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꿈나무에게 집착 받고 있습니다-12화 (12/14)

<11>

“알현을 신청한다 전해라.”

“폐하의 병환이 짙어지셨습니다. 누구의 출입도 허가되지 않습니다.”

“며칠 전까지 그렇게 멀쩡하신 모습으로 계시던 분이 갑자기 병으로 앓고 계시단 말이지.”

데이몬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는 당장 시종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시종이 그런 데이몬의 반응에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데이몬의 뒤에는 공작과 아이작, 카이난, 엘리샤까지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엘리샤의 긴 속눈썹 끝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식사는 잘하고 있을지….”

“거기에 대해서는 잘 일러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카이난이 엘리샤를 위로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카이난의 안색도 어두웠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암살이 종종 이루어지는 황궁이지만 시에나가 황궁에 있는 동안은 단 한 번의 살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 시에나가 놓고 갔다는 약으로 인해 하녀가 죽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이 너무 많아 조사할 정황은 충분했다.

“그때 거기에서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데이몬이 새까맣게 죽은 눈으로 말했다. 그 모습을 사람들이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시에나를 연행하려고 할 때 데이몬은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막아 내었다. 황제에 대한 반역을 일으키려는 셈이냐고 황제가 물었을 때 데이몬은 거의 긍정할 뻔했다.

시에나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이난과 공작까지 나서자 정말 금방이라도 들고 일어날 듯이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황제는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거부한다면 군사를 몰고 와 제 혈육들의 피를 볼 것처럼 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시에나를 조사받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나쁘게 흘러가자 시에나는 결국 구금을 자청했다.

제 손을 내밀어 수갑을 찬 시에나를 바라보는 데이몬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데이몬은 죄책감과 굴욕감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마지막까지 그런 데이몬을 달랬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괜찮아요. 조사만 받고 나올게요.

그게 벌써 사흘째였다. 그 후 황제는 병환을 이유로 칩거에 들어갔고, 그동안 시에나에 대한 여론은 손쓸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황궁에 독약을 가져온 여자. 하녀에 의해 발각되다.’

황제의 사주를 받은 기자들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하녀가 얼마나 잔혹하게 죽었는지, 약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자극적으로 기사를 썼다. 평민 신분으로 황자의 약혼녀가 된 시에나였기에 그 화제성은 더 컸다.

티타임 자리에서, 포커 게임 테이블에서, 물레방앗간에서, 빨래터에서,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시에나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 댔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차 커져 갔다.

공작과 데이몬이 누군가의 모함이라며 약병은 시에나의 것이 아니라는 정정 기사를 냈으나 시에나가 록사나의 창시자라는 것이 밝혀지며 세상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그렇게 약을 잘 쓰는 사람이니 당연히 경비가 삼엄한 황궁에도 독약을 가져올 수 있었을 거라고, 정말 무서운 여자라며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데이몬 황자의 약혼녀를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증거도 나오기 전에 시에나를 반역자 취급했고, 황제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데이몬에게 접근했다는 속설도 퍼지기 시작했다.

현재 그런 소문을 낸 이를 캐기 위해 정보 길드를 총동원하고 있었으나, 소문이 워낙 크고 방대하게 퍼져 근원지를 빠르게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데이몬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까지 저를 위로하며 어설프게 웃어 보이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제기랄. 얼마나 무서울까.

지켜 주기로 했는데, 이래서야 어렸을 때의 저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데이몬은 여전히 꽉 닫힌 황제의 집무실을 바라보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했다. 계속 만남을 거부한다면, 강제로라도 들어가는 수밖에. 데이몬에게 반역이나 자신의 위치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시에나였다.

* * *

“누구… 세요?”

시에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신관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시에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혹 황제가 저를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찾아온 건 대신관이었다. 역시 이 일은 황제와 대신관이 꾸민 게 맞는 건가.

“이 일, 두 분이 꾸민 건가요?”

시에나의 경계심 강한 물음에 대신관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법 똑똑하기까지 하군. 그래 그분이 영리하지 않은 아이를 택할 리가 없지.”

대신관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시에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행동에 오싹 소름이 돋은 시에나가 옷깃을 여몄다. 대신관은 이 황궁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겉을 갖추었지만 속은 심연과도 같이 깊고 차가웠다. 시에나는 본능적으로 놓아 달라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저를 어떻게 이용하실 건가요.”

“글쎄. 아직은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 마녀로 이용할까 했는데 성녀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대신관의 말에 시에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독약을 써서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의 씌웠으니 마녀로 몰아가려는 건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거였다. 록사나 일을 시작하며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성녀의 기운이 강하다는 건 뭘까. 그건 혹 제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것과 관계있는 걸까. 시에나는 대신관에게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대신관은 그저 시에나를 한번 관찰하러 온 것인지 벌써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럼 또 보도록 하지. 그때까지 살아 있었으면 좋겠군.”

“자, 잠깐…!”

시에나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대신관은 그대로 문을 닫았다. 철컥, 열쇠 구멍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났다. 문을 향해 간절히 손을 뻗고 있던 시에나가 이내 힘없이 손을 내렸다.

“추워….”

대신관이 다녀간 방 안은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훨씬 서늘해져 있었다. 실제 온도도 2~3도 정도 낮아져 있는 것 같았다. 시에나는 낡은 침대로 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대신관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한동안 문을 노려보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에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텅 빈 방 안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작은 침대 하나와 테이블, 의자 정도. 벽지와 바닥, 가구들은 황궁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그러다 보니 방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소리가 울렸다. 시계 초침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시에나가 몸을 움츠렸다.

창문 하나 없는 이 방에서 얼마나 버텨야 하는 걸까. 시에나가 배급받은 초는 겨우 열 개 남짓이었다. 하나로는 방을 제대로 밝힐 수 없었지만 초가 다 떨어지고 난 후가 두려웠기에 서너 개씩 켤 수는 없었다.

치이익-. 성냥에 불을 붙여 초를 켠 시에나가 오도카니 그 주변에 쪼그려 앉았다. 촛불 하나의 온기가 생각보다 따스했다. 일렁이는 초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시에나가 이내 품 안으로 고개를 묻었다.

상황을 악화시키기 싫어 간다고 자청했지만 사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고 조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그러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었을 것이다. 시에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도망자의 길을 택했겠지.

시에나는 데이몬에게서 미래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절대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촛불을 켠 채 홀로 있는 이 시간이 끔찍이도 외롭고 무서웠다.

“마르바스….”

네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시에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 되자 마르바스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곳에 있으라는 말을 들은 네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왜 너를 좀 더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까.

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마르바스가 시에나에게 보였던 집착에 대해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수분을 낭비하면 안 되지만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데이몬. 마르바스.

* * *

일찍 잠자리에 든 황제는 약이 없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악몽을 꾸었다.

“여보!”

해산을 막 끝낸 황후의 곁으로 황제가 뛰어 들어왔다. 해산을 돕던 사람들이 황제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심한 난산으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얼굴은 부어 있고 어찌나 인상을 썼는지 미간엔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황후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누, 눈을 떠 봐.”

“폐하….”

어쩔 줄 모르는 황제의 모습에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던 황후가 살며시 실눈을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땀에 푹 젖은 맨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힘들고 지쳐 보였다. 황제는 안쓰러운 황후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놀란 황후가 그를 향해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제국의 태양이 어쩜 이리 자주 운답니까.”

“나는… 당신이, 당신이 죽는 줄만 알고.”

“여자라면 다 겪는 출산이에요.”

“그래도… 너무 아파 보였다.”

“폐하, 제 아이는 잘 있나요?”

황후는 죽다 살아나 놓고 아이 걱정부터 했다. 황제는 그것이 영 못마땅했다. 벌써 순위가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황후가 혹 화를 낼까 봐 황제는 못마땅한 티를 내지 않고 하녀를 불러 아이를 데려오라 말했다. 하녀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황후에게 안겨 주었다. 아이는 태어났을 때 이후로 잠깐 앙, 울더니 잠들어 있었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은 아이는 정말이지….

“못생겼군.”

황제의 말에 황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제가 아차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못생겼다니요, 이렇게 눈도 코도 입도 저를 닮았는데. 그럼 저도 못생긴 겁니까?”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나. 그냥 나는… 당신과 나의 아이는 훨씬 예쁠 줄 알아서.”

황후가 톡 쏘듯 묻자 황제는 쩔쩔매며 부연 설명을 했다. 안 그래도 황후가 해산하며 황제 폐하 이 개새끼라는 말을 열 번은 더 했기에 황제는 여기서 더 욕으로 배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눈처럼 하얀 아이의 머리칼은 검은색이었다. 물에 팅팅 불어 있긴 하지만 코의 선이 또렷하고 입술이 오동통해 앙증맞은 게 정말로 황후와 좀 닮아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갑자기 좀 예뻐 보이는 것도 같고.

“막 태어난 아이는 양수에 불어 있어 원래 다 이렇습니다. 삼 일만 지나도 놀라울 정도로 예뻐지실 겁니다.”

황후를 대신하듯 산파가 웃으며 답해 주었다. 황후에 품에 안긴 아기가 배냇짓을 하며 입을 오물거렸다. 예쁜 것과는 별개로 생명의 탄생은 정말 신비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씨를 뿌리면 생명이 생겨나 시간이 지나면 통로를 타고 아이가 나온다니. 이 아이는 자라서 기고, 걷고, 뛰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지. 낯선 듯 제 아이를 바라보는 황제를 보며 황후가 웃으며 물었다.

“이 아이를 사랑해 주실 거지요?”

사랑, 사랑할 거냐고. 당신과 나의 아이인데. 당연하지.

“당연히, 사랑해야지. 우리의 아이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해 주셔야 해요.”

“그럼, 다이안 오웬 마르바스의 이름을 걸고 이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겠네.”

황후는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살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불안했던 걸까. 그래서 확신이 필요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봐도 해산에 지친 그녀가 굳이 그런 말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송구하오나 후처리를 해야 하니 폐하께오선….”

산파가 말을 꺼낼 무렵 꿈틀. 황후의 배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본 사람들이 전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황제와 황후조차. 그런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이후 터져 나온 황후의 비명이었다.

“아아아악! 배가, 배가 너무 아파!”

“이브니아! 이브니아! 정신 차려!”

황제가 놀라 황후의 이름을 불렀지만 황후는 이미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반쯤 잃고 있었다. 황제가 산파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야! 아이는 전부 낳지 않았나! 원래 출산은 아이를 낳고 나서도 아픈 건가?”

“그, 그것이… 아이가 하나 더 들어 있는 듯합니다. 이봐! 다시 준비해!”

아이가 하나 더 있다고? 황제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말은 즉 쌍둥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제국에 불운을 가져다준다는 쌍둥이. 그것이 황실에서 태어나다니?

아름다운 이브니아는 어느새 괴물처럼 변해 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황제는 제 아내의 눈물을 닦아 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황제에게 산파가 외쳤다.

“폐하, 송구하오나 나가 주셔야 합니다!”

“아아아악!”

“이브니아…!”

황제는 산파에게 거의 끌려 나가듯 방을 나섰다. 쿠우웅. 육중한 산실의 문이 잠기고 혼자 남은 황제는 황후가 고통받는 것만큼이나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응애애애, 우렁찬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들이 이내 격렬하게 황후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폐하!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폐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폐하아!”

황제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바닥이 꺼지는 것이 더 빨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떨어지며 황제는 황후의 이름을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이브니아!”

황제는 황후의 이름을 외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숨을 헐떡이던 황제는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브니아를 잃고 나서 매일 꾸는 꿈인데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황제는 마른세수를 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검은 인영 하나가 촛불에 일렁였다. 그의 모습은 젊은 날의 황제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내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데이몬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황제가 흠칫 놀랐다. 무의식적으로 문밖을 바라보았지만 데이몬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을 겁니다.”

전부 죽였다는 소리인가. 황제의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제 아들은 상당한 실력자로 큰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어디 뒀습니까.”

“글쎄. 그런 평민 계집이 있는 곳을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데이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반말을 쓴 데이몬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압박감에 황제는 숨을 들이켰다.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면 오줌을 지리거나 기절했을 수도 있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었지만 마르바스의 피답게 황제는 아픈 와중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황제는 데이몬의 기운을 제 기운으로 겨우 막아 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꼭 제가 이브니아를 잃은 후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온 세상을 다 압박하면서도 저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절박한 표정.

