그리고… 고백도 좀 하시고… 도련님께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저는… 전부 용서했다고… 그러니 너무 아파하지… 말… 라고….”
아이작은 정신이 끊기는지 띄엄띄엄 말을 더듬으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그런 모습조차 아이작다워 사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작의 마나는 정말 대단했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이 마나를 받아들였다면 아마 과부하로 인해 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정신력에 따라 일주일까지도 실드를 유지할 수 있을 듯했다.
이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면 차라리 고치에 공격 마법을 퍼부었어도 승산이 있었을 텐데, 제 주인을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방어 마법을 펼치고 있는 스승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 전부 아이작다웠다.
“바보 같은 놈… 정말… 바보 같은 놈….”
아이작은 제게 남은 마나를 사이에게 남김없이 짜내어 주고 그의 밑으로 허물어졌다. 툭, 살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데다 약의 부작용으로 혈관들까지 새파랗게 도드라져 미라와 같은 흉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정말 멋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이는 제 밑에 쓰러져 행복한 미소를 띠고 죽어 있는 아이작을 보며 흐느꼈다. 눈물이 자꾸만 떨어져 시야가 흐려졌다.
“어어, 아아악-!”
“엄마아아-!”
그 바람에 고치에서 나온 검은 빗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던 실드가 흔들렸다.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사이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실드를 다시 가다듬었다. 제자의 죽음에 슬퍼할 틈조차 없었다. 제자가 목숨을 바쳐 만들어 준 기회를 어떻게든 유리한 방향으로 써야 했다.
“하아… 젠장. 아이작….”
거미줄처럼 촘촘한 가시 밑으로 떨어지는 검은 액체가 황금빛 실드에 부딪힐 때마다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수십 개의 얇은 막으로 둘러싸인 실드는 검은 액체에 부딪힐 때마다 소멸과 생성을 반복했다. 실드가 소멸될 때마다 실드의 밑으로는 금색 파편이 비처럼 내렸다. 밑에서 보면 마치 따뜻한 황금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광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탓이었다. 사이는 쉼 없이 주문을 되뇌이며 끊임없이 소멸되는 실드를 계속해서 재생성해 내었다.
아이작이 준 마나가 넘쳐나 실드를 유지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기사들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해 실드 자체의 크기가 좀 줄어든 덕도 있었다. 조금의 여유가 생긴 사이는 공작이 고치를 공격하는 모습을 지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치는 이제는 완전히 호전적으로 돌아서 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1초에도 수십 번씩 솟아나는 가시에 기사들은 멀리 떨어져 고치에 검기를 날렸다. 그러나 이따금 길게 늘어나는 가시에 심장을 뚫리는 기사들도 없진 않았다.
그때, 길어진 가시 하나가 공작의 옆에 있던 기사의 옆구리를 찔렀다. 피를 맛본 가시는 그 기사를 더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공작이 검기를 실은 검으로 가시들을 베어 냈다. 그사이 마법사 하나가 다친 기사를 무사히 밑으로 내렸다. 공작이 잠시 뒤로 물러나 밑에 내려간 기사의 안전을 확인할 때였다. 구불구불한 가시 하나가 정확하게 공작을 노리고 들어왔다.
“공작님-!”
사이가 소리를 지르자 공작이 흠칫 놀라 고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치는 이미 공작의 발목을 잡아챈 뒤였다. 검은 줄기가 공작의 몸을 순식간에 감쌌다. 검은 가시는 마치 새로운 숙주를 만난 거대한 벌레 같았다. 다른 기사들은 그대로 찌르는데, 공작과 카이난은 유독 이렇게 새로운 고치처럼 만들려고 했다. 핏줄과 관계가 있어 보였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복잡한 수식을 연결시킨 사이가 검은 가시를 향해 주문을 영창 했다.
“가장 강렬한 빛이여-!”
콰아아아. 빛이 쏟아지며 고치가 밝은 빛에 의해 그대로 소멸했다. 숨이 막혀 있었는지 새파랬던 공작의 안색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사람들 몇몇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빛 마법의 힘이 어찌나 강렬한지 공작의 근처에 돋아 있던 가시가 공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깎여 나가 있었다. 사람들이 사이의 거대한 힘에 혀를 내둘렀다.
“멍청아, 보이냐. 이거 네 마법이야….”
저는 모든 마법에 출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는 사이였지만 그는 유독 빛 마법에 서툴렀다. 그렇지만 아이작은 그와 반대로 빛 마법에 가장 뛰어났다. 서투르긴 했지만 빛 마법을 가장 좋아하는 사이는 그런 점에서 아이작에게 조금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런데 지금 사이는 저도 모르게 빛 마법을 썼다. 저 고치에 빛 마법이 가장 효과가 있어서 그런 거기도 하겠지만 아이작의 마나가 제 몸에 들어온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역사서에 네 설명이 더 길어도… 용서해 줄게.”
사이는 제 발치에 평온하게 자는 듯 죽어 있는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병사 하나가 아이작의 얼굴을 천으로 덮어 주었기에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멋진 미소를 짓고 있겠지. 사이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다시 공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작이 준 마나가, 어쩌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공작님 하나만 서포트할 테니 나머지 다 내려보내-! 공작님! 마법 걸어 드릴 테니 그대로 공격하세요-!”
사이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 검지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쉴 새 없이 공작을 향해 마법을 걸었다. 빛 마법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실드와 버프가 공작의 주변에서 반짝거렸다. 아이작이 죽기 전 대부분의 기사들을 내려놓았던지라 다른 마법사가 마법을 걸어 남아 있던 기사들까지 내려가자 공작은 정말 고치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공작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고치가 계속해서 공작을 향해 줄기를 뻗으며 공격했지만, 단단한 실드에 의해 채 닿지도 못하고 부서졌다. 공작은 사이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치의 주변을 전부 베어 내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솟아나는 가시들뿐 아니라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가시를 검기를 실어 베어 내자 그것은 마치 자아가 있는 듯 끼에에엑, 끔찍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인피니티 실드 위로 수십 개의 가시들이 떨어지며 소멸했다. 사람들이 콰장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가시에 비명을 질렀지만 탄탄한 실드는 한 줌의 가시도 내려오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야아아아-!”
