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와….”
시에나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황궁 역시 화려했지만 황궁 옆의 신전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벽돌로 만든 황궁과는 다르게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전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여기 와 본 건 처음인가?”
“수도에 와 본 적은 있는데, 황궁에 신전까지 와 본 건 처음이에요.”
“그렇군. 앞으로는 종종 와야 할 곳이니,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네?”
“그대가 데이몬과 결혼한다면 여기에 살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
공작은 짓궂게 말했다. 이미 데이몬과 시에나의 사이를 전부 알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시에나는 새삼 부끄러워졌다.
내가 황자비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미래에 시에나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공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를 타고 온지라 성문은 별다른 신원검사 없이 손쉽게 열렸다. 성문을 통과한 후에도 끝없이 긴 정원을 지나 황궁 앞에 다다른 마차가 이윽고 멈춰 섰다. 시에나는 데이몬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리며 다시금 감탄을 흘렸다.
“정원도 그렇고 황궁도 정말 예쁘네요….”
데이몬 역시 처음 보는 곳일 텐데 전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시에나가 수도의 공기에 떨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고 있었다.
“춥진 않아? 숄을 줄까?”
“으음, 공기가 좀 차갑긴 하네요. 북부의 기온이 훨씬 더 낮다고 들었는데, 유독 황궁은 좀 더 서늘한 것 같아요.”
“안되겠어. 목도리도 두르자.”
“어휴, 저 지금 입은 걸로도 충분해요.”
“안 돼. 낯선 곳에서 감기 들면 어떡해. 조금 전에 나올 때 몸 한번 떨었잖아.”
시에나가 따뜻한 마차에서 상대적으로 차가운 밖으로 나올 때 작게 몸을 떤 것 가지고 데이몬은 야단이었다. 데이몬은 기어이 그녀에게 숄과 제 목도리까지 둘둘 둘러 주었다. 옷 예닐곱 벌을 껴입어 거대한 눈사람이 된 시에나가 뒤뚱뒤뚱 황궁의 계단을 걸었다. 금으로 치장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궁이었지만, 어쩐지 서늘한 오한이 온몸을 감쌌다. 분위기 때문인 걸까.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황태자 전하.”
시종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데이몬과 시에나를 예리하게 훑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의 눈길에서 데이몬과 시에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황제께선 뭘 하고 계시지?”
“평소와 같이 바쁘게 정무를 보고 계십니다.”
“급히 알현을 요청한다 전하게.”
“하오나 폐하께서는 지금 바쁘셔서….”
“호오, 하나뿐인 동생을 못 볼 정도로 말인가?”
공작이 중간에 시종의 말을 끊고 불쾌함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그 서슬 퍼런 말투에 시종이 이내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말씀 전하겠습니다. 먼저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럴 게 아니라 그냥 같이 가지.”
“예?”
“오래 시간 끌 거 있나. 짧게 몇 마디만 하면 끝날 일이네.”
시종은 공작의 파격적인 말에 몹시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끼이익, 성의 문이 열렸다. 복도를 따라 주르륵 박아 넣은 마나석 전등은 낮에도 환하게 켜져 있었다. 끝이 없는 듯한 긴 복도에는 황가의 문양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들이 쭉 걸려 있었다. 검붉은 바탕에 금색 실로 수놓아진 황금 사자는 화려하면서도 근엄했다. 이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들었을까. 시에나가 혀를 내둘렀다.
황제의 집무실까지는 금방이었다. 집무실 밖에는 두 명의 기사가 앞을 지키고 있다가 공작과 황태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나?”
“예, 대신관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 늙은이가.”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신관을 싫어하는 티가 너무 나는 공작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시에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들어간 지는 얼마나 되었지?”
“한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럼 나오실 때도 되었군. 안에 들어가 반가운 손님이 왔다고 전하게.”
“예? 제, 제가 말입니까?”
“그럼 자네들이 들어가겠나?”
시종은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사들은 움찔하며 은근슬쩍 공작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 저희는 여기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서….”
“역시 그대가 들어가야겠군.”
공작이 시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종이 구원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기사들과 공작, 카이난, 시에나, 데이몬을 한 번씩 훑어보다가 결국 울상을 지으며 문을 두드렸다.
처음 보는 공작의 강압적인 면모에 놀라긴 하지만 시에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과연 알현을 허락하실까요?”
카이난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공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내가 이때 즈음 온다고 전령을 보내 놨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손님을 들인 건,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쿵, 안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토끼 눈을 뜨고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문 안쪽을 경계하며 시에나를 뒤로 물렸다. 이윽고 순식간에 눈두덩이가 시퍼레지고 광대가 새빨개진 시종이 나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우린 괜찮으니 여기서 계속 기다리겠다고 전하게.”
시에나는 순식간에 다친 시종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공작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그 말을 전한 걸로도 이렇게 맞았는데 안에 들어가서 그 말을 또 전하고 오라고? 그러나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종이 결국 어깨가 축 처져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쿵, 퍽.
문 안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에 시에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시에나, 내가 너무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시에나의 표정을 본 공작이 장난스레 물었다. 시에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의 솔직함에 카이난과 공작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 시종은 저래 보여도 귀족이야.”
“시종이… 귀족이에요?”
“그래. 신관이기도 하고.”
신관이자 귀족이자 시종이라고? 시에나는 더 알쏭달쏭해졌다.
“아마 베이나 자작가의 둘째 아들일 걸세.”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둘째 아들이나 셋째 아들은 보통 신관이 되거나 상인이 됩니다.”
설명이 불친절한 공작 대신 카이난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시에나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맞을 사람은 원래 저 사람이 아니었을 걸세. 대신관과 황제가 합작해 우릴 만나지 않으려 꾀를 쓴 게지. 그래서 일부러 강경하게 나온 거야.”
“그렇군요….”
그제야 시에나는 공작의 행동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양쪽 눈두덩이에 새파란 멍이 든 시종이 울먹거리며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어이쿠!
그런 시종을 밀치며 한 사람이 나왔다. 시종은 힘을 잃은 지푸라기처럼 픽 앞으로 넘어갔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노신관이 시종이 오물이라도 되듯 경멸하는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쯧.”
하등한 생물과 말을 섞는 것도 싫다는 듯 노신관은 걸음을 옮기려다 시에나와 눈이 마주쳤다. 노신관이 이내 시에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신관은 마치 뱀 같은 자였다. 금방이라도 그 얇은 입술 사이로 두 개의 갈라진 혀가 나올 것 같았다. 그 집요한 시선에 시에나가 뱀 앞에 놓인 희생양처럼 몸을 굳히고 있었다.
“눈알을 파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 보는 게 좋을 듯한데.”
데이몬이 살벌하게 협박해왔다. 흠칫 놀란 노신관이 시에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카이난과 흡사해 보이는 그 외양에 놀란 것도 잠시, 그가 인상을 훅 굳히고 말했다.
“평민들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 무례함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노신관은 데이몬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공작과 카이난이 험악하게 인상을 굳혔으나 데이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막 자란 만큼 막 나가기도 하지. 예를 들어 지엄한 황궁에서조차 음흉한 노인네 모가지를 비틀어 본다든가.”
데이몬이 이렇게까지 막 나갈 줄은 몰랐는지 노신관은 새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입술을 깨물고 걸음을 옮겼다.
“억!”
떠나기 전 시종의 옆구리를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를 정통으로 차인 시종이 컥컥거렸다. 시에나가 그런 시종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시종이 그 새 10년은 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공작이 이내 시종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찔러 주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어 고맙네.”
“벼, 별말씀을요. 좋은 대화 나누시기 바랍니다.”
손바닥 정도 되는 크기의 주머니 안에서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종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종은 머리를 굽신거리며 감사까지 표했다.
“시에나, 방을 안내해 줄 테니 그대는 쉬고 있는 게 좋겠군.”
“네? 아….”
시에나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제가 함께 들어가서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데이몬과 시에나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었다. 그게 걱정되었는지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말했다.
“그래, 시에나. 쉬고 있어.”
“데이몬도 같이 가서 좀 쉬는 게 어떤가? 필요할 때가 되면 부르겠네.”
“저는 쉬라고 안 해 주십니까?”
카이난이 살짝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다. 공작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 동생과 함께 대거리 해줄 사람 하나는 있어야지. 저 둘은 새로운 장소에 온 것만으로도 피곤할 테니 보내 주는 게 맞고.”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시종에게 방을 안내하라 말했다. 둘만 빠지는 게 못내 미안해 시에나가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후로는 정신없이 바쁠 테니 지금 쉬어 두는 게 나을 걸세.”
“네에….”
“쉴 틈이 거의 없을 거예요. 바로 저녁 연회를 위해 하녀들을 보낼 거니까.”
카이난의 말에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하녀요?”
“네. 오늘의 주인공은 둘이잖아요. 데이몬도 그렇고 시에나도 간단하게라도 갖춰 입는 게 좋으니까요. 그러니 마음 놓고 잠깐이라도 쉬고 와요.”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시에나와 데이몬은 둘과 헤어져 앞서 걷기 시작한 시종의 뒤를 따랐다. 데이몬이라면 몰라도, 시에나까지 연회의 주인공이 된다고? 갑자기 부담스러움에 배가 살살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시에나, 어디 아파?”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의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물어왔다. 시에나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연회의 주인공이 저희라는 거, 그냥 하는 말씀이시겠죠?”
“글쎄, 왜?”
“아아. 좀… 피곤해서요.”
“마차를 오래 탔으니 당연히 피곤할 거야.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건강이 가장 중요해.”
데이몬의 다정한 말이 시에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대로 넘어가 버리면 편하겠지만 이대로 가면 데이몬이 혼자 남아 그 적대적인 시선을 사람들에게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자리는 부담스러웠지만 데이몬만 혼자 남겨 두고 싶진 않았다. 결심한 시에나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좀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무리하진 말고.”
“네.”
다정한 둘의 대화에 시종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그래.”
“고마워요.”
시에나는 감사를 표했지만 시종이 안면몰수를 하고 그들 사이를 휙 지나가 버렸다. 무례한 행동에 데이몬이 눈썹을 꿈틀댔지만 시에나가 말렸다.
“저 피곤해요, 이만 쉬고 싶어요.”
“…알았어.”
“그럼 좀 이따 봬요.”
“응.”
시에나는 애교 있게 웃으며 방 안으로 쓱 들어갔다.
“와아….”
방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열 명 정도는 너끈히 생활할 수 있을 법한 넓은 방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는 베이지색과 분홍색이 섞인 태피스트리가 깔려 있었고, 벽지와 커튼은 전부 부드러운 산호색이었다. 화장대와 의자, 간이 테이블은 전부 흰색으로 통일성을 주어 고풍스럽다기보다는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흰색 바탕에 분홍색 수가 놓인 침대에 털썩 누운 시에나가 핑크색 원사를 쓴 망사 캐노피를 보며 감탄했다. 그야말로 공주님이 쓸 법한 방이었다.
“푹신푹신해….”
매트리스는 꼭 물로 채운 것처럼 말캉거렸다. 그게 기분 좋아 널찍한 침대에서 혼자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이내 똑똑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하녀입니다. 카이난 황자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시에나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카락도 원래대로 가라앉힌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요.”
시에나의 말에 예닐곱 명의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들어와 시에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들어온 하녀 둘은 욕조를 들고 있었고, 나머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통을 들고 있었다. 목욕 시중부터 시작하는 건가.
황궁 하녀들과의 첫 만남을 알몸으로 시작하게 된 시에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맨몸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움이 앞섰다. 시에나가 난감해하면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혼자 목욕할 수 있는데요.”
“갑작스러운 연회라 빠르게 움직여야 해서요.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의견은 이내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하녀에게 묵살 당했다. 하녀 두셋이 달라붙어 시에나의 겨울옷을 벗겼다. 그 사이 나머지 하녀들은 욕조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된 시에나가 당황하고 있는 새에 하녀가 욕조에 손을 담가 물 온도를 확인하더니 이내 속옷도 마저 벗겨 내었다. 너무나 속전속결이었다.
“꺄…!”
“추우실 테니 어서 들어가세요. 씻으신 뒤 마사지도 바로 해 드릴게요. 장미향 입욕제를 넣을까 하는데 혹시 싫어하시는 향이시면 말씀해 주세요.”
“…좋아해요.”
욕조에 들어간 시에나의 반쯤 포기한 듯한 말투에 하녀의 눈이 처음으로 부드럽게 풀어졌다. 장미향 입욕제를 넣자 거품이 몽글몽글 솟아나 다행히 민망함이 조금 덜했다.
바쁘다고 한 하녀의 말이 맞는지 시에나의 목욕은 향을 즐겨 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끝났다. 이내 마사지대 위에 누운 시에나의 위에 오일이 아낌없이 쏟아졌다. 입욕제와 같은 향긋한 장미 향이 나는 오일은 체온에 가까운 온도로 데워져서 따끈따끈했다.
“피부 결이 좋으세요. 평소에 관리를 아주 잘하시나 봐요.”
시에나의 어깨와 등을 마사지하며 하녀가 물었다. 뭉친 곳에서 간헐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에 인상을 찡그린 시에나가 겨우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겨울이니까 보습은… 하고 있어요. 그런데, 윽. 좀 아픈데요.”
“어깨가 많이 뭉치셔서 그래요. 거의 기사님들 마사지할 때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귀부인께서 이렇게 단단하게 뭉치신 건 처음 봐요.”
아무래도 영지를 시찰한다거나 집무를 보는 일로 피로가 쌓여 그런 것 같았다. 시에나가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깨가 끝나고 상대적으로 덜 뭉친 허리 쪽으로 가자 그제야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녀가 마사지하는 새 다른 하녀 하나가 시에나의 허리 쪽에 오일을 듬뿍 짜서 흘렸다. 오일의 익숙한 향에 시에나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수더분한 인상의 하녀 하나가 그런 시에나의 행동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향이 좋지요? 록사나의 장미 오일이랍니다. 저도 제일 좋아하는 향이에요.”