“꼴좋구나.”

“…무슨.”

“네 그 표정 말이다. 네가 태어나는 바람에 죽은 이브니아를 바라본 내 표정이 그러했지.”

처음으로 황후의 이름을 들어본 데이몬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시에나는 어디 있어.”

“뻔뻔한 놈. 네 어미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주제도 모르고 반려만 찾고 있구나.”

스릉. 어느새 데이몬이 쥔 검이 황제의 목에 닿았다.

“하, 어미에 이어 아비까지 죽일 생각이냐? 신탁이 하나 틀린 게 없구나.”

황제는 자신에게 찾아온 아름다운 암살자의 협박에도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데이몬은 이미 수많은 피를 묻힌 눈을 하고 있었다. 원하는 바를 듣고 나면 그대로 죽이겠지. 황제가 속으로 조소했다.

이브니아가 죽은 이후 덤처럼 살던 목숨이었다. 매일 밤 그런 악몽을 꾸느니 죽는 게 나았다. 그러나 최소한 이 괘씸한 악마의 자식에게 복수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구 때문에 이브니아가 그렇게 죽었는데.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탁자에 놓인 검을 보는 황제의 눈이 야차처럼 빛났다.

펄럭, 데이몬을 향해 이불을 던진 황제가 침대 바닥으로 몸을 굴려 탁자 위의 검을 집었다. 검을 뽑을 새도 없이 데이몬의 검이 돌격해 들어왔다.

쩡-!

방을 울릴 만큼 커다란 소음이 둘 사이에서 울렸다. 데이몬의 일격에 보검의 검집이 그대로 깨졌다.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데이몬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뺄 필요가 없게 해 줘 고맙군.”

챙, 챙.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격렬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데이몬은 이를 악물었다. 전심전력으로 데이몬의 목숨을 거두려 하는 황제와 달리 그는 어떻게든 황제를 제압해 그 위치를 알아내야 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황제는 조롱하듯 제 몸에 틈을 주면서까지 데이몬을 압박해 왔다.

“기세에 비해 생각보다 별 볼 일 없군? 응? 그래?”

“시끄러워…!”

“죽여 봐. 그래, 그렇게 죽여 봐. 황궁의 미로는 지금껏 아무도 빠져나온 적이 없는 건 알겠지? 내가 죽으면 너의 그 사랑스러운 연인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너를 원망한 채 서서히 죽어 갈 거다!”

“닥쳐!”

데이몬이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황제는 데이몬의 분노에 자꾸만 불을 질렀다. 언제나 냉철하게 사냥감을 처분하는 데이몬이었으나 시에나가 위험에 처해 있는 지금은 이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황제는 힘겹게 데이몬의 검을 받아치며 그가 계속 틈을 보이길 기다렸다.

“네 사랑스러운 연인은 벌써 너 같은 건 잊고 감옥에서 남자들 맛을 보고 있을 테니 걱정 마라.”

“그게 무슨…!”

황제의 비열한 언사에 데이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황제가 데이몬의 얼굴을 향해 약병을 던졌다.

“윽…!”

쨍그랑! 데이몬이 팔을 들어 막아 내었지만 두께가 얇은 유리병은 그대로 깨졌다. 달큰한 약 냄새가 데이몬의 앞에서 확 퍼졌다. 그 때문에 옆구리가 비자 황제는 틈을 놓치지 않고 옆구리를 깊숙이 베어 내었다. 약 냄새를 맡지 않으려 급히 숨을 멈추었던 데이몬이 고통에 섞인 숨을 내뱉었다.

“후우욱….”

약은 꼭 독한 술을 몇 배나 농축해 놓은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데이몬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황제는 넓은 옷을 들어 코를 막으며 데이몬을 끔찍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데이몬이 지금 맡은 약은 황제가 평소에 이브니아의 꿈을 꾸려 먹는 약이었다. 그 약은 먹으면 가장 보고 싶은 장면을 보게 해 주지만 병 밖으로 나오면 기화하기 시작하는데, 그때 숨을 쉬면 인간은 가장 고통스러운 환각을 보게 된다.

돈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연속해서 사업이 망하는 꿈을, 괴물이 무서운 사람이라면 괴물에게 씹히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때 느끼는 감각은 평소보다 훨씬 강하며, 환상통으로 인해 실제로 상처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끄으윽….”

“독한 놈.”

전쟁용으로 쓰기 위해 개발하다가 먹으면 다른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대신관이 황제에게 권해 중독시킨 약이었다. 데이몬이 뒤집어쓴 약의 양은 한 부대를 전부 중독시키고도 남을 양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정신력과 싸우고 있었다. 데이몬의 정신력에 황제가 혀를 내둘렀다. 저야 어느 정도 중독이 되어 견딜 수 있다지만 놈은 처음 겪어 보는 것일 텐데도 생각보다 제법 잘 버티고 있었다.

“…시에나?”

그때, 데이몬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걸렸지만 데이몬은 결국 약에 중독되었다. 더듬더듬 앞을 걸어가다 벽에 부딪힌 데이몬이 쿵, 쿵 벽에 머리를 박으며 목 놓아 시에나의 이름을 외쳤다.

“시에나! 가지 마! 가면 안 돼! 시에나!”

마르바스가에게 가장 끔찍한 장면은 제 반려가 죽는 장면일 것이다. 데이몬 역시 그런 환각을 보고 있겠지. 이브니아가 죽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황제가 계속해서 꾸고 있는 그 꿈을. 그 원죄의 원인이 저와 같은 꿈을 꾸며 괴로워하고 있다 생각하자 황제는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후후후… 하하하!”

황제는 여전히 시에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데이몬을 베어 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대로 베어 안식을 주기는 아까웠다.

데이몬이 저를 암살하러 왔으니 굳이 원래 계획대로 갈 필요는 없었다. 가지고 놀 만큼 놀다가 죽이면 그만이었다. 제가 괴로웠던 만큼은 아니라도 적어도 그 반의반만큼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죽었으면 했다.

“악마에게 딱 어울리는 마지막이군.”

데이몬. 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자식이라 손수 악마라고 이름 지었다. 그 이름답게 아이는 커서 제 아비를 죽이러 왔다. 카이난을 사랑해 주겠다는 황후와의 약속 때문에 그는 오직 데이몬만을 미워했다. 그러나 약속대로 카이난을 사랑하지는 못했다. 열여섯 만남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병은 오직 황후만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래도 너만은 나를 이해하겠지, 이브니아.

“으으으… 으…!”

데이몬은 엎드려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황제가 그런 데이몬을 버러지라도 보는 듯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황제는 발로 그의 옆구리를 차며 짓이겼다. 까득,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끄으윽…! 시에나, 가지 마. 가지 마….”

상처가 벌어졌는지 옆구리에서 비죽이 피가 배어났다. 데이몬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시에나를 찾았다. 간절하게 뻗은 손끝이 후들후들 떨렸다. 아까 황제를 몰아붙이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황제가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최대한 고통을 주다가 죽일 생각이었다.

황제는 코와 입을 막은 채 서랍을 열고 안에 든 약을 꺼냈다. 며칠 전 흑요석 광산 유통권을 주고 대신관에게 얻어 낸 약병들이 서랍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황제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약병을 끼우자 안에 든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렸다.

쨍그랑, 쨍그랑. 얇은 유리병이 데이몬이 있는 곳 주변에서 마구 깨졌다. 유리 조각이 튀어 데이몬의 몸에 생채기가 나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느 정도 약에 중독이 된 황제조차 견디기 힘들 만큼 독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데이몬의 주변으로 약이 원을 그리며 카펫에 스며들었다. 황제는 고통스러워하는 데이몬이 썩 마음에 드는지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삼 일 밤낮은 악몽에 절어 살겠지. 안전장치는 충분히 해 두었으니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만면에 띠며 방을 나섰다.

* * *

데이몬은 연속된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뿐 꿈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렸다. 이 꿈속에서의 시에나는 자꾸만 죽어 갔다. 리메리오 남작에게 잉크병을 던지고 끌려 나와 사람들 앞에서 목이 베이기도 하고, 전쟁터를 겪다가 산적이 휘두른 메이스에 그대로 몸이 으스러지기도 했다.

“안 돼, 시에나 안 돼!”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가 죽는 장면을 계속 봐야만 했다. 시에나에게 달려가려고만 하면 발밑이 떨어지고 새로운 장면들이 자꾸 나왔다. 시에나는 황궁에서 독살당하기도 하고, 황제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항상 저를 바라보며 죽었다. 자신에게 향해 있던 유리구슬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이내 빛을 잃는 것을 데이몬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제 반려가 이렇게 죽어 가는데도 데이몬은 울부짖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꿈일 거라고, 그저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엔 감각이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전쟁터에서는 피와 날붙이의 냄새가 났고, 시에나의 곁에 있을 때에는 시에나의 향이 났다.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느낄 수가 없었다. 시에나가 잘못되기 전에 제가 죽으려고 손목을 끊어 보기도 했지만 제가 자른 것은 제 손목이 아닌 시에나의 목이었다.

“도련님…? 왜….”

아연한 듯 저를 바라보는 시에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아아악-!”

제 앞에서 시에나가 죽은 지 두 자릿수가 되어갈 무렵, 데이몬의 정신은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 * *

철컥.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시에나는 열쇠 구멍이 돌아가는 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대신관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흐트러진 시에나의 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시선에 오싹 소름이 돋아 시에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가 있나.”

“당신 같으면 경계를 안 하겠어? 그렇게… 매번 이상한 짓을 하는데.”

당연히 있었다. 대신관은 매일같이 시에나를 찾아왔다. 어느 날은 시에나의 몸을 샅샅이 뒤지기도 하고, 어느 날은 머리카락과 피를 뽑아 가기도 했다. 언제나 건장한 체구의 병사들을 대동하고 왔기에 시에나는 꼼짝없이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대신관 혼자였다. 그렇지만 평소보다 몇 배는 위험해 보였다. 시에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야말로 네가 수상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무슨 소리야.”

“네게는 신성력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는데 왜 겉으로 봤을 때에는 신성력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대신관이 시에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였다. 시에나에게 신성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성녀급인데 머리카락이나 피를 뽑아 검사해 보았을 때에는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 좋아. 시험해 보면 알겠지.”

“다가오지 마!”

대신관은 시에나의 말을 무시하고 품속에서 작은 향로를 꺼내었다. 찰칵, 향로에 불을 붙이자 뭉근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방 전체에 퍼졌다. 시에나는 이 향을 함부로 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숨을 참기 시작했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런 시에나를 놀리듯 대신관이 느릿하게 말을 걸었다.

“왜 우리 제국에는 성녀가 없는 줄 아나?”

시에나는 숨을 참고 있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관은 제게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시에나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10년에 한두 번꼴로 성녀들이 태어나기는 해. 공명정대한 여신의 모습을 보여 주듯 비천한 곳에서도, 고귀한 곳에서도.”

대신관은 비단 오늘뿐만 아니라 전에도 시에나에게 친근한 듯 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것이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높은 수위의 정보를 들을수록 시에나는 제가 살아서 나갈 수 없으리라는 걸 느꼈다.

“성녀들은 결혼도 할 수 없으니 귀한 곳에서는 자식을 성녀로 내보내려 하지 않고, 비천한 곳에서 나온 성녀 후보들만이 신전에 비싼 값을 받고 팔려 오지.”

시에나는 현재 벽의 모서리에 빳빳하게 풀을 먹인 옷감처럼 서 있었다. 치마와 숄로 뒤덮인 오른쪽 허벅지에는 작은 단검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황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준 단검이었다. 혹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항상 갖추어 두고 있으라는 말에 장비해 두었는데, 정말로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성녀들은 스무 살 이후로 힘을 잃고 보통 여자로 돌아간다고 하지.”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몸수색 없이 바로 방에 갇혔던 게 시에나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시에나가 만약 남자였다면 철저한 수색을 했겠지만, 힘없는 여자가 뭘 하겠냐는 무시에서 야기된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대신관은 대답 없는 시에나에게 물었다. 시에나가 경계심 강한 고양이 같은 눈으로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대신관이 그런 시에나가 가소롭다는 듯 클클 웃으며 아주 중요한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성녀들의 외모는 대부분 아주 아름답지. 미의 여신이기도 한 이스테라의 분신과도 같은 이들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왜 나이가 찬 이후의 성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을까?”