공작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고치를 공격했다. 안에 든 게 데이몬이라는 건 알지만,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제는 눈물을 머금고 베어 내야 할 때였다. 공작의 검기에 의해 가시가 전부 사라지고 고치는 맹렬하게 회전하며 더욱 두껍게 생성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공작이 베어 내는 속도 역시 빨랐지만 고치가 생성되는 속도 역시 빨랐다. 그 반대편에서 카이난이 올라왔다. 그는 제 숙부에게 눈짓을 하더니 빠르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이난은 엘리샤의 빛 마법과 신성력에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든든한 둘의 서포트를 받은 둘이 고치에 아낌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고치는 안의 피막이 보일 정도로 얇아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고치 안에 든 데이몬의 모습이 드러나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데이몬은 깊은 잠이 든 듯했다. 그러나 둘은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은 명확한 살의를 가지고 고치를 공격했다.
얇은 피막은 수많은 검기에도 깨질 듯 절대 깨지지 않았다. 수백 번 검기를 날리고 베어 내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잠시 둘이 공격을 쉬었을 때에도 고치는 더 생겨나지 않았다. 생성이 아닌 강화에 모든 기운을 쏟아붓고 있는 듯했다.
마치 칼로 물을 베는 듯한 느낌에 보는 사람들조차 지쳐 갈 때 즈음이었다.
“잠깐만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쫄딱 젖은 몸으로 한 손에는 환하게 빛이 나는 팔찌를, 한 손에는 무거워 보이는 검집을 쥐고 있었다.
“시에나! 지금까지 어디….”
“제가… 할게요.”
시에나에게 달려가던 엘리샤가 그녀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에나가 말한 바를 명확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시에나는 하도 꽉 쥐어 손톱자국대로 피가 배어든 손바닥으로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제가… 도련님을 죽일게요.”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공중에 떠 있던 둘조차 잠시 공격을 멈췄다. 대부분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손꼽히는 소드마스터 둘조차 베지 못하는 저 고치를 어떻게 검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연약한 여자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이제 와서 뭘 하다가 나타난 거야! 괜히 공작 각하랑 황태자 전하가 죽일 것 같으니까 방해하려는 거 아니야?”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
시에나는 쏟아지는 비난을 전부 들으며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보다 못한 엘리샤가 다가가 그런 시에나를 감싸 안았다.
“시에나. 마음은 알겠지만… 힘들 거예요. 공작님과 카이난 님께 맡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장 적극적으로 싸움을 도운 엘리샤가 시에나를 대놓고 감싸자 사람들은 무어라 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에나를 향한 적대감은 대단했다.
데이몬으로 인해 벌써 수백 명이 땅속에 묻히고 수십 명이 죽었다. 욕을 먹어도 싼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데이몬을 처리하기 위해 나선 것도 데이몬의 혈육이자 황족인 공작과 황태자였기에 그들은 대놓고 황족을 욕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평민인 시에나는 달랐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평민 계집애. 제 남자 하나 간수 못 해 이 사태를 만들어 낸 원흉. 사람들이 대놓고 수군대며 시에나에게 독기 어린 말을 뱉어 내었다. 시에나는 담담하게 그 말들을 받아 내었다.
“엘리샤, 부탁이에요. 나를 저기로 올려 줘요.”
“시에나….”
시에나의 눈은 누구보다도 결연해 보였다. 사실 시에나는 아이작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설 수 없었다. 마음의 준비 기간이 너무도 짧았던 탓이었다.
고치 주변에 난 거미줄 같은 가시가 잘렸을 때도 안도했지만, 데이몬을 감싼 피막이 깨지지 않았을 때에도 안도했다. 그런 이중적인 자신에게 환멸이 났다. 그들이 욕하는 이유도 당연했다.
이스테라의 힘이 제게 온 탓일까. 시에나는 약간의 예지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확히는 제가 나서지 않았을 때의 미래를. 피막 안에서 데이몬은 힘을 모으고 있었다. 3분이 지나지 않아 피막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가시들로 인해 반경 10km는 전부 초토화된다. 수도의 반이 무너지는 것이다.
공작과 카이난이 데이몬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안다. 그런 사람들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살해하는 건, 이미 데이몬이 아니었다.
“시에나, 지금은 소강상태라곤 하지만 위험해요.”
“나는 괜찮아요. 엘리샤, 제발.”
시에나의 간절한 말에도 엘리샤는 망설였다. 카이난이 고치 근처로 다가가려는 저를 말리는 게 딱 이런 기분이었겠지. 물에 쫄딱 젖어 처참한 얼굴을 한 시에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했다.
이상하게도 작고 마른 데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을 하고 있는데도 시에나는 묘하게 고아했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눈은 반짝였고, 새파란 입술일망정 앙다물고 있었다. 마른 손목에 걸고 있는 팔찌에서는 신성한 빛이 어렸고, 들고 있는 검은 잘 벼려져 있었다.
어쩌면 시에나라면 데이몬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샤는 그 역할을 그녀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운명이라니, 그 얼마나 가혹한가. 결심한 듯한 시에나를 바라보는 엘리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시에나, 나는….”
엘리샤가 망설이고 있는데, 시에나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깜짝 놀란 엘리샤가 주위를 둘러보니 사이가 그녀에게 추가적인 실드와 버프를 걸어 주고 있었다. 시에나 역시 조금 놀란 듯했으나 이내 그녀는 사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시에나…!”
“공작 각하, 카이난 님.”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정말 당신이 죽은 줄만 알았어요.”
카이난의 원망과 걱정이 섞인 말에 시에나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설명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다 설명드릴게요. 지금은… 저에게 맡기시고 두 분 다 내려가 주세요.”
시에나의 말엔 묘한 힘이 어려 있었다. 마치 신이 인간의 입을 빌어 말하는 듯했다. 그들은 더 캐묻지 못하고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려갔다. 공중에서 단둘이 남은 시에나는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피막에 둘러싸인 데이몬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의 배 속에 들어 있는 태아 같았다. 그 모습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시에나가 이내 그 피막을 팔찌를 낀 손목으로 콩, 두들겼다.
“…!”
“세상에…!”
“이럴 수가…!”
공작가 황자가 수많은 검기를 날렸을 때에도 깨지지 않던 단단한 피막이, 시에나의 약한 두드림에 쩍, 하고 갈라졌다.
