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꿈나무에게 집착 받고 있습니다-9화 (9/14)
  • <2부>

    석양이 들어 붉어진 방 안에서 남자는 짐을 싸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초조한지 짐을 대충대충 던져 넣는 바람에 가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짐을 더 욱여넣은 뒤 가방을 체중으로 꾹꾹 눌렀다. 가방이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조금씩 닫히기 시작했다.

    절대 닫힐 것 같지 않은 가방을 힘으로 억지로 닫은 남자가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석양빛에 반사된 남자의 금색 눈이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던 남자는 책상 앞에 위치한 낡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두 손에 안기에는 큰 크기의 반투명한 상자 안에 텅 빈 찻잎 통과 다 쓴 롤온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낡은 목도리와 모자 등 실용적이면서도 아기자기한 선물들이 가득했다.

    “이런.”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냐는 한탄과 흡사했다. 상자의 크기는 제법 커서 손으로 들고 갈 수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소중한 걸 손으로 들고 다니다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이내 조심스레 상자를 안은 뒤 가방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억지로 닫아놓은 상자의 지퍼를 누르자 안에 있던 물건들이 펑 소리와 함께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쌌던 짐을 와르르 쏟아 내었다. 다이아몬드 큐빅으로 장식된 넥타이핀과 루비와 사파이어가 박힌 휘황찬란한 브로치들이 우당탕 떨어져 마룻바닥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호박으로 만들어진 금색 브로치도 침대 밑으로 데구르르 굴러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몬은 신중하게 가방 안에 넣을 상자의 위치를 고르고 있었다. 상자 안에 옷을 둘둘 마는가 하면, 이따금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예 천을 사는 게….”

    “빰빠라밤 빰빰빰 빰빠라밤-. 데이몬 수석 졸업을 축하합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북과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다. 개중에서도 제일 시끄러운 건 루이젠의 목소리였다.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밤손님에 가까워 보이는 데이몬의 모습에 루이젠이 입을 딱 벌렸다.

    “야, 너 어디 가려고!”

    “졸업장 받았으니까 집에 가야지.”

    “오늘 저녁에 졸업 파티 있는 거 알잖아! 수석 졸업생이 빠지겠다고?”

    “상관없어. 너나 재밌게 즐기다 와.”

    상자에 모직 코트와 잠옷, 학교 카디건까지 둘둘 감은 데이몬이 드디어 만족스러운 위치를 찾았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 완벽한 미소를 본 루이젠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안 돼, 못 가!”

    “걸리적거려, 루.”

    “아, 루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루이젠이 심통을 부리자 데이몬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안 부를 테니까 나 그냥 보내 줘.”

    “루는 정말 좋은 이름이지. 너라면 계속 불러줘도 좋아.”

    루이젠의 태세 변환에 데이몬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지만 그는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아!”

    “마차에서 간단히 먹을 거야.”

    아카데미 내의 식당에서 가져온 허름한 샌드위치를 쥔 데이몬에게 루이젠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수성찬을 코앞에 두고 저 맛없는 샌드위치를 먹겠다고 잘도 말하는구나.

    “참 질리지도 않는다. 6년간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어.”

    “한결같지는 않아.”

    “뭐?”

    “더 좋아졌는걸.”

    “기가 막혀.”

    데이몬은 루이젠의 핀잔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캐리어 안에 옷을 쑤셔 박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갈게. 다음에 보자.”

    “우리한테 다음이 있긴 해?”

    “네가 우리 영지로 오기로 했잖아.”

    “그렇긴 한데… 엇… 야, 저거 내가 너 생일 선물로 준 브로치 아냐?”

    루이젠의 말에 데이몬이 힐끗 뒤를 보았다. 데이몬이 나서기도 전 루이젠이 빛처럼 빠르게 달려 나가 침대 밑에서 반짝이는 브로치 하나를 주웠다.

    호박 주위에 박힌 큐빅들에 먼지가 묻어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데이몬은 처음으로 당황한 눈치였다.

    “그게.”