오싹, 시에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신관은 바로 말을 이었다.

“궁금하지? 특별히 너에게는 그 진실을 알려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대신관이 히죽 웃었다. 이가 빠진 빈 공간 사이로 검은색 혀가 날름거렸다. 섬뜩한 광경에 시에나의 머리칼이 쭈뼛 섰다. 숨을 참기가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게 산다는 게 행복일 수 있지만… 성녀들은 신성력이 사라지기 전 훨씬 고귀한 일을 하게 되지.”

시에나의 숨이 한계에 달했다. 입을 앙다물고 부들부들 떨며 대신관을 노려보았다. 대신관은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잔혹하게 웃었다.

“나와 통정하며 신성력을 나누어주는 일 말이야.”

“헉….”

대신관의 말에 시에나가 너무 놀라 숨을 토해 냈다. 아차 하는 순간 몽롱한 감각이 피어났다. 이불을 잡은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미친놈, 대신관은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대신관의 나이는 어림짐작해도 60대 후반이었다. 그런 사람이 성년도 안 된 어린 소녀들과 통정을 하다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대신관은 세간의 평판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평생을 수절하며 신의 뜻에 맞추어 산 사람이라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알게 된 진실은 추악했다. 시에나 외에는 대부분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가 통정한 후 소녀들을 어떻게 처리했을지는 뻔했다. 실컷 노리개로 가지고 놀다 전부… 죽였겠지. 시에나의 얼굴이 더러운 구정물을 본 듯 일그러졌다. 대신관의 얼굴만 봐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최근 성녀가 나타나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는데, 네가 나타나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시에나는 아까 마신 연기로 인해 몸이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대신관이 히죽 웃으며 시에나에게 다가왔다.

“몸에 해로운 향은 아니니 안심해. 그저 몸을 마비시키고 잠들게 만드는 약일 뿐이니까. 나와 통할 여자에게 나쁜 걸 주입할 수는 없지. 뭐, 미약을 쓸 수도 있지만… 나는 나에게 달려들어 애원하는 여자보단 내 밑에 깔려 굴욕적으로 날 바라보는 여자와 하는 게 취향이라.”

시에나의 마지막이라고 느꼈는지 대신관은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까지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았다. 말 하나하나에서 썩은 내가 나는 듯해 시에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에나는 몸을 비틀며 몰래 칼집에 손을 대었다. 흐릿해지는 시야로 주변에 있는 사물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섯 발자국 앞에 대신관, 옆에는 침대와 베개, 2시 방향에 놓인 향로와 열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문. 시에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물음을 던졌다.

“내 몸이 이렇게 굳어 가는데 당신은…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지?”

대신관은 마지막 자비를 발휘하려는 듯 기다란 검은색 혀 안에서 하얗게 빛나는 알약을 보여 주었다.

“나야 해독제를 먹고 있으니까. 궁금한 게 많군, 나의 성녀는.”

“그 알약을 본… 적이 있어. 신전에서 판매하고 있는 약이었지.”

시에나의 말에 대신관은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네가 록사나의 약을 대부분 만들었다지? 평민 주제에 건방지게 굴었으니 네가 이런 꼴을 당하는 거다.”

“합리화시키지… 마… 귀족만 살 수 있을 만큼 비싸게 약을 파는 게… 진정한 신의 뜻인 것 같아?”

“선택받은 자만 여신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게 뭐가 나쁘지? 평민들이야 어떤 환경이든 돼지나 닭처럼 새끼들을 까 대는데, 굳이 자비를 내 살릴 필요가 뭐가 있냔 말이야.”

대신관은 제가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시에나가 일부러 소리 나게 픽 웃으며 대신관을 비웃었다. 대신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벌벌 떨어야 하는 계집이 오히려 저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나빠졌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당연히 웃길 수밖에.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돼지우리 출신이잖아.”

쩡, 대신관의 가면에 금이 갔다.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에선 대신관을 짧게 묘사했지만 시에나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평민을 혐오하는 대신관은 빈민굴 출신으로, 뛰어난 신성력으로 인해 신전에 들어간 이후로 빈민굴의 사람들을 전부 살해했으며 제 출신을 아는 신관들도 죄다 죽였다. 작중 스토리가 끝날 때까지 대신관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시에나가 알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컥…!”

“누가 말했지?”

대신관이 성큼성큼 다가가 시에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세던지 순식간에 숨이 막혀왔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 어떻게 알았냔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대신관의 얼굴은 시에나만큼이나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계집이 그의 가장 예민한 치부를 알고 있었다. 나름의 방비를 하고 있던 대신관의 몸이 시에나의 목을 쥐며 무방비하게 열렸다. 시에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커억…!”

대신관은 비명을 터뜨렸다. 단검이 옷과 거죽을 뚫고 내장 깊숙한 곳까지 박혀 있었다. 대신관이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단검과 시에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신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대신관은 시에나를 때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미친… 년이…! 으어어억!”

시에나는 대신관이 손을 들어 올리기 전에 그의 몸에 박힌 단검을 빼기 위해 비틀었다. 살들이 그새 단검을 꽉 물고 있어 잘 빠지지 않았지만, 시에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빼냈다.

촤아악.

검이 빠진 자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흘러나왔다. 선명한 붉은 피가 시에나의 새하얀 얼굴 위에 흩뿌려졌다. 대신관의 몸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더니 이내 소리가 멎어 들었다. 마룻바닥 위로 검붉은 피 웅덩이가 점차 넓게 퍼졌다. 세상의 종말이 온 듯 조용한 방 안에서 시에나가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터뜨렸다.

“으흑….”

처음으로 성공한 발도술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칼로 찌르던 그 순간의 감각이 선명하게 손에 남아 있었다. 물컹한 살을 뚫고 내장을 찌르는 감각을 처음 겪어 본 시에나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떨어졌다. 첫 살인. 한국에서 살았다면 뉴스로만 접했을 일을 제 손으로 했다.

눈물을 닦아 낸 손등에는 물보다 피가 더 많이 묻어났다. 제 몸을 온통 적신 미지근한 피의 온도가 지독한 현실감을 주었다. 시에나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긴 시간 향에 노출된 시에나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정신이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엉금엉금 기어 문 앞까지 가는 건 어떻게든 해 냈는데, 도저히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물먹은 솜처럼 점점 가라앉아만 갔다. 명멸하는 감각 속에 데이몬의 얼굴이 떠올랐다. 많이 걱정하고 계시겠지. 그래도 무모한 짓은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도련님….”

그때 데이몬이 대답하듯 성 전체가 쿠궁, 울렸다. 심상치 않은 울림에 시에나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벽 한쪽에 조촐하게 걸려 있던 액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건가. 그러나 시에나는 이 재난에서 도망칠 힘조차 없었다. 속눈썹 끝에 걸려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신이 점멸했다.

* * *

집무실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황제는 황궁이 통째로 흔들리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쨍그랑, 책상이 흔들리는 바람에 유리로 만들어진 술병이 그대로 아래로 낙하하며 파괴되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쿠구궁. 다시금 성안이 크게 흔들렸다. 일어서기도 힘들 만큼 큰 지진이었다.

“꺄아아악-!”

“사람 살려-”

“도망쳐!”

문밖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도망치는 발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도망, 도망쳐야….”

황제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해 몸을 운신하기 힘들었던 황제의 걸음걸이는 형편없었다. 문을 향해 가는 것만으로도 중노동이었다. 겨우 문고리를 돌리고 밖으로 나선 황제가 경악했다.

“이브니아….”

항상 마나석을 켜 두는 복도가 암전되어 있었다. 황제의 침실에서 시작된 어둠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복도로, 창으로, 방 안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거쳐 간 곳에서는 어떤 빛도 존재하지 못했다. 그림자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거대한 공포를 예감하고 도망치는 사람들의 주위에서 빛이 꺼져 갈 때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폐하, 도망치셔야 합니다!”

그 소란 속에도 나름의 충성심을 발휘한 시종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는 잠시 망설였다. 이 어둠은 분명 제 침실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어둠은 데이몬이 불러온 것일 확률이 높았다.

쿠구궁. 다시금 성이 흔들렸다.

“폐하! 어서 걸음을!”

시종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황제는 결심한 듯 도망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황제를 바라보던 시종이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가게. 나는… 알아볼 게 있네.”

“폐하-!”

황제는 딱히 성군은 아니었지만 눈앞에서 성이 무너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데이몬을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 했다. 시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황제는 짧은 망설임 끝에 제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젠장….”

제 자식이 제국을 망칠 거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침실을 향해 갈 때마다 온몸이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황제는 끊임없이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이 약에 갓 중독되었을 때 목을 베어야 했다고 황제는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 놓는군.”

황제가 씁쓸하게 조소했다. 성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값비싼 화병과 마나석이 우르르 깨지고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으니 이 성 어딘가에 시에나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거겠지. 어쩌면 데이몬이 제 손으로 반려를 죽이게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한 황제가 큭큭 웃었다.

“꼴좋군. 정말 제 손으로 죽이고 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지은 일에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성안에는 이브니아의 흔적이 너무도 많았다. 황제는 이브니아의 방을 제가 청소할 정도로 여전히 애착이 강했다.

성이 무너지는데 물건들을 하나하나 싸 짊어지고 도망치느니 차라리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을 처리하는 편이 빨랐다. 어차피 여전히 약에 취해 주체하지 못하고 힘을 흩뿌리고 있는 것뿐이겠지.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욱…!”

침실은 까마득한 어둠에 젖어 있었다. 분명 정방형으로 만들어져 있을 방의 끝과 끝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어둠이었다. 모든 색을 삼켜 버린 어둠은 그 끝도 시작도 알 수 없었다. 너무나도 독한 기운에 저절로 토악질이 나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둠의 기운은 온몸을 다 말려 버릴 듯 뜨거웠다. 뜨거운 용광로 앞에 벗은 몸을 대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있다면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황제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역겹군.”

데이몬은 그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여전히 누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서 있으면서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따금 신음을 내기도 했다.

“시에나….”

여전히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는 사람이 괴로울 정도로 서글픈 표정에서도 황제는 한 줌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제 궁을 망친 자에게 강한 분노를 느낄 뿐이었다.

스르릉. 황제가 칼을 빼어 들었다. 이브니아가 죽고 나서 전혀 단련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검사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대를 베어 내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옥에서 보자.”

피붙이의 목을 베는 사람의 말투치고는 지나치게 담백했다. 정이랄 게 없는 관계였다. 황제는 검을 든 채 그대로 데이몬을 향해 달려갔다.

“…!”

그때 데이몬이 반짝, 눈을 떴다. 데이몬의 눈은 평소와 달랐다. 따뜻했던 금안의 온기는 사라지고 오직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데이몬의 눈이 오만하게 황제를 훑었다. 그러나 황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초점은 없었다. 오싹, 황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지만 달리는 발걸음에 가속도가 붙어 멈출 수는 없었다.

“으, 으아아악!”

데이몬의 목에 검이 닿기 직전 검은 줄기 같은 안개가 그의 몸을 감쌌다. 데이몬이 의도했다기보다는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기운이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뭉글, 실드 안으로 들어갔던 검과 황제의 손목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흐으윽, 아악, 아-! 아파-! 아아악!”

황제의 잘린 손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황제가 생소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데이몬은 시끄럽게 꽥꽥 비명을 지르는 황제가 귀찮다는 듯 차가운 눈으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흐으으….”

황제는 손목이 잘렸는데도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참아 내었다. 처음으로 황제의 눈에 공포심이 떠올랐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몸이 오싹해졌다.

“내, 내가 잘못했다. 그 계집은… 아, 아니 시에나는 살아 있어.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그러나 그 소리는 데이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예 외부의 소리와는 차단된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황제의 얼굴에 절망이 차올랐다. 데이몬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황제가 뒷걸음질 치다 이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열린 문 사이로 황제가 점점 작아졌다.