피막은 사라진 후에도 전혀 재생되지 않았다. 이스테라의 힘이 담긴 팔찌를 차고 있어 수월하게 깰 수 있었던 거지만, 사람들은 이 장면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공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
“기회인데. 활이라도 쏴 볼까?”
“그러다가 저 여자까지 다치면 어떡해!”
“뭐 어때?”
“뭐가 어떻긴. 저 피막을 깬 유일한 사람이라고.”
“이, 일단 쏴 보자고!”
“다들 그만.”
공작이 손을 들어 그들의 웅성거림을 단박에 일축시켰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던 사람들이 공작을 돌아보았다. 카이난 역시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공격은 중지한다. 이대로 대기하도록 해.”
그들은 불만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별수 없이 당겼던 활시위를 다시 원상 복구 시킬 수밖에 없었다. 밑이 다시 조용해져 시에나는 방해 없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얼굴이 많이 거칠어졌네요.”
시에나가 데이몬의 얼굴을 매만지며 속상한 듯 말했다. 시에나가 사라진 이후로 잠 한숨 이루지 못했는지 데이몬의 얼굴은 몹시 상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잘생겼어요.”
농담을 건네는 시에나의 눈에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데이몬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눈물을 참으려 힘을 주는 입꼬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 많이 찾았어요?”
당연히 그랬겠지.
“이렇게 될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 정말 바보 같은 사람.
“나, 당신을 죽여야 한대요.”
저를 죽인다는 말에도 데이몬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살아 있는 채로 죽은 것 같았다. 시에나는 데이몬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제발.”
시에나는 왈칵 흘러내리는 눈물에 고개를 숙인 채 꺼질 듯한 목소리로 잇대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잖아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는데도 계속해서 눈물이 펑펑 솟아났다. 어디서 이 많은 물들이 나오는 걸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야기는 들을 수 없지만 시에나가 어떤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겠는지 엘리샤 역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신을… 사랑해요.”
시에나의 고백에도 데이몬은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죽은 듯이 서서 잠들어 있는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게 해 줘요.”
시에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데이몬은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약속의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이 시간이 지나면 아래에 있는 모두가 죽게 된다. 시에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데이몬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핏, 데이몬의 목에서 피가 방울방울 배어 나왔다.
성검이라 그런지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시에나는 눈앞의 빨간 피를 보자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이대로 베면, 데이몬은 죽겠지. 베지 않으면 나를 포함한 모두가 죽고. 시에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조마조마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시에나에게 빨리하라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에나와 데이몬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애끓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에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전, 거의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르바스, 혹시 거기 있어?”
있을 리가 없지.
찬찬히 고개를 들던 시에나가 이내 놀라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동도 없던 데이몬의 눈꺼풀 위가 마치 꿈을 꾸듯 움찔거렸기 때문이었다. 시에나의 가슴속에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가 싹텄다.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
둘만의 암구호를 말하자 데이몬의 눈꺼풀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 작게 싹튼 불씨는 거대한 들불이 되어 번져 나갔다.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
시에나는 그 말이 마치 마지막 희망이라도 된다는 듯 간절하게 말했다. 목에 대고 있던 검까지 치운 뒤였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마르바스, 제발…! 일어나…!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
시에나는 데이몬의 어깨를 뒤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잠시나마 있었던 눈꺼풀의 움직임도 사라져 버렸다. 시에나의 희망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어느덧 또 흠씬 흘러내린 눈물을 고개를 숙여 닦으며 시에나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뭐가 그럴 리가 없어?”
“나한테 그런 행운이 일어날 리가… 마르바스?”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답하다가 말을 건 주체가 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앞에는 길쭉한 동공을 가진 남자가 시에나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마르바스-!”
시에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를 얼싸안았다. 온몸이 환희에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시에나의 격한 반응에 마르바스는 조금 놀라면서도 시에나의 등에 팔을 둘러 토닥였다.
“오랜만이야, 시에나. 그런데 마법이라도 배운 거야? 왜 공중에 떠 있어?”
“너… 너도 떠 있거든?”
시에나는 마르바스에게 평소처럼 받아치고 싶었지만, 감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 더듬으며 대답했다. 마르바스가 밑에 무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흘긋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네. 공중에서 밤일이라도 하려다가 걸린 거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시에나가 마르바스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미안, 미안. 분위기가 하도 어둡길래 농담 좀 해 봤어.”
“만약에 네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난 그대로 널 베어야 했어.”
시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했다. 대신관과 황제, 시에나의 실종과 이스테라와의 만남까지. 하도 짧게 설명해 제가 생각해도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데 마르바스는 완전히 납득한 듯했다.
“그렇구나.”
“…그게 끝이야?”
“네가 그렇다는데 뭐. 그게 아니면 지금 내 속에서 끓고 있는 이 시한폭탄 같은 힘이 뭔지 설명도 안 되거든.”
“시한폭탄 같은… 힘?”
시에나가 놀라서 마르바스에게 되물었다. 너무 급작스러워 몰랐는데 마르바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뭔가 참는 기색 역시 역력했다. 시에나와 대화하는 내내 속 안에서 그 힘을 참아 내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 아직까지 버틸 만은 한데… 계속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아.”
“방법은 없는 거야?”
시에나가 더럭 겁이 나 물었다. 마르바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없는 건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정신 하나가 소멸해야 해.”
“뭐…?”
방법이 있다는 말에 화색이 돌았던 시에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사이 마르바스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까 지었던 여유로운 표정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원래 이 몸 안에 잠들어 있던 힘 자체도 제국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했잖아. 그 힘을 깨우면서 들어온 힘을 함께 소멸시키는 원리야. 다만 그 힘이 크다 보니 융합 과정에서 정신이 함께 붕괴할 거야. 원래는 이 정도의 힘이라면 오롯이 전체가 다 소멸해야 하지만 우리는 원래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잖아. 그래서 으… 한 명분의 정신만 소멸되면 돼, 아마… 될 거야.”
마르바스의 말에 시에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데이몬과 마르바스 둘 중 하나의 정신이 영원히 소멸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데이몬이 마르바스의 정신을 안에 가두어 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그냥 계속 버티면서 살면….”
그렇게 말한 시에나의 눈앞에 또 하나의 예지가 펼쳐졌다. 데이몬의 육신이 두 힘의 충돌을 견디다 못해 폭발한 것이었다. 그 강한 힘은 거의 핵폭발과 같은 효과를 내었고, 세계는 결국 또 멸망했다.
