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똑똑.
“누구세요….”
“시에나 님. 재봉사 커클렌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시에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생각이 많아 새벽녘에 잠드는 바람에 억지로 뜬 눈이 뻑뻑하고 건조했다.
“이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지.”
커클렌은 영지에서 가장 실력 좋은 재봉사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른 아침인데 그가 왜 시에나의 방문을 두드린 건지. 시에나는 달콤한 이불의 유혹을 힘겹게 견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자 머리가 희끗한 40대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에나는 제 초췌한 모습에 조금은 어색한 모습으로 그를 반겼다.
“커클렌 씨, 오랜만이에요.”
“예, 잘 지내셨지요? 이런, 밤새 잠을 많이 못 주무셨나 봅니다.”
커클렌이 보기에도 시에나의 상태가 영 아니었는지 바로 그녀의 상태를 지적했다. 시에나가 부끄러움에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밤새 생각할 일이 많아서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데이몬 도련님이 새벽같이 의상실을 방문하셨습니다. 급히 시에나 님의 옷을 지어야 한다고요.”
“데이몬… 도련님이요?”
시에나가 당황하며 커클렌에게 되물었다. 커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저는 시에나 님께서 어디 연회에 참여하시게 된 줄 알고 찾아왔습니다만 혹시 모르고 계셨던 일인가요?”
자신이 혹 난감한 짓을 한 건지 걱정하는 커클렌의 앞에서 시에나는 어제 데이몬이 흘리듯이 한 말을 떠올렸다.
‘시에나, 이거 아끼는 옷이야?’
‘네? 그냥 평소에 입는 옷인데요.’
‘열 벌이든 스무 벌이든 세 벌이든 더 좋은 걸로 새로 사 줄게.’
그리고 투두둑, 시에나는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혔다. 재봉사 커클렌을 깨워 새벽같이 제 방에 보내 놓고 데이몬은 어디 간 걸까. 복도 밖을 살피고 있자니 저 복도 맞은편에 삐죽이 튀어나온 수상한 그림자가 보였다. 시에나를 보기 부끄러웠는지 데이몬은 숨어 있었다.
“어차피 겨울옷은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만 저뿐만 아니라 저기 계신 도련님도 함께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아이구, 그러믄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없어도 빼놓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구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에, 천천히 하십시오.”
시에나는 방을 나서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발소리에 그림자가 움찔거렸다. 그림자가 안절부절못하다가 스르륵 사라지려고 할 때 시에나가 선수를 쳤다.
“도련님, 다 보여요.”
시에나가 재빠르게 복도의 모서리를 돌자 있는 걸 딱 들킨 데이몬이 어색하게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몬 역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는지 눈이 판다처럼 퀭해 보였다. 그 맹한 모습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안녕, 시에나. 잘 잤어?”
“푸후, 도련님도 잠 많이 못 주무셨군요?”
시에나가 웃음을 터뜨리며 명랑하게 말하자 데이몬 역시 슬쩍 민망함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에나도 많이 못 잤어?”
“네. 새벽에나 잠들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셔서 커클렌 씨를 부르셨어요?”
시치미를 뚝 떼며 데이몬에게 묻자 그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게, 어제 보니까 시에나 옷이 좀 얇은 것 같아서 도톰한 옷을 지어 줄까 하고.”
“그래서 커클렌 씨를 새벽같이 여기로 부르신 거예요?”
“어어. 오늘은 날이 더 춥더라고.”
“저는 이제 그 얇은 옷 못 입는데.”
“…응?”
데이몬이 더욱 당황하며 되묻자 시에나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만 들리게 귓가에 속삭였다.
“어제 누가 찢어 버렸거든요. 엄청 박력 넘치게.”
시에나의 요망한 속삭임에 결국 2m에 가까운 장정 하나가 광대를 벌겋게 물들였다. 이제야 시에나가 데이몬을 놀리려 물은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이불을 마구 차며 수치스러워했는데, 제 앞에 저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자 갑자기 놀리고 싶어졌다.
“…놀리지 마. 네가 놀릴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데이몬이 마른세수를 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더 놀릴까 했지만 커클렌 씨가 시선 둘 곳 없이 문 앞에 서서 방황하고 있었기에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팔짱을 끼며 그를 잡아끌었다.
“안 놀릴 테니까 도련님 옷도 같이 지어요.”
“내 옷?”
“네. 도련님도 졸업하셨으니 이제 옷 새로 몇 벌 맞추셔야죠. 아, 수도에 있는 옷가게에서 맞춰 오셨을 테니 여기서는 맞추기 좀 그러시려나요?”
“아니, 상관없어. 내 옷을 맞추는 건 생각한 적이 없어서 그랬어.”
“제가 졸업 선물로 해 드릴게요. 옷감, 보석 전부 좋은 걸로 해서 한 벌 해요.”
“내가 너한테 해주는 걸로도 충분한데.”
“저는 도련님한테, 도련님은 저한테 해 주시면 되죠.”
시에나의 방글방글 웃는 모습에 결국 데이몬이 화답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어. 그러자.”
“네, 커클렌 씨.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준비하는 대로 바로 내려갈게요.”
“옙, 알겠습니다.”
“응접실로는 내가 안내하지.”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서 걷는 데이몬을 커클렌이 뒤따랐다. 그 뒷모습을 바라본 시에나가 이내 준비를 위해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 * *
“도련님께서 키가 더 크셨네요.”
치수를 재던 커클렌이 감탄하며 말했다.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겨우 두어 달 전에 쟀었는데, 키가 더 크셨어요?”
“예. 전에 재었을 때보다 반 뼘 정도 크셨는데요.”
이러다가 곧 2m도 넘을 기세였다. 시에나는 데이몬의 성장에 혀를 내둘렀다. 키만 큰 게 아니라 근육도 함께 붙은 늘씬한 몸은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났다. 시에나는 데이몬이 어떤 옷을 짓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자아, 다 되셨습니다. 시에나 님은 다른 방에서 따로 재시겠어요?”
공작새의 깃털로 만든 깃펜에 잉크를 묻혀 데이몬의 치수를 잰 커클렌이 시에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이즈에 예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해 준 배려인 듯했다.
“아니요, 저도 그냥 여기서 할게요.”
“네에, 그럼 이쪽으로 잠시 와 주세요. 도련님께서는 잠시 앉아 계시면 됩니다. 참, 혹 참고하실 만한 스타일이 있으실까 해서 카탈로그를 마련해 왔으니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주저 없이 말씀해 주세요.”
커클렌이 테이블 위에 두꺼운 카탈로그 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았네.”
“네, 시에나 님 손을 이렇게 들어 보시겠어요? 예, 그렇게요. 잘하셨습니다.”
시에나가 팔을 들고 기다리자 커클렌이 조심스레 그녀의 치수를 재었다.
“이런, 저번에 재셨을 때보다 더 마르셨어요. 요즘 잘 못 드시고 계신가요?”
“아, 아니요. 제인이 챙겨 줘서 잘 먹고 있어요.”
“더 잘 드셔야 합니다. 하시는 일도 많으시지 않습니까. 영양실조로 쓰러지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겁을 주는 커클렌의 말에 시에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영 바빠 시에나의 식생활은 식사라는 말보다는 끼니를 때운다는 말이 더 적절했다.
제인이 따라다니며 먹이긴 했지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나 주스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몬스터의 습격으로 바쁜 요즘에는 점점 더 식사에 소홀해지고 있었다.
방금 말을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조용한 데이몬이 어째 불안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앞으로 따라다니며 밥을 먹일 사람이 또 생길 것 같아 시에나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잠시 나갔다 오지.”
“어디 가세요?”
“출출해서 주방에. 다녀올게.”
“예, 잘 다녀오세요.”
데이몬이 나가고 조용해진 응접실에는 깃펜이 종이를 긁는 사각사각 소리만 울렸다.
“두 분은 혹시 결혼하십니까?”
“콜록.”
너무 놀라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시작된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어찌나 기침이 나오던지 치수 재는 것까지 잠시 멈추고 커클렌이 등을 두드려 줄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실언을 했군요.”
“괜찮아요. 궁금하실 수도 있죠.”
“궁금하기로는 사실 온 영지 사람들이 궁금해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시에나가 커클렌의 말에 동의하며 살풋 미소 지었다. 근사한 외모의 미혼 영주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데이몬에게 로맨스를 꿈꾸며 설레하는 뭇 영지 처녀들은 무척 많았다.
시에나를 끔찍할 정도로 아끼는 것도 데이몬의 인기에 한몫했다. 금요일 밤이면 아카데미를 떠나 토요일 아침에 도착해 일요일 밤에 돌아가는 젊은 영주에 대한 이야기는 사용인들의 틈새에서 알음알음 퍼져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둘 외에도 귀족과 평민 사이의 연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을 했을 때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평민이기에 그들은 기를 쓰고 귀족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시에나와 데이몬의 관계는 하녀와 사용인 사이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봐도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매달리는 모양새였다.
주말에 시에나가 영지 시찰을 나갈 때면 데이몬이 꼭 따라붙었는데, 시에나가 뭘 하던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에 설레하는 처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하는 데이몬의 모습이 영지 시찰을 하는 날이면 전 영지에 생중계되었다.
그 스윗한 남자가 모두에게 친절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데이몬은 시에나 외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한때 옆 영지의 남작 영애가 데이몬을 보고 반해 그가 오는 주말이면 모든 일정을 쫓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공작새가 구애를 위해 깃털을 한껏 세우듯 그녀는 데이몬의 앞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옷들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데이몬은 눈앞에 그런 사람을 두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포기할 만도 하건만 오기가 생겼는지 남작 영애는 제 이름을 알리기도 하고 러브 레터를 주고 가기도 하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고백을 하는 등 저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이 열 번이 되도록 데이몬은 관심은커녕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영애는 제게 관심 없는 데이몬 대신 시에나를 점점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쓰레기조차 데이몬에게 더 관심을 받을 것 같았다. 그 고백이 열 번이 되던 날 보다 못한 시에나가 데이몬에게 그녀의 이름을 주지시켰다. 데이몬은 그제야 그 이름을 기억했다. 거기에 대해 충격을 받은 영애는 그 이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일이 또 처녀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무관심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에 한해서는 세상에 다시없을 열정을 보여 주는 차가운 영지 남자가 바로 데이몬이었다.
“아직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시군요. 하긴 도련님께서도 이제 마악 졸업하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커클렌은 슬쩍 시에나의 눈치를 보았다. 보통 이 세계 여자들의 혼기는 열여섯부터 스물넷 내외였다. 시에나는 이제 갓 스물.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기의 중반이라고 생각하는 나이였다.
마르바스 영지는 6년이란 시간에 정말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영지민들의 인생 역시 바뀌었다. 영지를 부흥시키기 위해 시에나는 정말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했다. 영지민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에나가 6년 내내 이 영지에 헌신한 만큼 영지 사람들은 시에나가 꼭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것은 커클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데이몬이 새벽녘 저를 찾아왔을 때 혹 웨딩드레스를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닌가 싶어 후다닥 나온 것도 있었다. 지금 보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시에나를 향한 데이몬의 달콤하고 진득한 시선을 보니 시간문제인 듯 보였다.
“네에, 다 되셨습니다. 가봉 때 다시 한번 올 테니 그때까지 식사 잘 드시고 계세요. 사이즈는 얼마든지 늘려도 되니까요.”
“네, 그럴게요.”
오만 군데서 잔소리가 쏟아져 나와 시에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좋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여기에서 이렇게나 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전부 시에나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가끔 시에나는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혹 현실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예전에는 매일매일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사람이 많아지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시에나. 나 왔어.”
“도련님, 어서 오세요. 그건 웬 거예요?”
시에나가 돌아온 데이몬을 반기다 그가 손에 든 것을 보게 되었다. 데이몬이 나무줄기로 엮은 묵직한 바구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옷 고르는 거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먹으면서 하라고.”
데이몬이 가져온 바구니 안에는 샌드위치와 우유, 빵, 과일 등 먹을 것이 가득했다. 음식들은 전부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려 있어 이야기하면서 먹기에도 부담이 없어 보였다.
“와, 감사해요. 커클렌 씨도 아직 식사 안 하셨지요?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어이쿠, 감사합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온 탓에 허기가 져 있던 커클렌이 반색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시에나가 잼이 발린 샌드위치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응? 이 잼….”
잼을 넣은 샌드위치를 맛본 시에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신선하고 달달한 딸기 향이 그윽하게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잼 맛이었다. 시에나가 혹시나 싶어 데이몬을 바라보자 그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레네톤에서 사 온 잼이야.”
“초겨울이라 구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수도에서 가져오신 거예요?”
“아니, 오기 전에 레네톤 들러서 사 왔어. 시에나 이거 좋아하잖아.”
좋아하긴 하지만, 시에나는 그의 지극정성에 말문이 막혔다. 데이몬의 성격에 졸업식을 치르자마자 그대로 마차를 타고 왔을 게 뻔했다.
연인이 좋아하는 잼을 다른 영지에 가서까지 사 오면서 저는 식사나 제대로 했을까. 그래 놓고도 시에나가 묻지 않았다면 데이몬은 굳이 여기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색내지 않았겠지. 헤아릴 수 없는 애정에 시에나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감사해요…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야. 더 먹어. 많이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은 갓 짠 신선한 우유를 시에나에게 건네주었다. 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우유는 차갑다기보다는 미지근한 온도에 가까웠다. 차가운 우유보다 더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풍부해 시에나가 꿀꺽꿀꺽 우유를 넘겼다.
“이쪽의 옷은 어떠신가요? 수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고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예?”
커클렌이 가져온 카탈로그 북 세 권을 손으로 톡, 톡, 톡 가리키던 데이몬이 말했다.
“전부 제작해. 금액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네.”
“네에!?”
“예?”
시에나가 기겁하며 데이몬에게 물었다. 데이몬은 뭐가 어떻냐는 듯 시에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탈로그 북 한 권에 20벌씩 해서 60벌인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아니. 잠깐만요. 도련님, 갑자기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사라고 하세요. 사실 저는 지금 입는 옷만으로도 충분해요.”
“60벌 정도면 보통이잖아. 수도의 살롱에 나가는 영애들은 하루에 두 번씩도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던데. 60벌을 해도 두 달이면 끝나니, 그다음에는 다음 계절의 옷을 만들면 되겠지.”
데이몬의 엄청난 씀씀이에 시에나가 입을 딱 벌렸다. 대체 수도에 가서 뭘 배우다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련님, 뭐 잘못 드셨어요?”
“아니, 이게 첫 끼인데.”
데이몬은 진심이었다.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간단하게 설득될 것 같지도 않았다. 골이 띵해져 시에나가 머리를 짚었다. 일단 데이몬의 입에 샌드위치 한 조각을 더 넣어 주며 시에나가 설득에 들어갔다.
“이렇게 많은 옷은 필요 없어요. 그리고 영지를 돌보는 데 이런 옷은 적절치도 않고요. 1년에 반은 셔츠에 바지 차림인데 드레스가 왜 60벌이나 필요해요?”
“…남성복 쪽도 보면.”
“아니요!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지금도 옷장은 포화 상태예요. 저 많은 옷을 사서 대체 어디에 넣어요?”