데이몬은 그런 황제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저 주먹 쥔 손을 쭉 뻗었다가, 이내 공작이 날개를 펼치듯 손을 확 펼쳤을 뿐이었다.

파아앙-!

데이몬으로부터 시작된 어둠이 순식간에 수백 미터 밖으로 퍼져 나갔다. 돌풍을 동반한 어둠은 모든 것을 삼키고 쓸어 가기 시작했다. 돌풍 속의 수천 개의 칼날 비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조각내었다. 콰과강. 수십 년을 지어 수백 년 가까이 건재했던 황궁이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성이 무너져 모든 것이 가라앉았지만 데이몬은 중력을 거스르고 공중에 떠 있었다. 한 번에 죽지 못한 사람들이 고통에 아우성쳤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데이몬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진정한 재앙의 시작이었다.

* * *

“으응….”

오줌이 마려워 새벽같이 눈을 뜬 페터는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앉아 쪼르르, 시원하게 소변을 본 페터가 이내 물을 내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페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이 좋은 편이었다.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항상 꿈을 꿨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배를 타고 가다 죽는 꿈을 꾸었다. 페터의 아버지는 상인이었다. 그 꿈을 꾼 날 저녁에 아버지는 좋은 건이 있어 한 달 정도 배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

그 꿈이 생각난 페터는 불안했다. 꿈 이야기를 해 보기도 하고 엉엉 울며 가지 말라고 졸랐지만 아비는 그저 아이가 외로워서 그러는 줄 알고 좋은 선물을 사 오겠다며 위로했다.

아무리 해도 아버지가 페터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페터는 결국 아버지의 신분패를 훔쳐 달아났다. 동네 뒷산에서 제일 높은 나무에 오른 채 눈을 꼭 감고 저를 찾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외국에 나가는 일이라 신분증 없이는 배에 타는 게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나 결국 아버지는 배를 타지 못했고 저녁때 돌아온 페터는 엉덩이를 흠씬 얻어맞고 훌쩍훌쩍 울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페터의 꿈은 사실이 되었다. 물건을 잔뜩 싣고 돌아오는 길에서 대형 몬스터 크라켄에 의해 배는 산산조각이 나 망망대해 밑으로 가라앉았다. 무리해서 사들인 물건이 바다에 가라앉자 배를 탔던 사람들의 가족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이어 거대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페터의 아버지는 입을 딱 벌리고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 배에 탔었다면, 그들과 같이 바다에 수장되었겠지. 그때부터 아버지는 페터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페터는 그 후로도 나쁜 일이 닥치기 전이면 항상 꿈을 꾸었다. 집이 무너지고 마을이 불타는 꿈을 꿨다는 말에 페터의 가족은 바로 짐을 싸 수도로 이사했다. 정확히 일주일 뒤 격렬한 영지전으로 인해 페터가 원래 살던 거주지의 70%가 소실되었다. 그 70% 안에 페터의 집이 있던 건 당연지사였다.

가끔은 좋은 일에 대한 꿈을 꿀 때도 있었다. 갈색의 낡고 오래된 항아리가 반짝이는 꿈을 꾼 날에 시장 구경을 간 페터는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항아리를 보았다. 워낙 낡은 항아리였기에 페터의 용돈으로도 살 수 있었다. 그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감정사에게 가져가자, 고대 황실의 유물이라는 게 밝혀졌다. 항아리를 경매에 부친 페터는 샀던 금액의 수천 배에 달하는 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페터의 집은 평민이지만 제법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수도의 비싼 월세를 감당하는 것은 물론 이 기세로 가면 5년 안에는 아예 집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페터의 단꿈은 최근 꾸기 시작한 악몽 때문에 자꾸만 사라졌다. 페터는 며칠 전부터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도 전체가 새카만 어둠에 뒤덮이는 꿈이었다. 페터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악몽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페터는 그때마다 탈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탈출구를 찾으면 찾을수록 페터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새까만 어둠은 제국 전체를 뒤엎는 것으로 모자라 전 세계를 암흑으로 물들였다.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땅은 독으로 뒤덮였으며, 농작물은 말라비틀어졌다. 바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작은 물고기 떼는 물론 바다 깊숙한 곳에 사는 크라켄이며 옥토퍼스 같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둥둥 떠올라 넓은 바다를 꽉 메웠다. 생명체들은 썩어 문드러졌으며, 자연은 자정 작용을 잃었다. 그야말로, 세계의 멸망이었다.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암흑의 땅, 탈출구는 없었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항상 가족들에게 미주알고주알 고하는 페터였지만 이번 꿈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을 꺼내면 실제로 일어날까 봐 무섭기도 했고, 말한다고 해도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 꿈을 꾸고 난 참이라 페터는 안색이 좋지 못했다. 오늘 꾼 꿈이 유독 선명했던 것도 있었다. 포오, 한숨을 내쉬며 잠을 청하려던 페터가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지?”

그것은 언뜻 보면 평온한 새벽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페터의 심장은 아까부터 쿵쿵,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이상한 점을 찾아야 했다. 분명, 예전과는 달랐다. 페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창문 너머를 살폈다. 민가들은 그대로였고, 산 너머 하늘에는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잠깐, 산이 보인다고?

이제야 이상한 점을 알아챈 페터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페터가 사는 집은 황궁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황궁 뒤에 산이 있긴 하지만, 황궁이 워낙 커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산이 막히는 것 하나 없이 너무도 선명하게 잘 보였다. 산 앞에 당연히 있어야 할 황궁과 신전이, 하루아침에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세상에….”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페터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기 전이었다면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끔찍한 현실에 눈물조차 터져 나오지 않았다. 아니길 바라고 기도해 왔던 멸망이, 오늘로 시작돼 버렸다.

* * *

“어떻게 이럴 수가….”

카이난은 망연자실하게 무너진 황궁과 신전을 바라보았다. 수백 년의 침략에도 버티던 황궁이 단 하룻밤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흔적이 없진 않았다. 싱크홀 같은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으니까.

그 구덩이의 지름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둘러쌀 정도로 넓었다. 높이 또한 얼마나 깊은지, 구멍 안에 돌을 던져도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다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저도 황궁과 운명을 같이했겠지.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황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시종 하나가 카이난을 향해 걱정스레 물었다. 저를 걱정하는 시종의 안색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카이난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지만….”

카이난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알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집에 돌아간 엘리샤도 걱정되었지만 황궁에 남아 있던 공작이나 데이몬, 시에나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걱정이었다. 그때, 사람들을 헤치고 공작이 카이난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카이난.”

“숙부님!”

카이난은 마침 적절한 때에 다가와 준 공작을 반가운 마음에 꽉 끌어안았다. 공작 역시 카이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숙부님은 아십니까?”

“아니, 나도 모른다. 자다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밖으로 빠져나온 순간 황궁이 무너져 내렸어.”

“저도 비슷합니다. 갑자기 마족이라도 소환된 걸까요?”

인간의 힘이라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힘이라 카이난은 일단 전설에 나오는 인외 종족을 떠올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저기, 저쪽이 조금 이상하군. 저쪽에만 어둠이 약간 뭉쳐 있는 것 같지 않나?”

카이난은 공작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하늘에는 여전히 새카만 어둠만이 가득했다. 카이난과 공작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하늘의 작은 공간 한편에 실타래처럼 어둠이 뭉쳐 있었다. 그 실타래는 둥근 고치 모양이었는데, 높이가 약 2m 정도로 딱 사람 하나를 감쌀 만한 크기였다. 카이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존재에 대해 가늠해 보았다.

“숙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게 대체 뭘까요?”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군.”

“공작 각하, 황자 전하.”

안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던 둘이 동시에 저를 부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얗게 질린 아이작이 서 있었다.

“아이작, 무사했군.”

“괜찮으십니까?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우린 괜찮네. 아마 저기 있는 존재가 벌인 일인 것 같아.”

아이작은 공작이 가리키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했다. 역시 마법사인지라 그 존재에 대해 빠르게 알아챈 듯싶었다. 그러나 그 고치를 살피던 아이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그 존재에 대해서 알아챈 것처럼.

“혹시 저 존재가 뭔지 알겠나?”

“…먼저 사람들을 물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아이작은 대답 대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카이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추가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전부 흩어져라! 추후 신호할 때까지 대기를 기다리도록!”

카이난의 말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수십 명의 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공작과 카이난, 아이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답을 들으려 일부러 사람들을 물린 것인데도 아이작은 한동안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작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결국 아이작이 주저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마나의 기운을 느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기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좀 다르긴 하지만 전에 본 적이 있는 종류의 것이고요.”

카이난과 공작이 아이작의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챘는지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이작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 제 생각에 저건 데이몬 도련님의 기운인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두통이 몰려오는 듯 공작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카이난도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섰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작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이 심상치 않아 보이니 먼저 마탑에 연락하겠습니다. 피해는 최대한 줄여 봐야죠.”

“그래. 나도 일단 연락 가능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

공작과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난 역시 제 정예 부대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그의 품에 뛰어 들어왔다.

“카이난 님!”

“엘리샤!”

엘리샤는 잠옷 차림이었다. 카이난이 놀라 그런 엘리샤에게 급히 제 옷을 둘러 주었다.

“무슨 일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눈을 떴는데 성이 사라져 있어서… 혹시나 카이난 님께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뛰쳐나왔어요.”

카이난은 성이 무너진 걸 봤던 때보다 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엘리샤가 이 위험한 곳에 혈혈단신으로 왔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격한 불안감으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여긴 위험해, 엘리샤! 사람을 붙여 줄 테니 당장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있어. 아니, 일단 수도를 떠나는 편이….”

“싫어요!”

여간해서는 카이난의 말을 들어주는 엘리샤가 격하게 거부했다. 카이난이 인상을 찌푸렸다. 엘리샤는 열에 아홉은 카이난의 말에 긍정했지만, 가끔 그 하나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그 하나의 상황이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여긴 정말 위험해, 엘리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왔어요. 약혼자가 위험에 빠졌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저도 제 한 몸 지킬 수 있어요.”

카이난이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돌겠네. 부모님께 인사까지 드리고 왔다니. 엘리샤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엘리샤의 새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도 잠기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엘리샤… 넌 정말….”

엘리샤가 제 한 몸 지킬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엘리샤는 하늘하늘한 인상과는 다르게 웬만한 남자들보다 검을 잘 다루는 건 물론 마법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6클래스 마스터인 것과 동시에 신성력까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아 어쩌면 이 재난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엘리샤일지도 몰랐다.

카이난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엘리샤를 이 위험한 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난은 엘리샤가 그 한 번의 고집을 부릴 때 절대 이긴 적이 없었다. 결국 카이난은 엘리샤를 설득하는 걸 그만두었다. 카이난은 화를 내는 대신 사랑스러운 연인을 뜨겁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와 줘서 고마워. 보고 싶었어.”

“그럴 줄 알고 왔어요.”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담을 던지는 엘리샤를 보며 카이난이 피식 웃었다. 보고 싶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수백 년을 굳건히 버텨 온 황궁이 무너진 순간, 카이난은 제 죽음도 예감했었으니까.

“시에나는… 괜찮을까요?”

카이난의 손을 잡은 엘리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에 대해서 카이난은 썩 긍정적인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시에나는 제가 알기로 황궁의 미로 안에 있는 방에 갇혀 있었다. 그곳은 길을 전부 외우고 있어도 빠져나오기 힘든 곳이었다. 하물며 이렇게 무너져 버려서야.

“…잘 모르겠어.”

카이난은 솔직히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이 지금 이렇게 된 이유가 어쩌면 시에나의 죽음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을 무너뜨리며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데이몬이었지만, 카이난은 여전히 그를 동정했다. 동시에 오싹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순서로 인해 운명이 바뀌었다. 저도 엘리샤를 잃으면, 이렇게 될까.

어렸을 때부터 데이몬에게는 시에나밖에 없었는데. 원하지 않는 것을 주겠다고 데려와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했으니 미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격렬한 죄책감이 칼날처럼 카이난의 가슴을 헤집었다. 카이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본 엘리샤가 그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말이 맞아. 괜히 네게 걱정을 끼쳤군.”