    “아이고오-! 6년 내내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키워 주고 꼬박꼬박 선물도 갖다 바치고 다 했는데 졸업하자마자 학생 신분 마지막 무도회도 안 나가고 선물도 다 갖다 버리고 떠나려는 것 좀 보시오-! 동네 학생분들-!”

    루이젠의 목청이 필요 이상으로 커졌다.

    잘못 걸렸다.

    데이몬이 인상을 찌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루이젠은 카펫 밑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호소했다. 각자 악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던 친구들까지 북을 둥둥 치고 트럼펫을 뿜빰거리며 흥을 돋웠다.

    그 소음에 사람들이 복도를 지나가며 힐긋힐긋 방 안을 들여다봤다. 결국 데이몬이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 테니까 일어나.”

    그 말과 동시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루이젠이 벌떡 일어났다. 루이젠은 우아한 포즈로 데이몬의 가슴께에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호박 브로치에 묻은 먼지를 손등으로 스윽 닦아 내자 깨끗해진 브로치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후, 입김을 불어 먼지 한 톨까지 용납하지 않고 떼어 낸 루이젠은 호박 브로치만큼이나 환하게 웃었다.

    “가시죠.”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영식처럼 공손한 태도로 손을 내미는 루이젠을 가볍게 무시한 채 한숨짓던 데이몬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나 파트너 없어.”

    “무쓴 그런 섭섭한 소릴! 내가 너의 단 하나뿐인 친구이자 파트너가 아니었니.”

    “너랑 왈츠를 추라고?”

    데이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들보다 머리 반통은 큰 루이젠과 한통 가까이 큰 데이몬이 춤을 추는 장면은 어지간히 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루이젠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첫 춤 지나면 자유롭게 추게 되어 있어. 그리고 지금 너 정도면 눈길만 줘도 몇몇 영애들은 파트너 버리고 너한테 갈걸.”

    시에나를 만나기 위해 근래 들어 가장 멋지게 차려입은 데이몬이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저 차림 그대로 마차에 장시간 있으면 불편할 텐데도 데이몬은 꼭 이렇게 두고 온 정인에 대해서 맹목적이었다.

    “영애들은 나한테 관심 없어.”

    “그건 네 생각이고. 너랑 눈 한 번 마주치면 너랑 낳을 둘째 아이 얼굴까지 생각하고 있을 영애들이 분명 있다는 데 한 표 던진다.”

    “나 역시 동감이야.”

    옆에 남자가 그의 말에 동감했다.

    “카이난.”

    데이몬은 너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며 핀잔주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칼과 금을 녹인 듯한 눈동자가 놀랍도록 데이몬과 닮아 있었다.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은 데이몬과는 다르게 흐트러져 이마 밑으로 내려온 머리칼과 장난꾸러기 같은 눈동자가 아니라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둘은 외모도 체구도 흡사했다.

    “그거 너무 황자님 자랑 아닙니까?”

    어이없다는 듯 루이젠이 작게 속삭였다. 카이난이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칭찬하면서 나를 치켜세울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 아닌가.”

    카이난은 그렇게 말하며 짐을 정리하느라 관자놀이 안쪽으로 살짝 빠져나온 데이몬의 옆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정리해 주었다. 데이몬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자 그림자가 볼 위를 타고 내려왔다. 그림 같은 그 장면을 주변 사람들이 힐끗힐끗 바라 보았다.

    첫 모습은 흡사했지만, 그들은 보면 볼수록 다른 사람이었다. 카이난은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데이몬은 그보다는 조금 흰 피부에 근육이 단단히 올라붙은 늘씬한 체형이었다. 카이난이 평원을 다스리는 사자라면, 데이몬은 정글을 매끄럽게 유영하는 흑표범이었다.

    눈이 처져 선한 느낌을 주는 카이난과는 다르게 데이몬의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워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따금 자신의 사람 앞에서 한없이 순해지는 눈꼬리는 뭇 영애와 영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한 배에서 나왔지만 열두 살까지 서로를 보지 못했던 둘은 입학식 날 서로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데이몬은 수석, 카이난은 차석이었다. 입학식 날 수석 증표를 수여받고 내려오는 데이몬에게 카이난이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시에나에 대한 생각에 꽉 차 있었던 데이몬은 그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무례한 행동이라고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카이난은 개의치 않고 그를 계속해서 쫓아다녔다.