“옷장이야 사면 되고, 방을 두 개쯤 터서 드레스 룸을 만들면 적당하지 않을까?”
이 정도면 적당이라는 말을 아는 게 신기했다. 데이몬의 적당은 대체 어떤 걸까. 시에나는 한숨을 쉬었지만 데이몬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도련님, 아. 커클렌,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피해 줄 수 있을까요?”
“예에. 그러겠습니다.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네, 고마워요.”
커클렌이 눈치 있게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문이 닫히고 시에나가 2차전을 시작했다.
“도련님,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희 영지 지금 드레스를 60벌이나 만들 만큼 예산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정말 드레스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무슨 소리야, 시에나?”
데이몬이 처음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루이젠을 통해 테이모스 가문과의 거래량을 알고 있을 테니 지금 영지가 엄청나게 부유할 줄 알고 있을 테였다. 그러나 병원과 학교, 도서관 등 영지민들의 복지에 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짓다 보니 여윳돈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원하시면 세수 장부를 보여 드릴게요. 허튼 곳에 쓴 건 단 하나도 없어요.”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야. 아,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데이몬이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이게 아닌가.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난 마르바스 영지에서 벌어들인 돈을 단 한 푼도 쓸 생각이 없어. 내가 왜 시에나가 고생하며 벌어들인 돈을 네게 선물하는데 쓸 거라고 생각한 거야?”
도련님께 드레스 60벌을 살 돈이 있다고요?
시에나는 하마터면 그렇게 물을 뻔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스크래치가 난 듯한 데이몬이 그 말을 들으면 더욱 침울해지겠지. 그러나 궁금하긴 했다. 데이몬은 이제 아카데미를 갓 졸업했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나? 공작 각하께 재산이라도 물려받은 걸까.
“오해하지 마. 숙부님께 받은 돈도 아니니까.”
데이몬이 딱 잘라 말하자 시에나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데이몬이 하아, 한숨을 쉬었다.
“시에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해. 영지를 운영하는 동안 제대로 된 돈도 주지 못했으니까.”
“네? 아니에요! 그건 제가 거절해 왔잖아요.”
시에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데이몬이 학생 신분이었을 때, 깜짝 놀랄 만큼 큰돈을 가지고 나타난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시에나의 사업이 잘되고 있어 영지 운영에 문제가 없었기에 딱히 돈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데이몬이라면 있는 돈 없는 돈 긁어서 가져다주었을 게 뻔했다. 시에나는 그래서 처음부터 그 돈을 받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안 그래도 친구들과 한창 놀 주말이나 방학 때 오는 것도 미안하던 차였다. 평일에라도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거나 놀러 다녔으면 했다.
“그럼 그때 돈은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 공작 각하께 받은 용돈이요.”
“시에나,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학생한테 그렇게 큰돈을 주지는 않아.”
그렇긴… 하죠.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데이몬은 그 큰돈을 어디서 만들어 온 건가. 시에나가 의문을 담은 눈동자로 바라보자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학생 때부터 상단을 하나 운영하고 있어. 작은 거지만, 그래도 순수익이 제법 나오고 있어서 쓸 만해.”
“상단명이 뭔지 물어봐도 돼요?”
“어어?”
“상단명이요.”
시에나가 물었으나 데이몬은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상한 거라도 파는 건가. 평소라면 모르는 척해 줄 수도 있겠으나, 시에나는 왠지 모르게 물어야 할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시에나의 직감은 소름 끼치도록 들어맞을 때가 많았다.
“그냥 작은 상단이야, 말해도 모를 거야.”
“저 무시하지 마세요. 이래 봬도 경쟁사들은 아주 작은 곳도 다 꿰고 있다고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이, 빨리요. 도련님.”
시에나의 계속되는 재촉에 데이몬은 결국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디에스 상단이야.”
상단의 이름을 들은 시에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작기는 무슨. 디에스 상단은 나온 지 5년도 되지 않은 신흥 상단이지만, 벌써 제국의 상단 중 열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괴물 같은 상단으로 통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뼈와 가죽, 뿔, 체액 등 재료를 판매하는 일로 시작해 지금은 그 재료들로 만든 마도구와 장식품을 판매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몬스터들 중 대부분은 흔히 보기 힘든 것들이라 그 희소가치는 더욱 높았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귀품들도 디에스 상단에는 굴러다닌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굉장한 상단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니, 시에나는 기가 찼다.
“그런 상단을 운영하시면서 왜 저한테 이야기도 안 해 주셨어요?”
시에나가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자 데이몬이 안절부절못하며 쩔쩔매었다.
“아니, 그냥 굳이 알릴 만한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이런 게 알릴 만한 게 아니면 뭐가 알릴 만한 거예요?”
“그게… 사람마다 숨기고 싶은 비밀 하나쯤은 있는 법이잖아.”
그 말이 꼭 마르바스와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시에나가 어깨를 움찔했지만 데이몬은 알아채지 못하고 연신 그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시에나에게 숨기는 것이 거의 없는 데이몬이었다. 그가 졸업할 때까지 숨기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테였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지만 디에스 상단의 상단주가 도련님이라니, 대단하시네요.”
시에나는 잠시 달콤한 말로 데이몬을 살살 꾀어 보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데이몬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슬쩍 돌린 고개 사이로 붉어진 광대가 눈에 띄었다.
“별거 아니야. 시에나가 더 대단해.”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물건들은 다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디에스 상단 물건은 희귀한 것들이 많던데.”
시에나의 물음에 데이몬이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시에나가 대답을 재촉했지만 데이몬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도련님?”
“그게… 야시장 같은 데서 구하기도 하고, 용병들한테….”
데이몬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아랫입술을 핥는 버릇은 데이몬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몬을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직접 구하신 건 아니죠?”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라며 활짝 웃는 시에나의 앞에서 데이몬은 거의 덜덜 떨고 있었다.
“커클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군. 내가 가서 도로 데려오도록….”
“도련님, 앉으세요.”
시에나의 어둡게 깔린 목소리에 데이몬이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소곳하게 앉은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어요?”
디에스 상단이 취급하는 물건들 중에는 가고일의 뼈나 반룡의 이빨도 있었다. 제 몸집의 50배도 넘는 것들을 데이몬이 사냥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정말 도련님이 그 큰 몬스터들을 사냥하셨다고요? 혼자서요?”
“아주 혼자서는 아니고… 가끔 아이작이 수도에 오면 도와주기도 했어.”
“그런데 수업을 들으셔야 했잖아요? 어떻게 그 많은 양을 감당하셨어요?”
시에나의 계속되는 물음에 거의 포기한 데이몬이 솔직하게 답했다.
“저학년 때에는 수업 끝나면 밤에 다녀왔고, 고학년 때에는 경제학 관련한 수업을 골라 들어서 상단 업무에 대한 보고서를 만드는 걸로 대체했어.”
가면 갈수록 가관이었다. 저학년 때에는 대체 그럼 언제 잠을 잤던 건지. 그러고도 키가 이만큼이나 큰 게 기적이었다.
“그런데 아카데미는 수도에 있었잖아요. 수도의 치안이 여기보다 좋으면 좋을 텐데 그 몬스터들은 어떻게 잡으신 거예요?”
“요 몇 년 새에 수도 근처에 던전이 많이 발생되었잖아. 그래서 던전을 위주로 많이 돌았었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던전에 대체 뭐가 있는지 아시고…!”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상단을 한다는 걸 숨기려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돈을 벌겠다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한다는 걸 알았다면 시에나는 도시락을 싸 들고 말렸을 것이다. 상단이 만들어진 게 5년 전이니, 세상에. 데이몬은 열네 살 때부터 몬스터를 잡고 다녔던 거다.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후우우….”
시에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이몬이 깜짝 놀라 시에나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봤다. 시에나가 성큼성큼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훈훈했던 응접실에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겨울바람을 맞자 마음이 좀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시에나, 화났어?”
“당연히 엄청 많이 났죠!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큰 일을 벌이신 거예요?”
차분은 무슨. 데이몬의 물음에 시에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데이몬이 깨갱 하며 주인의 발에 차인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번에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시에나는 데이몬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먼 산을 바라보고 화를 삭이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도련님, 오실 때마다 가져오신 선물들이요.”
“어, 어?”
“귀걸이, 목걸이 같은 장신구들이요.”
“…응.”
“그거 혹시 전부 진짜예요?”
“…미안.”
맞다는 거네.
시에나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후, 하. 후, 하. 그러자 데이몬이 옆에서 잽싸게 과일주스를 따라 주었다. 시원한 과일주스를 원샷하고 시에나가 탕 소리 나게 주스 잔을 내려놓았다. 데이몬이 그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미안해.”
데이몬은 올 때마다 시에나가 좋아하는 것들을 왕창 사 올 뿐만 아니라 제가 시에나에게 주고 싶은 선물들도 함께 사 왔다.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 귀걸이와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오팔로 만든 반지, 석양처럼 붉게 빛나는 루비가 알알이 박힌 팔찌들과 같은 장신구들은 척 보기에도 학생 신분으로 사기에는 힘들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들이었다.
시에나가 부담스러워하자 데이몬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전부 가품이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때 아랫입술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다.
가품이라고 하니 한결 안심은 되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데이몬은 부득불 주에 한 번씩은 그런 것들을 사 와 시에나의 품에 안겨 주었다.
가져다주는 게 하나같이 너무 고급스러워 보여 의심은 좀 되었지만 진품을 굳이 가품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무심히 넘어갔었다. 그 가품을 공작님께 받은 용돈으로 샀을 거라 생각한 과거의 저는 얼마나 우매했는가.
“미안할 짓을 왜 하셨어요. 저는 정말 가품인 줄만 알고….”
“너한테 싼 걸 줄 수는 없잖아.”
시에나의 눈치를 보면서도 데이몬은 사뭇 당당했다. 데이몬의 명쾌한 지론에 시에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지만 미안해.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
‘싫어할 줄 몰랐다’니. 그런 가벼운 느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저를 속일 셈이었을까. 그리고 대체 왜 한 번도 의심을 하지 못했을까.
시에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몇 년 동안 생사를 오가면서도 제게 말 한마디 하지 않은 데이몬에게. 그리고 그가 목숨을 걸어 만든 돈으로 산 선물을 받으며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제가 혐오스러웠다.
“당연히 싫죠! 제가 도련님 목숨 걸어서 번 돈으로 팔찌에 귀걸이 한다고 좋아할 줄 아셨어요?”
시에나는 제 귀에 걸린 귀걸이를 빼내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페리도트로 만들어진 목걸이도, 금테 중앙에 하얀 오팔을 두른 팔찌도. 둥근 모양의 팔찌가 데굴데굴 굴러가 모서리에 맞고 멈추어 섰다. 시에나의 처음 있는 과격한 행동에 데이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시에나.”
“언제까지 말하지 않을 셈이셨어요? 제가 만약에 출처도 묻지 않고 드레스 60벌을 그대로 수락했다면, 오늘도 얘기하지 않을 생각이셨겠지요?”
“미안해, 시에나. 내가 잘못했어.”
“오늘도 이야기를 안 하는데, 내일이라고 하셨겠어요. 그리고 모레는 하셨겠어요? 저는 계속 그대로 속은 채로 살아왔겠지요.”
시에나의 비꼬는 말투에 데이몬이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조만간 이야기하려고 했어. 조만간 또 출정 나갈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출정을… 나가요?”
“으응, 최대한 빨리 돌아오긴 할 건데 괜찮은 건수가 있어서.”
시에나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 상단은 도련님께 어떤 의미예요?”
“어, 별 의미는 없는데.”
“저와 비교해서는요?”
데이몬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당연히 비교할 수 없어. 내 삶의 의미가 너인걸.”
“그럼 가지 마세요.”
“…응?”
“출정, 가지 마시라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나가지 마세요.”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데이몬이 씁쓸하게 물었다.
“저를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아니면 다른 걸 판매하시거나, 왜 꼭 몬스터를 잡는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나는 너처럼 상상력이 뛰어나 기발한 물건을 개발하거나 하지는 못해.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잘하는 걸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버셔야 하는 이유가 뭐예요? 도련님이 보시기에는 미약하겠지만 저 그래도 도련님 안 굶길 자신 있어요. 아주 풍족하진 않지만 삼시 세끼 맛있는 밥 먹고, 철마다 좋은 곳에 놀러 가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건가요?”
“네게 그렇게까지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런 거라도 하지 않는다면 네게 진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어.”
“굳이 갚을 필요 없어요. 그냥, 그냥 제 곁에 함께 있으면서 살아가면 되잖아요.”
시에나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에 대한 부채 의식이 그렇게 깊었던 것일까. 그녀는 거의 울고 싶어졌다.
“전에 일국의 왕처럼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제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네 옆에 붙어살면서 널 갉아먹는 기생충이 되고 싶지 않아.”
“결국 계속하시겠다는 소리네요. 뜻이 강경하시니 말리지는 않을게요. 그치만 알아 두세요. 그거, 도련님의 자기만족이라는 거.”
시에나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데이몬은 상처받은 눈빛을 했지만 시에나는 무시하고 그를 지나쳤다. 쾅, 문을 열고 나가자 이 이야기를 모두 들었는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커클렌과 하녀들이 보였다. 시에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고 화나는 일이었다. 시에나는 한밤중이 되도록 화가 풀리지 않았다. 일부러 식사도 하지 않았다. 제인과 데이몬이 수시로 문을 두들기고 밥을 먹으라 했지만 없는 척 입을 꽉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데이몬이 거의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기에 시에나는 문 열면 다시는 안 보겠다고 엄포까지 놓아 겨우 돌려보냈다. 사실 데이몬에게 화난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몇 년을 살았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한심한 시에나.”
반짝이는 보석이 다 무언가, 드레스가 무언가.
제가 이 세계에 남고 싶은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데이몬인데.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커 보았자 30m가 넘는 반룡보다 클까. 삽화와 설명으로만 들은 반룡과 싸우는 데이몬을 생각하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물론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되면 마르바스가 나오겠지만, 그라고 해도 인간이 아닌 것과 싸워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잠깐, 마르바스?
시에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에나가 알기로 마르바스는 데이몬과 가끔씩 기억을 공유한다. 그렇게 뻔질나게 나가서 몬스터를 잡았는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르바스는 거기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 시에나가 데이몬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으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잡담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데이몬이고 마르바스고 몇 년 동안 저를 속여 온 것이다.
“와 진짜 둘 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자 겨우 가라앉힌 화가 한순간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아, 이건 좀 따져야겠다.
시에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데이몬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벌컥 열고 싶은 심정을 무시하고 시에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어 시에나는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꼼꼼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종종 이렇게 방문을 열어 두었다. 잔소리를 하기에는 알게 된 이유가 너무 찔리는 것이라 계속 넘어갔더니 여태껏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찰칵, 방 안에 들어온 시에나가 문을 잠갔다.
넓은 침대에서 데이몬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길이가 긴 침대인데도 데이몬의 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더 큰 침대를 사야겠다 생각하며 시에나가 데이몬의 앞으로 걸어갔다.