멸망, 멸망. 그 지겨운 멸망. 대체 이 야속한 운명은 어디까지 저를 괴롭혀야 속이 시원한지.
시에나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마르바스를 바라보았다. 마르바스는 힘들 것이 자명한데도 티를 내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둘 다 망가지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야.”
“…뭐?”
“네가 그 6년이란 시간 속에 날 하나의 완성된 인격으로 만들어 주었기에, 나만 죽으면 해결되게 되었으니까.”
“지금 무슨….”
“소멸하는 건 나니까 안심하라는 뜻이야.”
시에나는 마음 한구석을 들킨 것 같아 당황하며 마르바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괜찮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아무리 우리 둘 다 널 사랑해도, 네가 사랑하는 건 데이몬이잖아. 그러니 내가 사라지는 게 맞지.”
“아니, 나는… 난….”
시에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마르바스를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네가 사라지고 널 정말 많이 생각했어. 수없이 꿈에서 너를 봤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생각이 들어 많이 울었어. 난 사실은 너 역시…
시에나는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지는 못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마르바스가 희망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로 인해 데이몬의 정신이 대신 파괴된다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시에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돈 속에서 입술만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런 시에나의 이마 위로 시원한 것이 얹어졌다. 마르바스가 괜찮다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단순하게 생각해. 이미 사라졌어야 할 정신이었어. 네 덕에 조금 오래 살게 된 것뿐이지.”
“마르바스….”
시에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뭐라도, 한마디라도 더 해야 하는데. 눈물이 흘러내려 도저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으흑….”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만큼 서럽게 우는 시에나를 마르바스가 꽉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가, 품이, 제 머리를 모두 품고도 남는 큼직한 손이 너무 따뜻해 시에나는 더욱 섧게 울었다.
“다 울었어?”
한참을 울고 눈이 새빨개진 시에나를 마르바스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퉁퉁 부어 있을 제 얼굴을 가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따뜻하게 저를 대하자 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울 건 제가 아니라 마르바스인데도.
“나 마지막 소원이 있는데.”
마르바스는 시에나의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떼어 주며 말했다. 시에나는 토끼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원?”
“응.”
“…뭔데? 말해 봐.”
시에나는 전부 들어줄 듯한 기세로 말했다. 그 소원이 공중에서 밤일을 치르는 거라도 해 줄 기세였다. 그런 시에나가 귀여워 끌어안은 마르바스가 말했다.
“너랑 입 맞추는 거.”
마르바스의 소원에 시에나는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바스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어 왔다.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사람들 때문에 그래? 가려 줄게. 넘쳐나는 게 힘인데.”
마르바스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둘과 사람들 사이에 거대한 어둠의 장벽이 생겨났다. 소리조차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 어둠 속엔 둘만 있는 듯했다. 그러나 마르바스와 함께 있는 지금 캄캄한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늑한 둘만의 공간에서 마르바스가 시에나를 꽉 끌어안으며 입을 맞춰 왔다. 탱, 미약하게나마 손에 쥐고 있던 성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응….”
시에나 역시 그런 마르바스를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혀를 놀렸다. 마르바스의 혀는 아까 제 눈물을 핥아서인지 짭짤한 맛이 났다. 그는 거침없이 시에나의 안을 파고들었다. 츄웃, 츳, 야한 소리가 시에나의 귓가를 울렸다. 하도 울어 머리가 아픈 상태로 거친 입맞춤을 받아 내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뇌가 그대로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시에나는 까슬한 그의 뒷머리를 잡으며 긴 시간 농밀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먼저 떨어져 나온 건 마르바스였다.
“이젠 진짜… 폭발할 것 같아서.”
“아, 응.”
씁쓸한 미소를 감추는 마르바스를 보며 시에나는 민망한 듯 젖은 입가를 닦아 내었다. 정신없이 마르바스를 탐했다는 사실이 새삼 민망하게 느껴졌다.
“행복해야 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그의 말에 시에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끝을 바라보며 비죽이 배어드는 울음을 겨우 참아 내었다. 마르바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툭툭, 시에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려가 있어. 위험하니까.”
시에나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할망정 꼭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말 안 듣는 꼬마를 보는 것처럼 마르바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말 안 듣네.”
“마지막 소원은 이미 썼잖아.”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마르바스는 허공에서 손을 우측으로 그어 둘과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던 어둠을 사그라뜨렸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타나자 다시금 아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나타났잖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공작의 지적에 금세 조용해졌다. 마르바스는 시에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 이 두 힘을 합칠 거야. 최대한 안에서 해결해 보겠지만, 여파가 있을지도 모르니 강한 실드를 준비해 놓으라고 전해 줘.”
“…알았어.”
시에나가 긴장한 어조로 답했다. 마르바스는 내려갈 준비를 하는 시에나를 뒤에서 다시 한번 꽉 끌어안았다. 시에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려다 마르바스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그냥, 잠시만….”
마르바스는 시에나의 밀빛 머리칼에 서너 번 입 맞추더니 이내 홱, 떨어져 나왔다. 시에나는 그가 그녀를 밑으로 내려보낼 때까지도 여전히 굳어 있었다. 엘리샤가 그런 시에나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에나. 시에나,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힘을 폭발시킬 거니까… 강한 실드를 준비해 놓으래요.”
“알겠어요. 바로 조치를 취할게요.”
엘리샤는 재빨리 마법사와 신관들을 불러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최대 크기의 실드를 준비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긴장감 속에 마르바스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상승하는 그의 뒤로 붉은 빛무리가 졌다. 마르바스는 점점 멀어지더니 작은 점에서 이내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쿠궁.
하늘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땅에 지진이 일 정도로 거대한 폭발에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시에나는 눈도 깜짝 않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별의 폭발이나 혜성의 추락 같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빛이 시에나의 망막에 잠겼다.
마르바스가 마지막으로 저를 끌어안았을 때, 그는 떨고 있었다. 무서웠겠지. 두려웠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위해 저 먼 곳에서 홀로 소멸했다. 그 거대한 감정을 시에나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떨어진다, 준비해-!”
폭발의 파편들이 이제야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실드 안에 숨어 잔뜩 굳어 있었다. 검은 구름이 걷힌 자리에는 어느새 피처럼 붉은 노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톡. 은색 갑옷으로 잔뜩 무장한 기사의 코끝에 붉은 무언가가 떨어졌다.