    선택받은 황자와 버림받은 황자. 카이난은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데이몬에게 흠뻑 빠져들어 지냈다. 몇 년간은 카이난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결국 그 애정 공세에 데이몬도 마음을 조금 열게 되었다.

    그게 못내 기뻤던 카이난이 데이몬을 공식적인 황자로 인정해 달라며 황제에게 요청했다가 근신형에 처해지는 건 물론, 데이몬은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뻔했다. 그 후 루이젠에게서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데이몬이 학을 떼고 그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지만 삼 일 밤낮을 기숙사 문 앞에서 징징거린 탓에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게 되었다.

    카이난과 데이몬, 루이젠 그리고 또 하나의 일원은 어느새 해밀턴 아카데미의 유명 인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실력, 그리고 그들의 신분과 재력까지.

    연회장으로 향하는 그들의 앞으로 사람들이 비켜섰다. 차례차례 비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 한 명, 그들을 보고도 비키지 않으면서 화사한 미소를 짓는 이가 있었다.

    “엘리샤,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데이몬 님 사수 작전에 대해 들었는데 결과가 궁금해서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엘리샤는 혀를 살짝 빼물며 애교 있게 말했다. 엘리샤는 가느다란 은색 실 같은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유리구슬 같은 푸른 눈으로 연신 거대한 카이난의 뒤를 살피고 있었다. 카이난의 뒤로 삐죽 튀어나온 검은 머리통을 발견한 엘리샤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데이몬 님!”

    “반갑습니다, 엘리샤 영애.”

    데이몬의 표정은 전혀 반갑지 못했지만 엘리샤는 개의치 않고 그를 반겼다.

    “졸업 파티에 참여하시게 되었군요.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저도 기쁩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랍니다, 영애.”

    영혼이 사라진 대화였지만 셋은 개의치 않고 데이몬을 연행하듯 감쌌다. 포기한 데이몬이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에서는 이미 가벼운 미뉴에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의 하모니가 울리는 돔 형태의 연회장에서는 귀족 영애와 영식들이 한껏 차려입고 졸업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카이난 일행은 자연스레 그 중앙으로 향했다.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샴페인 한잔할까? 아니면 식사부터?”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기 있네.”

    시종이 들고 있는 샴페인 잔을 차례차례 건네준 카이난이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나와 데이몬, 루이젠, 엘리샤의 졸업을 축하하며.”

    챙. 얇디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샴페인 잔이 공중에서 가볍게 부딪혔다. 낮은 도수의 샴페인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적당한 탄산과 새콤한 산미가 입맛을 돋우었다.

    “데이몬, 아직 저녁 식사 안 했지? 사람들이 첫 춤 추는 동안 우리 가서 먹고 오자.”

    루이젠이 연회장 한쪽에 마련된 식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데이몬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루이젠, 너 정말 파트너 없어?”

    “그래. 어차피 너도 없을 게 뻔한데 어떻게 파트너를 신청하겠어. 혼자 둘 수는 없지.”

    데이몬은 끔찍이도 챙기는 루이젠이었다. 데이몬은 슬쩍 감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첫 춤 즐겁게 추시길.”

    “추고 함께 와서 식사해요.”

    루이젠의 말에 카이난과 엘리샤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이 시작되고, 카이난이 엘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샤는 작은 손을 얹는 것과 동시에 나비처럼 사뿐히 돌기 시작했다. 시폰 드레스 안에 새끼손톱만 한 보석을 가득 박아 넣은 엘리샤의 치맛자락이 조명이 비출 때마다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던 데이몬을 루이젠이 잡아끌었다.

    “배고프다, 얼른 가자.”

    “…그래.”

    50명이 앉고도 남을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음식들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첫 춤 이전이라 식당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루이젠은 신이 나서 그릇에 음식들을 퍼 담기 시작했다.