달빛에 비친 콧날과 턱선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내리깐 속눈썹은 저보다 더 긴 것 같았다. 시에나와의 일이 충격적이었는지 미간에는 평소 잘 잡히지 않던 주름까지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정말 근사했다. 화나서 왔는데도 그의 얼굴을 보자 화가 조금 풀릴 지경이었다. 자신의 외모 지상주의를 원망하며 시에나는 데이몬의 미간을 조심스레 눌러 펴주었다. 이내 데이몬의 미간이 온전해졌다. 시에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이몬은 예민한 것치고는 잠을 잘 깨지 않았다.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
시에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평소처럼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눈을 떠야 하는 마르바스가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귓가에 다시 한번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읍…!”
시에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침대에 누워 있던 마르바스가 어느새 시에나의 위에 올라타며 거칠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금껏 그를 불렀던 이래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시에나는 당황하며 마르바스를 밀쳤지만 그는 땅에 단단히 박힌 반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이몬과의 부드러운 키스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르바스는 거칠게 시에나를 몰아쳤다. 시에나의 미약한 반항도 귀찮았는지 한 손으로 가볍게 손목을 쥐자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으읏, 응…!”
갑작스레 당한 일에 당황하기도 잠시, 화가 난 시에나가 마르바스의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 작은 폭력이 귀여웠는지 마르바스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내 그가 시에나의 턱을 잡고 다시 입을 맞춰 왔다.
“흐으….”
턱을 잡히자 다시 한번 깨물려고 해도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르바스가 그런 시에나의 입 안을 유유히 유영했다. 시에나가 그를 노려보았지만 마르바스는 두 눈을 요사스럽게 휠 뿐,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응-. 으읏….”
축축한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시에나의 혀와 얽혔다. 고른 치열과 설소대를 훑은 혀가 이내 입술 밖으로 빠져나와 볼과 코, 목을 강하게 빨아 대었다. 마치 시에나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설탕 과자라도 되는 듯이.
“이게 뭐 하는 짓…!”
“쉬, 너무 큰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깰 거야.”
시에나가 버럭 화를 내자 마르바스가 그런 시에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상 몰래 들어온 것이기에 시에나는 그 말을 듣곤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귀엽긴.”
시에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며 마르바스는 이로 잘근잘근 귓불을 씹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예민한 귀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하으, 하… 하지 마…! 응…!”
“6년 내내 참았는데 어떻게 그만둬.”
연한 귓바퀴를 입 안에 넣었다가 그대로 미끄러지듯 내려와 귓불을 빨고, 구멍에 뜨거운 숨결을 넣자 시에나가 자지러졌다.
“흐윽, 그만둬어….”
울음 섞인 신음에도 끊임없이 시에나를 괴롭히던 마르바스가 그녀를 실컷 가지고 논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마르바스를 노려보는 시에나의 눈가가 노긋이 젖어 있었다. 마르바스는 시에나의 눈가를 손으로 훑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난 네가 우는 게 좋아. 아무 힘도 없으면서 바르작거리고 찔찔 짜고 반항하는 게 미치도록 예뻐.”
“미쳤어….”
시에나가 최대한 독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낄낄거렸다. 그 미소에 시에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마르바스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시에나가 입술을 닦아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 왜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
“현실에서나 안 했지, 상상에서는 천 번도 더 해 온 일이었을 뿐이야.”
“헛소리 말고. 입술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
“아아, 그렇게 약속한 적도 있었지. 그런데 네가 말했잖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게 무슨….”
지나가다 알려 준 속담을 인용하는 마르바스의 속셈이 무엇일까. 시에나는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10년은 아니지만, 6년쯤 지났으니 우리의 관계도 조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지.”
“나 지금 너랑 장난할 기분 아니야.”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난 지금 살아왔던 것 중에서 제일 진지한데.”
“그렇게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하는데 어떻게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
시에나의 화난 말투에 이내 마르바스가 묻어 있던 웃음기를 털어 냈다.
“그래? 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웃고 있어도 기분은 존나 더러운 거.”
그 사나운 말투에 시에나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당황하는 모습이 흡족한지 마르바스가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 역시 기분 안 좋은 건 마찬가지야. 어떻게….”
“지금까지 둘 다 쌍으로 널 속여 왔냐고?”
정곡을 찔린 말에 시에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따위 짓거리를 하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에나가 그를 확 밀치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비켜!”
“그건 안 돼. 이대로 도망칠 거잖아.”
“도망 안 칠 테니까 비켜. 무거워.”
“얘기 듣다 보면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족쇄라도 걸어 놔야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건지. 시에나가 마르바스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시에나가 그 상태 그대로 마르바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럼 물어볼게. 너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마르바스는 잠시 시에나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짓말 안 했는데. 이야기를 안 한 거지.”
“말 돌리지 마! 아무 문제 없이 학교생활 하고 있다며 날 속였잖아!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으면 언질이라도 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시에나가 마르바스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깔린 상태에서 쥔 멱살인지라 그렇게 위협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시에나로서는 최고로 위협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제 제국에서 이 육체보다 강한 건 없다고. 몬스터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가끔 위험할 때는 내가 나섰지만, 3년 전부터는 나오게 될 필요도 없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얘는 강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마르바스의 태도가 짜증이 나 시에나는 그의 허벅지를 발로 차 버렸다. 잔뜩 독이 올라 사나운 시에나의 태도에도 마르바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었다.
“남은 심각한데 뭐가 그렇게 웃겨?”
“그냥.”
그렇게 말하며 마르바스는 시에나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엎드렸다. 묵직한 무게감에 시에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에나.”
귓가에서 들려오는 녹작지근한 음성에 시에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음성인데도 불구하고 몹시 수상하고 불안하게 느껴졌다. 알 만하다는 듯 마르바스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넌 내가 싫지.”
“뭐…?”
“네가 사랑하는 연인의 몸을 좀먹는 괴물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렇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 시에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6년간 아무 말도 없다가 대체 왜. 시에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라져 줄까?”
쿵. 마르바스의 말에 시에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꼭꼭 숨어서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말아 줄까.”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뭔데?”
시에나는 마르바스를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그냥 할 리가 없었다.
“대신.”
그럼 그렇지. 분명 이상한 조건을 붙이겠지. 마르바스는 오만한 눈으로 시에나를 느릿하게 훑었다.
“나랑 해.”
시에나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 지금 뭐라고….”
“데이몬이랑 하기 전에 나랑 한 번 하자고.”
빡, 시에나가 마르바스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맞을 줄 몰랐는지 마르바스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미쳤어? 몇 주 못 봤다고 아주 정신을 놨구나?”
“진심인데. 너희 곧 할 거잖아.”
마르바스의 직접적인 말에 시에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그제야 시에나는 마르바스가 제게 억지로 입 맞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걔랑 하기 전에 나랑 먼저 해. 그럼 평생 둘 사이 방해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마르바스의 눈은 진심이었다. 시에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입 한 번 맞춰 보지 않은 둘이었다. 왜 지금 와서 이러는 걸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여자는 처음을 잊지 못한다며. 그게 내가 되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귓불을 잘근 씹었다. 시에나가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 마, 미친놈아!”
“잘 생각해 봐. 처녀혈 안 나온다고 널 버릴 남자도 아닌 거 알잖아. 단 한 번이야. 한 번 하면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하잖아.”
“우리가 그럴 사이도 아니잖아. 지금까지 우린 겨우….”
손만 핥아왔을 뿐이면서. 하지 못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겨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색정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6년 내내 겨우 손만 핥으면서 마르바스는 뼈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작은 틈만 보였다면 짐승처럼 달려들었겠지.
“말을 못 하시네. 우리 사이가 말 한마디에 정의하기엔 좀 복잡하기는 하지?”
마르바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시에나가 울컥해서 물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그리고 뭐, 한 번 하면 다시는 안 나온다고?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난 지금까지 거짓말한 적 없어.”
그런 치가 아카데미 밖으로 애가 나도는데 잘 지냈다고 했지? 시에나가 세모눈이 되어 그를 노려보자 그가 은근슬쩍 덧붙였다.
“말을 안 한 적은 있지만.”
“난 널 신뢰하지 않아.”
“왜? 6년 내내 나만큼 약속 지킨 사람이 누가 있었다고. 신뢰 하나는 탄탄하지 않아?”
신뢰? 마르바스에게 신뢰라는 말이 가당키는 한가. 계약 내용을 세세하게 하지 않은 시에나의 잘못도 있지만 마르바스는 6년 내내 입과 중요 부위를 제외한 시에나의 몸을 쪽쪽 빨아 대었다.
뽀뽀가 아닌 애무에 가까운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시에나는 질색을 했지만 약속하지 않았냐고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기에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마르바스는 시에나가 정한 곳 이외의 부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성실하다고 하면 성실하달까. 그랬기에 오늘 마르바스의 입맞춤이 시에나에게는 몹시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잖아.”
“그래서 그게 뭐?”
“이 눈, 코, 입, 머리카락, 체향, 몸 전부 같아. 눈 감으면 너도 헷갈리면서.”
그렇게 말하며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물었다. 야한 혀 놀림에 시에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가 도련님인 건 아니야.”
“도련님, 도련님. 대체 그놈이랑 내가 뭐가 그렇게 다르지?”
마르바스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그의 금안이 흉포하게 들끓었다. 그에 비해 시에나의 눈동자는 심해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도련님은 너처럼 이렇게 모든 관계에 대해서 조건을 걸지 않아.”
“빌어먹을, 나라고 조건을 걸고 싶어서 걸었어? 이렇게 안 하면 봐 주지도 않았을 거잖아!”
마르바스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울분을 토하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두렵게 느껴지겠지만, 시에나는 그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구름이 지나가고, 창문 안으로 달빛이 스몄다. 그의 비참한 얼굴을 달빛이 섬세하게 비추었다.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어! 네 연인한테 붙어먹는 기생충 취급하는 것도 알지만 견뎠어. 네 머리카락부터 뼛속까지 다 씹어 먹고 싶어도 질겁할 거 아니까 6년 동안 꼬리 말고 살았잖아. 혐오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개처럼 발바닥만 핥고 살았어. 날 싫어하는 네가 너무 미운데, 널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어. 도저히 이런 짓 그만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마르바스의 민낯에 시에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사내가 어쩐지 어린아이만큼이나 작아 보였다. 마르바스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나와 깍지를 낀 투박한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난 기본적으로 그와 감정을 공유해. 그 말은… 데이몬이 너에게 느끼는 감정과 내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이 같다는 거야. 데이몬이 널 가지고 싶다 생각할 때 나 역시 같은 감정을 느껴. 그래서 같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안에 들어 있을 때 네가 데이몬에게 장난치고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게 미치도록 질투가 났어. 그래도 참았어. 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니까.”
“마르바스.”
“그렇지만, 그렇지만 도저히 데이몬이 네 몸을 가지는 걸 볼 자신까지는 없어. 그걸 볼 때마다 결국 주인공은 걔고 난 네가 주는 이 찔끔찔끔한 동정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라도 되는 양 받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마르바스는 아프게 웃었다. 그 쓰린 미소에 시에나의 가슴에도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네 동정 맛있어. 진짜 맛있는데, 한 번만이라도 동정 말고 다른 걸 받아보고 싶어.”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항상 강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그가 무너진 모습을 보자 시에나 역시 충격이 컸다. 진지한 일이라고는 세상에 하나도 없는 듯이 시에나를 대하던 마르바스였다. 그가 이렇게 혼자 오랜 시간을 속으로 썩이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라질게. 안으로 꽁꽁 숨어들어 다신 나오지 않을게.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기회잖아. 나만 없으면, 그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시에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르바스가 간절한 목소리 호소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웠다.
“정말, 다신 나오지 않을 거야?”
시에나의 물음에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시는.”
마르바스의 대답에 시에나의 가슴이 창으로 쿡 찔린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처음부터 혼란스러운 존재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할 이야기를 짐처럼 마음에 쌓아두는 동안, 마르바스는 시에나에게 점점 혼돈의 대상이 되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동정일까, 애정일까, 혐오일까. 혹은 전부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존재하는 한 저는 언제나 이렇게 혼돈 속에 살겠지.
“…좋아.”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마르바스 역시 시에나가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는데, 순해 보이는 그 눈이 꼭 데이몬의 것과 닮아 있었다.
“아…!”
마르바스는 시에나가 정정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시에나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은 마르바스가 그대로 제 입에 가져다 대었다. 6년간 일상처럼 해온 행위인데도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으읏….”
사탕을 빨아 먹듯 데이몬이 시에나의 검지와 중지를 입 안에 넣고 빨자, 저도 모르게 입 안에서 한숨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작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빠는 것뿐인데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압력이며 오돌토돌한 입천장,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와 언뜻언뜻 부딪히는 이가 그렇게 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흐으….”
참을 수 없이 몰려드는 쾌감에 시에나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6년 내내 그에게만 길들어진 손가락은 주인을 만난 듯 착실하게 반응했다. 손끝에서 시작한 열기가 서서히 온몸의 피를 달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지나 손바닥과 팔목 안쪽의 여린 살에 입 맞춘 마르바스가 이내 시에나의 옷깃을 하나하나 풀어 헤쳤다. 마르바스가 끈 하나면 풀리는 잠옷의 리본을 당기자 옷이 흘러내리며 시에나의 하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장작불이 꺼져가는 방 안에서 맨몸이면 추울 만도 하건만 마르바스의 몸이 대장간의 용광로만큼이나 뜨거운 까닭에 시에나는 한 줌의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윽.”
작게 신음을 흘린 마르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뭐에 좀 찔렸나 봐.”
그는 그렇게 말하며 평소의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변했다. 시에나의 옷을 벗긴 그가 상의도 빠르게 탈의했다. 얼굴에는 소년 같은 미소를 띠고 있으면서 몸은 전쟁터에서 평생을 구른 노장만큼이나 단단했다.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몽롱한 눈길로 그의 몸을 훑으며 손가락 끝으로 근육과 근육 사이를 덧그렸다. 탄탄한 근육 위로 시에나의 여린 손가락이 훑을 때마다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생각보다 적극적이네. 목석처럼 굳어 있을 줄 알았는데.”
마르바스가 놀리듯 말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시에나가 손을 떼더니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마르바스가 청량한 웃음을 터뜨리며 시에나를 와락 껴안았다.
“어떻든 좋아. 예뻐.”
“조, 조용히 해….”
“누가 들을까 봐 그래? 아무도 들을 일 없어. 듣는다 해도 누가 감히 여기에 들어올 수 있겠어.”
네 말이 부끄러우니까 그렇지!
시에나가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켰다. 단단하고 탄력 있는 마르바스의 몸과 매끈하고 부드러운 시에나의 몸이 얽히고설켰다. 시에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저를 단단하게 껴안은 마르바스에게 벗어나려 버둥대었다.
“무거워….”
시에나가 볼멘소리로 말하며 바르작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마르바스는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어 두고 놔 주지 않았다. 결국 빠져나가지는 못하고 겨우 몸을 뒤집는 데에만 성공한 시에나가 제 등으로 다가와 입 맞추는 마르바스의 행동에 헉, 숨을 들이켰다.
“등이 크림색이야. 이대로 앙 물면 크림 맛이 날 것 같아.”