“어?”
기사는 화들짝 놀라 제가 지금 맞은 것을 주워 확인했다.
“…세이지 꽃잎?”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수천 개의 세이지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공격 의사가 없는 순수한 꽃잎들은 실드를 뚫고 사람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이게 무슨….”
사람들이 연약하고 부드럽지만 선명한 붉은색을 띤 꽃잎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죽는 게 그렇게 무서웠으면서 제가 슬퍼할까 선물까지 주고 갔다. 시에나가 제일 좋아하는 세이지 꽃의 폭풍. 세이지 꽃은 발목까지 올 정도로 가득히 차올랐다.
“이 바보가 정도도 몰라. 이렇게 많이 하면… 어떡….”
말을 잇지 못하고 시에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세이지 꽃의 꽃말은 구원, 그는 마지막 선물의 꽃말처럼 살다 갔다. 마르바스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우는 시에나의 이마와 눈썹, 코끝, 어깨에 보드라운 세이지 꽃잎이 위로하듯 나리고, 또 나렸다.
* * *
제국의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주변국에 알려지며 세상은 잠시 시끄러워졌다. 황제가 서거한 날에 생겨난 이상한 고치와 거미줄, 거기서 떨어지는 검은색 독액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다들 쉬쉬하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끝없는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던 황궁과 신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지상 위로 돌아왔다. 황궁에서는 지진을 느끼고 대부분 재빨리 대피했기에 사망자가 적었지만, 신전의 지하에는 이상할 만큼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화려한 신전 아래에는 8층 높이의 지하가 있었는데, 대외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인원들이 신전의 지하에 모여 있다 대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했던 것이다. 그 수가 수십만을 넘었고 신분 역시 신관이 아니었기에 간단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 카이난이 자세한 조사에 들어갔고, 그 결과는 모두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대신관의 명 아래 반란을 일으킬 의도를 가진 군사들이 조용히 신전의 지하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잘 벼려진 무기와 대포, 갑주를 모아 놓은 창고가 한쪽에 발견된 한편, 몬스터들을 접붙여 만든 키메라에 대한 연구소도 설치되어 있었다. 조사 도중 반란을 시작하는 날짜가 담긴 문서를 발견했는데 그 날짜가 일이 일어난 날의 겨우 6일 뒤라 다시 한번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의 인원이었다면 황궁이 폐허가 되는 것은 물론 수도가 초토화되고도 남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던 대신들 사이에서 데이몬 황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데이몬이 일으킨 폭주의 결과가 거의 전쟁 영웅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반 황태자파에서는 그야말로 제국을 지킨 사람이니 황제에 어울린다는 말도 나왔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하늘에서 떨어진 이후 일주일 내내 의식 불명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의견은 그다지 힘을 받지 못했다.
“도련님, 벌써 몸을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요.”
시에나가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창밖을 구경하는 데이몬의 손등을 찰싹, 쳤다.
“아, 알았어.”
데이몬은 순한 양처럼 굴었다. 제국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화제인 데이몬은 8일 만에 깨어나 황궁 깊숙한 곳에서 요양 중이었다. 데이몬이 폭주하기 시작한 황제의 방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별관은 다행히 거의 무너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수리를 하는 동안 별관에서 업무를 보고 생활하게 되었다.
“뭘 보고 계셨던 거예요?”
시에나는 새하얀 빵을 먹기 좋게 찢어 데이몬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데이몬은 아기 새처럼 빵을 받아먹으며 곤란한 듯 말했다.
“…아이작.”
그 말을 들은 시에나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물론 데이몬이 보고 있던 게 실제 아이작은 아니었다. 황궁을 수리하는 도중 카이난은 새로운 사업을 추진했다. 수많은 국민들을 지키고 죽은 아이작이 성인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황궁 앞에 동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데이몬이 보고 있던 건 황궁 앞에 제작 중인 동상이었다.
그걸로 모자라 카이난은 아이작을 위한 위인전을 집필하는 한편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시켰다. 국가 마법사의 훈장을 수여하며 매년 나라로부터 녹봉을 받게 되었지만 물려받을 가족이 없었기에 대신 그의 이름으로 된 재단을 만들어 마법에 재능이 있지만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게 되었다.
예전의 삶이었다면 이름 없는 필부로 평생 데이몬을 원망하고 살았을 아이작은 온 세상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시에나도 데이몬도 거기에 대해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의 성대한 장례식 앞에 수많은 꽃이 쌓였지만, 그가 앞으로 펼쳐갈 앞날보다 아름답진 않았을 테니까.
“아이작은 도련님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시에나가 데이몬이 깨어나자마자 닳도록 해 준 이야기,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씁쓸해 보였다. 오랜 지우를 잃은 감정과 함께 부모도 자식도 전부 저와 관련되어 죽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커 보였다. 시에나는 그런 데이몬을 향해 수프를 빠르게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으, 읍. 시에, 읍.”
빠르게 제 입 안으로 들어오는 야채수프에 데이몬은 다른 생각 할 틈 없이 씹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억지로 집어넣는 건 아니지만 수프를 뜬 스푼을 앞에 갖다 대고 있으니 빨리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프를 담은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시에나는 데이몬의 입에 수프를 집어넣었다. 결국 데이몬은 수프를 다 먹고 나서야 긴 숨을 내쉬었다.
그다음으로는 감자와 고기 요리를 먹이려는 시에나를 겨우 말렸다.
“이건 내가 알아서 먹을게.”
“그래도 의사가 절대 안정하라고 했는걸요.”
“정말, 좀 봐줘. 절대 안정이랬지 갓 태어난 신생아 취급하라곤 하지 않았다고.”
데이몬이 볼멘소리를 하며 시에나로부터 접시와 포크를 빼앗아 들었다. 시에나는 우아하게 고기를 써는 데이몬의 모습을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는 고기를 입 안에 쏙 넣고 시에나에게 물었다.
“시에나.”
“네?”
“황후와 작위를 물려받은 귀족 중에 뭐가 좋아?”
“갑자기 그런 말은 왜요?”
“그냥, 궁금해서.”
“제가 된다는 가정하에요?”
“응.”
시에나는 데이몬의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가장 명예로운 직책인 황후와 작위를 물려받은 귀족. 공작일 리는 없으니 후작부터 남작까지려나. 작위만 있지 돈이 없는 귀족들의 사례도 알고 있는 시에나였지만, 시에나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귀족이요.”