    “꼭 전세 낸 기분인걸. 와, 음식들 좀 봐. 데이몬.”

    “맛있어 보이네.”

    데이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접시 위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운 패스티(만두처럼 고기와 채소로 속을 넣어 구운 작은 파이)가 가득했고, 금박을 입힌 파이와 작은 비스킷이 산더미처럼 올라가 있었다. 병아리콩을 곁들인 송아지고기 스튜와 공작새구이, 통째로 구워 다시 가죽에 넣은 사슴, 새고기로 속을 채우고 격자 모양으로 덮은 파이 등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는 고기와 당과를 뿌린 정켓과 풍성한 트뤼프가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었다.

    설탕에 졸인 오렌지 껍질에 초콜릿을 덮은 오랑제트를 입 안에 넣으며 루이젠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 보여도 미식가인 루이젠을 만족시킨 요리라면 안에서 주방장이 얼마나 이 연회를 고생해서 만들었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디저트부터 먹으면 입맛 버려.”

    “그치만 가장 먹고 싶은 것부터 먹어야 행복한걸.”

    데이몬의 말에 루이젠은 입을 삐죽이며 반박해 왔다.

    “그리고 고기도 이렇게 많이 가져왔으니까 상관없다고.”

    은접시 위에 육즙이 줄줄 흐르는 두꺼운 스테이크와 잘 익은 꿩고기를 담은 루이젠이 접시를 가리켰다. 고기와 빵을 한가득 담은 루이젠과는 다르게 데이몬은 샌드위치와 고기 몇 점을 담았을 뿐이었다.

    “그만큼만 먹고도 키가 그렇게 큰 건 반칙이야.”

    “검술 수업이 끝나고는 나도 많이 먹잖아. 지금은 그냥 배가 덜 고플 뿐이야.”

    루이젠이 입을 삐죽이자 데이몬이 여상한 말투로 그를 달래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좀 더 먹어. 요즘 너 말랐어.”

    루이젠이 집게를 이용해 데이몬의 접시 위에 노랗고 길쭉한 것을 후두둑 뿌려 주었다. 갓 튀긴 듯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감자튀김을 바라보던 데이몬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맛있겠다.”

    “튀긴 건 별로 안 좋아하면서 이건 꼭 한 번씩 먹더라 자기 영지에서 최초로 선보인 음식이라 그런가?”

    “뭐, 그렇기도 하지만… 맛있잖아.”

    바삭, 길쭉한 감자튀김 하나를 입 안에 넣고 우물대며 데이몬이 말했다. 식탁에 앉기 전에는 절대 접시 위의 음식을 먹지 않는 데이몬이지만, 감자로 만든 요리에는 유독 관대한 편이었다.

    머스캣 포도주와 벌꿀술 미드가 담긴 잔을 하나씩 집은 그들이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데이몬이 문밖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할 거면 아예 초대를 하지 그랬어.”

    “뭐가?”

    “네 약혼녀 말이야. 졸업 파티에 한해서 외부인도 초대가 가능하잖아.”

    평소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해밀턴 아카데미였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귀족들은 이미 성년이 되기 전 약혼을 끝내 놓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아카데미에 없을 시에는 파트너 한 명에 한해 초대가 가능했다.

    “됐어. 시에나는 바빠.”

    “그건 알지만 그런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보여 주면 와 주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끄러워. 식사나 해.”

    비스킷 하나를 루이젠의 입에 넣어 버리며 데이몬이 말했다. 루이젠이 미드로 딱딱한 비스킷을 녹여 먹는 새 데이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반과는 다르게 식당에는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첫 춤을 마친 사람과 이제 마악 도착해 식사부터 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는 데이몬의 뒤로 세이지 꽃향기가 흘러들어왔다. 데이몬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상기된 표정의 영애 둘과 화려하게 꾸몄지만 어쩐지 우울해 보이는 영애 하나가 마악 음식을 가지고 앉은 참이었다. 그들은 벌떡 일어난 데이몬을 토끼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뭐, 뭐야. 왜 그래, 데이몬?”