“너, 너어… 흐읏.”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목뼈부터 등까지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처음 겪는 야릇한 감각에 시에나가 깜짝 놀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체 이 몸뚱이는 어떻게 된 건지, 뭘 만지기만 하면 필요 이상으로 반응해 버린다. 이내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등에 입을 맞추며 틈새를 파고들어 기어코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시에나가 숨을 들이켰다.
“조금만 만져도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이 부드러워.”
“시, 시끄… 흣.”
데이몬일 때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행동에 패닉에 빠지는 것도 잠시, 그가 가슴을 만지며 살에 입을 맞출 때마다 몸에서 이상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으… 흐으….”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시에나가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 긴장감이 마르바스에게 전해질 정도였다. 마르바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렇게 힘주면 내일 힘들어져.”
“사, 상관 마….”
“그래 뭐, 긴장이야 내가 풀어 주면 되지.”
시에나의 등에 입 맞추던 마르바스가 점점 몸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하던 시에나가 경악했다. 그의 혀가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풀고 있잖아.”
“거긴 더러운 데야…!”
“매주 나한테 온몸이 다 빨려놓고도 아직도 순진하네. 내가 이걸 더러워할 거라 생각하고.”
음담패설에 가까운 마르바스의 말에 시에나의 얼굴이 화르륵 타오르며 잠깐 긴장이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르바스가 기어코 혀로 안을 헤집었다.
회음과 질구에 이어 그 안쪽까지 빨아 대는 행동에 시에나가 경악했다. 제가 생각한 건 절대 이런 게 아니었다.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아니, 그렇게까진 아니라도 적어도 이렇게 음탕하고 수치스러운 느낌일 줄은 몰랐는데.
한참 시에나의 꽃즙을 빨아 대던 마르바스가 일시에 행동을 뚝 멈추었다. 옅은 신음이 들려온 것도 같았다. 시에나가 그런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꺅!”
“역시 이게 편하겠어.”
그와 동시에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다리를 쫙 벌렸다. 다리가 한계까지 벌어지자 시에나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던 내밀한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이게 무슨….”
시에나가 급히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마르바스가 먼저 허벅지를 팔꿈치로 누른 채 다른 쪽 발목을 손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다. 시에나가 벗어나려 버둥거렸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었다.
저의 것을 빤히 바라보는 마르바스의 시선에 시에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타올랐다.
“보지 마-!”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한 사람한테 너무하네.”
마르바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툴툴대었다. 시에나는 아무리 낑낑대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자, 더 크게 반항하는 대신 손을 뻗어 마르바스의 눈을 가려 버렸다. 눈이 가려진 마르바스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렸다.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넌 정말 똑똑해. 가끔은 바보 같은 짓을 하지만 말이야.”
“내가 언… 흐으으…!”
그 말과 동시에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처박았다. 맛있다는 듯 시에나의 내밀한 곳까지 샅샅이 빨아 댈 때마다 그녀가 교성을 질렀다.
“아, 하아. 하지, 하지 마아. 아, 응…!”
“하, 여기에 나 몰래 꿀이라도 뿌려 놨어? 미치도록 달아.”
수치심과 쾌락이 뒤섞여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내 시에나의 안으로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아…!”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는 구멍은 정말 혀가 지나갈 작은 틈새만큼 벌어졌다. 즈읏, 즈읏. 긴장으로 잠시 말랐던 안이 마르바스의 혀가 지나갈 때마다 타액으로 점점 젖어 들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감각에 발가락이 곱아 들고 머릿속에 전류가 튀었다. 혀로는 안은 헤집으면서 손가락으로는 그 음핵을 매만졌다.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왕복 운동을 할 때마다 시에나가 자지러졌다.
“응, 아, 아, 흐응. 흣… 아흑…!”
마르바스가 안을 파고들 때마다 속절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 몸에 이런 감각이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나 이상해…! 아, 흐…!”
그가 강하게 안을 빨며 제 음핵을 비빌 때마다 쾌감이 점점 차올랐다. 한계치에 다다른 쾌락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린 입 사이로 타액이 흘렀다.
“마르바스, 제발. 제발 나와…!”
오줌을 쌀 것처럼 아랫배가 간질간질해 참기가 어려웠다. 이대로 가다간 침대 위를 적실 판이었다. 다급해진 시에나가 제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마르바스를 밀치고 때렸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야속하게도 속도를 더 올렸다.
“나, 나와…! 나오라구…! 으흑, 아, 아아아아-!”
강한 쾌감이 머리를 때리는 것과 동시에 질구에서 왈칵, 애액이 흘러나왔다. 투명하고 점성 있는 애액이 엉덩이 골을 타고 내려가 시트를 적시기도 전 마르바스가 그것을 전부 제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춥, 추웁. 음란한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는 그것들을 말끔히 빨아들이고 난 뒤에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마르바스의 미소 띤 얼굴로 미루어 보아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시에나는 노긋이 젖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은데 한 번의 절정을 겪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 말을 하긴커녕 정신을 차리기조차 어려웠다.
“나쁘지 않았나 보네.”
마르바스가 땀으로 젖은 시에나의 날씬한 배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배꼽을 중심으로 오목하게 파인 부분을 장난스레 매만지는 그 손길에 다시금 몸이 달아올랐다.
나쁘지 않았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성년을 맞이하고 몸이 완전히 무르익었지만 시에나는 자위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데다 누구에게 물어볼 내용도 아니었고, 매일매일이 바빠 지쳐 잠드는 바람에 성욕도 거의 생기지 않았다. 저는 혹시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시에나는 정말이지 제가 오줌을 싼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감각이 완전히 달랐다. 온몸의 세포가 일시에 살아나는 기분. 깜깜한 터널을 지나 환한 빛에 감싸이는 것 같았다.
한숨 같은 숨을 한참 토해 내던 시에나가 몽롱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르바스가 옆으로 돌아서 제 바지를 벗고 있었다. 속옷까지 전부 벗은 마르바스의 맨몸을 본 시에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보는 건 처음인가?”
마르바스가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의 위로 올라탔다. 시에나의 배 위에 마르바스의 성기가 묵직하게 얹혔다. 슬쩍 쳐다본 그것은 마르바스의 몸과 별개의 생물인 것 같았다. 제가 상상했던 작고 귀여운 크기의 분홍색 성기와는 전혀 달랐다.
무성한 검은색 수풀 사이로 보이는 검붉은 양물은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숨겨 왔나 싶을 정도로 거대하고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어 징그러웠다. 시에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네 안으로 들어갈 내 자지.”
말도 안 돼. 어렸을 적 몸을 닦아 주며 은근슬쩍 느껴졌던 데이몬의 것과는 정말이지 전혀 달랐다. 어리고 귀엽고 순진했던 제가 생각한 어린 시절의 데이몬이 와장창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아카데미에서 뭘 먹으면 이렇게 크는 거지. 시에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린아이 손목만 한 성기는 이따금 저 혼자 꺼덕이며 프리컴을 흘리고 있었다. 시에나가 그의 페니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징그러워….”
“징그러워?”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질색하는 말투가 재밌다는 듯 큭큭대며 손가락으로 시에나의 음순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난 귀엽기만 한데.”
“읏, 뭐 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시에나가 다리를 모았다. 마르바스가 낄낄 웃으며 시에나의 애액에 젖은 제 손가락을 맛있다는 듯 빨았다. 하얀 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새빨간 혓바닥이 쓸데없이 야했다.
“나도 사실 의문이긴 해. 이렇게 비좁아 보이는 곳으로 대체 어떻게 들어가는 건지.”
데이몬이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시에나의 손을 제 자지로 잡아끌었다. 뜨끈뜨끈한 그의 페니스를 시에나의 손이 감쌌다.
“윽….”
시에나가 가볍게 쥔 것만으로도 마르바스는 작게 첫 신음을 토해 냈다. 안 그래도 커져 있던 그의 것이 꿈틀대며 더욱 커져 시에나가 질겁하며 손을 떼어 냈다. 제 손안에 다 쥐이지 않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제 안으로 들어온다는 걸까. 시에나는 두려움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무서워?”“…응.”
“솔직하네. 귀엽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어 고맙다는 듯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쓰다듬었다.
“더 느껴 줘. 어떤 감정이든.”
“더… 무서워하라는 거야?”
“뭐든. 고통, 두려움, 쾌락, 슬픔, 기쁨. 전부 느끼고…전부 기억해 줘.”“뭐…?”
“그리고 내가 사라지더라도, 오늘 있었던 일만큼은, 내가 있었던 사실만큼은… 최대한 오래 기억해 줘.”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둥근 이마에 담백하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의 외로움이 너무나 절절히 느껴지는 말에 시에나의 마음이 저렸다. 마르바스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시에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시에나….”
“아, 읏…!”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밑에 제 것을 비비기 시작했다. 마르바스의 자지가 시에나의 음핵을 자극할 때마다 그녀가 몸을 잘게 떨었다. 선단의 끝부분에서 방울방울 나온 프리컴과 애액이 섞여 마르바스가 움직일 때마다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시에나의 얇고 가는 금색 체모를 본 마르바스가 피식 웃었다.
“음모도 귀엽네.”
“미, 미쳤어… 흐으….”
시에나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면서도 저는 어찌나 여유로운지 이렇게 야한 말을 툭툭 던졌다. 안 그래도 새빨간 딸기 같던 시에나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런 그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고 싶다 생각한 시에나가 어설프게 그의 몸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마르바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에나가 하는 행동에 집중했다.
만져 보기까지 한 건 좋은데 본격적으로 하려니 어딜 만져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시에나는 그의 단단한 등을 감싸며 마르바스가 아까 제게 한 것처럼 손끝으로 부드럽게 그를 자극했다.
“아, 너무 좋아….”
마르바스는 표현이 직설적이고 에둘러 말할 줄을 몰랐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마르바스의 긍정적인 표현에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긴 시에나가 그의 등골을 훑으며 쇄골 밑에 입을 파묻었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은 살이라곤 없어 빨기 쉽진 않았다. 시에나는 당황하고 있다가 문득 그의 유두에 시선을 두었다.
마르바스의 젖꼭지는 흥분으로 인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어 다른 곳에 비해서는 훨씬 빨기 좋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남자도 여기에 흥분하는 걸까. 문득 의문을 가지던 시에나가 천천히 몸을 내려 그의 유실에 입술을 대었다.
“윽… 시에나….”
몇 번 빨지도 않았는데 즉시 신음이 튀어나왔다. 시에나의 입술이 유두를 덮고 이내 그녀가 그것을 강하게 빨아 대기 시작했다. 어설픈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결국 마르바스도 관계는 처음이었다. 비교 대상이 없는 섹스는 서로에게 최선이고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춥, 춥…. 야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시에나는 그의 젖꼭지를 빨며 마르바스의 온몸을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마르바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의 눈에서 서서히 이성이 사라졌다.
“응…!”
콱, 시에나의 머리칼을 아플 정도로 잡아챈 마르바스가 거칠게 그녀에게 입을 맞춰 왔다. 너무 갑작스러워 서로의 이가 부딪히는 바람에 아플 만도 하건만 마르바스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시에나가 입맞춤을 받아 내는 것도 힘겨워하는데, 밑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흐으…!”
마르바스가 뭉뚝한 선단을 시에나의 입구에 대고 있었다. 그 거대한 크기와 열기에 시에나의 눈이 공포에 젖어 들었다. 다가올 파열의 시간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얼마나 아플까. 많이 아프겠지. 시에나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바르작거렸지만 마르바스는 정확히 입구에 제 것을 가져다 대었다.
“아읏…!”
역시나 꽉 닫힌 입구는 침입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마르바스의 몸에 비해 시에나의 체구가 너무 작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마르바스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밀어 대는 압력에 시에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아… 개새끼, 아까부터 진짜….”
마르바스가 낮은 목소리로 욕을 뇌까리며 고통스러워하다 시에나의 몸 위로 털썩 쓰러졌다. 힘을 뺀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마르… 바스?”
시에나가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겨우 몸을 일으킨 마르바스의 표정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마르바스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침대를 엉금엉금 기었다. 그의 표정이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져 괴로웠다. 마르바스가 향한 곳은 침대 바로 옆의 탁자였다. 탁자 밑에 달린 서랍에서 호신용 단검을 꺼낸 마르바스가 검집에서 단검을 빼더니 그대로 제 허벅지에 푹 내리꽂았다.
“……!”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에나는 경악해 마르바스를 바라보았다. 정녕 미친 건가. 시에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손속에 어떤 정도 없는 단호한 행위였다. 어찌나 깔끔하게 박아 넣었는지 단검이 제법 깊숙이 박혔는데도 불구하고 피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생살을 찢고 검을 박았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르바스의 고개가 푹 꺾였다. 시에나는 공포에 질려 차마 그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괴기스럽게 꺾여 있던 그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어쩐지 그 모습에 뒷골이 서늘해 시에나는 제 밑에 있는 이불을 주워 몸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 그는 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마침 달이 구름에 가린 뒤라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마르바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당장 호된 잔소리를 쏟아부으며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너무나 차갑고 뾰족뾰족해 어쩐지 다가가기가 두려웠다.
“…시에나.”
장난기 하나 없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차가우면서도 격정적이었다. 시에나가 흠칫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구름이 막 걷히고 달빛이 그들의 창가를 비추고 있었다. 상처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다리에 박힌 단검 때문에 난 상처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이 엉클어지고 다쳐 생긴 상처였다.
심해로 가라앉은 듯한 눈동자가 시에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까만 해도 반짝였던 눈동자가 암울하게 젖어 들어 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겨 있던 동공이 줄어들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시에나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나야.”
데이몬이었다.
“어떻게….”
시에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데이몬 앞에서 벌거벗은 제가 너무도 창피하게 느껴졌다. 꼭 남편에게 불륜을 들킨 아내가 된 기분이었다.
“처음 해 봤는데 불가능하진 않네.”
데이몬은 남의 살에 박힌 검을 뽑는 것처럼 무심하게 허벅지에 단검을 뽑아냈다. 피슷, 단검으로 인해 막혀 있던 피가 주르륵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얀 시트가 순식간에 붉게 젖어 들었다. 시에나가 아연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 고통을 주면 때론 이렇게 바뀌기도 하나 봐.”
“알고… 계셨어요?”
“뭘?”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시에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빌어먹다 못해 주제도 모르고 너를 탐하려 한 것? 아니면… 매주 밤마다 네가 마르바스를 불렀던 것?”
“도, 도련님.”
시에나가 두려움에 이불 뒤로 숨자 데이몬이 으르렁거리며 그런 시에나를 깔고 앉았다. 데이몬이 힘을 줄 때마다 피가 이불을 적셨으나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표정 한 점 없이 차갑게 시에나를 마주했다.
“피가 많이 나요. 치료를….”
“왜 그랬어?”
“네?”
“왜 그 자식이 사라지겠다는 조건을 걸었는데도 응했던 거야?”
“저는….”
도련님을 위해. 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에나가 대답하는 대신 데이몬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넌… 그 자식 좋아하잖아.”
“아니에요. 저는 도련… 도련님을….”
시에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데이몬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데이몬의 상처받은 눈동자를 보고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1년 전이야.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게.”
* * *
평소보다 두어 시간 정도 일찍 돌아온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차를 타 주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을 때였다.