“귀족?”
“네.”
“왜 그렇게 생각했어?”
“황후는 내가 잘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귀족도 가문을 물려받으면 되는 거니 똑같지 않나?”
시에나는 데이몬의 반박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데이몬은 재미있다는 듯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몬의 짓궂은 질문에 시에나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래도 황후는 뭔가 남편 덕인 것 같다면, 귀족 작위는 내가 하기 나름이니까요.”
“그래, 무슨 소린지 알았어.”
“그런데 왜 물어보신 거예요?”
“카이난이 황제 하겠냐고 물어봐서.”
“…네?”
시에나가 황망하게 되물었다. 무슨 그런 중요한 얘기를 이렇게 성의 없이 말하는 건지.
“여전히 황제 자리가 공석이잖아. 그런데 카이난은 처음부터 별로 황제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더라고.”
카이난이 황제를 맡기 싫어하는 건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에도 여러 번 묘사되어 있긴 했다. 원래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엘리샤와 전국 유랑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데이몬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황제가 죽고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게 되어 억울해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데이몬에게 아예 황제 자리를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카이난다웠다.
“처음엔 거절했었는데, 하도 집요하게 물어보길래 너한테 물어본다고 했어. 그런데 역시 안 하는 게 좋겠네.”
데이몬은 그렇게 말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시에나는 충격을 받은 듯 어물어물하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 그런데 그럼 작위는 뭐예요?”
“음, 카이난이 네게 작위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더라고.”
“작위를… 저한테요?”
“응. 네가 마지막으로 그 힘을 소멸시키기도 했고… 다친 사람들도 성수로 치료했잖아.”
“아….”
마르바스가 사라진 그날 수도 전역에는 붉은 세이지 꽃잎이 나렸다. 둘이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느라 장막으로 가려 놓은 동안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 모양이었다. 시에나가 장막 너머에서 황자의 몸 안에 든 악마와 싸웠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퍼졌다. 세이지 꽃잎에 대한 연출도 한몫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부상자들을 치료할 때 시에나는 제가 빠졌던 성수가 있는 동굴로 사람들을 인도했다. 희석되지 않은 강한 성력이 물에 녹아 있어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한 상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치료되었다. 살아남은 신관 중 하나가 수백 년 전 사라진 성물인 보검과 팔찌를 알아보며 사람들은 시에나를 성녀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신성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에나인지라 사람들이 제게 경외의 눈빛을 보낼 때마다 난감해졌다. 게다가 제가 한 일은 정말이지 별거 없었기에 얌전히 찬양받기에는 양심이 쿡쿡 찔렸다. 솜털 하나도 다치지 않은 시에나가 데이몬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별궁에 콕 박혀 있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작위를 받을 만큼 많은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시에나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한 건 맞지. 좀 더 당당해져도 괜찮아. 그래도… 황궁에 계속 있는 건 문제가 되긴 할 거야.”
“역시 그렇죠?”
시에나와 데이몬은 난감한 눈빛을 교환했다. 데이몬이 깔끔하게 비운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다보며 후,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는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일단 카이난에게는 내일 말해 둘게. 작위를 받는 쪽으로 하는 걸로.”
“저는 굳이 받지 않아도….”
“받아 놓으면 마르바스 영지를 전적으로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데이몬의 계속되는 설득에 시에나는 결국 작위를 받는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시에나의 승낙에 데이몬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착하다.”
쪽, 보름달처럼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춘 데이몬이 환하게 웃었다. 두근,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시에나의 가슴속이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파닥거렸다. 시에나는 말없이 데이몬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에나의 생각을 알아챈 데이몬이 점잖게 그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얹었다. 데이몬의 입술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가볍게 눌렸던 입술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자 시에나가 아쉽다는 듯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 역시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럼, 내일 봐. 시에나.”
“네, 도련님.”
데이몬은 침대에 앉아 있다 혼절하듯이 뒤로 스러졌다. 시에나는 혹시 데이몬이 다칠까 머리 뒤에 손바닥을 대었다. 산 너머로 해가 지나가고 빛이 잦아들자, 또 다른 데이몬이 눈을 반짝 떴다.
“시에나.”
“…마르바스. 일어… 읍.”
마르바스는 일어나자마자 시에나에게 입을 맞춰 왔다. 말을 해야 할 혀가 어느새 그에게 끌려가 쪽쪽 빨리고 있었다. 혀가 아릴 정도로 강한 압박감에 시에나가 마르바스의 가슴을 콩콩 쳤다. 그러나 그런 반항은 가볍다는 듯 마르바스는 씩 웃으며 시에나를 침대에 누였다.
“으, 마르바스. 안 돼!”
시에나는 겨우 마르바스를 밀치며 소리쳤다. 시에나가 팔찌를 낀 손으로 밀치자 마르바스의 몸이 퍽 밀쳐져 침대 끝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반쯤 내려온 옷을 추스른 시에나가 마르바스를 보며 씩씩대었다.
“아직 몸이 다 치료되지 않았다고 했잖아.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반가워서 그랬지.”
“두 번 반가우면 아주 재밌겠어.”
마르바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시에나를 품속에 넣었다.
“알겠어. 그럼 그냥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
시에나는 마르바스의 품에 폭 안겼다. 눈을 가늘게 뜬 시에나가 마르바스를 슬쩍 노려보았다. 마르바스가 바로 깨갱하며 그녀를 놔주었다.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시에나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계속 아옹다옹하고 있긴 하지만 시에나는 그와 다시 만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 * *
일이 마무리 된 후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마르바스였다. 쭉 찢어진 동공을 본 시에나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혹 희생된 것이 데이몬이었나 싶었는데, 동공이 갑자기 작아지며 바로 데이몬으로 돌아왔다.
“시에나…? 여기가 어디야…?”
“도련님. 정신이 드세요?”
데이몬은 폭주가 시작된 후의 기억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시에나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상처받고 슬퍼할 테니까.
시에나는 정성을 다해 데이몬을 간호하는 한편 아까 보았던 길쭉한 동공에 대한 잔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데이몬이 잠든 새에 둘만의 암구호를 외쳤고, 결과는 놀라웠다. 마르바스의 정신 역시 살아 있었던 것이다.