“네, 정말 좋아요.”
시에나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그 이유가 있었다. 이 오일은 시에나가 만든 거니까.
“록사나에서 나온 오일은 전부 향이 좋아요. 천연 제품이라 안전하기도 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향은 베르가모트랑 나무딸기 향이에요.”
“맞아요. 저는 레몬과 체리 향이 좋더라고요.”
수다스러운 하녀들이 새가 지저귀듯 시에나에게 말했다. 시에나는 민망함에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시에나가 이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자 눈을 새치름하게 뜬 하녀가 그들에게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위에 시에나가 물었다.
“록사나가 제법 유명한가 봐요.”
그와 동시에 잠시 하녀들의 손이 멈추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 그들의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시에나가 걱정하고 있는데 하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으음, 귀부인께서는 멀리서 오셨나요?”
하녀는 대답 대신 시에나의 신원을 물었다. 무시하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에 시에나가 얌전히 수긍했다.
“네에, 북부에서 왔어요.”
“멀리서 오셨으니 잘 모르실 수도 있지요. 록사나는 오일뿐만 아니라 화장품이나 롤온 같은 상품을 만드는 걸로도 유명해요. 상품들도 전부 질이 좋고요.”
“저번에 제 남동생도 페퍼민트 롤온을 바르고 시험을 엄청 잘 봤어요. 코에 대고 있으면 막힌 코도 뻥 뚫리고요. 엄청 좋아요!”
“귀족분들이 쓸 수 있는 것 말고도 평민용도 만들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분명 마음씨만큼 얼굴도 고운 영애일 거예요.”
하녀들이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시에나는 잠시나마 간질거렸던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다. 그들의 환상을 지켜 주고 싶었다.
민망함은 그대로라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에나가 고개를 묻은 채 한동안 말이 없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하녀들이 시에나의 몸을 주무르며 작은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난 페퍼민트 롤온보다는 오일이 좋더라. 값도 싼데 질이 좋잖아.”
“나는 오일보다는 마법의 약초로 만든 크림이 좋아. 그거 바르고 얽은 흉터도 싹 사라졌잖아.”
마법의 약초? 혹시 센텔라를 말하는 건가. 여드름에 특효약인 센텔라가 수도의 하녀들 사이에도 제법 입소문을 탄 모양이었다. 그들이 약초에 대해 지식이 많을 리는 없으니 센텔라가 마법의 약초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바르기만 했는데 흉이 사라지고 피부가 좋아지니 얼마나 마법처럼 보였을까.
“나는 미백 효과가 있는 크림! 그거 바르고 얼굴이 완전 하얘졌어.”
“그래도 우리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건 역시 버터 향 보습 크림이야. 단점이라곤 냄새가 너무 맛있게 나서 가끔 손등을 핥아 먹고 싶다는 거지.”
“그건 네가 너무 식욕이 좋아서 그래.”
“뭐야?”
시에나가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시에나를 마사지 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던 새치름한 얼굴의 하녀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한 건 약을 만든다는 거지.”
“아, 맞아. 약.”
“그건 진짜 인정해야 한다.”
이게 낫네 저게 낫네 이야기하던 하녀들이 순식간에 전부 납득했다.
“록사나의 약이 괜찮은가요?”
시에나는 잠에서 깨어난 척 작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궁금했던 물음을 던졌다. 아직까지 시에나와 같이 약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전과 적을 지게 되는 리스크가 있는 반면에 얻을 수 있는 수익은 극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시에나는 의도치 않은 독과점을 하게 되어 사람들이 제 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기가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어설픈 연기와 민망함을 무릅쓰고 물어보게 되었다.
“그럼요. 물론 귀족분들이야 신전의 약을 쓰시니 댈 것은 아니겠지만 꽤 효과가 좋답니다.”
“제 남동생도 어릴 때 록사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걔는 칠칠치 못해서 여기저기 많이 다쳤었거든요. 록사나 약 덕분에 흉터 하나 없이 싹 나았죠.”
“저희 할머니도 무릎이 항상 아프신데 약을 드시고는 훨씬 좋아지셨어요. 10년 전보다 더 정정해지신 것 같아요.”
“그냥… 평민이라면 대부분 록사나가 은인이나 마찬가지죠.”
“그렇군요….”
하녀들의 말을 듣자니 괜히 시에나의 코끝이 찡해졌다. 시에나의 말이 사라지자 하녀들이 무언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 시에나의 눈치를 보았다. 하녀들 중 하나가 주눅 든 표정으로 말을 꺼내었다.
“저어,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네?”
시에나는 갑작스러운 사과에 어안이 벙벙했다.
“록사나 이야기를 꺼내어 괜히 귀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아서요.”
“네에? 당치도 않아요! 그냥 저는 그저… 록사나가 예상보다 인기가 좋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시에나의 반박에 하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난 하녀 하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시에나를 조심스러워 하는 한편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 보아 이 하녀들은 황태자의 사람들인 듯 보였다. 시에나는 새삼 제 사람들을 내어 준 황태자에게 감사했다.
“다행이에요. 귀족분들 사이에는 록사나를 싫어하시는 분도 계시거든요.”
“귀족 영애분들은 대부분 좋아하시지만요.”
“네에, 저도 록사나를 좋아해요.”
친신전파인 귀족들 중에서는 록사나를 배척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화장품 부분에서 워낙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다 롤온과 같은 상품은 자녀를 두고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강한 지지를 받고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시에나는 팔 아래로 얼굴을 묻었다. 괜스레 얼굴이 뜨겁고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마사지를 끝내고 잠시 목욕 가운을 입은 채 쉬고 있던 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에나가 흠칫 긴장하며 목욕 가운을 여몄다.
“안녕하세요, 카이난 황자님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들어가도 될까요?”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낭랑한 목소리에 시에나가 경계를 풀었다.
“네, 들어오세요.”
시에나의 수긍에 문을 열고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를 바라본 시에나의 눈이 커졌다. 은색 머리에 시에나만큼이나 새파란 눈. 조막만 한 얼굴에 세밀한 붓으로 이목구비를 그려 낸 듯한 느낌의 여자였다. 시에나는 처음 보지만 그녀에게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놀라워하는 시에나를 보며 여자가 부드럽게 눈을 접었다.
“안녕하세요, 엘리샤라고 해요. 반가워요, 시에나.”
* * *
달칵, 오랜 기다림 끝에 시에나의 방문이 열렸다. 데이몬은 진작 준비를 끝내고 그 앞에서 목 빠지게 시에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서 기다리는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가 살짝 놀라 그를 불렀다.
“도련님.”
“시에….”
데이몬은 반갑게 외친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마악 드레스를 입은 시에나가 어색하게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한가요?”
“아, 아니….”
데이몬이 입술을 깨물며 마른세수를 했다. 커다란 손 사이로 슬쩍 보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녀들이 그 모습을 보며 뒤에서 작게 키득댔다. 시에나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데이몬이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정말… 예뻐.”
시에나가 데이몬의 말에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데이몬의 얼굴이 농익은 토마토처럼 더 달아올랐음은 물론이었다. 석양에 비친 시에나의 모습은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시에나는 어깨가 트여 있고 허리 밑으로 치마가 넓게 퍼진 디자인의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빛을 받으면 푸른색으로 빛나는 드레스에는 가슴 부분부터 허벅지까지 장미와 국화 등 각종 꽃이 흐드러지게 수 놓여 있었다. 종아리 부분부터는 풍성한 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레이스 사이사이에서는 섬세하게 수놓은 금사가 반짝였다.
“준비가 갑작스러워 제 드레스를 가져왔어요. 사이즈가 비슷해서 다행이에요.”
시에나는 시치미를 뚝 떼는 엘리샤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엘리샤는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며 살짝 윙크했다. 사이즈는 안 맞을 수가 없었다. 엘리샤가 그렇게 방에 들어오고 장정 여럿이 드레스와 구두, 모자, 목걸이 등의 물건을 이고 들어왔다. 지옥의 시작이었다.
시에나는 엘리샤가 데뷔탕트를 치른 열여섯 살 때부터 입어 온 모든 드레스를 한 번씩 입어 봐야 했다. 겨울이라 망정이지 여름이었으면 땀을 너무 흘려 탈진했을 것이다. 적당히 하고 싶은데 시에나보다 입고 벗는 걸 돕는 하녀들과 엘리샤가 더 고생하는 걸 알기에 시에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조용히 드레스를 입는 수밖에 없었다. 스물다섯 번째에 입어 본 이 드레스가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구두와 액세서리 지옥이었다.
시에나는 눈앞에 펼쳐진 화려하고 번쩍번쩍한 보석의 산을 보며 혹 엘리샤가 제집에 있는 모든 보석을 싹 다 털어 온 건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 그런 시에나의 마음을 읽은 듯 이 보석들은 전부 제 것이며 카이난이 선물해 준 것이라 했다.
까마귀도 아니고 길 가다가 예쁜 게 보이면 그 좌판에 있는 걸 몽땅 사 버리지 뭐예요, 황태자를 귀엽게 흉보는 엘리샤의 말이 너무 공감이 가서 시에나는 지친 와중에도 살풋 웃었다. 데이몬과 완전히 똑같은 행동이 아닌가. 새삼 카이난이 데이몬과 한 핏줄이라는 게 느껴졌다.
수없이 구두를 신고 액세서리를 착용하며 점점 지쳐 가는 시에나와는 달리 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점점 생기가 돌았다.
시에나는 하얀 도화지 같은 사람이었다. 아주 작은 장신구 하나에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화사한 루비 목걸이를 했을 때에는 5월의 장미처럼 물을 함빡 머금은 장미 같았고, 차분한 페리도트를 사용할 때에는 고아한 숙녀 같아 보였다.
시에나는 수많은 액세서리를 착용해본 끝에 푸른 벨벳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군청색을 띤 물방울무늬 목걸이와 팔찌를 차게 되었다. 시에나는 아이작이 준 반지를 고민하다 잠시 빼 두었다.
아이작이 준 반지는 심플한 스타일의 은반지였는데, 평소라면 모를까 오늘 같은 화려한 복장을 한 날에는 좀 어울리지 않았다.
브레이슬릿도 뺄까 하다가 그건 그만두었다. 예전에 여신을 기리는 축제에서 연극에 참여해 준 보답으로 주디스에게 받았던 팔찌였다. 손목을 둘러싼 얇은 금색 링 안에 고대어가 쓰여 있었는데, 아이작은 그 팔찌가 생각보다 귀한 물건이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팔찌에서는 종종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부담스럽거나 거북한 힘은 아니고 엄마의 품 같은 포근한 느낌이라 시에나는 한시도 그 팔찌를 빼놓지 않았다. 6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 낡은 팔찌만 하고 다니니 데이몬이 질투하면서 한동안 팔찌만 선물했던 때도 있었지만, 시에나는 고집스레 그 팔찌를 끼고 다녔다. 결국 데이몬은 포기했고, 시에나는 마음 놓고 그 팔찌를 끼고 다닐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거의 한 몸 같이 느껴지는 팔찌였다.
“데이몬도 오늘 멋져요.”
“…나?”
“네. 진짜 진짜 멋져요.”
심플한 검은 셔츠와 바지 위에 도톰한 털로 만들어진 망토를 두른 데이몬의 모습은 정말로 근사했다. 얼굴이 화려하게 생겨서 그런지 데이몬은 심플한 스타일이 잘 어울렸다. 데이몬이 쑥스러워하면서도 시에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앞으로 자주 입고 다닐게.”
“응? 아니에요. 이런 건 가끔이면 돼요.”
시에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렇게 꾸미는 데 오랜 공을 들이는 건 일 년에 한두 번이면 족했다. 언뜻 보면 심플한 옷차림이지만 데이몬 역시 평소와는 달리 누군가 사력을 다해 꾸며 준 티가 났다. 저 복도 너머로 카이난과 공작이 다가왔다.
“벌써 나와 있었군.”
시에나가 그들에게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공작은 시에나를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에나, 못 알아볼 뻔했어. 오늘 정말 예쁘군.”
“감사합니다, 공작님. 다 여기 있는 엘리샤 님 덕분이에요.”
시에나가 엘리샤를 치켜세우자 카이난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워낙 본판이 좋아 꾸미는 재미가 있었어요.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시에나. 삼 일 밤낮 드레스만 입어도 즐거울 것 같아요.”
보물섬을 발견한 소년처럼 눈을 빛내는 엘리샤를 보며 시에나는 그녀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응, 절대 가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많이 지쳐 보여, 시에나. 괜찮아?”
“아아, 네. 괜찮아요. 좀 배가 고파서 그런가 봐요.”
“연회장으로 가서 뭘 좀 먹는 게 좋겠어. 이제 출발하죠.”
“네. 가요.”
공작의 뒤로 엘리샤의 손을 잡은 카이난이 앞섰다. 아찔한 힐을 신고도 잘 걸어가는 엘리샤와는 달리 시에나는 구두가 익숙지 않아 자연스레 뒤처지게 되었다. 그런 시에나를 위해 데이몬이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시에나, 혹시 어디 불편해?”
“으음, 매일 편한 신만 신다가 갑자기 굽 있는 구두를 신으니 좀 어색하네요.”
“단화로 갈아 신고 갈래? 아니면 연회장에서 먼저 먹고 있으면 내가 가져다줄게.”
금방이라도 시에나의 방에 들어가 단화를 가져올 기세에 시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엘리샤 님이 사력을 다해 골라 주신 신발인걸요. 그리고… 시선이 조금 올라가니까 도련님을 볼 때 색다른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윽.”