‘그 소리 들었어?’
‘무슨 소리?’
‘시에나 님. 도련님 오시는 날 밤마다 방에 가신대.’
데이몬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한 이야기는 데이몬이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에이, 난 또 뭐라고. 이제 곧 두 분 다 성인이잖아. 오래 사귀시기도 했고. 그럴 수도 있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하인에게 다른 하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데 이게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래.’
‘그럼? 옛날부터 그랬다는 거야?’
‘무려… 도련님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무렵부터 그랬다는 거 아니냐.’
‘뭐? 그렇게 오래?’
‘그래. 둘 다 새파랗게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거지.’
‘와, 그렇다면 충격인걸. 시에나 님 마냥 순진하게만 봤었는데….’
‘똑똑한 거지. 도련님 하나만 잡으면 앞으로 인생이 탄탄대로인데 나 같아도 그러겠다.’‘근데 그럼….’
더 이상 시에나의 험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데이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남자 둘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 도련님…!’
‘어… 언제 오셨습니까.’
그들은 뒤늦게 머리를 숙이며 덜덜 떨었다. 당사자 앞에서 얘기하지 못할 거면서 왜 이렇게 입들을 싸게 놀리는지. 데이몬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더군.’
그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주제도 모르고 실언을 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이야기 꺼내지 않겠습니다…!’
스르릉. 데이몬은 그들의 사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검집에서 검을 꺼낸 뒤 하인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앞으로 진실만을 말해야 할 것이다. 말해.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지?’
* * *
하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데이몬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한없이 긍정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시에나가 잠든 제 얼굴을 보다가 나간다는 건데, 데이몬은 어쩐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제가 잠든 새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거지.
수많은 가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데이몬의 머릿속에 며칠 전 꾼 꿈이 생각났다. 시에나가 어둠이 내린 방 안에 찾아오고, 저는 그런 그녀의 손가락을 맛있는 사탕처럼 빠는 꿈.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꾸는 꿈이었다. 깨어나고 나면 어김없이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데이몬은 절대 그런 행동을 했던 적이 없었다. 그 비슷한 행동도. 그렇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겪은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때에는 꿈일 뿐이라 치부하고 그냥 넘어갔었지만, 사실 넘어가면 안 되는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 꿈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무의식이라도 반복되는 기억에 결국 꿈으로 표출된 거라면? 데이몬은 주어진 정보들로 하나하나 추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무려 5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시에나의 방문.
꿈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잠깐,
그림자가 저를 괴롭혔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새로운 가설을 세운 데이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추운 겨울에 맨몸으로 바깥에 서 있어도 지금보다 몸이 떨리진 않을 거다.
시에나가 메이스를 맞은 후 정신이 날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일어나 보니 사건이 해결되어 있었지. 시에나는 그때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시에나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그리고 그게 자신의 그림자와 관계있는 거라면.
그녀가 저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고 있는가.
데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어떻게든 알아내야 했어. 그래서 주말 저녁에 잠든 척을 하고 널 기다렸지. 어김없이 찾아온 네가 암호를 말하고, 그대로 내 정신이 부유했어. 나는 정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일어나니 그다음 날이었지. 오기가 생긴 나는 몇 달 내내 정신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쳤고, 노력한 끝에 결국 그 자식이 나왔을 때에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어.”
시에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이렇게 밝혀져 버렸구나.
“안타깝게도 그때에는 힘이 모자라 개입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지. 그때 나는 정말이지 내가 죽을 만큼 싫었어. 내 또 다른 인격이 이따위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또 다른… 인격이요?”
데이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시에나는 어쩌면 마르바스가 지옥에서 온 악마나, 다른 사람의 영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마르바스가 ‘또 다른 인격’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어쩐지 확신이 들어 있었다.
“그래. 그 자식은 내가 어렸을 때 분리한 인격이야.”
데이몬이 아주 징그러운 거라도 되는 양 인상을 찌푸리며 마르바스를 지칭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기억하게 되었어.”
어린아이의 몸으로 오랫동안 학대당하는 것도 모자라 제 편을 들어 주는 사람까지 잃었던 데이몬은 이따금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제 가슴에 끓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작이 저를 악마의 자식이라고 말하며 때릴 때마다 데이몬은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남작을 죽이기 위해 그 끓는 힘을 끌어 쓴다면, 절대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작은 데이몬에게 점점 더 가혹한 폭력을 가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남작이 두렵지 않았다. 제가 두려웠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정말로 괴물로 만들 것 같았다. 데이몬은 죽더라도 인간이고 싶었다.
그래서 데이몬은 그 능력을 스스로 가두기로 했고,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을 행했다. 그와 동시에 데이몬은 제 기억의 일부도 가두었다.
폭력, 질투, 자존심, 탐욕, 식욕, 분노, 교만. 제 안의 약하고 악한 감정과 기억까지 몽땅 그 안에 넣고 제가 가진 가장 강력한 열쇠로 잠갔다.
자신이 아무리 가차 없는 폭력을 당하더라도 분노하지 않도록. 터지지 않도록. 인간으로 죽을 수 있도록. 쉽게 꺼낼 수 없게 꼭꼭 숨겨 두고 그걸 숨겨 두었다는 기억조차 봉인했다. 그렇게 그 안에 감정을 넣어 두고, 자신은 인형처럼 살았다.
그러나 그 힘이 너무 강력했던 탓일까. 데이몬이 기억과 힘을 잃은 날, 또 다른 자아가 태어났다. 데이몬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인격, 바로 마르바스였다. 제 나쁜 것들만 가지고 있는 마르바스는 호시탐탐 데이몬의 몸을 노렸다. 데이몬은 기억도 없으면서 그 녀석을 밖에 꺼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그를 막았다.
그런데 그놈이 결국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렸다.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 놓고 시치미를 뗐다. 데이몬은 그가 자신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자해라도 했을 것이다.
마르바스가 깨어난 동안은 제가 힘을 쓸 수 없었기에 데이몬은 그가 시에나의 몸에 입 맞추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를 소멸시키려 했다. 그 대가가 어마어마하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러나 마르바스의 힘은 상당히 자라 있는 상태였다. 한 몸에서 떨어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개별적인 인격이 되어 버렸다.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시에나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시에나가 매주 그를 부를수록 그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는데 어김없이 주말이 또 찾아왔다. 가지 않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때의 데이몬은 시에나와 함께 있어도 그녀가 그리웠다.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괴로울 때도 있었다.
그 주 저녁, 어김없이 시에나가 와 암호를 속삭였다. 마르바스의 속에 숨겨진 데이몬이 그와 같은 시선을 공유받았다. 당연하게도 시에나는 미치도록 예뻤다.
저를 쳐다보는 순진한 눈동자는 망가뜨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눈빛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시에나는 데이몬을 아끼고 있었지만, 마르바스에게도 애정을 품고 있었다.
제 손을 쪽쪽 빨아 대는 마르바스를 밉지 않게 흘기는 시에나의 양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시에나는 분명 마르바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데이몬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더 떠올랐다.
시에나가, 마르바스를 사랑하고 있다.
그 끔찍한 사실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시에나는 눈치채지 못했을 뿐, 마르바스에게 조금씩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데이몬은 어이가 없었다. 제 어린 시절의 단점들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마르바스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데이몬은 시에나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저 마음 착한 시에나의 동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3자의 시점으로 보아서일까, 시에나가 마르바스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시에나에게 사실을 밝힌 뒤 인격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볼 예정이었으나 시에나가 비친 약간의 감정만으로도 계획은 와르르 무너졌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었다. 사라져야 하는 건 오히려 저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시에나가 저와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데이몬은 선택받은 기분이었다. 비록 끝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새끼가 감히. 저의 존재를 팔며 시에나를 기만해 가지려 들었다.
당장이라도 육체를 빼앗고 그를 소멸시켜 버리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둘을 떼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마르바스의 제안을 수락하는 시에나의 표정에 전의를 상실했다.
마르바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였으나 시에나를 오랜 시간 관찰해 온 데이몬은 알 수 있었다. 시에나는 은연중에 그와의 관계에 설레며 기대하고 있었다. 심장이 와르르 무너질 듯 조여들었다. 그대로 온몸이 부서져 사라진다면 좋을 텐데.
결국 데이몬은 마르바스에게서 육체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몸을 만지고 빨 때마다 미친 듯이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밑에서 가르랑대는 시에나를 보고 느낄 때마다 데이몬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결국 데이몬은 몸을 되찾기 위해 거세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바스 역시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는지 좀처럼 그에게 몸을 넘기지 않았다. 마르바스가 깨어 있을 때에 인격을 되찾는 과정은 마치 단단히 잠긴 문을 온몸을 부딪쳐 여는 것과 비슷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 데이몬은 무던히도 노력했다. 부딪칠 때마다 영혼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시에나의 몸을 물고 빨면서도 마르바스는 착실하게 데이몬을 방어했다. 온몸이 불에 탈 듯이 고통스러울 텐데도 절대 정신을 놓지 않는 데다 시에나가 걱정할까 봐 티조차 내지 않았다. 누굴 닮았는지 그는 정말 미친놈이었다.
농밀한 애무를 끝낸 마르바스는 이내 시에나의 안을 침범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모든 게 뚝 끊기는 느낌이었다. 영혼이 얼마나 다치든, 육체가 중상을 입든 상관없었다.
콰앙, 결국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르바스는 자신의 정신을 빠르게 복구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 정신을 빼앗길 것 같아 데이몬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푹, 강렬한 고통으로 인해 마르바스가 그 충격으로 인해 일시적 쇼크를 받고 기절했다.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깨어난다면 시에나와 이어지기 위해 난리를 피우겠지. 데이몬은 절대 그를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도련님….”
눈앞의 시에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조차 예뻐 보인다면, 저는 중증인 거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싸구려 동정이라도 상관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 그녀를 안을 거였다. 자신은 태어나기를 원래 이렇게 빌어먹게 태어났으니. 데이몬이 충격에 얼어붙은 시에나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 * *
“화… 안 났어요?”
“안 났어. 날 위해서 그런 거였잖아. 오히려 오랫동안 네게 큰 짐을 지워 버린 내가 미안하지.”
데이몬은 달콤하게 말했다. 시에나는 그리 말하는 데이몬이 어쩐지 어색했다. 분명히 데이몬인데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시에나를 껴안은 데이몬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에나. 마르바스한테 한 행동들 전부 정말 나를 위한 거였지?”
“…네. 그럼요.”
시에나는 찔려 오는 양심에도 불구하고 간절해 보이는 데이몬의 표정에 결국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데이몬은 전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기쁜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진지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다음엔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 줘야 해.”
“…그럴게요.”
“착하다.”
시에나는 자신을 끌어안은 데이몬의 시선을 피했다. 분명 데이몬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가 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둘은 여전히 나체였다. 시에나의 몸 군데군데에는 마르바스가 남긴 키스 마크가 남아 있었고, 밑에는 둘의 애액이 섞여 말라붙은 자국이 여실했다. 데이몬 역시 그걸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시에나가 침대 밑으로 떨어진 제 옷을 주워 입으려고 하자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의 손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하지 마.”
“네…?”
“옷, 입지 말라고.”
데이몬이 시에나의 손에 깍지를 끼며 그대로 그녀의 몸에 남겨진 키스 마크 위에 제 키스 마크를 덧그리기 시작했다.
“아…!”
데이몬이 거쳐 간 자리에는 아까보다 더 붉은 꽃잎이 피어올랐다. 강한 자극에 산호색 유두가 도도록이 솟아올랐다. 데이몬은 딱 먹기 좋게 부푼 시에나의 유실을 머금고 손으로는 그녀의 반대편 유두를 둥글렸다.
“아, 흐읏. 도련님…!”
시에나가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이대로 데이몬과 해버리는 걸까. 마르바스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할 게 너무나 많았지만 데이몬은 거침이 없었다.
“치, 치료하셔야 해요….”
“끝나고 받을게.”
데이몬은 단숨에 단검을 뽑아냈다. 그 잔혹한 행동에 시에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데이몬은 개의치 않고 시트를 북 찢어 상처 난 제 허벅지에 단단히 묶었다. 하얀 시트에 붉은 피가 순식간에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그래도… 으!”
“지금은 나한테만 집중해.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 응?”
데이몬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게 어떤 뜻인지 시에나는 알아챘다. 마르바스와의 약속. 시에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까는 홀린 듯이 마르바스에게 잠시 제 몸을 맡기긴 했지만, 역시 처음은 데이몬이 좋았다. 시에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착하다.”
데이몬이 그대로 시에나의 입을 맞췄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이 농밀한 입맞춤에 시에나의 눈앞이 흐려졌다. 빗장뼈를 만지던 손은 점점 내려가 가슴과 배를 거쳐 이내 수풀을 더듬었다. 시에나가 화들짝 놀라 다리를 오므렸지만 데이몬이 먼저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넣어 틈을 만들어 냈다.
“응…!”
시에나의 예민한 틈 사이를 가르고 데이몬의 손가락이 서서히 침범했다. 시에나가 생경한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입맞춤과 애무로 아무리 젖어 있다 한들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는 곳이 벌어지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예전과는 달리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데이몬의 중지가 그대로 안을 파고들었다.
“아, 흣, 아파아….”
시에나의 눈꼬리 끝에 맑은 눈물이 맺혔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눈물을 핥으면서도 침범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시에나의 속살이 데이몬의 손가락을 차지게 조여 왔다. 데이몬이 짧게 침음했다.
“엄청나게 조여….”
검으로 단련된 데이몬의 손가락은 일반인의 것보다는 굵고 긴 편이었다. 그렇지만 흉기와도 가까운 데이몬의 자지와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도 이렇게 아픈데, 대체 그의 것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죽는 건 아닐까.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너무나 두려웠다.
“아으…!”
그런 시에나의 속도 모르고 어느새 두 번째 손가락이 들어왔다. 물이 충분히 밑을 적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은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느릿하게 왕복 운동을 하며 길을 넓히던 데이몬의 손가락이 내벽 안쪽의 볼록한 부분을 매만졌다.
“하으읏-!”
저도 모르게 허리가 튕길 만큼 강한 쾌감이 시에나를 덮쳤다. 데이몬이 물 만난 고기처럼 집요하게 그 부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 흐, 이상해. 거기 이상해요… 응… 아…!”
손가락이 나갔다가 들어오며 돌기를 자극할 때마다 질구에서 나온 애액이 철벅철벅 야한 소리를 내었다.
“흐아아앙—!”
절정을 맞이한 시에나가 허리를 튕기며 데이몬의 손가락을 끊을 듯이 조여 대었다. 그 조임에 데이몬 역시 느꼈는지 선단에 끈적이는 액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하룻밤 새 두 번이나 절정을 맞이한 시에나의 내벽이 한결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데이몬의 손가락이 빠져나온 자리에서 왈칵 흘러내린 애액이 시에나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들어갈게.”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시에나는 그 말이 마냥 두렵게 느껴졌다. 더럭 겁이 난 시에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으나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의 손에 가볍게 입 맞추기만 할 뿐, 허리를 놀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아흑…!”