두 힘이 융합과 소멸을 거치며 둘의 정신 역시 섞였다고 했다. 그래서 둘의 정신이 반씩 소실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었다고.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 때문일까. 이전과는 달리 데이몬과 마르바스는 제가 강하게 원할 때면 언제든 육체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항상 되는 건 아니고 한 명이 육체를 차지하고 약 한 시간이 지난 뒤부터 가능했다. 한때는 인격이 휙휙 바뀌는 통에 시에나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아주 애를 먹었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이 좀 진정되고 나서는 마르바스가 제 몸을 탐하려 드는 것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예전의 데이몬과는 달리 데이몬은 시에나에게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정신이 반씩 소실되고 융합되면서 서로가 예전과 같은 격한 질투심은 느끼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시에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마르바스의 몸이 낫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거부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어?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어.”
너랑 하는 거 생각하고 있었어, 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시에나는 말을 돌렸다.
“뭐야, 싱겁게.”
키득 웃는 마르바스를 보는 시에나의 가슴이 쿡쿡 찔리면서도 설레었다.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으면서도 둘의 인상은 완전히 달랐다. 색다른 매력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법 보여 줄까?”
“마법?”
마르바스의 힘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두 힘이 맞붙어 같은 양이 소멸되긴 했지만 어둠의 구에 담겨 있던 힘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데이몬은 그 덕분에 배우지 않은 마법들을 전부 제 것이었던 것처럼 쓸 수 있게 되었다. 검기를 사용하는 건 데이몬이 원래 훈련한 것이었기에 남아 있어, 데이몬은 검기를 쓰는 검사이자 고위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세상 밖에 나가게 되면 혼란스러워질 테니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잘 봐.”
마르바스가 물통을 손짓하자 안에서 물통이 툭 쏟아지며 물이 쏟아져 나왔다. 시에나가 기겁하며 물통을 들어 올리려고 일어서는데 물이 땅에 닿기 전 분수처럼 위로 수직 상승했다.
“어…?”
당황한 시에나가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 마르바스가 계속해서 마법을 펼쳤다. 분수처럼 펼쳐졌던 물은 다시 모여 달리는 말 모양이 되었다.
“우와!”
제법 리얼하게 달리는 말을 보며 시에나가 감탄했다. 초원을 마음껏 달리던 말은 이내 귀족 아가씨를 태운 마차의 말이 되었다. 왕궁 앞에 다다른 아가씨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수많은 남자들이 앞다투어 마차 앞에 섰다. 우스꽝스러운 묘사에 시에나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너무 웃겨.”
여자는 많은 사람들 중 한 남자의 손을 잡고 내렸다. 마차가 떠나고 어느새 여자는 화려한 드레스를, 남자는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둘은 무도회에서 내내 춤을 추었다. 물로 만들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멋진 연출에 시에나가 어느새 넋을 놓고 앞을 바라보았다.
달이 뜨고, 둘은 춤을 더 추는 대신 발코니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신이 나타나 있던 둘의 모습이 얼굴과 어깨까지로 클로즈업되었다. 시에나는 그제야 둘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저거 혹시 나야?”
“…맞아.”
여자는 시에나였고, 남자는 마르바스였다. 시에나는 지금껏 마르바스가 상상한 둘의 이야기를 봤던 거였다. 둘은 발코니에서 입을 맞추었다. 그 장면을 바라본 시에나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물은 조로록 모여 다시 물통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네가 나를 데이몬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나 역시 너를 데이몬만큼, 아니 걔보다 더 사랑한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마르바스의 애달픈 고백에 시에나의 코끝이 찡해졌다. 시에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래 기다릴 수 있으니까, 너무 길게 어색해하지는 말자. 이제는… 네가 원하기 전까지 절대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게.”
“…응.”
시에나는 마르바스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왜 지금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지 모르겠다. 마르바스를 받아들일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 *
시에나는 신전을 걸으며 문득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스테라가 전과 같은 대리석 의자에 앉아 시에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왔구나. 앉으렴. ]
“네.”
시에나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를 응시했다.
[ 먹으면서 이야기할까. ]
“좋아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시에나는 예전과 같은 맛을 생각하며 과자를 입 안에 넣었다. 와작, 과자를 씹은 시에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졌다. 이스테라가 그런 시에나의 눈치를 보았다.
[ 별로 맛이 없니…? 이번엔 좀 더 다양한 맛을 도전해 봤는데. ]
“과자 안에… 김치찌개는 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바삭하고 달콤한 겉 부분과 매콤하고 푸근한 속의 조화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스테라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있던 세계에서는 하도 많이 먹길래 넣어 봤단다. ]
“하하, 좀 많이 먹긴 하죠.”
[ 그래, 과자 이야기는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지. ]
이스테라의 말에 시에나가 과자 가루가 묻은 입을 털고 자세를 바로 했다.
[ 일단, 이 세계를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구나. ]
이스테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신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시에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스테라가 고맙다는 말을 할 것 같긴 했지만 고개를 숙일 줄은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시에나는 당황하며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완전히 제대로 한 것도 아니었는데요, 뭘. 그만 일어나세요.”
[ 더 좋은 방향을 맞이하게 되었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
“네에….”
시에나는 계속되는 인사에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 그래서 보상은, 어떤 게 좋겠니? ]
“보상…이요?”
[ 네가 신성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힘이 상당히 많이 비축되게 되었단다. 게다가 네가 나서 준 덕에 사람들이 찬양이 늘어나 소멸은 면하게 되었어. 신은 사람들에게 찬양받을수록 힘이 늘어나게 되어 있거든. ]
“아아, 그렇구나.”
[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말해 보렴.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니? ]
원래 세계. 그리운 아버지와 친구들이 있는 세계. 서툴게 끓인 김치찌개와 한약재의 냄새가 나던 나날들. 평온해서 더욱 완전했던 세계. 그러나… 이제는 여기보다는 소중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아니요, 저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 그래? 의외구나. 나는 네가 돌아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
“저는 여기가 좋아요. 이제 사업도 궤도에 들어섰는데, 여기서 끝낼 수는 없죠.”
사실 제일 큰 이유는 데이몬이었지만, 이스테라의 앞에서 꺼내기엔 왠지 부끄러워 피하게 되었다. 이스테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에나의 이야기에 긍정했다.