시에나가 손을 들어 데이몬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접촉에 데이몬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슬쩍 내린 시선 끝에 데이몬의 중앙이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시에나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아챈 데이몬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시에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혹시 제가 방금 쓰다듬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상태였어. 네가 너무 예뻐서.”
세상에. 혹시나 들킬까 봐 시에나는 저가 더 전전긍긍했다. 데이몬이 쓴웃음을 지으며 망토를 제 몸에 둘둘 둘렀다.
“너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가라앉혀 볼게. 별로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눈동자에는 욕망이 우글우글했다. 시에나가 허락만 한다면 이 신성한 황궁 복도에서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시에나는 그 뜨거운 시선을 모른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은 갑작스레 소환된 귀족들로 가득했다. 시에나는 너무 긴장해서 잘 몰랐지만 꾸밀 시간이 부족했기에 귀족들의 차림새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하나씩 흐트러진 부분이 있었다. 모자 위에 달린 수많은 깃털 중 꺾인 깃털이 하나쯤 있다든가, 단추 하나가 풀려 있다든가 하는 작은 부분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그들에게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시에나는 제 몸이 그 시선에 샅샅이 분해당하는 느낌에 작게 몸을 떨었다.
“긴장 풀어, 시에나. 괜찮아.”
“네에….”
시에나가 긴장한 걸 느낀 데이몬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귀족들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데이몬의 흉흉한 기세에 단박에 흩어졌다. 꾸미는 도중 황제가 데이몬을 황자로 인정하기로 한 사실을 전달받았지만 걱정되는 건 여전했다.
귀족들은 알음알음 데이몬이 그런 신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신탁을 받은 저주받은 황자를 귀족들은 달갑게 보지 않을 것이다.
떨어져 나간 듯했던 시선은 그들이 자리에 앉은 후에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데이몬이 선득하게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그때뿐, 다시금 시선들이 몰래 따라붙었다. 따끔따끔한 그들의 시선에 시에나는 자리에 앉아서도 앞에 놓인 수프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한 스푼을 뜰 때마다 수십 개의 시선이 쏟아지는 통에 시에나는 결국 스푼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하도 부담스러워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와,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아.’
부담스러운 한편 데이몬을 혼자 두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무심하고 무던한 데이몬이긴 했지만, 혼자 연회에 참여했다 해도 적대적인 시선과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여기에서 분명 편치 않았을 터였다.
“황제 폐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시종의 말과 동시에 뿌우우, 뿔피리가 울렸다.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이했다. 시에나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직한 걸음걸이가 연회장을 울렸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갑작스럽게 불렀음에도 이렇게나 많이 자리를 밝혀 주어 고맙군.”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좌중을 훑은 황제의 시선이 데이몬과 시에나에게 멈추어 섰다. 시에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금안과 마주치자 시에나가 숨을 들이켰다. 공작과는 달리 그는 생각보다 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황제보다 오히려 공작이 더 데이몬과 닮아 있었다. 시에나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 역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오랫동안 앓고 있었던 데이몬 황자의 병이 나아 그것을 축하하기 위함일세.”
데이몬이 지금까지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모두 병 때문인 걸로 결론을 냈다. 6년 내내 건강하게 아카데미에 다닌 데이몬이었기에 아팠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제국에 단 한 명뿐인 황제였다. 흰 빵을 두고 검은 빵이라고 하면 모두가 검은 빵으로 불러야 하는 것처럼 귀족들은 그 상황에서 가타부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이리 오렴, 데이몬.”
황제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데이몬은 그런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에나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인 뒤 그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데이몬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건강해져 짐은 몹시 정말 기쁘구나. 앞으로도 쭉 건강하여 이 제국에 이바지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 둘 사이에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호칭도, 애정도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냉기가 뚝뚝 흐르는 그 만남에도 귀족들은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황자님.”
시에나 역시 손뼉을 치면서도 그들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정식 즉위식은 일주일 이내로 하려고 하네. 그때에도 많이 와 주었으면 좋겠군. 이상, 연회를 즐기도록.”
그 말과 동시에 황제는 미련 없이 뒤돌아 성큼성큼 연회장을 떠났다. 혼자 남은 데이몬은 민망해질 만도 하건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에나에게 돌아갔다. 시에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몬을 맞이했다.
“고생하셨어요.”
“고마워.”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이 씩 웃었다. 짧게 끝나긴 했지만 어쨌든 데이몬은 황자로 인정받았다. 어깨에 무거운 짐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도 데이몬은 의연했다. 잠시 멈추었던 음악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시에나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시에나, 괜찮아?”
“으음, 제가 좀 긴장했었나 봐요. 죄송해요.”
“죄송할 게 아니지. 힘들면 같이 돌아갈까? 아니면 의원을 부르는 게 좋을까?”
“아아뇨, 괜찮아요. 그냥 긴장이 풀린 것뿐이에요. 그리고 오늘은 도련님이 주인공인데 저 혼자면 몰라도 어떻게 빠져요.”
“상관없어. 그리고 황궁을 혼자 돌아다니지 마, 별로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아.”
“네에… 그럴게요.”
고위 귀족들조차 꼼꼼하게 몸수색을 하고 아무나 날붙이를 가져오지 못하는 황궁이지만 시에나 역시 이곳이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끝없이 늘어진 복도를 걷고 있자면 꼭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급스러운 음식이 눈앞에 천지였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시선에 물조차 마음껏 마실 수 없었다. 마르바스 영지로 돌아가 빵에 치즈를 발라 먹으며 염소젖이나 실컷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데이몬 황자님.”
“오랜만입니다, 황자님! 황자님과 같이 아카데미에 다녔는데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저 역시 해밀턴 아카데미를 26년 전에 다닌 바가 있습니다. 황자님과는 어찌 보면 동문인 셈이지요.”
쭈뼛거리며 사람들 몇몇이 데이몬에게 다가왔다. 갖은 이유를 대며 귀족들이 데이몬과 친해지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귀찮은 표정이 역력해 보이는 데이몬에게 시에나가 살짝 속삭였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가 보세요. 저는 엘리샤 영애랑 이야기 좀 나누고 있을게요.”
“어…?”
시에나가 저를 밀어내자 데이몬의 눈이 커졌다. 금세 풀죽은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원망스레 시에나를 바라보는 데이몬에게 엘리샤가 그녀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래요, 황자님. 여긴 전부 황자님이 궁금한 사람투성이예요. 시에나는 카이난 님과 제가 잘 돌보고 있을 테니 사람들 궁금증 좀 풀어 주세요.”
“그래, 데이몬. 너무 짧게 끝났으니 함께 가서 소개하는 자리를 만드는 게 좋겠군.”
공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몬을 이끌었다. 그러다 보니 데이몬도 어쩔 수 없이 시에나를 두고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못내 시에나가 눈에 밟히는지 계속해서 뒤돌아보는 데이몬에게 그녀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결국 데이몬은 보이지 않는 꼬리가 축 처져 공작의 뒤를 따랐다.
“데이몬 황자님이 시에나를 정말 사랑하나 봐요.”
엘리샤가 살며시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시에나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과보호인 면이 없잖아 있지만요.”
“카이난 님도 그래요. 여름에 저한테 다가오는 벌레를 죽이시겠다고 마법을 배우셨는걸요.”
엘리샤가 카이난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눈앞에서 약혼녀가 제 앞담화를 하는데도 카이난은 마냥 좋은지 사람 좋게 웃었다.
“네 피부가 벌레에 물려 조금이라도 빨갛게 물들어 버리면 내 심장이 아파오는걸.”
“정말, 유난이세요.”
그러면서도 엘리샤는 그런 카이난에게 부드럽게 웃었다.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둘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시에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 저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레이디와 춤을 출 수 있을까요?”
어린 티가 아직 남아 있는 영식 하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시에나에게 다가왔다. 시에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저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 요?”
“예. 영애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아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 제 실력이 미천해 함께 춤을 추기에는 영식께 폐가 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완곡한 거절에 영식은 얼굴을 더 새빨갛게 붉히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시 레이디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 헉.”
영식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강렬한 살기가 어린 영식의 뒤통수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사흘 밤낮을 굶어 사나워진 맹수를 마주한 것 같은 진득한 살기에 영식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위에서 그를 노려보는 데이몬이 있었다. 데이몬이 눈썹을 세운 채 가엾은 영식을 바라보며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꺼져.’
“시, 실례했습니다!”
사람 셋은 단숨에 죽일 듯한 그 강렬한 시선에 영식은 허겁지겁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장면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엘리샤와 카이난이 동시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시에나만 이 상황이 민망해 괜스레 귀 끝을 붉혔다. 그런 시에나를 보며 엘리샤가 결국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시에나 너무 귀여워요. 내가 남자였어도 데이몬 황자님 몰래 데이트 신청 한 번쯤은 했을 것 같아요.”
“하하….”
“다행히 저는 여자니까 당당히 데이트 신청해야겠어요. 수도에 머무는 동안 저한테 시간 한번 꼭 내줘요.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제가 수도 구경시켜 줄게요.”
“네, 그럴게요.”
저를 고생시키긴 했어도 최선을 다해 꾸며 준 엘리샤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이 영애는 새침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털털한 데다 시에나를 몹시 귀여워했다. 작은 소동물처럼 여겨진다는 느낌을 버릴 수는 없었지만, 예쁜 여자가 저를 좋아해 준다는 사실이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수도에 머무는 동안 한 번쯤은 정식으로 인사해야겠다고 시에나가 생각했다. 그런 시에나를 귀엽게 바라보던 엘리샤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카이난에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 사람이 꽤 많이 오긴 했네요.”
“음. 아무래도 친황제파에 공작파에 황태자파까지 다 모인 자리니.”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단숨에 씹어 삼킨 뒤 카이난이 답했다.
“아하, 공작 각하와 카이난 님이 부르셨군요?”
“그래. 오기 전부터 아예 초대장을 보내 놓았어. 거기에 대해 부담을 느낀 아버지가 급히 친황제파 귀족들을 소환한 거고. 너무 급히 부르는 바람에 많이 오지 않아 금방 자리를 뜨셨지만.”
공작과 카이난은 아주 작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그들의 행동이 귀엽기도 했지만 감사한 마음이 컸다.
“이런 말을 제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감사해요. 카이난 전하.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도련님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제가 감사해야죠. 데이몬의 마음을 돌려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맞아요. 저도 자리에는 안 계시지만 시에나를 알게 해 준 데이몬 님께 감사드려야겠어요.”
뜻밖의 감사 파티에 셋이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떠들다 보니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음식이 한결 편하게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포도주를 따르려 엘리샤가 술병에 손을 뻗자 카이난이 먼저 선수를 쳤다. 엘리샤의 은잔에 붉은 포도주가 채워졌다.
“시에나, 시에나도 한잔하겠어요?”
“저요? 으음. 네, 그럼 저도 딱 한 잔만 마실게요.”
카이난이 시에나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시에나 역시 카이난의 잔을 채웠다. 차란, 은잔이 경쾌하게 부딪치고 시에나가 포도주를 꿀꺽꿀꺽 넘겼다.
“와, 달콤하고 맛있어요.”
“그렇죠? 황궁의 포도주는 맛있기로 유명해요. 아무래도 한 해의 최고의 포도만 수확해서 만드는 거니까요.”
검붉은 포도주에서는 포도 특유의 쌉쌀한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달콤하면서도 깊은 맛에 시에나가 감탄했다. 빵 한 입 먹고 포도주 마시고, 고기 한 점 먹고 포도주 마시는 식으로 연신 들이켜다 보니 어느새 은잔이 텅 비었다. 이번엔 엘리샤가 손수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어깨를 훤히 드러내는 바람에 살짝 춥게 느껴졌던 몸이 술기운에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런 시에나에게 시선이 느껴졌다. 시에나에게는 이미 익숙한 시선이었다. 시에나가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데이몬이 멀리서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심기가 불편해 보이겠지만 그를 오래 봐 온 시에나로서는 저 모습이 주인에게 가고 싶어 끙끙대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시에나가 그를 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데이몬의 키가 큰 덕분이었다. 데이몬은 수십 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홀로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따라 유난히 데이몬이 빛나 보였다.
정말 자알 생겼다. 저 사람이 내 사람이라니.
시에나가 괜스레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댔다. 취기가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데이몬에게 헤실 웃어 보이자 그가 갑작스러운 그녀의 애교에 콜록, 헛기침을 하며 망토를 여며 하반신을 가렸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시에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휴, 정말 못 말린다니까.
* * *
“황자 전하께서는 사냥을 즐기십니까? 제가 아는 좋은 사냥터가 있는데 언제 한번….”
“동물 사냥은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몬스터 토벌은 좋아하지만요.”
“오, 어떤 몬스터를 사냥해 보셨습니까? 저는 예전에 리자드맨을 사냥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은 실력이 미천합니다. 반룡 한 마리도 겨우 잡을 수 있을 정도여서요.”
드레곤과 가장 가깝다는 반룡을 사냥했다는 이야기를 무슨 동네 뒷산에서 토끼 잡았다는 듯 말하는 데이몬에게 귀족들은 입을 떡 벌렸다. 어린 것이 허세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라붙는 스타일의 옷 아래로 빈틈없이 짜인 근육이 언뜻언뜻 비칠 때마다 완전 거짓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데이몬은 그에게 쏟아지는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면서도 끈덕지게 시에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샤와 카이난은 아카데미에서도 소문난 주당이었다. 심지어 엘리샤는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이래로 아카데미에서 술 내기를 해서 져 본 적이 없는 술꾼 중의 술꾼이었다. 연인끼리는 닮는다더니 카이난 역시 엘리샤를 사귄 뒤 점심시간에도 심심치 않게 술을 마시고 수업에 들어갔다. 물론 전혀 취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야 그들이 취해서 바닥에 엎어져 자든 술집에서 밤을 새우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시에나는 달랐다. 저 술꾼들 사이에서 기분 좋은 듯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엘리샤는 말리기는커녕 그런 시에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사자 둘에게 토끼를 맡긴 격이었다.