“별말씀을요. 다 끝나면 우리 약속했던 대로 피크닉 가요. 시에나랑, 데이몬 님이랑, 카이난 님이랑, 공작 각하, 아이작… 다 같이 가서 샌드위치랑 주스도 먹고 그래요.”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라는 걸 알지만 카이난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엘리샤의 명주실 같은 은빛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 꼭 그렇게 하자.”

* * *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평소 고고하기 짝이 없는 마탑의 마법사들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황궁이 있던 공터에 모였다.

황궁과 신전을 무너뜨리며 거대한 에너지를 써서인지 어둠은 잠시 소강상태였다. 그러나 데이몬을 감싸고 있는 고치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검은색이 아니라 검붉은 색인 듯도 했다.

정오가 지났는데도 해는 뜨지 않았다. 아니, 데이몬이 하늘을 어둠으로 물들이며 햇빛을 차단한 듯했다. 아직까지 아무 일 없이 어둡기만 한 거였지만 빛을 보지 못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우울해졌다.

“라이트닝 마법진,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득하게 하늘과 땅을 감싸고 있는 어둠을 빛으로 몰아내 볼 생각이었다. 고위직에 있는 듯한 마법사 하나가 신호를 보내자 마법사들이 거대한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가장 밝은 빛이여-!”

이내 그 마법진에서 나온 전기가 폭발하듯이 하늘로 치솟더니, 불꽃이 되어 화했다. 불꽃은 사람의 혈관처럼 하늘과 땅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감싸더니 새하얀 빛으로 변했다.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환한 빛에 사람들이 잠시 희망을 가졌으나 그것도 잠시. 십수 명의 마법사가 만들어 낸 마법은, 한 줌의 어둠조차 없애지 못한 채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희망이 강했던 만큼 절망도 강했다. 몇몇 마음 약한 사람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린 죽을 거야. 다 죽을 거라고!”

“도망쳐야 해. 어떻게든 국경을 넘어가야…!”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어둠을 몰아내는 마법을 시도했다. 살아남은 신관들을 대상으로 신성력을 써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짙은 어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자꾸 건드리는 게 화가 나는지 오히려 영역을 더 넓히기도 했다.

어둠이 영역을 넓힌 대지에 피어 있던 꽃이 순식간에 시들며 사그라들었다. 독기를 머금은 땅은 더 이상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 고약한 냄새에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그 대상을 직접 공격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마법사로 불리는 남자가 공작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고치를 공격하는 것은 처음부터 나온 이야기였지만 공작이며 황자까지 거부하는 탓에 어둠을 걷어 내는 짓을 하며 쓸데없이 힘만 뺐다.

“…내가 먼저 간단한 공격을 시도해 보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사이를 바라보았다. 9클래스에 들어선 사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섬뜩할 만큼 아름다운 은색 머리칼도 붉은 눈도 마탑을 나갔을 때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마탑주도 능히 될 수 있는 인물이 왜 여전히 공작가에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이던 사이는 고치를 보자마자 자지러졌다. 도망치려고 하는 사이를 공작이 겨우 붙잡아 두었다. 사이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다 죽을 거라 망발을 내뱉었다. 공작이 그런 사이를 능숙하게 다루며 제게 라비에이터 마법을 걸게 했다.

라비에이터는 사람을 공중에 띄우는 간단한 마법이었으나, 9클래스인 사이가 마법을 걸자 마법을 전혀 못 쓰는 공작도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사이는 공작이 시키지도 않은 강화 마법이며 보호 마법을 마구마구 걸어 주면서도 독설을 내뱉었다.

“공작님 죽으면 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거예요. 제가 만들어 놓은 지하 벙커에서 평생 숨어 살면서 연구만 하다가 늙어 죽을 거라고요.”

“사이 너는 걱정되면 걱정된다고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어.”

“무슨 소리세요. 절대 걱정 안 되거든요?”

새침한 사이의 태도에 공작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위험한 기운이 풀풀 흐르는 고치로 향하면서도 공작은 여전히 의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두려운 기운이 흐르는 고치였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공포를 내리누르며 끝까지 다가간다. 해야 하는 거니까.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마탑주는 그제야 까칠한 고양이처럼 털을 세우는 사이가 공작에게는 이렇게 얌전한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둘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보통 인간이라면 이룰 수 없는 대단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는 동년배 중에선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 공작은 사이에게 없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외로운 두 천재는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마탑주가 사이에게 감동적인 눈빛을 보냈다.

“공작님이 금고 열쇠를 어디다 숨겨 놓으셨더라. 장식장 아래 두 번째 서랍이었던가.”

…아닌 것도 같고.

마탑주는 잠시 제 생각을 정정했다. 그사이 공작은 고치로 다가가 있었다. 고치를 베기 위해 숨을 고르던 공작이 검을 슬쩍 내밀었을 때였다. 고치에서 나온 검은 줄기가 그대로 공작의 검을 휘어 감았다. 놀란 공작이 검은 줄기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 얇은 줄기의 힘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기껏 올라와서 검 한 번 못 휘둘러 보고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작은 검에 검기를 실었다. 푸르스름한 검기가 검을 뒤덮자 검은 줄기들이 놀란 듯이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공작은 고치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푸른 검기를 맞은 고치의 일부가 소멸했다.

고치가 검기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공작이 고치를 향해 검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후웅, 후우웅.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고치는 생성과 파괴를 반복해 가며 조금씩 소멸해 갔다.

“어, 저 고치…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까 진짜 줄어드는 것 같은데.”

“카이난 님.”

“응. 숙부님께서 해내실지도 모르겠어.”

사람들은 처음으로 희망찬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이만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공작과 고치를 번갈아 주의 깊게 살폈다.

십여 분이 지날 때까지 공작은 지치지 않고 검기를 날렸다. 결국 고치는 공작의 끈질긴 노력에 진짜 모습을 보이는 걸 허락했다. 고치의 안에는 데이몬이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눈꺼풀 위로 눈동자가 움찔거렸다.

“데이몬.”

공작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고치는 데이몬의 몸을 감싸는 대신 공작을 향해 쇄도했다. 파아악! 공작이 뒤늦게 검으로 막아 낸 순간 고치가 순식간에 공작의 대검을 감쌌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차마 검기를 생성할 틈도 없었다.

검을 감싼 고치의 줄기가 유연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엄청난 힘으로 내리쳤다. 공작이 검을 놓친 채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실드!”

사이의 입에서 비명 같은 주문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투포환처럼 떨어지던 공작의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공작도 놀란 듯 관자놀이에 주륵, 한 줄기 땀이 흘렀다. 사람들이 공작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공작 각하!”

“숙부님, 다친 곳은….”

“아아, 나는 괜찮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군.”

방금 고치에게 내던져져 온몸이 으스러질 뻔한 공작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먼저 달려왔으면서 모르는 척 구석에 박힌 사이를 찾아내 공작이 인사했다.

“고맙네, 사이. 아까는 나도 정말 아찔했어.”

“여쭤볼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공작님 금고 열쇠 있는 데가 장식장 두 번째 서랍인가요, 아니면 2층 복도 끝에서 두 번째 액자 뒤인가요?”

뻔뻔스레 말하는 사이를 보며 사람들이 경악했다. 이 와중에도 한밑천 챙기려 하는 모습이라니! 그러나 공작은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살아야 하니 끝나면 알려 주겠네.”

“약속하신 겁니다. 끝나면 꼭 알려 주기예요.”

“그럼, 난 약속한 건 언제나 지키지 않나.”

“야호, 신난다.”

신난다고 말하는 사이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고저가 없어 이상하게 들렸지만, 워낙 중대한 사안이 앞에 펼쳐져 있는지라 사람들은 천재는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고치가 검기에 반응하더군.”

“예, 저희도 보았습니다.”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마법사들이 공중에서 서포트하며….”

계획을 짜던 공작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고치가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며 거대한 구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들이 망연자실하게 구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구는 순식간에 거대한 성만큼이나 커졌다.

“정비해! 마법사들은 실드를 준비해 놓고 상황에 대비한다!”

“세상에….”

“이스테라 여신이시여.”

사람들은 이제 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비를 구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사이가 만든 벙커에 저도 껴 줄 수 있냐며 구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작이 무리를 해서라도 다시 올라가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파아앗, 구에서 수많은 가시가 튀어나왔다.

직경 5km는 넘어 보이는 가시는 스멀스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구의 크기는 전혀 얇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시와 가시 사이에 새로운 가시가 튀어나와 더욱 촘촘하고 세밀해졌다. 늘어날 대로 늘어난 가시 사이에서 검은 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햇빛이 세상을 비추듯 어두운 구가 온 세상을 물들였다. 이 정도의 반경이라면 제국 수도 전체의 하늘이 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너무나 거대한 공포에 아연해 말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얇은 막 사이에서 검은 빗물이 뚜욱, 뚝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검은 빗물은 바닥에 스미자마자 풀과 나무를 시들게 하고 땅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돌과 철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은 빗물에 지붕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빗장을 걸고 숨어든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젠장, 당장 실드 펼쳐! 민간인은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

공작의 소리에 사람들은 파드득 놀라 실드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대한 실드를 펼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실드가 닿지 않는 지역에서 집에 들어가지 못한 가축들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사이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라이트닝 마법진을 그렸던 분필을 집어 자로 잰 것처럼 정교하고 재빠르게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면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몇몇 마법사들이 그 와중에도 사이에게 감탄을 던졌다. 마법진 위에 선 사이가 그대로 선을 마무리 지으며 벌떡 일어나 발로 바닥을 쿵, 굴렸다.

“인피니티 실드!”

“세상에….”

사이의 손끝에서 황금색 빛 무리가 솟구치더니, 이내 지평선까지 훅 퍼졌다. 가느다랗고 얇은 금색 막이 검은 비를 꿋꿋하게 막아 내었다. 한 명이 건 실드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그 크기가 거대했다.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이 어느새 환호성을 지르며 신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사이를 본 사람들의 눈에 감탄과 경외가 차올랐다. 마법사들은 이 실드가 얼마나 대단한 건 줄 알기에 일부 마법사들이 질투 어린 눈으로 사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하군….”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사이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투둑, 그와 동시에 사이의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젠장. 진짜 별거 아닌데.”

사이는 자존심이 상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무도 그의 실드만큼 넓게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공작이 다급하게 다가와 옷깃으로 피를 쓱쓱 닦아 주었다. 공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사이에게 물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삼 일 밤낮도 끄떡없죠.”

“조금 봐주면?”

“조금 봐주면… 한 시간 정도요.”

한 시간이라.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거군. 공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나머지 마법사들은 기사들한테 실드 걸고 고치 쪽으로 날려 보내! 기사들은 고치를 향해 검기를 날리고!”

공작의 지휘 아래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기사들 중에는 카이난도 껴 있었다. 엘리샤는 아직 검기를 다루는 수준은 못 되었기에 그 일에는 빠지게 되었다. 입술을 깨물고 상황을 살피던 엘리샤가 공작에게 말했다.

“검기 외에도 신성력이 통할지도 몰라요. 저도 함께 올라갈게요.”

“엘리샤!”

카이난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엘리샤의 결정엔 변함이 없었다. 엘리샤가 의연한 눈으로 카이난을 바라보았다.

“저는 결정했어요.”

“그래도 위험해. 밑에서 실드를 걸어 주는 편이 나아.”

“마법과 신성력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저 외에 또 있나요? 한 시간 동안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돼요.”

엘리샤의 말에 카이난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실상 카이난이 잘못한 건 없는데도, 제가 능력이 부족해 반려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것 같았다. 공작은 엘리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좋아, 함께 올라가도록. 그래도 안전을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카이난 너도 마찬가지다.”

“예, 그럴게요.”

“…네, 알겠습니다.”

준비 끝에 플라잉 마법이 걸린 기사들이 공중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공중에서 고치를 마주하게 된 기사들은 허공에서 검기를 날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공작이 했을 때에는 간단해 보이던 동작들이, 제가 하니 검기는커녕 자세를 제대로 잡는 것도 어려웠다.

“잠깐 물러나 주세요-!”