[ 그래, 네 뜻을 존중하마. 그렇다면 다른 소원은 없니? ]
“저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 제가 있던 세계에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나요?”
시에나는 조심스레 이스테라에게 물었다.
[ 아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건 불가능하단다. ]
“역시… 그렇죠?”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입이 썼다. 그러나 이스테라는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가 죽을 위기에서 구하는 건 가능하지. ]
“네…?!”
[ 신이란 원래 고차원의 존재. 시간에는 제약이 없단다. ]
은근슬쩍 저를 띄우는 이스테라의 말에 시에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어렸을 때 죽은 동생이 있어요. 그 동생을 죽을 위기에서 구해 주실 수 있나요?”
언제나 마음의 짐처럼 남아 있는 수한이었다. 시에나는 수한을 살릴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을 것 같았다.
[ 그래, 알겠다. 주어진 운명을 바꾸는 건 쉽지 않지만, 한 명을 죽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거라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지. ]
“고, 고맙습니다.”
[ 네게 주기로 했던 축복들을 모두 그 아이에게 주겠다. 그 아이는 은보다 반짝이고 금보다 귀한 인생을 살다 갈 게다. ]
“정말… 고맙습니다.”
[ 네가 해 준 것에 비하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란다. ]
시에나는 벅찬 감정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하나만 더 들어주실 수도 있을까요?”
[ 말해 보렴. ]
“그쪽 세상에서… 저에 대한 기억을 전부 지워 줬으면 좋겠어요.”
[ 흐음. 인간들은 기억되길 원한다고 들었는데. ]
“저는 계속 여기 살 테니까요. 저에 대한 기억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수한을 잃은 회한을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도 가끔은 견디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그런 날이면 수한이 활짝 웃고 있는 액자를 쓰다듬으며 울었다. 시에나는 아버지가 저 때문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다.
[ 알겠다. 어차피 널 이곳으로 인도한 것도 나였으니 그 정도의 책임은 져야겠지. ]
“감사합니다!”
시에나는 짐을 덜어낸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다른 소원은 없는 거니? ]
“으음. 네. 이젠 없어요.”
[ 참 욕심이 적은 아이로구나. ]
돈이야 평생 쓰고 남을 정도로 벌었고, 명예직이라는 황후 자리도 내쳤다. 그저 남은 생을 제 연인과 행복하게 지내면 족했다.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에나에게 이스테라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이스테라는 멍하니 서 있는 시에나의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네게 축복을 걸었다. 너는 한평생 잔병치레하는 일 없이 행복한 삶을 살며 장수하게 될 거란다. ]
“감사합니다….”
[ 네가 해 준 일에 비해 바라는 것이 너무 적어서, 마음을 좀 써 봤단다. ]
“후후. 이제 그럼 다시는 인간계에는 오지 않으실 건가요? 저 저번 축제 때 주디스가 또 오지 않을까 싶어서 알아보기도 했는데.”
결국엔 찾지 못했지만. 시에나의 말에 이스테라가 눈을 휘었다.
[ 인연이 닿는다면 또 다른 유희로 만나게 되겠지. ]
“…신도 유희를 즐기나요?”
[ 그래. 가끔 나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 본단다. ]
“몰랐네요. 주디스는 그럼 진짜 유희였군요?”
저를 만나기 위한 장치인 줄만 알았는데. 시에나의 말에 이스테라가 그리운 듯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참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구나. ]
“나중에 저랑 알아보러 가요.”
[ …그래. 그러마. 자아,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단다. 오늘은 네게 있어 기쁜 날이지 않니. ]
시에나는 그제야 제가 무엇을 기다리다 잠들었는지 기억하게 되었다. 시에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이스테라를 향해 시에나가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까치발을 든 채 시에나가 이스테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린 새의 부리처럼 따뜻하고 연한 입술이 신의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인간이 신에게 보내는 감사예요. 저는 당신과 달리 축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을 구해준 당신에게 감사는 할 수 있어요.”
당돌한 시에나의 말에 이스테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에나가 천천히 이스테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희생해 가며 이 세계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저의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평생 당신에게 감사하며 살게요. 당신이 세상을 구한 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으니까.”
시에나의 감사 인사에 이스테라는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아이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제 몸 따윈 부서져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러나 도움을 청했던 인간이 오히려 제게 고맙다고 말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는데, 깨끗이 잊고 세상을 구한 것만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이스테라는 이 작은 아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아무리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대신관처럼 영혼이 검게 물들고 추악해진다. 그러나 수천 번의 실망과 과오를 반복하면서도 이렇게 한 번씩 시에나 같은 아이가 나오곤 한다. 이러니, 인간을 사랑하는 걸 멈추지 못할 수밖에.
이스테라는 격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는지 시에나를 꽉 껴안았다. 시에나는 이스테라의 포옹을 받으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이스테라의 품은 따뜻해 시에나는 마치 어미 새의 품에 안긴 아기 새가 된 기분이었다. 안온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시에나에게 이스테라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구나. ]
“만나서 반가웠어요.”
[ 나 역시 만나서 반가웠단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
시에나는 포근하고 환한 빛에 둘러싸였다. 체온이 있는 구름을 껴안으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나, 시에나.”
데이몬이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시에나를 조심스레 깨웠다. 시에나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데이몬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제 곧 대관식이야. 많이 피곤해?”
저를 걱정하는 데이몬이 무색하게 시에나는 오랜만에 정말이지 상쾌했다. 제가 백작위를 받는 대관식 도중 잠깐 졸았던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하품을 하며 쭈욱 기지개를 켰다.
“아니요. 그냥 잠깐 졸았을 뿐이에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요.”
시에나는 눈부시도록 새파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에나에게 긍정했다.
“오늘 날씨가 좋긴 하지.”
“다 끝나면 다 같이 피크닉이라도 갈까 봐요.”
“좋아. 샌드위치는 내가 준비할게.”
화려한 정복을 차려입고 금방이라도 피크닉을 갈 기세에 시에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시에나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평민이지만 타의 귀감이 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나는 이에 그에게 백작위를 수여하고자 한다. 이상, 시에나!”
카이난이 앞에서 예복을 차려입고 시에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엘리샤가 함께였다. 시에나는 데이몬 쪽으로 돌아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응. 다녀와.”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바지를 입은 시에나가 단상에 오르자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데이몬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시에나의 뒷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 위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볕 좋은 날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