평소 음주를 적절히 조절하는 시에나지만 두 주당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일반인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나는 황태자에 하나는 귀족이니 시에나로서는 거절하기도 힘들었을 테고. 저 치들은 어쩌자고 저렇게 술을 많이 먹인 건지! 데이몬에게도 아주 가끔씩만 보여 주는 무방비한 미소에 둘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힐끔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50명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 위에 놓인 포도주를 전부 마셔도 취하지 않을 그들이 알아서 시에나를 지키겠지만, 가만히 여기 있자니 오늘 시에나가 빌어먹게 예뻤다. 시에나야 언제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처음 봤을 때에는 정말이지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훤히 드러난 목과 쇄골에 제 입술로 도장을 찍어 내 거라고 표시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진작 표시를 해서 연회장에 데려왔어야 했다. 데이몬이 아까 시에나에게 관심을 가졌던 영식을 생각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의 얼굴은 기억해 두었으니 후에 필히 조치를 취할 예정이었다.
시에나가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으며 발을 통통 굴렀다. 배시시 웃는 그 모습에 아랫도리가 저절로 뻐근해져 왔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몄음에도 불구하고 언뜻언뜻 보이는 말간 표정이 데이몬의 음심을 자극했다.
아아, 안 되겠다.
“말씀 중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데이몬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시에나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지금까지 숙부와 형이 고생한 걸 모르는 바는 아니나 취한 시에나를 앞에 두고 이 정도면 많이 참은 셈이었다. 시에나는 술에 취해 마냥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제게 찾아온 데이몬을 시에나가 아무 경계심 없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 도련니임….”
젠장, 돌아 버리겠군.
“많이 취한 것 같아. 이만 들어가자, 시에나.”
시에나는 이 자리를 뜨기 영 아쉬운지 술병에 눈길을 주었다.
“그치만,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그래. 데이몬, 식사도 많이 못 했는데 앉아서 좀 더 먹고 가.”
“아니요. 충분합니다. 시에나, 그럼 그것도 들고 가자.”
“아…!”
그와 동시에 데이몬이 시에나를 일으켜 안았다. 한 손으로 시에나를 안고 한 손에는 술병을 들자 좌중이 잠시 술렁였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시에나가 작게 발버둥 쳤지만 데이몬은 전혀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연회장을 나섰다. 공중에 뜨는 바람에 신데렐라처럼 구두 한 짝이 벗겨졌지만 데이몬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시에나가 저 기괴하게 높은 신발을 신지 않았으면 했다. 여린 허리를 더 꽉 조인 코르셋도 혐오스러웠다. 오늘 시에나는 정말 예뻤지만, 개인적으로 시에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때가 가장 예뻤다.
덜컹. 문을 열자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그대들은 이만 나가 봐도 좋네.”
“예, 알겠습니다.”
데이몬의 기백에 눌린 하녀들이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시에나를 조심스레 침대에 뉘이고 보자 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데이몬을 보고 있었다.
“…왜?”
“더 마시고 싶었단 말이에요.”
“거기서 더 마시면 연회장에서 그대로 잠들겠던데.”
“아니에요. 그렇게 취하지 않았다구요… 봐요. 멀쩡하잖아요.”
평소와 다르게 말을 늘이는 시에나의 말투에서 데이몬은 그녀가 잔뜩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옮겼다.
“읍…!”
시에나의 입 안을 침범한 데이몬이 거칠게 그녀의 입 안을 훑었다. 데이몬이 하도 세차게 몰아치는 탓에 시에나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데이몬에게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한계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술을 마셔서일까, 데이몬의 입맞춤 때문일까. 공중에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과 함께 몸의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으응…!”
시에나가 제 몸이 이상해지는 기분에 데이몬의 가슴을 콩콩 치며 밀쳤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데이몬을 받아들이느라 한껏 벌려진 입 사이로 한줄기 타액이 흘렀다. 좋게 말하면 격렬하고, 나쁘게 말하면 천박한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그 입맞춤에 속절없이 젖기 시작했다.
“하으… 응… 으… 흐으…!”
데이몬은 그 뒤에도 한참이나 시에나와 입을 맞추다 호흡 곤란이 오기 직전에야 떨어져 나갔다. 데이몬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시에나가 헉헉대며 부족한 산소를 들이켰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지도 않고 말했다.
“멀쩡하다니 정말 다행이야. 부디 그 정신이 오래갔으면 좋겠는걸.”
데이몬과 맞닿은 하반신이 묵직하고 뜨거웠다. 시에나는 아찔할 정도로 색기를 뿜어 대는 남자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말을 좀 잘못한 것 같아요….”
“늦었어.”
그렇게 말한 데이몬이 순식간에 시에나의 풍성한 치맛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흑-!”
데이몬은 익숙한 듯 속옷을 옆으로 밀고 시에나의 가장 은밀한 곳을 벌린 뒤 혀를 대었다. 밖에는 여전히 하녀들이 대기 중일지도 모른다. 시에나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겨우 입으로 내리눌렀다. 그러나 데이몬은 시에나의 사정에 전혀 개의치 않고 속을 파고들어 그녀의 꿀을 빨아들였다. 분명 창피하고 수치스러운데도 낯선 장소에서 야한 짓을 한다는 게 이상하게도 시에나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도, 도련님. 흣, 씻어야 해요….”
시에나가 아래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감각에 몸을 비비 꼬며 겨우 말했다. 그러나 치맛자락이 워낙 치렁치렁하고 두꺼워 데이몬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레이스는 소음을 차단하고 시에나의 안에만 집중하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으흣, 아… 응…!”
“…너… 맛… 어.”
데이몬이 무어라 치맛자락 안에서 웅얼대었으나, 시에나는 듣지 못했다. 흰 바탕에 분홍색 실이 수 놓인 이불 위로 시에나의 밝은 금발이 제멋대로 흐트러졌다.
“아앙…!”
데이몬의 앞에서 외음부를 활짝 벌린 채 시에나는 연신 신음을 흘렸다. 데이몬이 음핵을 빨 때마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며 안에서 애액이 샘솟았다. 데이몬의 혀 놀림이 빨라질 때마다 시에나가 쥔 시트의 주름이 더 진해졌다. 얕게 시작한 흥분감이 시간이 갈수록 한계를 모르고 치솟았다.
“흑, 아, 아, 아아…!”
눈앞에서 섬광이 튀었다. 황홀한 절정을 맛본 시에나의 안에서 애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데이몬은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 흘러내리는 애액을 전부 빨아 대었다. 게슴츠레 뜬 눈에 비친 천장이 비잉비잉 돌았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건가, 네게 취해서 그런 걸까. 울렁울렁, 멀미가 날 것 같아 시에나는 눈을 꼭 감고 데이몬이 주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흐으….”
두 번이나 더 절정을 느끼게 하고 나서야 빠져나온 데이몬의 입술이 시에나의 애액으로 인해 번들거렸다. 시에나는 작게 숨을 헐떡이며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데이몬이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시에나를 꽉 껴안았다. 데이몬이 시에나의 가슴 사이로 파묻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손으로도 해 주고 싶지만… 제대로 씻질 않아서.”
“…안 해 주셔도 괜찮거든요.”
부러 새침하게 말하는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이 마냥 즐거운 듯 눈을 휘었다. 데이몬이 재킷을 벗고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이내 탄탄한 데이몬의 몸이 환한 조명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태초의 몸이 된 데이몬이 이내 시에나의 옷에 시선을 두었다.
“…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녀들이 입혀 준 탓에 시에나는 이 옷을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 몰랐다. 데이몬의 품 안에서 거의 한 바퀴를 돌며 리본과 단추, 지퍼를 찾았지만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밑이 거의 터지기 직전이었던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간절하게 물었다.
“찢으면….”
“안 돼요! 엘리샤 영애에게 빌린 옷이란 말이에요.”
“물어 주면 되잖아.”
데이몬의 막무가내에 시에나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엘리샤 영애한테 찢어진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실 거예요?”
“말을 안 해도 알지….”
퍽. 시에나에게 어깨를 얻어맞은 데이몬의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진짜 아파서는 아니었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짓는 표정이었다.
“그럼 하녀들을 부를까?”
“지금 이 상황에서요?”
방 안에는 정사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방에 들어온 강아지도 이 묘한 분위기를 알아챌 것이었다. 오늘 처음 본 하녀들에게 지금의 이 상황을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시에나의 딱 자른 거절에 데이몬이 더 조급해져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래도 이 옷을 입고 잘 수는 없잖아.”
“잘 땐 그래야겠지만… 지금은 흥이 깨지잖아요.”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뜻인지 아직은 가늠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밑에는 이미 홍수가 난 상태였다. 데이몬은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몸도 마음도 데이몬으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 있는 시에나와는 다르게 데이몬은 끝없는 갈증을 느끼는 듯했다. 욕망에 찬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뱃속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아아, 나도 어지간히 취했나 보다.
“나 충분히 젖었는데.”
시에나의 파격적인 말에 데이몬의 하반신이 더 단단하게 서는 게 느껴졌다. 시에나가 키득거리며 그의 목을 팔로 감싸 안고는 귓가에 속살거렸다. 데이몬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이대로 넣어 줘요.”
데이몬의 안에서 무언가 뚝 끊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요망한 시에나의 유혹에 데이몬은 결국 참패했다. 풍성한 치맛자락을 전부 위로 들추자 시에나의 날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빈틈없이 껴입은 상의와는 달리 휑한 하반신에 뜨거운 열기가 와 닿았다. 다가올 미래를 아는 듯이 시에나의 질 안에서 애액이 샘물처럼 솟아났다.
“아…!”
외부 테두리를 누르는 거대한 압박감에 시에나의 입에서 저절로 쾌락에 젖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충분히 젖었을 때에도 첫 삽입은 언제나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술에 취해 그런지 잠깐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귀두를 삼킨 질 내벽이 오물거리며 데이몬의 성기를 순식간에 삼켰다.
“윽….”
첫 경험 이후로 수십 번을 들어간 곳이었지만 들어갈 때마다 색다른 기분이었다. 시에나의 질 내벽에 있는 오돌토돌한 돌기들이 데이몬의 것을 빈틈없이 감쌌다. 데이몬이 서서히 제 것을 빼내다 귀두만 걸쳤을 무렵 다시금 퍽, 안으로 들어왔다.
“아학-!”
다시 돌아온 귀한 손님을 반기듯 시에나의 내벽이 데이몬의 것을 차지게 조여 왔다.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빠르게 들어올 때마다 시에나가 숨을 헉, 들이켰다. 데이몬이 제 밑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는 시에나의 어깨를 잡고 몰아쳤다.
“새빨개진 얼굴이 꼭 딸기 같아.”
“으응…!”
술은 고통을 사그라뜨리고 쾌락을 배가시켰다. 데이몬이 주는 거대한 쾌락에 시에나는 정신없이 앓았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안으로 끊임없이 제 것을 밀어 넣으며 조명에 비친 그녀를 샅샅이 살폈다. 분명 쾌락에 젖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텐데. 시에나가 고개를 돌리자 사랑스럽다는 듯 그 볼에 입을 맞춰 왔다. 위에서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짓을 하면서 아래에서는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 차이에 시에나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흐… 아… 으응…!”
“옷을 입고 하니까 정순한 귀부인을 겁탈하는 느낌이야.”
“그래서… 흣, 싫은가요?”
시에나의 물음에 데이몬은 땀에 젖은 얼굴로 씩 웃으며 옷 위로 시에나의 유두를 건드렸다. 펑퍼짐한 옷 위로 유두가 도도록이 솟아올랐다. 볼록한 꼭짓점을 손가락으로 살살 굴리자 시에나의 입에서 밭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니, 더 흥분돼.”
“아흑-! 아…!”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데이몬의 것이 안에서 더 커졌다. 그 덕분에 시에나가 느끼는 안쪽 깊은 곳을 그의 페니스가 기분 좋게 찔렀다.
“흑… 아응….”
“예전엔 다른 애들보다 쓸데없이 크고 징그러워서 네가 이걸 싫어하면 어쩌지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아…! 흐으, 아…!”
“지금은 다행이라 생각해. 웬만한 남자들 거로는 여길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게… 정말 만족스러워.”
“나… 갈 것 같아… 아…!”
“안 돼. 조금만 더.”
데이몬은 그렇게 말하며 허릿짓을 늦추었다. 시에나가 절정 앞에서 데이몬이 속도를 늦추자 이슬을 머금은 눈동자로 원망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몬이 미소 지으며 시에나의 젖은 속눈썹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날 이렇게 볼 때마다, 미치도록 예뻐.”
“벼, 변태….”
“그래. 그럴지도. 그래도 도망치지는 마.”
젖은 눈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드는 파괴욕에 데이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몸을 으스러지게 껴안고 입 맞출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저는 얼마나 흉측한 괴물인가.
“하윽, 아… 응…! 아, 하아앙!”
데이몬은 점점 파도처럼 몰아쳤다. 데이몬의 것이 시에나의 안을 강하게 찌를 때마다 교성이 점점 높아지더니, 이내 둘은 동시에 절정을 맞이했다. 산호색 유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빳빳하게 서고, 젖은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몸이 푹 젖어서 시에나를 꽉 끌어안은 데이몬이 밭은 숨을 내뱉었다. 이내 굳어 있던 시에나의 몸에서 쭈욱 힘이 빠졌다. 물먹은 솜처럼 눈꺼풀이 무겁고 노곤해져 왔다. 강한 졸음이 시에나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시에나는 명멸하는 감각 속에서 저를 향한 소유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이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내 눈을 감았다.