기사들이 엘리샤의 목소리에 뒤로 물러났다. 고치에 타격을 가하는 첫 번째 타자는 엘리샤였다. 플라잉 마법을 제게 걸어 다른 사람들보다 움직이기가 조금 더 수월했던 엘리샤가 익숙한 자세로 신성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주 작고 하얀 불꽃이었다. 손안에서 탁탁 튀던 흰 불꽃은 순식간에 새하얀 구 모양으로 손바닥 안에 고여 들었다. 신성력이 담긴 원형의 빛에는 공중에 떠 있는 모두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진하고 달큰한 세이지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준비를 마친 엘리샤가 반짝, 눈을 떴다.

“데이몬.”

엘리샤의 목소리에도 고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엘리샤 역시 반응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닌지라 그저 할 말을 했다.

“나는… 시에나가 살아 있다고 생각해요.”

본인의 이름은 아니라도 시에나의 이름을 부르면 반응할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데이몬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엘리샤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안의 고치를 노려보았다.

아카데미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만 해도 당신을 공격할 거라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어쩐지 지금 여기에 있는 순간 이런 날이 올 걸 이미 알았던 것 같은 건 왜일까.

꼭 이런 일을 겪어 본 것처럼.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야.

이게 만약 운명이라면 데이몬. 당신은 강한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견뎌 내고, 운명 같은 건 훌쩍 뛰어넘고. 다시 돌아와.

“그러니까, 데이몬 당신도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시에나 돌아오면 대체 뭐라고 말할 거야!”

말을 끝낸 엘리샤가 지금까지 모아온 신성력을 고치를 향해 내뿜었다.

콰아아아. 새까만 고치에 눈부신 신성력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빛의 폭포를 보는 게 이런 느낌일까. 사람들이 그 빛이 너무 환해 눈을 찡그리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것 봐! 고치가 얇아졌어!”

“진짜다. 신성력이 통했다고!”

신성력을 잔뜩 먹은 고치는 눈에 띄게 얇아져 있었다. 떠들썩하게 고치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드는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휴우.”

신성력이 통했다는 걸 확인한 엘리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고치가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이내 아까와 같은 크기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에 금세 절망의 빛이 어렸다.

“그렇게 신성력을 쏟아부었는데… 똑같아졌어….”

“아니, 아니야!”

좌절하는 남자의 앞에 기사 한 명이 손가락으로 가시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저것 봐, 저기 가시가 아까보다 더 줄어들어 있어!”

기사의 말에 사람들이 가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넓게 퍼져 있던 가시가 정말 줄어들어 있었다. 비교 대상인 사이의 금색 실드가 더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었다.

고치를 공격하면, 가시는 줄어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기사가 외쳤다.

“가시가 아니라 본체에 검기를 날려! 그러면 가시가 점점 줄어들 거야.”

기사의 말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고치에 검기를 쏘기 시작했다. 엘리샤 역시 신성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퍼엉, 펑. 카이난과 기사들이 검기를 날릴 때마다 고치는 쉴 새 없이 회전하며 재생을 시도했다. 시간이 지나자 고치 자체는 아까와 다름없는 둥근 구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넓게 퍼져 있던 가시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 * *

[ 에나. 시에나. ]

시에나는 저를 부르는 소음에 눈을 꼭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잠들어 있고만 싶은데, 옆에서 자꾸 누군가가 귀찮게 불러 대었다.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시에나가 신경질적으로 팩 소리쳤다.

“아…! 누….”

누구냐고 물으려던 시에나의 입 모양이 그대로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있는 인물이 정말로 뜬금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디스?”

시에나가 묻자 주디스는 알아봐 주어 반갑다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대체 어떻게….”

주디스는 길고 넓은 하얀 천 하나를 두르고 있었다. 추운 겨울에 봄, 가을에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은 건 둘째 치고, 주디스의 주변에는 반짝이는 반딧불이의 빛무리가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저 일루전 마법인 걸까. 빛무리가 신기했던 시에나가 무심코 주디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러나 놀랍게도 주디스의 몸은 시에나의 손을 그대로 통과했다. 시에나가 화들짝 놀라 뒤로 가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디스는 그런 시에나의 모습을 보며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 미안, 많이 놀랐니? ]

“조금… 놀랐어요.”

시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었다. 그러나 주디스가 앞에 있어서일까? 이상하게 무섭거나 겁이 나진 않았다.

“여긴… 어디예요?”

[ 여긴…나의 공간이란다. 인간이라고 치면 집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

…주디스의 집이라고? 마지막 기억에는 분명 독방에 갇혀 있었는데, 어떻게 주디스의 집에 오게 된 거지? 시에나는 궁금증을 가득 안은 표정으로 주디스를 바라보았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서요…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 음, 수빈. 아니, 이제는 시에나라고 말하려는 게 나으려나. ]

주디스의 말에 시에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수빈. 한국의 이름, 그래서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이름. 시에나는 경계심 강한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물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요? 아니, 당신은 누구죠?”

손을 통과했을 때부터 보통 사람은 아니겠구나 생각은 했다. 미로 같은 독방에서 저를 꺼낸 거로도 모자라 제 원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사람. 아니, 사람이긴 한 걸까.

“당신은 신인가요?”

정답을 맞혔다는 듯 주디스의 눈이 곱게 휘었다.

[ 그래, 사람들은 나를 이스테라라 부르더구나. ]

그것도 제국의 주신인 이스테라라니. 시에나가 입을 딱 벌렸다.

신을 만날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나는 이곳에 왜 오게 된 건지. 그저 실수인지, 이유가 있어서 이끈 건지.

그런데, 이미 나는 신을 만났었구나.

“어… 그러니까 제가 만난 주디스는….”

[ 주디스 역시 나야. 한 번은 너와 만나 보고 싶었거든. 너와… 세상을 멸망시킬 존재를. ]

데이몬의 이야기인가. 시에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주디스에게 물었다.

“데이몬이 세상을 멸망시키나요?”

[ 네가 막지 않으면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지금은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는 것 같지만…. ]

이스테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밖에서 지금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맞나 보다.

[ 일단 지금은 손님을 맞이하기는 너무 어두우니, 좀 밝은 곳으로 가는 게 좋겠지? 인간들은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니 말이야. ]

이스테라가 손뼉을 치자 한치 앞을 볼 수 없던 어둠 속에 있던 시에나는 밝고 따스한 빛이 흘러넘치는 장소에 있게 되었다. 그곳은 우유니 소금사막처럼 지평선과 바닥의 경계가 없는 곳이었다.

새파란 하늘과 몽실몽실한 뭉게구름을 거대한 거울처럼 비추는 바닥에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의자와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끝없는 지평선에는 오직 둘 뿐이었다. 이스테라는 세밀하게 조각된 의자에 앉아 시에나에게 손짓했다. 반대편에 앉으란 소리인 듯했다. 시에나는 의자가 혹 허상이 아닌지 매만져 보았다. 손끝에 단단하고 시원한 대리석의 촉감이 느껴져 그제야 시에나는 자리에 앉았다. 시에나가 자리에 앉자 이스테라는 시에나에게 의자와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 놓인 작고 동그란 모양의 과자를 권했다.

[ 먹어 보렴. 맛있을 거야. ]

시에나는 잠시 망설이다 앞의 하얀 과자를 바삭, 베어 물었다. 하얗고 동그랗게 생긴 알 모양의 과자 안에는 녹진한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 있었다. 진한 크림이 놀랍도록 맛있었다.

“달콤해….”

밥은 잘 나왔지만 걱정이 많아 3일 내내 거의 굶다시피 한 시에나에게 앞에 놓인 과자는 천국의 맛이었다. 시에나는 손안 가득 과자를 집어 본격적으로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으음…!”

겉은 똑같은데 속안에 있는 건 완전히 달랐다. 어떤 과자는 달콤한 맛이 났는데 혀끝에 대자 솜사탕처럼 살살 녹아 버렸고, 어떤 과자는 체리 과육이 든 아이스크림 맛이 났다. 마지막으로 먹은 과자는 마시멜로처럼 쫀쫀하고 쫀득한 맛이 났다. 처음 먹어 보는 과자인데도 하나같이 그리운 맛이 났다.

[ 원래 있던 곳의 음식이 그리울 것 같아서, 그런 맛을 좀 내 봤단다. ]

시에나는 이스테라의 말에 정말 그녀가 저를 이 세계로 데려온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먹은 과자들은 전부 시에나가 원래의 세계에서 먹어 봤던 맛이었다. 그러니 그립게 느껴졌던 거겠지. 입에 과자 가루를 쓱쓱 털어 내며 시에나가 새초롬하게 답했다.

“…잘 먹었습니다.”

[ 좀 더 먹어도 되는데, 달콤한 것 좋아하잖니. ]

이스테라는 저에 대해 다 아는 걸까. 시에나는 이스테라와 똑같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스테라 역시 자세를 곧게 가다듬으며 시에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는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어 보아야 할 때였다.

“저는 왜 여기 오게 되었나요? 그리고 제가 할 일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 네 생각대로 너는 나의 뜻에 의해 이곳에 오게 되었단다. 그리고 네가 할 일은… 데이몬의 생명을 거두는 일이지. ]

바삭, 시에나의 손에서 과자가 그대로 뭉그러졌다. 데이몬의 생명을 거두는 일이라는 말을 ‘나는 오늘 아침으로 이런 걸 먹었단다’와 같은 평온한 어조로 말하는 이스테라를 보며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에나는 기분이 상한 티를 내며 부스러진 과자가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해 가게 정확히 설명해요. 제가 왜, 데이몬 도련님을 죽여야 한다는 거죠?”

[ 이런, 아이야. 급하구나. 그래, 전부 설명해 주마.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낫겠지. ]

“네? 무슨….”

이스테라 여신은 중지와 엄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시에나가 있는 의자의 바닥이 덜컹, 열렸다.

“꺄아아악-!”

한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한 시에나가 이내 풍덩, 깊은 물웅덩이 속에 빠졌다. 발버둥을 치며 겨우 올라온 시에나가 이를 으득 깨물었다.

“가만 안 둬….”

데이몬을 죽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하는 걸로도 모자라 갑자기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이런 곳에 빠뜨리다니. 어이가 없어 시에나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또 어디야….”

이스테라가 저를 이상한 곳으로 인도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시에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굴인가.”

시에나의 주변에는 매끈매끈한 종유석들이 가득했고,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출구를 가늠했다.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밝은 빛이 이따금 번쩍거렸다. 그곳이 출구라는 걸 직감한 시에나는 벽을 더듬으며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밖에 나온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시에나가 있던 동굴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 나오자마자 앞의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땅은 피로 인해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하늘은 번개가 내리치는 검은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폐허가 된 주변은 찢어진 옷과 부서진 날붙이, 살점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으으으….”

“그아아아아-!”

인간의 비명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나는 더럭 겁을 먹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야?”

심장에 칼을 꽂히고, 머리의 반이 날아간 사람들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거로도 모자라 성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부수고 있었다. 그들의 괴력에 수천 년 동안 건재해온 성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성을 파괴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본 좀비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과 몹시 흡사했다. 핏기 없는 새파란 얼굴에 기괴한 방향으로 몸이 꺾인 채 걸으며 모든 걸 파괴하는 이들.

언데드인가?

끔찍한 장면에 시에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포탄을 더 가져와-!”

“아아아악!”

“죽은 사람은 빨리 성 밖으로 밀어-! 곧 죽을 사람도 상관없다!”

성벽 위는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펑, 펑. 포탄으로 언데드를 사정없이 으깨는데도 그들은 끊임없이 성벽 위에 달라붙었다. 그 과정에서 팔 한쪽이 부러져도 얼굴이 날아가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 성벽 아래로 곧 숨이 넘어갈 큰 상처를 입고 고통에 신음하는 자를 떨어뜨렸다.

쿠웅. 사람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그는 추락하고 나서도 꽥꽥 비명을 지르며 질기게 숨을 유지했다. 그 남자에게 언데드 수십이 달려들어 살점을 파먹었다. 남자의 끔찍한 비명에 시에나가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도 곧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채로 어기적, 일어나 성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

“커어어어-!”

적어도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언데드 떼들에 비해 성벽 위의 사람들은 채 일만도 되지 않아 보였다. 시에나는 성벽에 서서 언데드를 공격하는 사람들 중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카이난 님!”

꺼칠해진 얼굴과 창백한 피부, 퀭한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금색 눈에 어린 총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분명 카이난이었다. 시에나는 생각할 새도 없이 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에나가 있는 곳은 성의 뒤편과 연결된 언덕이라 언데드의 방해 없이 성벽 쪽으로 갈 수 있었다.