데이몬의 성기가 시에나의 질구를 파열할 듯 파고들었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끙끙거리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데이몬 역시 제 것을 끊어 먹을 듯이 조여 오는 시에나의 내벽에 귀두조차 제대로 넣지 못하고 신음을 터뜨렸다.
“아파, 아파아….”
“시에나, 힘을 조금만 빼 봐… 쉬… 그래, 긴장 풀고….”
첫날밤은 아프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아플 줄은 몰랐다.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데이몬의 등을 긁었다. 그의 등에 빨간 줄이 주욱 그어졌다. 아플 만도 하건만 데이몬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시에나가 흘린 눈물을 연신 핥았다.
“흐으… 도련님… 우흑… 빼 주세요… 나, 나 못 할 것 같아요….”
이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사방이 가로막혀 도망갈 수도 없었다. 시에나가 꼬챙이에 꽂힌 물고기처럼 몸을 파닥였다. 그런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함이었는지 데이몬이 시에나의 몸 안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겨우 시에나도 조금씩 숨을 쉴 수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심호흡을 하며 고통을 삭이던 시에나의 어깨를 잡고 데이몬이 제 것을 그녀의 안으로 한 번에 쳐 올렸다.
“아흑-!”
투둑, 처녀지가 끊어지고 시에나의 몸 안으로 그가 쑥 밀려 들어왔다. 둘이 동시에 숨을 멈추었다.
“헉….”
“흐으….”
시에나의 크게 뜨인 눈에 순식간에 맑은 눈물이 고여 들었다. 몸이 두 개로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첫날밤이 낭만적이라고 했던 소설책을 전부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대체 낭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시에나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흐으윽… 아파, 아파!”
“시에나….”
시에나는 고통에 흐느끼며 데이몬을 꽉 끌어 안았다. 시간이 지나자 아픔은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문제는 시에나의 안에 들어가 있는 그의 양물이었다. 시에나가 우는 모습에 발정한 데이몬의 것이 어쩌자고 또 커졌기 때문이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길이 더 넓어지자 시에나가 자지러졌다.
“아흑, 줄여… 줄여 줘요. 왜, 왜 커지는 거야. 어떻게 더 커지는 거야! 정… 흐으… 응…!”
시에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데이몬이 시에나의 입술을 덮쳤다. 데이몬의 촉촉한 혀가 시에나의 마른 입 안을 적셨다. 몸이 녹진녹진해지는 입맞춤에 시에나가 겨우 눈물을 그쳤다.
“미안,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요….”
“널 아프게 해서.”
“그러니까 적당히 크면 됐잖아요….”
시에나의 아무 말에 데이몬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나는 아파 죽겠는데.
그래도 한결 살 만해진 시에나가 툴툴댔다. 데이몬이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다 좋아….”
평소의 데이몬이라기에는 조금 나사가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시에나가 이내 사색이 되어 다시 시선을 올렸다. 검붉은 데이몬의 양물이 시에나의 내벽을 빈틈없이 막고 있었다. 어떻게 제 몸이 이렇게까지 벌어질 수가 있을까. 데이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게 밑을 응시했다.
“보지 마요….”
“안 볼게. 그런데 나… 움직여도 돼?”
데이몬이 애가 닳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 들어와 놓고 움직이는 건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이러니했다. 밑은 빠듯하긴 했지만 아까처럼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에나가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한 채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흑…!”
데이몬의 페니스가 서서히 빠져나갔다가 귀두 끝에 걸릴 무렵 다시 내벽을 치며 파고들었다. 데이몬이 천천히 추삽질을 하다 속도를 올렸다.
“흐으, 아, 으응. 하… 아응-!”
데이몬이 제 안을 파고들 때마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터지면서 새롭게 부풀어 오르는 듯 했다. 아픔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쾌감이 채우기 시작했다.
“아… 흐읏. 으응…!”
데이몬이 올려 칠 때마다 시트가 물결치며 침대가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다. 시에나는 정신없이 제게 몰아치는 남성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시에나가 거의 자지러졌다.
“아, 흑. 흐윽, 아… 아… 하으… 아아아-!”
데이몬이 절정을 맞이하며 시에나의 안에 남김없이 정액을 쏟아 내었다. 뜨끈한 씨물이 시에나의 자궁을 가득 적셨다. 데이몬이 시에나를 꽉 껴안고 온몸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시에나, 사랑해. 너무 좋아. 사랑해. 사랑해….”
사정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몬의 것은 시에나의 안을 여전히 메우고 있었다. 시에나가 처음 느끼는 이물감에 몸을 비틀었으나 그게 또 자극이 되었는지 잠시 말랑해졌던 성기가 또다시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제 안에서 커지는 것을 느낀 시에나가 데이몬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이거 왜 또 커져요?”
“그러게….”
데이몬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허릿짓을 했다.
“흐으, 빼 줘요….”
“빼야지. 뺄 건데…. 몇 번만 더 넣었다 빼면 안 될까?”
데이몬이 달콤한 목소리로 시에나를 꾀었다. 시에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려던 차에 데이몬이 다시금 그녀의 안을 빠듯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시에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으…!”
데이몬은 한 번 사정한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단단하게 발기했다. 시에나는 다시 한번 정신없이 몰아치는 감각에 그의 등에 손을 세웠다. 데이몬의 등은 시에나의 손톱에 의해 이미 상처투성이였지만 데이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 뜨거워… 이대로 녹아 버릴 것 같아….”
시에나의 안은 비좁고 뜨거웠다. 꼭 갓 구운 크림 파이 안에 제 것을 넣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제 자지가 녹아 버려서 시에나와 한 몸이 되면 좋을 텐데. 데이몬이 신음을 터뜨리는 시에나의 목과 쇄골, 유두에 키스하며 생각했다.
“흐으, 응, 으읏… 흐으으-아아앙…!”
처녀지가 파괴된 고통은 점차 옅어지고, 서서히 생경한 감각이 깨어났다. 그의 것이 빠듯하게 몰아칠 때마다 아팠던 감각 위로 쾌락이 덮쳐 왔다.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기며 비음을 흘렸다.
“도련님…. 흐으, 도련님…!”
“데이몬이라고 불러, 시에나….”
젖어 든 눈동자에 데이몬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추었다. 데이몬의 몸 역시 시에나와 마찬가지로 땀투성이였다. 턱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단단하게 벌어진 가슴을 지나 탄탄한 복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장작을 제때 넣지 않아 숯만 뭉근하게 타오르고 있었는데 방 안은 둘의 열기 덕분에 한여름처럼 들끓었다.
“응… 아흣, 읏, 으, 응, 아…! 데이몬…!”
데이몬이라 이름을 불러 주었을 뿐인데 그의 추삽질이 더 빨라졌다. 시에나는 제 몸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쾌락에 밀려 아득한 곳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데이몬의 몸에 다리를 감았다. 데이몬에게 채신없이 매달리며 시에나가 교성을 질렀다. 데이몬이 시에나를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안에 사정했다. 둘 모두 열락에 젖은 표정으로 밭은 숨을 내뱉었다.
“시에나, 이름 한 번 더 불러 줘.”
데이몬이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졸라 왔다. 시에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이몬….”
“한 번 더.”
“데이몬.”
“또… 더 많이….”
“데이몬, 데이몬, 데이몬… 사랑해요.”
시에나의 마지막 말에 눈을 크게 뜬 데이몬이 이내 그녀에게 가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떨리는 데이몬의 손에서 그가 얼마나 이런 것을 원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옆에 있었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을 한 번의 관계로 알게 되는구나. 시에나는 몽롱한 와중에도 그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암….”
온몸이 나른했다. 데이몬은 여전히 시에나의 몸 안을 빠져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생각보다는 견딜 만했다. 제 안을 꽉 채운 게 의외로 안정감이 있었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아까만 해도 죽을 것처럼 아팠었는데. 지금은 묵직한 아픔이 있긴 했지만 괜찮다고 느껴졌다. 오히려 그가 빠져나가면 무언가 밑이 휑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에나와 데이몬이 이어진 채로 그대로 옆으로 돌아누웠다. 시에나가 데이몬의 품 안으로 들어가 비비적거렸다. 데이몬이 날숨을 들이켰다.
“…도련님?”
“시에나, 그게.”
남자는 원래 다 이런 건가요? 시에나는 벌써 세 번째로 제 안에서 팽창하는 데이몬의 것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 더 이상 못 해요….”
“응, 그렇지. 그냥, 넣고만 있을게.”
“그냥 빼는 게….”
시에나가 미약하게나마 몸을 뒤로 빼자 데이몬의 것이 꿈틀대며 더 커졌다. 둘이 동시에 비명 같은 신음을 흘렸다. 안정은 무슨, 언제 커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도련님, 빼요.”
“시에나, 내 거 이렇게 커져서 빼기도 힘든데….”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이 은근슬쩍 시에나의 눈치를 보았다. 시에나가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그래서요?”
“작아지면 빼자. 응?”
간절한 데이몬의 말에도 시에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데이몬은 시작하면 기본이 30분이었다. 시에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없었다. 눈만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은데, 데이몬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저… 피곤해요.”
“그럼 시에나는 자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이 성욕에 미친 자가 정녕 데이몬이 맞긴 한 건지 시에나는 의심스러워졌다. 언제나 멀끔하고 젠틀했던 데이몬은 잠자리에서 완전히 안하무인 어린아이 같았다. 데이몬이 꾸욱 제 것을 눌러 시에나의 안쪽에 집어넣었다. 시에나가 데이몬의 이름을 빽 불렀다.
“데이몬!”
“사랑해, 시에나.”
데이몬은 가슴이 떨릴 만큼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서서히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 * *
“거짓말쟁이….”
시에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였다. 데이몬은 난감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달랬다. 한밤중부터 시작해서 다다음 날 정오까지 농탕질을 한 둘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시에나는 데이몬을 받아 내고 또 받아 내다가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첫 관계를 시작한 지 여섯 시간 만의 일이었다. 기절한 시에나의 몸을 꼼꼼하게 닦아 주고 손수 시트까지 갈아 준 데이몬은 시에나의 일을 대신 도맡아 빠르게 끝내고 식사 거리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시에나에게 음식을 먹여 주다 또 불이 붙었다.
처음인 것에 비해 너무도 가혹한 것을 받아들인 시에나의 음부가 퉁퉁 부어 안쓰러워지자 데이몬은 직접 시에나의 안에 약을 발라 주었다. 불안한 마음에 그냥 제가 만든 약으로 해 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신전의 약을 구해 와 바른 데이몬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효과가 좋은 약은 시에나의 겉과 안을 말끔하게 치유했다. 더 안쪽도 다쳤을지도 모른다며 제 페니스에 약을 묻혀 기어코 시에나의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치료했으면 빼라는 시에나를 살살 달래 가며 기어코 또 세 번의 사정을 더 했다. 시에나의 안에 정액 마를 날이 없었다. 시에나의 땀에 젖은 몸을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 주며 데이몬이 은근슬쩍 시에나의 예민한 부위를 터치했다.
“또 하시면 저 진짜 제 방에 들어가서 문 잠글 거예요.”
“잘못했어.”
데이몬은 시에나의 협박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거라도 되는 양 항복 선언을 했다. 시에나는 옷 위로 툭 불거진 그의 물건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데이몬이 제 몸을 닦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요 이틀 내내 소리를 질렀더니 목소리조차 갈라져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두드러기라도 난 것처럼 목부터 종아리까지 전부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데이몬의 짓이었다. 시에나는 새하얬던 제 팔목이 온통 울혈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어이없다는 듯 보다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데이몬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시에나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차 줄까, 시에나?”
데이몬의 딸랑거림에 시에나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그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조금은 미안하게 느끼는 시에나였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단 한 푼어치의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지은 죄가 있는 데이몬 역시 평소보다 더욱 극진하게 시에나를 대접했다.
“시에나, 여기.”
쪼르륵, 데이몬이 차를 따라 시에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지금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마시기 힘들면 잠깐 입만 벌려.”
아쉬운 눈길로 차를 바라보고 있자 데이몬이 찻물을 제 입 안에 머금고 시에나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상큼한 민트 향이 시에나의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차를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무섭게 데이몬의 혀가 시에나의 입 안을 침범했다.
“읏….”
데이몬은 정말이지 인간인가 짐승인가. 시에나는 데이몬이 제가 지금껏 알아 오던 사람이 맞는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이런 정욕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체 지금까지는 어떻게 참아온 건지.
똑똑.
“시에나 님, 데이몬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방해받은 게 몹시 불쾌했는지 데이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에나가 사력을 다해 그를 밀어내며 문 쪽으로 손짓했다.
“가 봐요….”
갈라진 목소리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데이몬은 아쉬운 눈길로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다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저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시종은 주눅 든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와 황태자 각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황태자 각하?
시에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이몬이 아카데미에 가서 카이난과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는데.
나름대로 이 책이 들어오기 전, 제 첫사랑이었던 이가 아닌가. 그의 얼굴이 궁금했다.
“왜 온 거지?”
그러나 데이몬의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역력했다. 시종은 아까보다 더 당황한 듯 보였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작과 황태자가 그들의 방문 목적을 한낱 시종에게 말할 리가 없었다. 데이몬은 그저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싫어 늑장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
“다녀와요.”
“시에나.”
나름 엄숙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데이몬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저가 상처를 받는 거람. 그러나 시에나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고 결국 데이몬이 꼬리를 내렸다.
“곧 갈 테니 부족함 없이 응대하고 있게.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고.”
“예, 알겠습니다.”
시종이 뒤돌기도 전 문을 닫은 데이몬이 재빨리 시에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에나의 시선을 받자 데이몬이 눈을 반짝였다. 그의 뒤에 검은색 털로 뒤덮인 꼬리가 살랑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손, 이라고 하면 손을 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럴 땐 말 잘 듣는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시에나가 안간힘을 쓰며 자리에 앉았다. 온몸에 근육통이 오른 것처럼 욱신거렸다.
“시에나, 누워 있어.”
“손님이 왔는데 맞이해야죠…그것도 중요한 분들이신데.”“사용인들에겐 네가 아프다고 말해 놨어. 그러니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무리하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시에나가 표독스럽게 데이몬을 노려보다 이내 핑글 도는 정신에 털썩 침대에 누웠다. 데이몬이 안절부절못하고 시에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못된 생각은 하면 안 되는데 솔직히 그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 조금 고소했다.
“그럼 제 대신 도련님이 맞이해 주세요. 손님이 오셨는데 우리 중 한 명은 나가 봐야지요.”
“그렇지만….”
데이몬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시에나를 두고 나가려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요.”
“…알았어. 일단 제인을 불러올게.”
“안 돼요!”
시에나가 기겁하며 데이몬을 말렸다. 이 꼴을 하고서는 어떻게 제인을 본단 말인가. 팔은 조금만 걷어도 울혈투성이에 방 안에는 정사의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었다. 모든 걸 알아챈 제인이 어색하게 시에나에게 웃어 보이는 걸 상상하자 끔찍했다.
“절대 싫어요.”
“그럼 역시 내가 쭉 여기 있다가 저녁때 가는 편이….”
“그냥 제가 맞이할게요.”
시에나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신고 일어서려고 하자 데이몬이 사색이 되어 말렸다.