“…시에나?”
데이몬은 한겨울에도 온몸에 뚝뚝 흐르는 땀을 닦아 내지도 않고 기절한 시에나를 의아하게 응시했다. 시에나는 맨다리를 훤히 내놓고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잠드는 것도 가능한 건가.
“기절했나….”
혹시나 하고 코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대 보니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데이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한 번 한 걸로는 기절하지는 않는데 오늘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술을 마신 탓도 있겠지.
“귀여워.”
데이몬이 시에나의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술에 취한 시에나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귀여웠다. 취했으면서 안 취한 척을 하는 것도 그렇고, 허세를 부리는 모습도 예뻤다. 그리고 술을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신음도 훨씬 크고 반응도 더 적극적이었다. 다음에도 한 번쯤 서로 술에 취해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전부 물려 놓고 술은 단둘이서만 마셔야지. 이런 귀엽고 사랑스러운 데다 색기 넘치는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자고 이렇게 예뻐서.”
쌕쌕 소리를 내며 잠든 시에나의 말간 표정을 보자니 또다시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만 해도 제 것을 꽉꽉 조이며 야한 얼굴을 하던 사람은 어디 가고 무방비하게 잠들어 버린 시에나의 얼굴은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데이몬이 땀에 젖은 시에나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다 주제도 모르고 빳빳하게 선 제 것을 응시했다. 시에나의 얼굴과 제 것을 번갈아 보며 잠시 고민하던 데이몬이 검붉은 혈관이 툭 불거진 기둥을 훑기 시작했다.
“하아….”
찌걱찌걱, 시에나의 애액과 제 정액으로 뒤덮인 기둥과 손이 마찰할 때마다 야한 소리가 났다. 바로 앞에서 데이몬이 자위를 시작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녀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으음….”
데이몬의 손놀림이 빨라질 때쯤, 시에나가 몸을 뒤척이며 이내 데이몬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대었다. 데이몬의 손이 그대로 정지했다. 혹시 깬 걸까. 눈치를 보던 데이몬이 무색하게 시에나는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잠들어 버렸다. 맛있는 걸 먹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걸 다 할 수 있지.
“시에나….”
이내 다시 조심스러운 손짓이 시작되었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앞에 두고 그녀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속도를 올릴수록 데이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절정을 앞두고 데이몬이 선단의 끝부분을 제 손으로 감쌌다.
“윽…!”
데이몬이 침음을 토해 냈다. 귀두 끝에서 이내 묽은 액이 튀어나왔다. 정액은 첫 번째보다는 좀 더 묽었지만 여전히 끈적했다. 데이몬이 긴 숨을 내쉬며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정액은 한 방울도 튀지 않았지만, 어쩐지 시에나를 더럽힌 느낌이었다.
아니, 제가 더럽히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시에나는 진흙밭에 구를 때에도 혼자서만 빛이 났다. 더러운 물속에서도 혼자 핀 연꽃 같았다. 수도 없이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에나는 전혀 때 묻지 않았다. 더러운 건 오직 저 혼자였다. 시에나를 안으면 안을수록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아마 시에나에게서는 평생 벗어날 수 없겠지. 그렇다면 계속해서 이 갈증을 느끼며 살면 되는 것이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데이몬이 조소했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시에나의 몸을 닦아 주기 위함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제 눈에는 환하게 빛나고 있는 시에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데이몬이 이내 탁, 문을 닫았다.
* * *
황제와 대신관은 오랜만에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대신관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함께 술을 마신다는 말에는 좀 어폐가 있긴 했지만, 황제의 잔이 비기가 무섭게 다시금 술을 따라 주는 좋은 술친구로는 보였다. 짧은 시간 안에 40도가 넘는 독한 독주를 반 넘게 비우자 황제의 강건한 고개도 점점 수그러들었다. 딸꾹. 딸꾹질을 시작한 황제를 보며 대신관이 눈을 빛냈다.
“젠장, 하고 싶은 것 하나 못 하는데 이게 내 나라인지.”
“극히 동감합니다. 그 불행 덩어리를 궁에 들인다니, 나라에 망조가 들 거예요.”
“형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나는 이해가 안 되는군.”
“북방에서 몬스터 퇴치나 하시는 분이 어찌 국정을 보는 폐하와 격이 맞겠습니까.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입 안의 혀처럼 구는 대신관의 태도에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관이 따라 준 독주를 한 모금 더 넘기다 황제가 쿨럭, 기침을 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나도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군… 전에는 이런 술 네댓 병은 물처럼 마셨는데 말이야.”
“제가 알기로 불행의 씨앗이 방문하기 전에는 이러지 않으셨는데요. 요즘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젠장. 다 그 악마 같은 녀석 때문이야. 스무 해나 숨을 붙여 줬으면 감사한 줄 알고 얌전히 영지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지, 아카데미며 황궁이며 쑤시고 다니니 내가 멀쩡할 수가 있나.”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국의 황제답지 않게 유약한 모습이지만 대신관에게는 익숙했다. 황후가 죽은 뒤로 흔들리는 황제를 잡아 준 건 오로지 대신관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황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대신관의 앞에서는 때때로 이렇게 술에 취해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대신관이 독주 대신 앞에 있는 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제국을 쑤시고 다니지 못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무슨 수로?”
“결혼시키십시오.”
“그 평민 계집애랑 말이야?”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신관의 조언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얼굴은 좀 반반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평민이었다. 데이몬의 존재만으로도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판에 데이몬은 한사코 그 계집을 감싸고돌았다.
이따금 계집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집착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반려가 된 거겠지. 하고많은 계집들 중 하필 평민 계집이라니. 황제는 자신의 어린 시절도 떠올리지 못하고 그런 데이몬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황제의 옛 시절을 기억하는 대신관은 속으로 조소하며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니요. 데시앙의 공주가 혼기가 찼다고 합니다. 그쪽으로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데시앙이라면 1년에 한 번 제국에 꾸준히 공물을 보내오는 약소국가였다.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는 정보는 거의 없었는데, 황제가 대신관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대는…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그런 작은 나라의 사정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건가?”
“별것 아닙니다. 폐하와 함께 국정을 돌보다 우연히 알게 된 아주 작은 사실일 뿐이지요.”
“하하, 겸손하기까지. 자넨 정말 충신일세. 즉위식과 결혼 선언식을 성대하게 열고… 가는 길에 피치 못할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건 어떤가?”
황제와 대신관의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 어차피 20년 가까이 못 본 자식에게 줄 정은 한 줌도 없었다. 게다가 그 자식이 제 사랑하는 황후와 제국을 망가뜨릴 존재라면 더더욱. 카이난은 아직 어려 혈육의 존재에 홀려 있는 듯하지만, 데이몬을 처리하고 엘리샤와 빠르게 짝을 지어 주면 될 문제였다. 아이도 한둘 낳고 황위를 물려받아 제국을 꾸려 가다 보면 서서히 잊겠지.
“모든 것은… 제국의 광명을 위해.”
대신관이 황제의 말에 긍정하며 잔을 들어 올렸다.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신관과 잔을 마주했다. 챙-. 금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할 이야기가 끝난 둘이었으나 황제는 은근한 눈길로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저, 저어. 대신관. 혹시 오늘도 ‘그것’ 있나?”
황제의 말에 눈을 잠시 크게 뜬 대신관이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아주 위험한 약이라고요.”
“사, 상관없네. 그대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사랑하는 황후를 잃은 걸로도 모자라 그 원흉인 자식까지 인정하고 왔는데.”
황제는 기괴하고 음울한 눈으로 대신관을 바라보며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대신관은 그런 황제에게 못 이기는 척 품속에서 약을 내놓았다. 황제가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 약병을 바라보았다.
“고, 고맙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약을 바로 줄 것처럼 나오던 대신관이 조건을 붙이자 황제가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대신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빨 빠진 늙은 사자 주제에 어디서 주인에게 대들어.
“제가 알기로 데이몬 황자님께서는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영재라고 하더군요. 검술 대회에서 5년 내내 우승하기도 했고요. 물론 이게 다 지엄하신 폐하의 피를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은 안 주고 지금까지 실컷 욕하던 데이몬을 칭찬하자 황제의 눈빛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가?”
“데이몬 황자님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군사가 필요할 거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폐하께서는 이런 곳에 신경 쓰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대신관은 달콤하게 말하며 황제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제국을 망칠 존재라도 결국은 폐하의 자식, 얼마나 속상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저 저에게 군사 위임권만 주시고 방 안에 계시면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날은 황후 폐하도 하루 종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대신관의 말에 황제는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아, 알았네. 다 주겠네. 그러니 어서…!”
대신관이 약을 내밀자마자 황제는 그 약을 뺐듯이 가져가 꿀꺽꿀꺽 삼켰다. 순식간에 사라진 약에 대신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었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황제는 이따금 몸을 떨며 황홀한 표정에 잠겼다.
“아아, 이브니아….”
그리고는 텅 빈 허공을 보며 전 황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이다. 그런 황제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대신관은 빈 약병을 품 안에 갈무리하며 일어났다. 문을 나서자 기사들 몇몇이 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대신관은 낮게 깐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명했다.
“폐하께선 잠드셨네. 내일 아침까지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이 대신관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볼일이 끝난 대신관은 긴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복도를 걸었다. 그가 약 2년 전 즈음 발명한 그 약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마약이었다. 중독성이 강한 데다 독주와 함께 마셨을 때 그 효과가 강해 2년 동안 황제의 몸은 서서히 망가졌다.
별다른 운동 없이도 탄탄하던 그 몸이 서서히 마르고 약해지는 것을 보는 게 어찌나 즐겁던지. 이브니아, 이브니아. 20여 년 전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약에 취한 그 꼴사나운 모습이 떠오르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으흐흐흐.”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두뇌와 높은 신체 능력. 맨몸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힘.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제 반려만 사라지면 미치광이처럼 돌아 버린다. 대신관은 그 점이 너무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복도에서 웃고 있던 대신관은 언제 웃었냐는 듯 그 웃음을 뚝 멈추고 날카로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타닌.”
“예.”
사방에 아무도 없던 대신관의 앞에는 어느새 한 남자가 부복한 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신의 뜻이 조금 앞설 수도 있겠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이상이다.”
그 말과 동시에 남자는 연기처럼 다시 사라져 버렸다. 대신관은 차갑고 섬뜩한 눈으로 심연과도 같은 새카만 복도 끝을 바라보다 이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대신관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 * *
즉위식은 일주일 뒤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시에나는 황궁에서 오랜만에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침대에서 하루 종일 노닥이다 질리면 데이몬과 검 연습을 하거나, 엘리샤를 만났다. 엘리샤와 놀러 나간 날은 드레스를 세 벌이나 맞추기도 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이렇게 한가해 본 적이 얼마 만이더라.’
시에나가 점심을 먹고 티타임을 가진 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생각했다. 쉴 틈 없이 달려온 6년이었다. 사용인들은 꼬박꼬박 쉬게 해 주면서도 저는 좀처럼 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 휴식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제인은 잘하고 있으려나….”
얼마 전 받은 편지로는 별일 없다고 쓰여 있긴 했지만, 일주일 넘게 자리를 비웠다 보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즉위식은 내일이었다. 공작과 카이난의 입김 때문인지 일정이 상당히 빨랐다. 내일이면 데이몬은 진짜 황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 사실에 가슴이 설레었다.
“시에나, 손님이 왔는데 함께 나가겠어?”
“도련님! 손님이라면… 누구요?”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이몬과 시에나가 둘 다 알 만한 손님 중 황궁에 찾아올 만한 손님이 누가 있을까. 데이몬이 씩 웃으며 궁금해하는 시에나에게 말했다.
“나가 보면 알 거야. 반가운 손님이거든.”
“네에. 그럼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요.”
시에나는 간편한 실내용 드레스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슬리퍼를 끈이 달린 구두로 바꿔 신으며 방을 나섰다. 데이몬은 요즘 계속 정복 차림이었다. 근사한 모습에 새삼 얼굴을 붉히며 시에나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분은 어디 계신가요?”
“여기 있습니다.”
복도를 넘어서자마자 반가운 손님이 시에나를 맞이했다. 시에나는 눈을 크게 뜨고 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이작-!”
“오랜만이에요, 시에나 누나.”
따뜻한 다갈색 눈이 휘어지며 제게 달려오는 시에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시에나는 아이작에게 달려가 양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온 거야? 바쁘다고 들었는데,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야? 그분이 괴롭히지는 않아? 아픈 곳은 없고?”
다다다 쏟아지는 질문에 아이작이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괜찮아요, 누나. 이젠 다 컸는걸요.”
“그렇긴 하지만 내 눈엔 아직도 꼬마인걸.”
180이 훌쩍 넘는 아이작을 꼬마로 부르는 조그마한 시에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남몰래 미소 지었다. 아이작은 슬슬 저를 향한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와 잡고 있던 손을 슬쩍 놓았다.
“하하, 두 분은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그럼. 우린 다 잘 지냈어. 복도에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시에나는 아이작이 손을 놓으려고 하자 더 덥석 잡으면서 옆에 있는 데이몬의 손도 함께 잡았다. 양손에 훈훈한 남자 둘을 하나씩 잡은 시에나를 지나가는 하녀들이 소곤대며 부럽게 바라보았다. 신이 난 시에나가 한 줌도 안 될 것 같은 손목으로 덩치 큰 두 남자를 끌고 응접실로 데려가는 내내 둘은 자발적으로 끌려가며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응접실에 도착해 차가 식기도 전에 시에나는 아이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따뜻한 카모마일차를 후후 불던 아이작이 간단하게 답했다.
“도련님의 즉위식이라는데 빠질 수 없죠. 휴가 내서 왔어요.”