“폐하, 언데드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성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도망간다 해도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이미 제국은 언데드에게 다 먹혀 버렸는데.”

“동맹국인 라이논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이 성 아래에는 엘리샤가 잠들어 있어! 여길 버리고 떠나면 그녀 역시 언데드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여기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으면 죽었지, 엘리샤를 두고는 절대 떠날 수 없어!”

“역사에도 기록되지 못할 개죽음입니다!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폐하를 알아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역사에 기록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자네들도 알지 않나. 마지막 소원이 언데드가 되지 않기 위해 몸을 조각내 달라는 거였는데! 비록 이루어 주지는 못했지만 엘리샤의 육신을 언데드에게 넘길 수는 없단 말이다.”

“정말…고집불통이십니다.”

부관의 끊임없는 설득에도 카이난은 강경했다. 부관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카이난을 설득하길 포기했다. 카이난 가까이 다가온 시에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엘리샤가… 죽었어? 그, 엘리샤가? 믿기지 않았다. 카이난이 제 옆에 자리를 잡은 부관에게 말했다.

“…난 됐으니 자네라도 도망가게.”

“됐습니다. 제 소원이 상관 목 한 번 뜯어 보는 거였거든요. 옆에 딱 달라붙어 있다 죽어서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 폐하 모가지 한 번 뜯고 갈랍니다.”

부관의 퉁명스러운 말에 카이난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표정에서 이 삶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시에나가 카이난의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지만 카이난은 전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를… 못 봐?’

“카이난 님?”

시에나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그러나 카이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앞에 서서 손을 휘휘 저어보는 불경스러운 짓도 해보았지만 카이난은 마치 시에나가 없는 사람인 듯 대했다. 시에나가 당황해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카이난 님! 저예요. 시에나라고요!”

시에나가 소리를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난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시에나는 용기를 내 그의 팔을 잡아 보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그대로 통과했다. 오싹, 소름이 돋아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테라 같은 상태가 된 건가?

시에나가 나름 합리적으로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건 이스테라가 최악의 미래를 알려 주는 걸지도 모른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시에나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이런 걸 보여 주는 이스테라에게 깊은 혐오감이 생겼다.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저를 데려와 이딴 걸 보여주는 걸까.

“살아 나가면 반역죄로 자네 목부터 베어 주지.”

“바라던 바입니다!”

시에나의 마음도 모르고 카이난과 부관은 농담 따먹기를 하며 킬킬 웃었다. 살벌한 농담을 하는 새에 결국 성벽이 허물어지며 언데드 떼가 미친 듯이 올라왔다. 잠시나마 풀어졌던 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성벽이 허물어졌다-! 모두 집합해-!”

“사수해라-!”

시에나는 뒷걸음질 쳐 다시 동굴 근처의 산으로 돌아갔다. 언데드들 역시 시에나의 존재를 알아채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흉측한 모습을 앞에서 보는 게 두려웠다.

부관과 카이난, 기사들은 그런 언데드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 장면을 관망하며 시에나는 콧잔등이 시큰해져왔다.

“젠장.”

괴성을 지르며 제게 달려든 언데드들을 카이난은 쉴 새 없이 베어 넘겼다. 그의 검에 검기가 실릴 때마다 언데드의 팔다리가 무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부관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를 지켜라-!”

언데드들을 베어 넘기던 기사들은 그 말에 일사불란하게 달려와 원을 그리며 카이난을 지키기 시작했다. 황실 기사단 마크가 그려진 망토를 두른 기사들의 실력들은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언데드들은 머리의 반이 날아가고, 다리가 부서져도 달려들었고, 그 수는 기사들의 수십 배는 되었다. 결국 기사들은 하나하나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은색 투구를 벗겨 낸 언데드들이 기사의 얼굴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고통의 찬 비명에 카이난이 입술을 깨물며 달려드는 언데드의 팔을 벤 후 구둣발로 몸을 짓밟았다. 우두둑, 언데드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2시간이 넘는 지난한 싸움 끝에 결국 기사들에 이어 부관까지 목숨을 잃었다.

“징그러운 것들.”

홀로 남은 카이난은 참혹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연처럼 새까만 구름 사이로 이따금 내리치는 벼락, 짙은 피 안개가 둘러싼 무너져 가는 성벽 위로 새까맣게 몰려드는 언데드들. 그곳에 희망이란 없었다.

“키이이익, 키이익-!”

언데드 중 하나가 카이난에게 달려들었다. 카이난은 익숙한 듯 언데드의 목을 베어 넘겼다. 눈앞에서 제 동료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데드들은 아무런 공포도 없이 동시에 카이난에게 달려들었다.

카이난이 검기를 날릴 때마다 언데드 수십의 목이 베였다. 그러나 수십이 죽으면 수백이 달려들었다. 카이난은 열심히 버텼지만, 혼자의 몸으로 모든 언데드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카이난은 결국 지친 표정으로 아래 스러진 부관을 보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내 목은 네게 주려고 했는데. 너무 늦게 일어나는군.”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던 언데드 수백이 오로지 그를 잡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캬아아악-!”

카이난의 핏발 선 눈 아래로 얇은 눈물 길이 만들어졌다. 카이난은 한숨과도 같이 반려의 이름을 내뱉었다.

“엘리샤….”

언데드의 단단한 이가 그의 목에 박히기 직전, 도저히 그 장면을 볼 수 없었던 시에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에나의 앞에 이스테라의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 아이야, 이제는 눈을 떠도 된단다. ]

시에나는 이스테라의 말에 흠칫 놀라 목소리가 울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에나는 어느새 그 지옥 같던 전쟁터를 벗어나 아까와 같은 장소에 있게 되었다. 아삭, 평온한 표정으로 앞의 과자를 먹고 있는 이스테라에게 시에나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환상을 보여 주신 거예요?”

시에나가 핏발 선 눈으로 이스테라를 노려보았다. 이스테라는 그런 시에나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 환상이라니, 아이야. ]

“제가 데이몬 도련님을 죽이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걸 보여 주신 거잖아요! 정말, 악취미야.”

시에나는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한 명의 죽음과 세계의 멸망. 그 무게는 분명 달랐지만, 그 한 명을 사랑하게 된 시에나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스테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미래가 아니란다. ]

“미래가 아니라뇨? 그럼….”

[ 네가 없는 세계의 과거지. ]

“무슨…?”

이스테라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시에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은 재미있게 보았니? ]

시에나가 깜짝 놀라 이스테라를 쳐다 봤다. 그저 책의 등장인물인 줄만 알았던 이스테라가 제목을 알고 있다니? 당황한 시에나를 보며 이스테라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 내가 어떻게 그 책을 알고 있는지 궁금한 눈치로구나. 듣고 싶니? ]

“…….”

시에나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경계심 어린 눈으로 이스테라를 바라보았다. 이스테라의 말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팽팽 돌았다.

[ 내 말은 대부분 믿어도 괜찮단다. 신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거든. ]

시에나의 마음을 그대로 읽은 것 같은 이스테라의 반응에 시에나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이스테라는 시에나의 경계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 그래, 궁금한 것부터 말해 주어야겠구나. 내가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단다. 내가 그 책을 썼으니까. ]

이스테라 역시 책 속 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한 시에나의 생각이 와장창 무너졌다. 시에나는 차마 관리하지 못한 날것 그대로의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이스테라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 책의 작가라고요…?”

[ 맞아. 내가 그 책을 썼단다. ]

“그렇다면 제가 겪은 인물들은 전부 가공의 인물들인 건가요?”

[ 이런, 그건 아니야. 책을 쓴 건 내가 맞지만, 그건 거의 역사서에 가까운 책이었단다. ]

“그렇다면 아까 보여 준 그건 뭐예요? 끝부분에는 제국의 반이 무너졌을 때 엘리샤와 카이난이 힘을 합쳐 데이몬 도련님을 무너뜨렸다고 했잖아요.”

[ 거기까지도 전부 진실이란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었어. ]

이스테라는 싫은 기억을 꺼내는 사람처럼 상아처럼 희고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 …대신관이 리치가 되었거든. ]

“리치… 가 뭔데요?”

[ 흑마법을 다루는 마법사가 강한 염원을 지닌 채 죽으면 리치가 된단다. 영혼을 봉인해 두기 때문에 봉인된 곳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육체를 모두 조각낸다고 해도 멀쩡하게 재생되지. ]

시에나는 이스테라의 설명에 제가 죽인 대신관이 떠올랐다. 그럼, 그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저를 더듬으려 들던 섬뜩한 손이 생각나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건 아니란다. 대신관의 영혼은 이미 가야 할 곳으로 떠나갔어. ]

시에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었다.

“대신관이… 흑마법사였나요?”

[ 그래. 성력만큼이나 강한 마나도 가진 드문 아이였지. 소년 시절과 달리 권력과 살인에 물들어 가는 아이가 안타까워 잘못된 점을 알려 주기 위해 나는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아이는 참회는커녕 저를 버렸다 생각하며 강한 복수심을 품게 되었지. ]

그렇게 말하는 이스테라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제 아이가 나쁜 방향으로 빠지는 걸 막지 못했다는 데에서 온 죄책감이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 그 아이는 신성력과 마나를 느끼는 데 능했어. 그래서 황궁의 미로 속에 강한 힘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 아이는 그 힘을 얻기 위해 수년에 걸쳐 황궁의 미로를 탐색했단다. ]

황궁의 미로라면 제가 갇혀 있던 곳인가. 시에나는 감금당했을 때 대신관이 저에게 미로 관련하여 운운했던 걸 떠올렸다.

[ 결국 어느 날 그 아이는 황궁의 미로를 돌아다니다 잠들어 있는 어둠의 구를 발견했어. ]

그렇게 말하는 이스테라의 표정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시에나는 그런 이스테라를 향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 강한 힘이 왜 황궁의 미로에 있었던 건가요…?”

[ 그 구는 초대 마르바스가 봉인해 놓은 힘의 일부였거든. ]

“힘을 봉인해야 했다고요?”

[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초대 마르바스는 마왕이었으니 말이야. ]

“마, 마왕이요?”

[ 그래. 마르바스 황가는 전부 마족의 피를 이었단다. 수백 년에 걸쳐 지금은 많이 옅어졌지만 말이야. 네가 사랑하는 그 아이 역시 마족의 피를 이었는데… 알고 있었니? ]

“…아니요. 몰랐어요.”

시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데이몬이 마족이라니.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니 데이몬이 가진 능력들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섬세한 외모와 강인한 육체. 또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학습 능력. 검술과 마나에 대한 재능 등 데이몬은 여러모로 인간보다는 인간을 뛰어넘는 무언가에 가까워 보였다.

[ 초대 마르바스 이후 수많은 후손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머나먼 방계조차 검은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지고 있는 건 그게 초대 마르바스의 특징이었기 때문이야. 마족의 혈통이 인간보다 우성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 ]

“그런데 그 마족이 어째서 인간과 결혼해 황족이 된 거죠…?”

[ 인간계로 넘어와 유희 중에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거든. 그것도 나를 모시는 성녀를 말이야. ]

이스테라가 그때를 회상하며 재밌다는 듯 살풋 미소 지었다. 시에나는 모든 것이 아직은 얼떨떨했다.

[ 마족은 인간과는 다르게 한 명만을 평생 사랑한단다.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고. 마르바스의 경우는 인간 여자가 그 반려였고 말이야. ]

시에나는 예전 공작이 제게 말해 준 황가의 특징이 생각났다. 단 한 명만을 사랑한다는 낭만적이고도 거대한 약점. 그게 마족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었구나.

[ 그래서 마왕 직책도 사임하고 인간계에 눌어붙어 황제까지 하게 되었지. 그런데 인간계에 오면서 힘이 많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르바스의 힘은 너무 강했어. 아무래도 마왕이었으니까. 자신의 반려가 혹 무의식중에 제가 발휘하는 힘 때문에 위험에 빠질까 봐 마르바스는 대부분의 힘을 황궁의 지하에 봉인하고 인간은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복잡한 미로까지 만들어 놓았지. 그런데 대신관이 수년의 탐구 끝에 그걸 발견하게 된 거야. ]

“세상에….”