“내가 잘못했어. 지금 갈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데이몬은 좀처럼 안심이 되지 않는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계속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오늘따라 조금 귀찮았다. 떠나기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며 평소보다 훨씬 느릿하게 준비하는데도 저를 말리지 않자 시무룩해진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충분히 잘 대접해 주세요. 제 손님이기도 하잖아요.”
“…알았어.”
데이몬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다른 하인을 불러 줄까, 주스를 가져다줄까 주섬주섬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다 시에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높이자 깨갱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나 시에나를 뒤돌아보던 데이몬이 다시 다다다 달려가 이마에, 볼에, 입술에 도장을 찍고 나갔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시에나가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았다. 요 근래 들어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
* * *
시에나는 끝없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은 차갑고 싸늘했다. 똑, 똑. 동굴 안에 있는 것처럼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누구 있어요?”
시에나는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었다. 제 소리가 울려서 사방이 웅웅거렸다.
“여기야.”
누군가 멀리서 속삭였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사방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한 남자가 몸을 둥글게 말고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바스?”
“맞아, 나야.”
“왜 이런 곳에 있어.”
“이런 곳이 어떤 곳인데?”
“너무 춥고… 깜깜하고… 무서워.”
시에나가 몸을 떨었다. 마르바스가 그런 시에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이렇게 있으면 좀 괜찮지?”
“응… 괜찮아.”
추운 곳에서 마르바스의 온기는 제법 따스했다. 한참이나 시에나를 안고 있던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따뜻해?”
“응. 따뜻해.”
“더 느껴 줘. 어떤 감정이든.”
“응…?”
“뭐든. 고통, 두려움, 쾌락, 슬픔, 기쁨. 전부 느끼고… 전부 기억해 줘.”
“뭐…?”
“그리고 내가 사라지더라도, 오늘 있었던 일만큼은, 내가 있었던 사실만큼은… 최대한 오래 기억해 줘.”
시에나는 이게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마르바스를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그는 무심하게 시에나를 툭 뒤로 밀어 버렸다.
“…바스. 마르바스!”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
단단한 바닥이 무너지며 시에나가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며 마르바스가 아프게 미소 지었다.
“안녕, 시에나.”
* * *
“시에나, 시에나 괜찮아?”
“허억-!”
시에나가 발작하듯이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데이몬이 다급하게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나쁜 꿈 꿨어?”
“…네. 악몽을 좀 꾼 것 같아요.”
시에나는 어쩐지 저를 걱정하는 데이몬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데이몬이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등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시에나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밤하늘 색이 짙어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가요…?”
“얼마 안 됐어. 두 시간 정도. 간단히 이야기만 하고 걱정돼서 왔는데 악몽 꾸는 것 같아서 깨웠어.”
“네… 감사해요.”
“무슨 꿈이었길래 그렇게 놀랐어.”
시에나는 어쩐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데이몬에게 마르바스 이야기를 하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썩 좋은 반응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괴물이 갑자기 쫓아오는 꿈이요.”
“많이 피곤했나 보다. 미안해.”
데이몬이 축 처져서 시에나에게 사과했다. 시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도련님 때문은 아니에요.”
슬쩍 안도하는 데이몬의 얼굴이 조금 전에 꾼 꿈에 나온 마르바스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그 애달픈 표정이 오래도록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시에나의 기분이 저도 모르게 착 가라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
“악몽 꾸기 전엔 그래도 푹 잤는지 제법 가뿐해요.”
“다행이다.”
시에나가 팔을 붕붕 들며 말했다. 데이몬이 한결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안 해요.”
“어?”
“안 해요.”
“…응.”
시에나의 단호한 말에 데이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와, 말 안 했으면 오늘도 할 생각이었구나. 이 사람. 시에나는 질겁하며 가운을 더 꽉 여몄다.
“참, 황태자님이랑 공작 각하께선 왜 방문하신 거예요?”
“아아, 별건 아니야. 그냥… 둘이 의기투합해서 내가 황제 폐하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겠다고 하더라고.”
별건 아니야와 그 뒤 말의 갭이 너무 거대해 시에나는 입을 딱 벌렸다. 황제의 아들로 인정받는다니. 그건 곧 전 제국 사람들이 데이몬을 황자로 인식하게 되는 것 아닌가.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다.
“축하드려요, 도련님.”
“응? 거절했는데.”
“네?”
“지금 이 상태로 만족한다고 말했어.”
“네에!?”
시에나는 당황하며 데이몬에게 되물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당황하며 볼을 긁적였다.
“아니 왜요? 황자로 인정받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글쎄. 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오히려 귀찮은 일만 더 많아지게 될 것 같지.”
데이몬은 종종 이렇게 초연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욕심을 부리는 건 오직 시에나에 한해서였다.
“그래도….”
“시에나는 내가 황자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어?”
시에나가 아쉬움이 역력한 표정을 짓자 데이몬이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하실 거예요?”
“응. 그럴게.”
너무나 즉답에 시에나가 당황할 정도였다.
“왜… 별로 하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그냥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요?”
“그건….”
내내 즉답하던 데이몬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던 건가.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 전에 줄 게 있어.”
“뭔데요?”
데이몬이 잠시 심호흡을 하다 결심한 듯 주머니에서 흰색 봉투 하나를 꺼냈다. 꽤 두툼한 흰색 봉투 안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종이가 빽빽하게 접혀 있었다. 시에나가 얼떨결에 데이몬이 주는 종이를 받아들였다.
“이게… 뭐예요?”
“지금까지 모아 온 내 재산. 이건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되든 꼭 주고 싶었어.”
“네!?”
시에나가 종이를 펴 보다 깜짝 놀라 물었다. 재산이요…? 종이에는 정말로 지금까지 데이몬이 모아 온 재산의 명의가 전부 시에나로 바뀌어 있었다. 마르바스 영지와 디에스 상단부터 따로 모아 놓은 금고까지 그 목록이 다양했다. 종이 안에는 평생을 놀고먹어도 모자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찍혀 있었다.
“세상에…. 이게 진짜에요?”
“응, 전부 진짜야.”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잘 보여야 할 일이 있거든.”
데이몬은 이내 제 재킷 앞주머니에서 남색 벨벳 재질로 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시에나의 가슴이 두근대며 뛰기 시작했다.
“지금 재산은 좀 적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아직 건강하고 젊고 어려. 앞으로 30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거야.”
프러포즈를 하면서도 제 쓸모를 크게 어필하는 행동에 시에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연해졌다. 한쪽 무릎을 꿇은 데이몬이 자그마한 상자를 열었다. 시에나의 예상대로 그 안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사람에게 보내 주겠다는 약속은 지키기 힘들 것 같아. 나는 생각보다 욕심도, 질투도 많아. 네가 다른 사람과 있는 것만 봐도 속이 뒤틀리고 미쳐 버릴 것 같아.”
데이몬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묘한 욕망이 들끓었다. 시에나는 애타는 듯한 그의 표정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절대 고생시키지 않을게. 내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오직 널 위해서만 살게.”
“도련님….”
“그러니 시에나,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을까?”
반지의 중앙 테두리에는 작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 있고, 정중앙 위에는 알이 큰 호박과 아콰마린이 하나씩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데이몬 일생일대의 고백조차 잠시 뒤로 미룰 정도로 아름다운 반지였다.
“예뻐라….”
호박은 데이몬의 눈 색과 꼭 닮아 있었고, 푸르게 빛나는 아콰마린은 시에나의 눈과 닮아 있었다. 주문 제작임이 분명한 이 반지는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데이몬은 간절한 표정으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넋을 놓고 반지를 바라보다 한가지 의문이 생겨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게 황자가 되는 거랑은 무슨 상관인 건가요?”
“그게, 카이난만 해도 엘리샤 영애와 연애할 때 여기저기서 간섭을 많이 받았거든.”
“그런데요?”
순진하게 되묻는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이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난 너와 함께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시에나가 황당하다는 듯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황자가 되면 시에나랑 연애 하는 거에 대해서 태클이 들어올까 봐 안 한다는 소리였다. 욕심이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지.
그러나 이 반지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시에나는 복잡한 마음에 잠시 대답을 늦추었다. 데이몬이 답이 없는 시에나를 기다리며 긴장한 듯 입술을 핥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데이몬은 황위나 명예에는 한 푼어치도 관심이 없고 오직 제 앞에 선 시에나의 시선 한 줌을 얻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래, 데이몬은 이런 사람이었지. 저는 상상도 못할 사랑을 계속해서 주는 사람.
내가 어디서 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적지 않은 시간 고민하던 시에나가 이윽고 그의 앞에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끼워 주세요.”
“시에나….”
그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젖어 들었다. 시에나는 침대에 왕처럼 앉아 데이몬이 반지를 끼워 주길 기다렸다. 데이몬은 왕의 충실한 종처럼 경건하게 무릎 꿇은 채 시에나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시에나의 왼손 약지에 닿았다. 반지는 시에나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시에나가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예쁘다.”
“예쁘다.”
시에나는 반지를 바라보며, 데이몬은 시에나를 바라보며 동시에 같은 말을 한 둘이 눈을 마주쳤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건 대체 언제 준비하신 거예요.”
“음, 1년 전이었나.”
시에나는 그의 준비성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제가 살쪄서 손가락에 안 맞았으면 어쩌려구 그렇게 일찍 준비하셨어요.”
“그럼 또 사면 되지.”
“어휴. 못 말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에나의 기분은 몹시 좋아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프러포즈다. 하늘로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에나가 데이몬을 향해 팔을 벌렸다. 데이몬이 시에나를 끌어안으며 그녀를 자연스레 침대에 눕혔다. 시에나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설마.
“오늘은 안 해. 힘들잖아.”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매끈한 코와 볼,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쉽기는 시에나도 매한가지였다. 분위기 나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데이몬과 함께하려면 체력을 더 길러야 할 모양이었다.
“저도 검을 좀 배워 볼까 봐요.”
“검? 왜 갑자기?”
“체력도 기르고 제 몸 지킬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하긴, 요즘 몬스터의 습격이 잦으니 호신할 만한 걸 배워 보는 것도 좋겠네.”
데이몬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럼 도련님이 알려 주실래요?”
“내가…?”
데이몬은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시에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도련님 검술 대회에서 5년 연속 우승하셨잖아요. 이왕 배우려면 제국 최고의 검사한테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데이몬을 슬쩍 띄워 준 시에나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데이몬이 점잖은 얼굴을 하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광대가 슬쩍슬쩍 들썩였다.
“시에나가 나한테 검을….”
데이몬이 시에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내가 열심히 가르쳐 줄게.”
데이몬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제가 시에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일자 베기를, 아니야. 기초 체력을… 음. 단검술? 발도술?”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어떤 것을 가르칠지 생각하며 혼잣말했다. 잔뜩 신이 난 그 모습이 귀여워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볼에 키스했다. 데이몬이 깜짝 놀라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귀여워서요.”
190이 넘는 장정이 소년같이 눈망울을 반짝이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둘 사이에 묘한 공기가 흘렀다. 데이몬이 시에나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짧고 담백한 입맞춤이 기분 좋았다.
“난 평생 네게는 이기지 못할 것 같아.”
“어머, 이길 생각이셨어요?”
시에나는 짐짓 놀라는 척했다. 데이몬이 화들짝 놀라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도 그냥 농담한 거예요.”
시에나가 눈을 휘자 데이몬이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다. 놀림당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댔다. 마냥 지금 이 순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 황자로 인정받는 거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응?”
“공작 각하께서 꽤 오래 염원하고 계셨던 거잖아요. 그게 도련님의 제자리이기도 하고요. 저는 결혼 좀 늦어져도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혼기가 늦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지만 시에나는 제가 여전히 새파랗게 어리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1~2년, 혹 정말 오래 걸려서 10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 봤자 데이몬은 스물여덟, 시에나는 서른이었다. 그리고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지 않아도 둘의 사이는 변함없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고민해 볼게.”
“네.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응. 그럴게요.”
순하게 대답하는 데이몬이 귀여워 시에나가 누워 있는 상태로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누가 대형견 아니랄까 봐 데이몬은 시에나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꽤 좋아했다. 데이몬이 눈을 감고 시에나가 그의 머리칼을 훑는 감촉을 느꼈다. 안온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방 안에 흘렀다.
* * *
시에나는 또 익숙한 길을 걸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길에서 마르바스는 또 시에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아처럼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있는 마르바스가 시에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나를… 기억해 줘.’
그대로 시에나의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허억.”
시에나는 땀에 젖은 채 깨어났다. 멈춘 마차에는 시에나 혼자였다. 편안히 자라고 널찍하게 자리를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시에나가 덮은 겉옷에서는 데이몬의 체향이 났다. 시원하면서도 깊은 숲의 향이었다. 마차의 창문을 열자 산맥 뒤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강렬한 여명에 시에나가 눈을 찡그렸다.
“후우우우….”
시에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며칠째 마르바스가 꿈에 나오고 있었다. 패턴은 항상 같았다. 어두운 곳을 걷는 시에나가 마르바스를 발견한다. 마르바스는 제게 저를 오래 기억해 달라 말한다. 그가 말을 끝내면 시에나의 발밑이 무너지고 꿈에서 깨어난다.
“대체 뭘까.”
마르바스가 지금 그런 곳에 있다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환상일까. 시에나는 머리가 아파 왔다. 데이몬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다가도 종종 마르바스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덜컹, 마차 문을 열자 휴식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시에나를 돌아보았다. 시에나가 마차에 내리기도 전에 데이몬이 바람같이 달려와 시에나를 안아 들었다. 요즘 남의 시선을 전혀 생각지 않고 시에나를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는 데이몬이었다.
“추운데 안에 들어가 있지.”
“괜찮아요. 휴식 얼마나 남았어요?”
“앞으로 40분 정도?”
“잘됐다. 잠깐 산책 다녀올게요.”
“같이 가자. 이 숲은 위험해.”
“음… 네.”
몬스터가 나오는 숲이라도 데이몬이 함께 가면 안심이었다. 시에나가 사람들에게 잠시 숲에 다녀오겠다 눈짓했다. 루이젠과 카이난, 리카르도 공작이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 일행은 지금 수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카이난과 공작의 끈질긴 설득 끝에 데이몬은 황제에게 저를 황자로 인정해 달라 요청하러 가는 걸 수락했다. 데이몬이 시에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 시에나도 제인에게 일을 맡긴 뒤 영지를 떠나오게 되었다. 오랜만의 수도 방문이라 가슴이 떨렸다.
“음, 좋다.”
“그러게, 정말 좋다.”
작은 동산을 올라간 시에나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겨울 숲에서는 바람과 나무의 냄새가 났다. 데이몬이 제 목도리를 풀어 시에나에게 단단히 여며 주었다.
“밖은 추워.”
“이미 꽁꽁 싸맸는걸요. 도련님이야말로 추워 보여요.”
네다섯 겹을 껴입고 데이몬의 외투와 목도리까지 걸친 시에나는 꼭 거대한 눈사람처럼 보였다. 걸을 때마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추할 것도 같은데 데이몬의 눈에는 마냥 귀여운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아.”
“이러다 감기 걸리시면 어쩌시려고요.”
“난 감기 같은 거 한 번도 걸린 적 없어.”
“허세 부리지 마세요. 어릴 때 열도 그렇게 많이 나….”