“사이 님이 계속 붙잡고 있어서 마르바스 영지에도 잘 못 놀러 왔잖아?”
“그래서 편지 남겨 두고 왔어요.”
생글생글 웃는 아이작의 뒤에 울부짖는 사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시에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이작의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완전한 성인이 된 아이작은 아픔을 겪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사이의 곁에서 어지간히 고생했는지 때때로 시에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했다. 시에나는 그런 아이작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고생 많았어. 여기에서라도 푹 쉬어.”
“네. 그럴게요. 저 완전 쉴 작정으로 왔는걸요.”
“식사는 했니? 간단한 음식을 가져다줄까?”
공작과 카이난의 보호 아래 황궁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데이몬과 시에나였다. 데이몬은 제집처럼 편하게 지낸 지 오래였고, 시에나는 요즘 들어서야 황궁 생활이 조금 익숙해졌다.
“오면서 샌드위치 먹어서 괜찮아요. 아, 그리고 이스테라 여신을 찬양하는 축제가 오늘 저녁부터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마차에서 보니 야시장이 꽤 크게 열리는 것 같아요. 오늘 함께 가 보시겠어요?”
“정말? 밖이 시끄럽더니 그 축제 준비 때문에 그랬구나. 난 가고 싶은데… 도련님은요?”
“나도 시간 괜찮아. 오랜만에 셋이 뭉쳐 보자.”
데이몬과 아이작은 오랜만에 소년 같은 짓궂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식은 차를 단번에 들이켠 시에나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준비하고 한 시간 뒤에 다시 모이기로 하자.”
“네, 좋아요.”
* * *
“와아.”
시에나는 큰 규모의 축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스테라 여신의 축제는 각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지만, 아무래도 수도에서 가장 크게 열렸다. 게다가 축제 다음 날은 새 황자의 즉위식 날이었다. 황자 즉위식은 보통 다섯 살 이전에 이루어지기에 다 큰 황자의 즉위식은 몹시 이례적인지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큰 화젯거리였다. 베일에 싸여 있던 황자의 모습을 구경하러 각 지방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축제는 전에 없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시에나, 내 손 꼭 잡아.”
“아, 네에.”
사람에 치일 뻔한 시에나를 감싸며 데이몬이 말했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보호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노점상에는 각종 먹거리와 예쁘고 특이한 소품, 다양한 놀거리를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흥미롭게 노점상들을 구경하던 시에나가 가면을 늘어놓은 좌판에 시선을 두다가 데이몬의 소매를 살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도련님, 혹시 저 가면 기억나세요?”
“나 입학하기 전에 가면 축제 때 일 말이야? 기억나지.”
“그 축제 때 봤던 연극 하던 사람들이요. 혹시 이번 축제에 공연을 하러 오지 않을까요?”
시에나는 주디스를 떠올리며 물었다. 다른 영지에서 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수도에서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데이몬은 무례했던 여자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데이몬과는 다르게 시에나는 그녀를 제법 좋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 여자가 준 팔찌도 6년 넘게 차고 다니고 있으니. 데이몬은 재회를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는 시에나의 의견을 딱 잘라 낼 수 없었다. 데이몬이 마지못해 시에나에게 물었다.
“글쎄, 공연하는지 한번 알아볼까?”
“어머. 네, 좋아요.”
“아이작, 우리 잠깐 어디 좀 다녀오려고 하는데… 뭐 해?”
아이작은 어느새 옆 좌판에 서서 다트를 꽂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 손 가득 다트를 쥔 채 호승심을 불태우는 아이작을 데이몬이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이작의 옆에는 벌써 인형 예닐곱 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가게 주인이 불안한 눈동자로 아이작과 데이몬을 번갈아 쳐다봤다. 말릴 수 있으면 말려 달라는 표시였다. 그러나 아이작의 눈동자는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생생하게 반짝였다.
“아아, 저는 여기 계속 있을게요.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그래. 적당히 해 둬.”
“네에. 알겠습니다. 주인장, 인형 하나 더 뽑았군.”
못 말리겠다는 듯 데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옆에서 시에나가 쿡쿡 웃었다. 어느 정도 아이작과 거리를 벌린 시에나가 데이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에요.”
“응?”
“아이작이요. 1년 전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많이 우울해했잖아요.”
“아아, 그렇지.”
노파는 데이몬의 아카데미 졸업을 1년 앞두고 임종했다. 노파의 나이 68세, 평균 수명이 50세가 넘지 않는 이 제국에서 호상이라면 호상이었다. 노파는 가을비를 맞으며 약초를 캐던 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몸에 좋은 약들은 다 써 봤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가벼운 감기 몸살이 아닌 몸이 너무 나이가 들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생긴 노환이었다. 수도로 옮겨 더 전문적으로 치료해 보자는 아이작과 시에나의 설득에 노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죽어도 원래 살던 곳에서 죽고 싶습니다. 여기가 제 집이고 삶인데 왜 이 좋은 곳을 놔두고 모르는 곳에서 죽어 가야 하나요?’
원래 살던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의지가 강력했기에 둘은 더 이상 노파를 설득하지 못했다. 마지막이니 공작의 영지에 가서 손자인 아이작에게 의지할 줄 알았는데, 노파는 끝까지 시에나의 곁에서 삶을 마쳤다. 돌아오면 한동안 휴가는 없을 거라는 사이의 엄포 아래 아이작은 장기 휴가를 내고 마르바스 영지에 와서 지냈다.
노파는 이따금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혹 제가 더 알려 주지 못한 것은 없는지, 마음이 여린 시에나가 저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몹시 걱정했다. 시에나는 그때마다 씩씩한 척하며 그런 말씀 마시라고, 어서 건강해지시라 말했다.
매일 아침 허브차를 타고 몸에 좋은 약선 음식을 떠먹이며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파의 지팡이 역할을 하면서도 시에나는 한 번도 귀찮아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에서 좌절했다.
가을부터 시작해 노파는 꼬박 3개월을 앓았다. 상태는 좋아지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노파는 이제 깨어 있는 날보다 잠들어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아이작이 노파의 옆에 붙어 마나로 기운을 끊임없이 불어넣었다.
그 덕분일까. 3일을 꼬박 자고 일어난 노파는 묘하게 생기가 있고 상태가 좋았다. 식사의 대부분을 남겼던 예전과는 달리 1인분을 전부 먹어 치우고 허브차와 함께 디저트까지 먹었다. 오랜만에 너무 많이 먹어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이유로 공원을 30분이나 산책하기도 했다.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노파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한 명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시에나는 맨 마지막 순서였다. 십수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노파는 많이 지쳐 있었다. 시에나는 다음에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노파는 강경했다.
노파는 시에나에게 열쇠 하나를 건네며 제가 죽으면 서랍의 두 번째 칸을 열어 보라 말했다. 시에나는 열쇠를 받아 들면서도 건강해지면 다시 돌려드리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노파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 울음을 터뜨린 건 오히려 시에나였다. 눈도 잘 보이지 않으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노파의 말에 시에나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안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올렸다. 그런 시에나의 얼굴을 주름진 손으로 만지며 예쁘다고 말한 노파는 그다음 날 새벽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끝까지 꿋꿋하신 분이었다.
노파의 장례를 치르며 시에나는 두 번이나 실신했다. 정작 가장 슬픔에 젖어 있어야 할 아이작이 시에나를 위로했다. 장례가 끝난 뒤 겨우 조금 마음을 추스른 시에나는 약속대로 서랍의 두 번째 칸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노파 명의의 금고 계좌 번호와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계좌 안에는 노파의 전 재산일 돈이 통째로 들어 있었다.
멍하니 그 계좌를 보던 시에나가 안에 있는 짧은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의 윗면에는 나의 사랑하는 손녀딸이자 가장 친한 친구 시에나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이름 없는 필부로 살다 생을 마칠 수도 있었던 제게 이름을 주고 생활을 주고 새로운 인생을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도 없이 편지를 읽은 시에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꿇은 채 한참을 오열했다. 노파에게 시에나는 친손자인 아이작을 제치고 제 전 재산을 줄 만큼 소중한 가족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건 시에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혈육만큼 소중했던 둘이었기에 시에나는 노파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린 뒤 이 돈을 아이작에게 주는 게 맞겠다고 생각한 시에나는 할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산인 척 계좌를 전달하려 했다.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미 노파에게 들어 시에나가 유산의 주인인 걸 알고 있었기에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시에나는 지금까지 그 계좌에서 돈을 한 푼도 꺼내 쓰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나중에 아이작이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아이작은 공작가로 돌아간 지 6개월 만에 8클래스 익스퍼트에 들어갔다. 뭇 사람들은 그걸 보고 가족이 죽었는데 마법 공부에만 열중하는 냉혈한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아이작과 끊임없이 편지를 나누며 노파를 잃은 슬픔을 삭이던 시에나로서는 그것이 그 나름대로 노파를 잃은 허무함을 채우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이작과 시에나는 한동안 그렇게 나름의 방법으로 우울했다.
“여기인가 봐, 시에나.”
데이몬이 천막을 치고 축제 마크를 큼지막하게 달아 놓은 곳을 가리켰다. 안에는 외눈 안경을 쓴 남자가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맛있는 먹거리로 유명한 노점에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이가 사라졌다는 아빠, 엄마가 사라졌다는 아이 등 다양한 민원이 들어왔다. 민원 담당자의 태도는 딱딱했으나 일 처리는 몹시 능숙했다. 시에나가 민원 담당자를 지켜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드디어 시에나의 차례가 되어 앞에 서자 남자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번 공연에 어떤 팀들이 참여하는지 알고 싶은데요.”
구경꾼들을 한곳에 모아 두기엔 자리가 부족했기에 수도에서는 최소 예닐곱 팀의 연극단을 모집했다. 무료로 볼 수 있는 노상 연극단부터 귀족들만 볼 수 있는 호화 연극단까지 그 종류는 다양했다. 익숙한 질문이었는지 서류 하나를 뒤적이던 남자는 극단들을 쭉 읊어 주었다.
“이스티 연극단, 로날도 연극단, 루돌프 연극단, 마리아 연극단, 킹던 연극단, 레미디안 연극단, 하니카 연극단 이렇게 있습니다.”
다음 사람을 부르려는 남자를 만류하며 시에나가 다급히 물었다.
“저, 혹시 그중 주디스라는 사람이 주연으로 참여하는 극은 없나요?”
“그런 배우는 없는데요.”
“조금만 더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어휴, 저희는 바쁩… 니다만 아름다운 레이디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알아봐 드려야지요.”
남자가 귀찮은 태도를 보이자 데이몬이 재빨리 은화 하나를 튕겨 주었다. 남자가 반짝이는 은화를 속 안에 갈무리하며 유들유들하게 말을 바꾸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음… 이번 년에는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작년 것도 알아보겠습니다.”
은화 하나에 남자의 태도는 눈에 띄게 공손해져 있었다. 시에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남자는 자신 있게 종이를 뒤적이다 이내 시무룩해져서 답했다.
“음… 주디스라는 분이 나오는 연극은 없네요.”
“…그런가요.”
“몇 년 전에 본 연극입니까?”
“6년… 아니, 7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때 그 배우분의 나이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더군.”
시에나를 대신해 데이몬이 답했다. 10년 전에 출연한 극단까지 샅샅이 찾아보던 남자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미 은퇴했을 수도 있겠군요. 무희들은 보통 20대 전후로 은퇴하거든요.”
“그래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에. 이스테라 여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남자는 열정적으로 그들을 배웅하고 다시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을 맞이했다. 시에나는 힘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수도에서 공연한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아예 사라졌을 줄은 몰랐어요.”
“세월이 꽤 지났으니까. 다른 연극도 재미있을 거야.”
“네, 돌아가서 뭘 먹든가 해야 할 것 같아요. 참, 가면부터 사야 하려나.”
“천천히 하자. 아직 시간은 많아.”
가면을 필수로 써야 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아이작이 준 반지에 외형을 바꾸는 기능이 있어 데이몬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데이몬은 지금 금발 머리에 평범한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이목구비를 바꾸는 건 아니라 외모가 눈에 띄게 근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자들이 힐끔힐끔 데이몬을 바라보는데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에나가 혹 사람들에게 치여 넘어지진 않을지 살피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와, 도련님. 하늘 좀 봐요. 정말 예뻐요.”
시에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녁 즈음에 나온지라 하늘은 이미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연등이 동시에 켜지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름다운 노을과 그 노을만큼이나 빛나고 있는 연등, 사탕이니 과자니 알록달록한 것들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골목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잘 차려입고 나와 수줍게 서로를 보는 연인들. 그러나 데이몬은 그 풍경 속에서도 하늘을 가리키며 활짝 웃는 시에나가 제일 아름다워 보였다.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뻐.”
이런 말을 하면 민망해할 걸 알면서도 너무 예뻐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에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지금의 하늘색과 똑같이 물들었다.
“민망하게 도련님도 참….”
그렇게 말하는 시에나였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시에나는 볼을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사람들이 모여 있던 중앙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한산한 골목이었다. 걷다 보니 모르는 곳까지 흘러들어 온 모양이었다.
“저쪽으로 다시 나가면 되겠다. 돌아가자.”
“네에.”
조명이 강하지 않아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거리였다. 시에나는 뒷골에 서늘한 바람이 닿자 몸을 움츠렸다. 그때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잘생긴 청년, 이리 와서 한잔하는 거 어때요?”
“어머, 진짜 잘생겼네. 오빠, 이리 와서 한잔해요. 오빠는 술값 따로 안 내도 돼.”
주황색 조명이 켜진 술집 아래에서 여자들 몇몇이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푹 파인 옷을 입고 데이몬을 유혹했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시에나가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고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대놓고 유혹하는 데에 면역이 없는 데이몬이 딱딱하게 굳어 있자 여자들은 귀엽다며 깔깔 웃었다.