그의 집착을 칭찬을 해 줘야 하는 건가. 이미 강한 힘을 타고났으면서 어째서 더 큰 힘을 바랐던 걸까. 더 강한 힘을 찾을 시간에 인성을 가꿨으면 그런 최후는 맞지 않았을 텐데.

시에나는 대신관을 죽인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수많은 희생자를 낸 살인자였고, 또 다른 희생자를 내려다가 제가 희생된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 그 힘은 오랜 시절 황궁의 어둠을 빨아들이며 더 강해져 있었어. 대신관은 그 구를 이용해 내게 복수를 결심했지. 그걸 위해 제일 먼저 그 힘으로 제국 여기저기에 던전을 열었단다. ]

시에나는 데이몬이 창단한 디에스 상단이 생각났다. 제국의 가장자리 근처 깊은 숲에서만 열렸던 던전이 황궁 근처에서도 열려 아카데미에 다니면서도 사냥이 가능했다고 했었지. 그 이유가 대신관이 던전을 열었기 때문이었다니.

[ 그 아이는 세계를 제 손안에 쥐고 싶어 했어.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 나에게 내 아이들을 없앰으로써 복수하고 싶어 했고. 그리고 그 전의 미래에서 그건 실제로 이루어졌단다. ]

이스테라가 침통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사실을 읊어 갔다. 시에나는 어느새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 데이몬이 둘의 손에 소멸되고 얼마 되지 않아 대신관은 제 영혼을 그 구 안에 봉인하고 리치가 되는 것에 성공했지. 리치가 된 즉시 모든 던전의 문을 활짝 열었고 제국 전체에 무자비한 살육이 시작되었어. 던전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살육하고, 사람이 살던 곳에 터를 잡았지. 인간들은 그런 몬스터를 몰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결국 몬스터들을 몰아내는 것까지도 성공했지. 그렇지만, 문제가 생겼어.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난 거야. ]

이스테라의 설명에 시에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의 외전 격 이야기인 셈이었다. 둘이 행복하게 살았을 줄만 알았는데, 그다음에 이런 일이 생긴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몬스터에게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다시 무덤에서 걸어 나온 거야. 대신관이 구의 힘을 이용해 수도 전체에 언데드 마법을 걸어 놓았거든. 그것 때문에 제국은 전부 초토화되었어. 데이몬과 몬스터에게 많은 전력을 잃은 인간들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어.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든 부모가 언데드가 되어 자식들에게 달려들고, 믿었던 친구나 연인에게 몸을 뜯기는 일들이 속속들이 생겨났지. 엘리샤에게 내 힘을 줌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긴 전쟁 속에 결국 그 아이도 목숨을 잃게 되었어. ]

조용히 시에나에게 설명하는 이스테라는 소태를 씹은 듯한 씁쓸한 얼굴이었다. 참혹했다. 너무도 참혹한 일이었다. 시에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입술만 꽉 깨물었다. 입술이 하얘지도록 깨물었건만 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들이었다.

[ 제국에서 시작된 언데드화는 점점 퍼져 나가 세계의 멸망으로 이어졌어. 나는 최선을 다해 종말을 저지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나선 걸로 이미 세계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별다른 방법 없이 아이들이 죽는 걸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단다. 이대로 가면 멸망 역시 자명했지.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나머지 힘을 이용해 시간의 모래시계를 돌려 미래를 바꿔 보고자 했단다. ]

“그래서… 저를 끌어들이신 건가요?”

[ …그래. 나는 그 내용을 책으로 써서 다른 차원의 곳곳에 흩뿌렸어. 이 책을 좋아하고 이 세계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 세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

“…그게 저였군요.”

시에나는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제가 이 세계에 온 이유는 실수도 무엇도 아니었다. 여신의 인도였으며 선택이었다. 시에나는 이스테라에게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신관이 죽었다면 그 미래는 일어나지 않는 거 아닌가요? 왜 데이몬 도련님을 죽여야 해요?”

[ 지금 데이몬은 폭주를 시작했어. 운명에 의해 데이몬은 한 번은 폭주하게 되어 있어. 그렇지만 문제는 데이몬이 폭주하기 시작한 곳이 마르바스 영지가 아닌 황궁이라는 거야. ]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요?”

[ 어둠의 구는 기본적으로 혈통에 이끌리게 되어 있어. 대신관은 죽어 가면서 봉인을 풀고 구를 불렀지만, 구는 제 영혼을 봉인해 놓은 대신관 대신 마르바스의 혈통을 이은 데이몬의 영혼에 감응했지. ]

“그럼 데이몬 도련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 어떤 상태인 거죠?”

[ 데이몬은 마르바스의 피를 타고난 이들 중에 가장 강한 별을 타고났어. 그렇지만 그 역시 인간. 그 구는 마족이 가진 힘의 결정체나 다름없기에 주체를 빼앗기고 폭주하고 있지. 만약 네가 그를 소멸시키지 않으면, 이 세계는 전처럼 멸망할 거야. ]

이스테라는 협박과도 같은 말을 우아하게 전했다. 시에나는 이스테라의 뺨을 날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제 연인을 죽이란 말을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까.

[ 하지만 넌… 데이몬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네가 그의 반려로 선택된 이상, 데이몬은 널 해칠 수 없어. ]

“제가… 데이몬 도련님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면요?”

[ …이 세계로 와서 소중해진 것이 데이몬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

짜악, 이스테라의 뺨이 강한 타격음을 내며 그대로 돌아갔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시에나가 이스테라의 뺨을 날린 것이었다. 이스테라의 볼은 손바닥 자국을 남긴 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시에나는 제가 때려 놓고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까만 해도 그대로 통과했던 손이 이번에는 닿았던 것이다. 이스테라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그 팔찌, 내 힘으로 만들어 놓은 거라 낀 손으로는 날 만지는 게 가능해. ]

시에나는 주디스가 몇 년 전 제게 준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팔찌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이 팔찌로 날 감시한 거예요?”

[ 그런 건 아니야. 네 몸이 위험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으면 팔찌에서 신성력이 나와 널 치유하게 만들어 놓은 것뿐이야. ]

“내가… 데이몬 도련님을 죽일 때까지 죽어서는 안 되니까?”

시에나의 울분에 찬 말에 이스테라는 답이 없었다. 그저 슬픈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스테라의 눈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들어 있어 시에나는 그녀의 눈을 보기가 싫어졌다.

[ 나 역시 특별하기 아끼는 아이들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그게 이 세계의 모든 아이들보다 소중하지는 않아. ]

“당신은…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말하면서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시에나의 물음에 이스테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건 아니니까. ]

“이 신이 진짜.”

시에나가 발끈하자 쓴웃음을 지은 이스테라가 그녀에게 검 하나를 건네주었다. 무심코 건네받은 검을 살핀 시에나의 안색이 대번에 가라앉았다. 검집은 분명 어디에서 본 거였다. 6년 전 축제 때 받았던 검집과 같았다.

세이지 꽃잎이 가득 차 있던 검집과는 다르게 지금 받은 검집은 훨씬 묵직했다. 스르릉, 역시나 안에는 날이 새파랗게 벼려진 칼날이 들어 있었다. 이스테라가 이 검을 준 목적은 명확했다. 이 검으로 데이몬을 죽이라는 거겠지.

[ 네가 이 검으로 데이몬을 죽이고 나면, 나는 인간사에 과도하게 개입한 죄로 수십 년 안에 소멸될 거야. ]

“…꼴좋네요.”

[ 수천 년을 살아온 나인데, 수십 년 정도 더 산다고 해서 뭐가 있을까. 어차피 살아 있는 지금도 개입한 대가를 받아 고통의 연속인데. 내 여분의 삶 대신 이 세계에 왔었던 시절의 기억을 전부 지운 채 널 다시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 줄게. 그때 그 시간 그대로. ]

“실컷 이용해 먹고 내버리려는 거예요?”

감정이 흘러넘쳐서인지 자꾸만 말이 뾰족하게 나왔다. 이스테라의 의도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 그리고… 네게 축복을 내릴게. 넌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거야. 원하는 만큼의 돈을 가지고, 사람을 가지고, 행복을 가지게 될 거야. 네 남은 삶은 황금만큼 빛나고 귀하게 살게 될 거야. ]

이스테라는 간절하게 시에나를 설득했다. 이스테라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 시에나는 차마 단박에 거절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 제발… 부탁이야. 이 세계를 살려 줘. ]

이스테라의 간절한 부탁에 시에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시에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이스테라는 한 걸음 떨어져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시에나는 그제야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크지 않구나.’

이스테라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쭉 뻗은 늘씬한 미인을 상상했었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제 키에서 이마 하나 정도나 차이 날까. 체구는 시에나만큼이나 작은 데다 하얀 팔다리는 안쓰러울 만큼 마르고 멍들어 있었다. 표정은 우울하고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누가 이 사람을 신으로 볼까.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면 균형이 깨지는 만큼 신 역시 충격을 받는다고 했지. 억겁의 시간을 사는 신이 겨우 수십 년을 살 수 있다는 거면 그녀에게 남은 힘은 이미 거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이스테라는 제 마지막 희망인 시에나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신화에 나오는 이스테라의 모습은 근엄하고 우아한 데다 결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용감한 신이었는데, 가까이서 본 이스테라의 모습은 그저… 사랑하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치면서도 노력하고 또 노력해 온 작고 약한 신이었다.

그래서 시에나는 제 연인을 죽이라고 종용하는 그녀를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이전의 미래에서 이스테라는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며 울고 또 울었겠지.

그녀는 제 몸을 소멸시켜 세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능히 그렇게 했을 신이었다. 그러나 제 희생으로 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다른 방법으로 고군분투해 온 거겠지.

이렇게… 다쳐 가면서. 제가 희망이랍시고 데려온 인간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서.

“씨이….”

시에나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착하지나 말지.

왜 이렇게 바보같이 물러 터져서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야.

콧잔등이 시큰해지더니 기어코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내가… 데이몬 도련님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는 쭉 살아 있게 되나요?”

[ 육체만 살아 있는 게 사는 거라면, 세계를 멸망시키고 그 힘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제 영혼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살아 있게 되겠지. ]

“데이몬 도련님을… 다시 되돌릴 방법은 없나요?”

[ 글쎄… 그 아이의 정신은 이미 폭주하면서 어둠의 구와 감응해 하나로 합쳐지고 있어.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한들 마족, 그것도 마왕의 힘을 제 정신력으로 내리누르는 건… 불가능해. ]

“그래도, 아주 약간의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시에나는 이스테라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저히 데이몬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데이몬을 죽이느니 차라리 그 손에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스테라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벌써 정신의 대부분이 잠식되기 시작했어. 그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소중한 사람을 더 이상 죽이지 않게 해 주렴. 시에나, 이젠 시간이 없어. ]

더 이상이라고? 누가… 죽었단 말이야? 시에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누가… 죽었나요?”

[ 나머지는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

“…네? 이스테라. 이스테라-! 아악!”

시에나는 제 몸이 또다시 추락하는 걸 느꼈다. 몇 번이나 겪는 건데도 아찔한 공포에 질려 시에나가 비명을 질렀다.

“푸하아-!”

풍덩. 깊은 물웅덩이에 빠진 시에나가 어푸어푸 헤엄쳐 뭍으로 올라왔다. 왜 이렇게 물을 좋아하는 거야. 이스테라를 원망하며 시에나가 눈 앞을 가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아얏.”

돌바닥에 올라오며 무릎이 긁혔는지 꽤 깊은 상처가 났다. 시에나가 표정을 찡그리며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는 무릎을 바라보았다. 바쁜 마음에 대충 물로 씻고 나가려 물을 끼얹은 시에나는 물에 닿은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자 잠시 멈칫했다.

“성수인가….”

어둠 속에서도 반딧불이를 머금은 듯 푸르게 빛나는 물을 보며 시에나가 오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 동굴 안은 카이난과 언데드가 싸우는 또 다른 미래를 봤을 때 왔었던 곳과 같은 곳이었다. 이만한 양의 성수라면 국가에서 따로 관리할 법도 한데, 야생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되는 걸 보아 아직 인간에게 발견되지 않은 곳 같았다. 장소를 기억해 둔 시에나는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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