데이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하다 실언을 한 시에나가 입을 딱 다물었다. 데이몬의 몸에 열이 올랐던 건 마르바스가 나오려고 할 때마다 동반되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시에나는 실언을 한 것 같은 느낌에 괜히 고개를 돌렸다. 마르바스의 이야기는 둘 사이에 은연중에 금기시되어 있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빽빽하게 숲을 뒤덮은 침엽수림을 응시하던 데이몬이 말했다.
“시에나, 예전에 검술에 대해서 알려 주기로 했잖아.”
“아, 네에. 그렇죠.”
누가 봐도 어색한 화제 전환이었지만 시에나는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지금 돌아가서 해 볼래? 배워 두면 쓸모는 있을 거야.”
“네, 네에. 좋아요. 저희 이제 돌아가요.”
“응, 그러자.”
시에나가 데이몬의 손을 붙잡고 돌아갔다. 데이몬의 손은 한겨울에도 뜨끈뜨끈했다.
“금방 오셨군요.”
“예, 황태자 전하.”
“어휴, 그냥 카이난이면 된다니까요.”
“하하. 아직 어색해서요. 카이난… 님.”
시에나가 말끝을 흐리며 애매한 미소를 흘렸다. 도련님과 공작 각하 호칭으로 7여 년을 살아온 시에나로서는 황태자 전하라는 호칭을 두고 카이난 님이라고 부르는 게 너무나 어색했다.
“이쯤이 좋겠어, 시에나.”
“네에.”
데이몬이 일행들이 있는 곳에서 열 발자국 떨어진 곳이자 숲의 시작점에 서서 시에나를 불렀다. 일행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둘을 지켜보았다.
“뭐 하시려고요?”
루이젠이 천진하게 물었다.
“아아. 예전에 검술을 좀 배워 보고 싶었는데 데이몬 도련님이 마침 가르쳐 주신다고 하셔서요.”
“데이몬이 검술을요?”
루이젠에 이어 카이난도 흥미를 가지며 다가왔다. 시에나는 급격하게 쏟아지는 관심에 급 부담감을 느꼈다. 공작도 멀리서 시에나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으아, 저 그냥 다음에 할게요.”
“응? 갑자기 왜?”
데이몬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좀… 부끄러워서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루이젠이 옆에서 동의했다.
“누나, 저도 그 마음 이해합니다.”
“뭐가 부끄러워?”
데이몬이 묻자 루이젠이 혀를 끌끌 찼다.
“데이몬 네가 검술 대회 5년 내내 우승이었던 건 그렇다 치고, 카이난 님은 1년 우승, 5년 연속 준우승이셨는 데다 공작 각하께서는 6년 내내 우승이셨잖아. 누나가 부담 가질 만도 하지. 누나, 6년 내내 본선 진출이 목표였던 저는 누나 마음 정말 완전 이해합니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말해 주자 시에나의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그러나 데이몬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 배우는 게 어설픈 건 당연한 건데 뭐가 부끄럽다는 거야.”
“그렇긴 하지만….”
“수도에 가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간단한 호신술은 배워 보는 게 좋겠군.”
어느새 다가온 리카르도 공작까지 나서자 너무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시에나가 울상을 지었다.
“그래요, 시에나. 한번 해 봐요. 그런데 데이몬, 뭘 가르치려고?”
“호신의 용도라면 가볍게 발도술을 배워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발도술…?”
“발도술… 이요?”
시에나와 루이젠이 흐릿한 눈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런 거.”
스컹. 데이몬이 품 안에 있던 단검을 꺼내 그대로 앞의 나무를 베었다. 보이지도 않았는데 시에나의 허벅지 굵기 정도 되는 통나무가 스르르 무너졌다. 사선으로 베인 깔끔한 단면에 감탄이 나왔다. 다만 따라 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단검을 검집에 꽂은 채로 건네주었다.
“저, 저도 통나무를 베나요?”
“아니. 처음인데 어떻게 하겠어. 시에나는 이걸로 해 봐.”
데이몬이 가리킨 건 손가락만 한 굵기의 나무였다. 다행히 데이몬이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시에나, 만세.”
시에나가 가볍게 팔을 들자 데이몬이 시에나의 허리춤에 단검을 묶어 주었다. 시에나의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짧은 단검이지만 무게감이 제법 있었다.
“발은 어깨너비로 벌리고, 이쪽 발을 앞으로 향하고 검은 이렇게 단숨에 뽑아서 벤다고 생각하면 돼. 실전이라면 검을 뽑음으로써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일격을 날리고 도망치는 걸 목표로 삼으면 되고.”
“네.”
시에나가 데이몬의 상세한 설명에 자신감을 얻었다. 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마구마구 피어올랐다.
“자아, 해 봐. 시에나.”
시에나가 편하게 발도술을 펼칠 수 있도록 데이몬이 뒤로 물러나 주었다. 사람들이 진지한 표정의 시에나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몸을 회전시키면서 단숨에… 벤다!’
시에나가 제가 상상한 시뮬레이션대로 발도술을 펼쳤다. 서걱,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났다. 혹 앞에 있는 나무를 제대로 벤 건가 싶어 살펴보는데, 나무는 그대로였다.
“어?”
그럼 아까 그 소리는 뭐지. 시에나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메랑처럼 날아간 단검이 루이젠의 앞머리를 벤 후 땅에 떨어져 있었다. 루이젠은 아닌 밤중의 단검 부메랑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시에나가 다급히 루이젠에게 다가갔다.
“루이젠 님! 괜찮으세요?”
“어, 어어. 이게 무슨….”
루이젠이 어버버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난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정말 굉장합니다, 시에나. 상처 하나 안 내고 뒤에 있는 사람의 앞머리를 자르다니요. 어쩌면 검술에 굉장한 재능이 있을 수도 있겠어요.”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 검에 앞머리를 비춰 본 루이젠이 울상을 지었다.
“내… 내 앞머리.”
“죄송해요, 루이젠 님!”
시에나가 허겁지겁 다가와 루이젠에게 사과했다. 루이젠의 앞머리는 아기들이나 할 법한 스타일로 짧게 잘려 있었다. 데이몬이 입술을 깨물며 루이젠의 앞머리에서 시선을 피했다. 시에나가 어쩔 줄 모르고 루이젠에게 연신 사과했다.
“이, 이게 어떻게 이렇게 되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시에나가 너무 열심히 사과하자 루이젠은 신경질 한 번 내지 못하고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괜찮아요….”
루이젠을 만난 뒤로 이렇게 풀 죽은 모습은 처음이라 시에나도 울상을 짓는데 연신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은 공작이 시에나에게 제안했다.
“나름 개발하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수도에서는 애먼 사람을 잡을 수 있겠어. 차라리 대련을 하면서 바로 쓸 수 있는 기술들을 알려 주면 어떤가?”“제, 제가 대련을요?”
이 중 대체 누구와? 검술 대회는커녕 검술의 검 자도 모르는 시에나가 크게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래. 원을 그린 후 그대가 중앙에 서 있고 우리가 자네를 둘러싸는 형태로 서면 되지 않을까 싶네. 아, 물론 우리는 검을 들지 않고 말이야. 자네의 검이 우리의 옷깃이나 몸을 스치거나, 원 밖으로 나가게 하면 그대의 승리네.”
“저는 검을 들고요?”
“그래.”
“그, 그러다가 진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시에나가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했다. 아까만 해도 운이 좋아 루이젠이 다치지 않았지, 조금만 더 깊게 베였으면 이마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셋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시에나.”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보여도 실력은 나쁘지 않답니다.”
“루이젠이라고 했나? 그대는 빠지는 것도 좋겠군.”
공작의 우려에 루이젠은 오기가 생겼는지 데이몬이 그새 그려 놓은 원 안으로 당당히 발을 들였다.
“아닙니다! 저도 한때 32강까지는 가 본 사람이라고요.”
데이몬이 그린 원은 넓었으나 다섯 명이 들어가기에는 좀 비좁아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이래서야 대충 찔러 넣으면 누구 찔리는 거 아닌가. 시에나가 걱정스럽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시작하면 우리가 알려 줄 테니까 먼저 공격해 봐.”
“네, 네에.”
시에나가 긴장감에 몸을 움츠렸다. 데이몬, 카이난, 리카르도 공작은 전부 190이 훌쩍 넘는데다 루이젠 역시 180이 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장벽에 둘러싸인 느낌에 저는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위축되었다. 시에나가 심호흡을 하며 본격적으로 단검을 잡고 루이젠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
“왜 나야?!”
루이젠이 울상을 지으며 검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설프기도 하고 아직 사람을 공격할 준비가 되지 않은 시에나의 검은 사실 동선만 보면 피하는 것은 제법 쉬웠다. 번번이 허탕을 치자 어쩐지 오기가 무럭무럭 치밀었다. 제법 살기가 피어오르는 시에나를 보며 사람들이 기특한 얼굴을 했다. 데이몬이 특히나 시에나를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에나, 허리를 꼿꼿이 펴고 검을 크게 휘둘러!”
“이, 이렇게요?”
“으아, 치사하게 힌트 주지 말라고-!”
“시에나, 그대로 중간 베기!”
“악. 진짜-!”
“루이젠- 탈락!”
탈락이라는 말에 시에나가 어리둥절하게 카이난을 바라보았다. 카이난은 검지로 아래를 가리켰다. 루이젠의 오른쪽 발이 원을 넘어가 있었다. 루이젠이 아쉬운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시에나가 신중하게 다음 타깃을 고르기 시작했다. 공작은 어쩐지 제 안의 장유유서가 죄책감을 들게 만들었고, 데이몬은 시에나를 상대하면서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결국 다음 타깃으로 잡힌 카이난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상대했다.
“이젠 전가요?”
“네…!”
시에나가 두꺼운 겉옷을 벗어 던진 채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루이젠이 누구보다 열심히 그런 시에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누나! 배요, 배! 아, 팔도 비었어요!”
허점투성이일 것 같았던 카이난은 의외로 허점이 없었다. 허점을 보여 줘서 거기를 파고들면 슥 옆으로 피해 버렸다.
약이 오른 시에나가 단검을 검집 안에 집어 넣고 아까 배운 발도술 자세를 취했다. 카이난이 처음으로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검 꽉 잡으셔야 합니다.”
루이젠은 이미 저 멀리로 도망친 뒤였다. 어쩐지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하는 느낌에 시에나가 제대로 된 걸 보여 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원 안에서 열심히 달려 검을 뽑은 시에나가 그대로 카이난을 향해 쇄도했다.
“으앗-!”
아니, 쇄도하려고 했다. 그들이 서 있는 원 안에는 얕은 눈이 쌓여 있었는데, 그 바람에 밑에 깔린 방해물을 보지 못한 시에나가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갔다. 데이몬이 재빨리 달려나가 시에나를 허리를 잡아챘다.
“시에나, 괜찮아?”
데이몬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가 된 시에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데이몬의 목에 검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데이몬이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루이젠이 활짝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데이몬- 탈락!”
변변한 대련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밖에 나가게 된 데이몬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원 밖으로 나갔다. 조금 치사한 방법이긴 했지만, 둘이나 밖으로 내보낸 시에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둘이었다. 시에나는 다시 한번 카이난에게 달려들어 검을 날렸다. 데이몬이 조마조마하게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카이난은 꼭 한 발짝 차이로 시에나의 검을 피했다. 그 아쉬움에 시에나의 자세가 자꾸만 흐트러졌다.
“시에나, 자세 바로잡고 상대의 동선을 봐. 눈을 보면 상대가 어느 쪽으로 갈지 알 수 있어.”
“누나-!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둘의 아낌없는 응원과 조언에도 슬슬 숨이 찼다.
“힘드십니까?”
유들유들하게 저를 놀리듯 말하는 그 태도가 꼭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마르바스. 그를 떠올린 시에나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다.
“이야앗-!”
시에나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카이난에게 검을 겨누고 그가 피하자 비틀거리다 눈 위에 넘어졌다. 퍽, 시에나의 온몸이 눈으로 뒤덮였다. 데이몬이 밖에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으나 카이난은 잡아 주지 않았다.
“저는 데이몬이 아닙니다.”
“알아요.”
그와 동시에 시에나가 눈을 집어 들어 카이난의 얼굴에 흩뿌렸다. 기습 공격에 당황한 카이난이 팔을 들어 눈을 피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카이난의 넓은 망토가 바람에 펄럭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시에나가 망토의 끝부분을 단검으로 찢었다.
물 흐르듯 이어진 행동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공작이 쿡, 웃으며 카이난에게 말했다.
“탈락인 것 같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카이난이 씁쓸한 미소를 띤 채 원 밖으로 나갔다. 루이젠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누나 최고-!”
시에나가 어색하게 그런 루이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원 안에는 공작과 시에나만이 남아 있었다. 셋이 나가자 아까는 비좁았던 원이 제법 넓게 느껴졌다. 공작은 시에나가 검을 처음 다뤄 본다고 해서 절대 얕보지 않았다. 그가 어째서 검술 대회에서 6년 연속 우승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대는 참 영특해.”
“…칭찬 감사합니다.”
시에나가 검을 고쳐 쥐고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시에나가 달릴 때마다 우수수 눈이 튀었다. 공작은 물 흐르듯이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조곤조곤 설명을 했다.
“이때는 차라리 머리를 공격하는 게 좋네. 아까 그대가 했던 것처럼 눈을 뿌리거나 모래를 얼굴에 뿌리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야.”
별별 비열한 방법을 다 알려 주는 공작의 자세는 고아하기 짝이 없었다. 시에나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제법 날렵했지만 전쟁터에서 몇십 년을 굴러온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공작이 뒷걸음질 치며 시에나의 검을 피하다 이내 고개를 훅 숙이며 시에나의 뒤에 섰다. 제 몸 전체를 가린 그림자에 시에나가 깜짝 놀라 피하다 콰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에나!”
데이몬이 깜짝 놀라 시에나에게 다가갔다.
“다치진 않았어?”
“네, 네에.”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한 시에나에게 공작이 미소 띤 얼굴로 온화하게 말했다.
“내가 이긴 것 같군.”
“네?”
혹시나 싶어 바닥을 살피자 시에나의 손바닥이 닿은 곳이 원의 바깥쪽에 위치해 있었다. 설마 전부 계산된 행동이었던 건가. 시에나가 당황해서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적보다 다섯 수 앞을 내다보아야 하는 법이지. 그대도 처음치고는 몹시 잘했네.”
공작이 여전히 눈 바닥에 앉아 있는 시에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에나가 공작의 손을 마주 잡았다. 공작이 탄력 있게 시에나를 끌어당겨 단번에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엉덩이를 탁탁 털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여전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시에나 그대는 몸을 움직이는 데 제법 재능이 있는 듯해. 조카에게 꾸준히 배워 봐도 좋겠네.”
“맞아, 시에나 재능 있어.”
“누나 엄청 멋졌어요.”
“가, 감사합니다.”
시에나가 쏟아지는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제 다시 출발해 볼까? 지금 출발해야 저녁때는 도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네.”
“네, 알겠습니다.”
시에나를 태운 마차가 덜컹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산맥을 넘은 마차 창문 밖으로 서서히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