“너무 귀엽다. 몇 살? 어른은 맞아요?”
“상관없어. 내가 어른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어머, 얘 말하는 거 봐라. 내가 먼저야.”
“바쁜 거 아니면 진짜 같이 한 잔만 마시고 가요. 응? 나 잘해 줄게.”
“...나는 약혼녀를 두고 외도하지 않아.”
데이몬의 딱 자른 말에 시에나도 정신이 들었다. 여자들은 약혼녀가 있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이, 모르게 하면 되지. 딱딱하게 굴지 말고. 알잖아?”
“여, 여기 있는데 어떻게 몰라요!”
시에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데이몬의 팔을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데이몬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여자들은 그제야 시에나가 데이몬의 연인임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뭐야, 여동생이 아니라 연인이었어?”
“눈이랑 머리카락 색이 똑같아서 몰라봤네. 미안해요.”
여자들은 정말 미안한 기색이었다. 데이몬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어 더 오해한 듯했다. 잔뜩 긴장한 채 날을 세우고 있던 시에나가 경계를 풀지 않고 여자들에게 못 박았다.
“우린… 곧 결혼도 할 거라고요.”
필요 이상의 정보를 들은 여자들이 시에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축하해요. 자고로 남자들이란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아랫도리를 놀리려고 하니 조심하고.”
“저렇게 귀여운 아가씨 두고 여기 오면 쫓겨난다?”
여자들의 이상한 축복을 받으며 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거리를 빠져나왔다. 그 거리를 빠져나오고도 데이몬은 멍한 상태였다.
“도련님…?”
“어, 어어?”
“무슨 생각 하세요?”
“그냥… 별거 아니야.”
“별게 아닌 것 같은데.”
시에나가 입을 쭉 빼고 데이몬을 흘겨보았다. 이 사람이.
“응? 뭐가?”
“아까 그 여자들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뭐? 아니야!”
데이몬은 펄쩍 뛰며 시에나의 말을 부정했다. 너무 격렬한 반응에 시에나가 더 의심하기 시작했다.
“수상해요, 도련님.”
“진짜, 진짜 아니야. 그냥….”
“그냥 뭐요?”
볼멘소리로 말하는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네가 아까 우린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해 줘서… 그게 좋아서….”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고, 곧 할 거니까 그렇게 말하죠.”
“그… 그렇지. 맞아. 곧 할 거지. 너랑… 나랑….”
데이몬은 부끄러워하며 벌게진 목덜미를 긁적였다. 시에나와 데이몬은 한적한 골목에 선 채 한동안 얼굴을 붉히고 침묵했다.
“저, 저희 이제 갈까요?”
“그… 그래. 얼른 가자. 아이작이 기다리겠다.”
데이몬은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에게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익숙한 손을 잡으며 시에나는 데이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넓은 어깨와 등이 새삼 든든했다. 완전히 어둠이 가라앉은 곳에서 축제의 등과 밤하늘의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시에나는 이 풍경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그러고 보니 로하엘 님은 안 오셨네요.”
시에나가 즉위식 준비로 한창인 데이몬을 옆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오일을 이용해 머리를 올리고 있던 데이몬이 눈을 떴다.
“편지하긴 했는데, 부인이 곧 산달이라 오기 힘들 것 같다는 답장을 받았어.”
“아, 둘째가 곧 태어나는군요.”
“아니, 셋째야.”
“셋째요?”
시에나가 놀라 물었다. 마르바스 영지에서 쭉 머물던 로하엘은 3년 전 칸나와 결국 눈이 맞아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다. 지금은 백작위를 물려받아 영지를 다스리는 데 한창이었다. 로하엘은 영지민들에게 인기 있는 영주인 한편 사랑꾼으로도 몹시 유명했다.
“응. 처음 낳은 애가 아들 쌍둥이였잖아.”
“맞다, 그랬죠.”
아이들은 로하엘을 닮아 잘생기기도 했지만 강골을 타고나 건강하고 아주 활발했다. 부인이 몸이 약해 대부분의 육아를 로하엘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로하엘도 쌍둥이 육아는 너무 힘들다며 편지에서 가끔 우는소리를 했다. 쌍둥이가 생후 1년이 지나 좀 살 만해졌을 무렵 덜컥 다시 셋째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셋째는 제발 딸이길 바란다더라.”
“후후, 소원대로 되셨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아이를 갖기 전에 꾼 꿈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걱정이래.”
“무슨 꿈인데요?”
“집채만 한 회색 늑대 세 마리가 부인의 발치에서 노는 꿈이었다고 하더군.”
“와, 태몽인가 봐요. 그런데 설마… 세쌍둥이인 걸까요?”
“더 문제는 그 늑대들이 전부 수컷이었다는 거지.”
데이몬과 시에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마주쳤다. 머리를 다듬어 주던 미용사까지도 잠시 그들의 미래에 묵념하듯 손을 멈추었다 이내 다시 마지막 정돈을 했다. 똑똑, 누군가 데이몬의 방을 노크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혹 준비되셨습니까?”
“지금 나가지.”
병사의 부름에 데이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자복을 입은 데이몬의 모습은 그야말로 근사했다. 시에나는 새삼 감탄하며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저는 내려가서 아이작과 함께 보고 있을게요.”
“그래. 다녀올게.”
데이몬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긴장감은 없어 보여 시에나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데이몬은 곧게 등을 펴고 단상으로 향했다. 시에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홀로 내려갔다. 아이작과 공작, 카이난은 1층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루이젠 역시 같은 자리에 초대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보겠다며 2등석으로 내려갔다. 귀빈석에는 사람이 얼마 없어 구름같이 몰린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이작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시에나 누나.”
“아이작,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얼마 안 기다렸어요. 이제 하는 거예요?”
“응. 아, 저기 나온다.”
데이몬이 단상 위로 나오자 뿔피리 소리를 선두로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트럼펫과 심벌즈, 북이 어우러진 절도 있는 연주였다. 데이몬이 단상 위에서 손을 흔들자 제국민들이 환호했다. 데이몬이 나온 뒤 황제도 나와 그들에게 모습을 보여 주었다. 황제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마른 듯했다. 건강이 나쁜 건 아닌가 시에나가 걱정하고 있는데 황제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황자의 즉위식을 보러 와 준 제국민들에게 감사를 표하네.”
“와아아아-….”
황제의 목소리에는 확성 마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황제가 대신관으로부터 받아 든 연설문은 읽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황제의 앞에 부복한 채 그 연설을 듣고 있었다.
“마침내 건강을 되찾았으니 이 모든 게 이스테라 여신의 인도이심이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만큼….”
기나긴 연설이 끝나고 황제는 황자를 상징하는 관을 데이몬에게 씌워 주었다. 데이몬은 황자의 관을 쓴 채 제국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검은 머리칼 위에 자리 잡은 금색의 관은 데이몬에게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황자의 관은 햇빛을 받아 데이몬의 눈처럼 빛났다. 시에나는 그 장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저와 대화했던 데이몬인데, 황자의 관을 쓴 채 제국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그는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데이몬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데이몬은 제게 함성을 지르는 인파 속을 두리번거리다 저를 쳐다보는 시에나와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
시에나는 깜짝 놀라 그런 데이몬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차가운 인상의 데이몬이 웃음 짓자 얼어붙어 있던 주변의 분위기가 녹작지근하게 풀렸다. 시에나는 제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데이몬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참 애정 행각을 벌이던 데이몬이 카이난과 공작을 보고 슬쩍 목례했다. 공작은 자랑스럽다는 듯 데이몬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황제의 말이 이어진 것은.
“그리고 이스테라 여신은 황자에게 또 하나의 축복을 주었네.”
병이 나은 것 외에도 또 축복을 받았다는 말에 사람들이 웅성댔다. 예정에 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바로 반려를 맞이하게 되는 축복이지. 이스테라 여신이 황자의 짝으로 데시앙의 공주를 짝지어 주었네.”
황제의 청천벽력에 시에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데이몬이 황제의 헛소리에 차갑게 그를 돌아보았다. 당황하기는 공작과 카이난,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데이몬이 황제에게 적대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나 데이몬에게는 확성 마법이 걸려 있지 않기에 제국민들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황제는 그런 데이몬을 철저히 무시한 채 이어 말했다.
“데시앙이 비록 약소국이나 이스테라 여신의 축복은 절대적이지. 짐은 기꺼이 데시앙의 공주를 황자비로 맞이하기로 했네.”
“와아아아-!”
겹경사에 사람들이 들떠 환호를 질렀다. 그러나 이 일에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안색이 좋지 못했다. 시에나가 데이몬의 반려라는 건 황궁 사람 대부분이 아는 일이었다. 데이몬이 언제 어디서나 시에나를 끔찍하게 챙겼기 때문이었다. 대신관이 황제를 노려보고 있는 데이몬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다 설명하겠습니다. 제국민들이 보고 있어요. 황자로서의 체통을….”
“체통은 무슨. 내가 황자가 되려고 한 것도 다 시에나 때문인데, 헛소리하는 꼴을 어떻게 보라는 거지?”
씹어뱉듯이 말한 데이몬은 소리 높여 아이작을 불렀다.
“아이작!”
정신을 차린 아이작이 데이몬의 뜻을 알아듣고 급히 확성 마법을 걸어 주었다. 마법이 걸린 걸 확인한 데이몬이 제국민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하기 시작했다.
“20여 년 만에 저를 찾은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못난 황자라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이미 미래를 약속한 약혼녀가 있습니다.”
“이, 이런 무엄한…!”
대신관이 데이몬의 폭탄 발언에 경악하며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데이몬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각도로 장식용 보검을 겨누며 대신관을 위협하고 있었다. 보검의 무딘 날 위에는 푸르스름한 검기가 감싸져 있었다.
장식용 보검은 날이 무뎌 사람을 해칠 수 없지만, 검기가 실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데이몬이 조금만 손을 움직인다면 검은 대신관의 몸을 그대로 뚫을 테였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친 위험에 황제도 대신관도 그들을 지키던 기사들도 입을 다물고 상황을 관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아름다워 혼자 밖에 내두기 두려운 약혼녀에게 저는 어제도 결혼을 조른 참입니다. 몇 년을 걸쳐 신뢰를 쌓아 겨우 결혼 약속을 받아 냈는데, 그런 약혼녀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황자의 자격 이전에 사람의 자격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옳소!”
데이몬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시에나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에나와 한 적 없는 말까지 적절히 섞어 가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데이몬이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시에나는 단상 위에 선 데이몬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이스테라 여신께서도 이 사실을 굽어살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혹 그 미래를 바라고 저의 병을 낫게 해 주신 거라면 이 황자의 관, 기꺼이 내려놓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은 황자의 관을 난간 위에 올려 두었다. 황자의 관이 얇은 난간 위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질 듯 말 듯 흔들렸지만 데이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시에나를 찾아 눈을 마주친 데이몬은 안타깝게 저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찡그린 금색 눈동자에는 저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데이몬의 위로 세이지 꽃잎이 퍼졌다. 사람들이 동시에 탄성을 지르며 파란 하늘 위로 떨어지는 붉은 세이지 꽃잎을 바라보았다. 광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세이지 꽃잎은 느릿한 속도로 떨어지며 사람들의 눈에 각인되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세이지 꽃잎이 바닥에 닿기 전 사라진다는 건 알지 못하는 듯했다.
“환상 마법이에요.”
아이작이 시에나에게 속삭였다. 시에나는 그제야 그것이 아이작의 마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스테라 여신의 상징인 붉은 세이지 꽃잎을 보던 한 제국민이 외쳤다.
“이스테라 여신께서 굽어살피셨다-!”
“와아아-!”
“여신께서 황자님을 진짜 황자로 인정하셨어-!”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흥분하며 소리쳤다. 데이몬은 아이작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황자의 관을 도로 썼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데이몬은 멈추지 않는 박수갈채 속에 유유히 퇴장했다. 이 사건은 후에 역대 즉위식 중 가장 인상적인 즉위식으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 * *
“제기랄!”
쨍그랑, 수백 골드에 호가하는 크리스털 세공품을 바닥에 내던지면서도 황제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었다. 대신관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진정하십시오. 손을 다치실까 겁이 납니다.”
걱정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소란을 피우는 황제가 꼴사나워 뱉은 말이지만 황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그 악마의 자식이 나를 우롱하고 제국민들을 단단히 홀려 놨는데!”
“저 역시 황자님께 위협당했습니다.”
직접적으로 위협당한 저도 얌전히 있는데 네가 왜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냐는 뜻이었다. 황제는 대신관의 말에도 한동안 진정하지 못한 채 흉골을 들썩이며 씩씩대었다.
“역시 진작 처리를 했어야 했어. 그 짧은 새에 제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 보면 그 악마의 자식은 장차 이 나라의 큰 걸림돌이 될 걸세.”
“황자님을 없애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다만?”
“지금은 여론이 너무 불리합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
대신관은 제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황제의 목을 당장 꺾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겨우 참아 내었다. 대의를 위해 보내 온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한 번의 실수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소문을 흘리세요.”
“…무슨 소문을?”
“황자님이 약혼녀에게 빠져 있는 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바로 말하게.”
“그런데 그 여자가 사실 황자를 약으로 유혹한 마녀라면요?”
황제의 눈빛이 그제야 빛났다. 대신관은 가느다란 눈을 휘었다.
“게다가 요 몇 년 사이 일어나고 있는 몬스터의 습격과 던전의 발생이 마녀의 짓이라고 밝혀진다면… 여론은 바뀔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덮어씌우자는 거지.”
“예, 그 마녀의 최종 목적은 카이난 황자님과 폐하를 죽이고 황자님을 꼭두각시로 세워 제가 권력을 차지하는 거고요. 처벌은… 정석대로 화형이 좋겠지요. 충분한 고문도 필요하겠지만요.”
“흐음… 그대는 꼭 황자보다는 그 계집에게 더 원한이 있는 걸로 보이는군.”
“없진 않습니다. 록사나의 창시자가 바로 그 약혼녀니까요.”
“아, 그런가. 그것 때문에 자네가 골머리를 오래 앓았지.”
록사나에서 약을 만들기 시작한 뒤로 신전에서 만드는 약의 매출은 제법 떨어졌다. 귀족들 중 가벼운 상처들은 그냥 록사나에서 만든 약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다치는 게 일인 기사들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록사나의 약을 썼다.
대신관은 크게 분노해 당장 록사나를 만든 자들을 처벌하고자 했지만 공작이 대놓고 뒤를 봐주고 있어 불가능했다. 공작을 무시하고 밀어붙이기엔 그가 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관은 결국 록사나의 행보를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 원한이 어디 갈까. 남들보다 성격이 훨씬 더러운 대신관이었다. 공작이 죽고 난 뒤에라도 처벌하려 살생부를 하나하나 적어 두고 있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믿게 하지? 나름대로 증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잘해 줄 거라 믿네. 그런데 계집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놈까지 처리하지?”
“화형 전날 은밀하게 접촉하는 게 좋겠습니다. 반려 아닙니까. 조금만 건드려도 대신 죽으려고 할 겁니다.”
대신관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황제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대신관은 지금까지 저를 실망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황제는 그를 믿었다.
“참…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여자는 살려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계집 말인가?”
“예. 결국 처리하긴 하겠지만… 여자가 가진 기운이 좀 수상해서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대신관은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가 가지고 있던 기운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제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이스테라 여신의 기운을 무척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는 조금씩이지만 정말 신탁도 내려왔었는데, 성년이 된 이후로는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거라곤 쪼개 써야 하는 아주 약간의 신성력 정도. 대신관의 신성력은 귀하다는 이유로 이 사실을 감추고 있긴 했지만 여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대신관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 계집이 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건 상관없어. 알아서 하게.”
황제는 예상대로 별생각 없이 대신관의 말을 허용했다.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약으로 황후의 얼굴을 보는 것과 데이몬을 죽이는 것, 이 두 가지 정도였다. 대신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 모든 것은 이스테라 여신의 뜻대로.”
“작은 일에도 만전을 기하도록 하게.”
“예, 걱정 마시지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 * *
시에나는 차분히 돌아갈 짐을 싸고 있었다. 즉위식도 끝났겠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하녀들이 직접 짐을 싸는 시에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시에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런 것쯤이야.”
시에나가 하녀들에게 록사나의 물건들을 선물한 이후 그녀의 호감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평소 하녀들이 좋아하는 록사나의 제품에 대해 이야기한 걸 기억해서 각각의 하녀들에게 맞추어 선물했기에 더 호감을 살 수 있었다.
“후, 다 됐다.”
야시장에서 산 것들도 있고 엘리샤에게 선물 받은 것도 많다 보니 막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짐이 한가득이었다. 시에나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새 정이 든 하녀들이 못내 서운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에나도 그 표정을 보니 괜스레 코끝이 찡해져 왔다.
“또 올게요.”
“네, 자주 오세요.”
“꼭이에요.”
그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정이 담뿍 담겨 있어 시에나가 청아한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또 올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시에나는 이들이 보고 싶을 것 같았다. 문밖에는 데이몬이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가방을 들고 있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기겁해 그녀에게 달려와 가방을 빼앗았다.
“짐이 많으면 부르지 그랬어.”
“그렇게 무겁지도 않은걸요.”
“네 손엔 부채도 무거워.”
“정말….”
유난이세요….
시에나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뒤에서 하녀들이 저들끼리 흐뭇한 표정으로 둘의 애정 행각을 지켜보았다. 황궁에서 하녀 생활을 하다 보면 필수적으로 높으신 분들과 많이 만나게 된다. 어떤 상황이든 감정을 죽이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귀족들이다 보니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서는 소문난 사랑꾼으로 소문났으면서도 뒤에서는 하녀들과 불장난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익숙해져서 환멸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 나타난 데이몬과 시에나 커플은 정말이지 신선했다. 데이몬은 환영받지 못한다고는 해도 황족이었고 평민인 시에나와는 까마득할 만큼 신분이 차이 났다.
하녀와 몸을 나누면서도 실은 평민인 그들을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시에나에게 끊임없이 애정 표현을 하면서도 뭐든 해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시에나를 사람을 넘어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시에나는 그냥 평민이 아니고 제 이름으로 된 사업을 하고 있는 데다 오랜 기간 영지를 다스린 경력도 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하녀들로서는 그런 그녀가 마냥 대단해 보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정문 앞에 다가서자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카이난과 엘리샤, 아이작, 공작, 루이젠이 전부 기다리고 있었다. 시에나를 알아본 엘리샤가 반갑게 다가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시에나. 보고 싶었어요.”
“네? 어제 봤잖아요?”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걸요.”
볼멘소리로 말하는 엘리샤를 보며 시에나가 멋쩍게 웃었다. 엘리샤에게는 정말이지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고민하다 록사나 이야기를 슬쩍 꺼내었는데, 한 시간 내내 록사나의 찬양을 듣고 엘리샤가 즐겨 사용하는 록사나의 제품들을 한 아름 받아 오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이제는 전부 즐거운 추억이었지만.
시에나도 이 푼수 같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엘리샤에게 많은 정이 든 것 같았다. 시에나가 저를 꽉 껴안은 엘리샤를 함께 안고 토닥였다.
“나도 보고 싶을 거예요.”
“자주 놀러 와요. 시에나라면 언제나 환영이에요. 수도에 오면 어디 가지 말고 우리 집에 쭉 머물러요, 응?”
“그럴게요.”
품 안에서 떼어 낸 엘리샤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걸 바라본 시에나의 가슴이 괜히 뭉클해졌다. 안 좋은 사건들도 있긴 했지만 황궁에서 지낸 시간은 정말 의미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고 즐거운 추억들도 쌓게 되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기다리라 하십니다.”
재적을 완료하고 떠나려는 시에나 일행에게 시종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데이몬은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가진 게 많은 폐하께서는 입도 많으신가 보군. 끊임없이 할 말이 생겨나니 말이야.”
황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지 않냐는 말을 고급스럽게 돌려 데이몬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의 부정적인 언사에도 시종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대기해 주셔야 합니다.”
데이몬은 결국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시에나가 그런 데이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격려했다. 즉위식 이후 데이몬은 황제에게 남아 있던 한 줌의 감정조차 털어 버린 듯 보였다. 있을 리가 없는 고운 정, 미운 정을 넘어 그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시에나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 건 알지만 괜히 황제와 데이몬의 사이를 나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안 좋기는 했다. 그래서 혹시 황제가 할 말이 데이몬에게 사과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데이몬은 제 어깨를 두드리는 시에나를 민망한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시에나, 먼저 마차에 들어가 있을래?”
“아니요. 괜찮아요. 금방 오시겠지요.”
시에나의 거절에도 데이몬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시에나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더 말리지는 않았다.
그레이트 홀 앞에 있는 정문이다 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배웅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어림잡아 스무 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 듯했다. 개중에는 신관들도 있었는데, 신관들의 중앙에는 대신관도 있었다. 데이몬이 칼을 겨눈 이후로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걸로 보아 일이 있는 듯했다.
긴 기다림 끝에 정문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황제인가 싶어 급히 고개를 숙였는데 실루엣이 생각보다 작았다.
“시에나 님!”
조금 전에 헤어진 리나가 환한 얼굴로 시에나에게 달려왔다. 시에나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나?”
“이 약병을 방에 두고 가셨더라구요.”
리나가 약병을 양손에 소중하게 들고 오며 말했다. 리나의 얼굴에는 다시금 시에나를 본 기쁨이 그대로 어려 있었다.
“그래? 내가 깜빡했나….”
분명히 다 가지고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시에나가 무심코 리나를 향해 다가갔을 때였다.
“꺅!”
파삭 소리가 나며 약병이 리나의 손에서 그대로 깨졌다. 안에 있던 무색의 투명한 약이 왈칵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베였는지 리나의 손바닥에 그인 실금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약의 일부가 그 실금 사이로 스며들었다. 리나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죄, 죄송해요. 이게 왜… 켁.”
리나는 연신 사과하다 이내 사레들린 듯 격한 숨을 토해 냈다. 말짱한 손으로 막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 틈 사이로 피가 튀었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반응하기도 전 데이몬이 시에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데이몬의 품 안에 들어온 시에나가 토끼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 뒤로 물러서!”
데이몬이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한 걸음 물러서서 리나를 경계하며 칼을 빼 들었다.
“리나!”
“콜록… 시에나 님… 제가 뭘 잘못했나 봐요… 죄송해요.”
그사이 한 번 더 울컥 피를 토한 리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깨진 병을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들고 있다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꺄아아아악!”
조용해진 것만큼이나 빠르게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에나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가을 하늘만큼 맑았던 새파란 눈이 그 생기를 잃고 죽어 있었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의 기운이 리나를 감싸고 있었다. 시에나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리나에게 다가가려 시에나가 몸부림쳤다.
“안 돼!”
“이, 이거 놔요!”
그러나 데이몬은 절대 시에나를 놔 주지 않았다. 수 초 만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이다. 가까이 가서 좋을 게 없는데도 시에나는 울부짖으며 리나에게 다가가려 애썼다. 그때 병사들과 함께 황제가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해야 하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폐, 폐하!”
병사들은 당황하며 황제를 향해 부복했다. 황제는 인상을 찡그리며 병사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게, 하녀 하나가 황자 전하의 약혼녀분이 놓고 가신 약병을 가져오다 깨졌는데… 그 안에 독이 들어 있었는지 하녀가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린 병사 하나가 황제의 말에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공작과 카이난, 데이몬과 엘리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다보는 자들의 불안이었다. 황제는 병사의 설명을 들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에는 차디찬 바닥에 피를 토하고 죽은 하녀에 대한 한 줌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는 얼어붙어 있는 시에나와 그녀를 여전히 품에 꽉 안고 있는 데이몬을 보며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황궁에 쥐새끼를 들였군.”
그 쥐새끼라는 말이 시에나를 일컫는 건 너무나 분명했다. 시에나는 처음으로 황제의 금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데이몬이나 카이난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금색의 눈으로 오만하게 시에나를 훑으며 말했다.
“뭣들 하는가, 당장 죄인을 구금하지 않고.”
* * *
지금껏 황궁에서 머무르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초라한 방 안에서 시에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앉아 있었다. 감정을 내리누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이미 너무 울어 눈이 전부 짓물러 있었지만, 물 한 잔 마시지 않고도 눈물은 너무나 쉽게 흘러나왔다.
“머리 아파….”
새빨개진 토끼 눈을 하고 있던 시에나가 혼자 읊조렸다.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띵했다. 냉정하게 앞의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죽어 있던 리나의 모습이 눈을 감아도 떠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비슷하게 생겨서 잠시 착각했지만 그 약병은 시에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리나는 시에나의 하녀였기 때문에 죽은 게 맞았다.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시에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콜록… 시에나 님… 제가 뭘 잘못했나 봐요… 죄송해요.’
마지막까지 제가 뭘 잘못한 줄 알고 겁에 질려 죽어 간 리나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릿하게 슬픈 한편 분노가 끓어올랐다. 저를 몰아넣고 싶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다른 사람을 희생하지 않는 방법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누군가를 희생시킨 그들이 혐오스러웠다.
‘높으신 분들은 저희를 그분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녀들과 이야기를 했을 때 우연히 나온 말에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던 제가 너무 바보 같았다.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주 대낮에 사람을 죽여 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들이 끔찍했다. 시에나는 짓무른 눈가를 쓱쓱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이 크게 잘못되기 전에 이 일을 꾸밀 만한 사람을 추리하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시에나는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데이몬, 엘리샤, 카이난, 아이작, 공작 각하, 그리고 그 호위 기사들과 짐꾼, 하녀와 시종들, 그리고 신관. 잠깐, 신관?
“그러고 보니 대신관이 그 자리에 있었지.”
데이몬이 대신관에게 칼을 겨눈 후 둘의 사이 역시 눈에 띄게 나빠졌다. 그렇지만 대신관은 시에나 일행이 짐을 싸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진득하니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랬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대신관을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지만 시에나와 대신관은 몇 년 전부터 종종 대립해 왔다. 대부분은 공작 각하의 선에서 막아 주셨지만 이따금 약 판매를 중지하라는 편지나 괴문서를 마르바스 영지로 보내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대신관은 데이몬의 영지를 대신 다스리는 시에나라는 여자가 약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을 확률이 높았다.
시에나가 황궁에 와서 든 생각은, 데이몬과 시에나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보다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데이몬이 마르바스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물론, 시에나가 영주 대리인을 했던 것도 몰랐다.
록사나의 창시자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굵직굵직한 사건이 굉장히 많았는데도 황궁에서 데이몬의 존재에 대해 입막음을 제법 해 왔던 모양이었다. 고위 귀족들이야 알 수도 있었지만, 제가 알기로 그 장소에 고위 귀족은 없었다.
제가 전부터 약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평소 쓰는 약병과 비슷한 약병을 준비할 수 있는 자. 시에나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자는 제가 알기로 대신관밖에 없었다. 또한 그 일은 황제라는 보험이 없으면 불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에나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정말 그런 짓을 한 게 대신관과… 황제라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너무 막막해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매미 한 마리가 63층 고층 빌딩에 달라붙은 꼴이랄까. 시에나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 순간. 덜컥, 열쇠 구멍에 무언가 들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시에나가 흠칫 긴장하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문을 바라보았다. 열쇠 구멍이 철컥,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