    막 비스킷을 넘긴 루이젠이 깜짝 놀라 물어왔다. 데이몬에게 잔뜩 주눅 들어 눈치를 보는 영애의 목덜미에서 희미한 세이지 향이 나고 있었다. 연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영애를 보고 데이몬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 드렸군요.”

    “괘, 괜찮아요.”

    “좋은 향이 나서 저도 모르게 뒤돌아보게 되었네요.”

    데이몬이 머리를 긁적이며 정말 미안하다는 듯 말하자 긴장을 푼 영애가 안도하며 답했다.

    “아… 이거요. 세이지 향수에요. 좀 독특하죠.”

    “좋아하는 향입니다.”

    데이몬이 미소 짓자 남아 있던 긴장이 풀리는 것은 물론 영애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 기류를 눈치챈 두 영애가 그 영애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 무슨 그런…! 안 돼!”

    “뭐 어때. 지금 네가 찬 빵 더운 빵 가릴 처지니.”

    “그래. 근사하잖아. 말이나 한번 해 보는 게 뭐가 나빠.”

    소곤거리는 소리가 전부 다 들려와 데이몬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침묵을 택했다. 루이젠이 뒤에서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영애는 쭈뼛대면서도 용기를 내어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혹시 파트너가 없으시다면 저와 함께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약혼녀가 있습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거절당한 영애의 얼굴이 불쌍할 만큼 새빨개졌다. 데이몬은 그걸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영애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소심한 성격에 용기를 내었다가 거절당했으니 그 마음이 오죽 쓰릴까. 부추기던 영애들까지도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자 사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음식을 입 안에 넣고 우물대던 루이젠이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이 녀석은 입학 때부터 이랬으니 너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아리엘 영애.”

    당장이라도 식당을 빠져나갈 기세였던 영애가 이름이 불리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함께 6년을 배웠던 사이인데, 어떻게 이름 하나 모르겠습니까.”

    영애의 이름을 몰랐던 데이몬이 괜스레 뜨끔해 시선을 피했다. 루이젠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영애의 앞에 섰다.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화병에 꽂혀 있던 꽃 한 송이를 아리엘에게 내밀며 루이젠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이 무뚝뚝한 녀석 대신 저에게 영애와 함께할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어머, 어머.”

    영애들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워낙 목소리가 커서 전부 다 들리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는 온몸이 세이지 꽃처럼 붉어진 영애가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루이젠은 활짝 미소 지으며 아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의 손이 포개지자 루이젠이 그런 그녀를 이끌고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영애들이 꺄악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데이몬 님, 함께 가요.”

    “그래요. 좋은 구경이잖아요.”

    소심한 성격의 아리엘 영애와는 달리 둘은 제법 활기차고 기운이 넘쳤다. 성년을 넘겼는데도 아직 소녀다운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둘이 홍조를 띤 채 루이젠과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무도회장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음악 역시 가벼운 미뉴에트에서 녹진하고 성숙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몸을 밀착한 파트너 사이의 스킨십이 농밀해졌다.

    그러나 루이젠과 아리엘만큼은 그렇게 가볍고 경쾌할 수가 없었다. 뭐든 완벽하게 해내는 카이난과 데이몬에게 가려져 있긴 하지만 루이젠은 제법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

    아리엘 영애도 긴장해 몇 번 발을 밟긴 했지만 분위기를 유하게 풀어 주는 루이젠 덕분에 미소 띤 얼굴로 한결 편안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갓 졸업해 성인이 된 귀족 영애와 영식들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가득했고, 앞으로 펼쳐질 달콤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영애 둘은 호들갑을 떨며 엄마처럼 아리엘 영애가 춤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그러니까, 춤 안 췄으면 어쩔 뻔했어. 연습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 발 밟았다.”

    “괜찮아, 이미 다섯 번째야. 참, 데이몬 님. 저희가 춤 안 추는 거 안쓰럽게 여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맞아요. 저흰 아까 이미 추고 왔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안 썼는데.

    데이몬은 진실을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에나 외에는 일체의 관심도 없는 데이몬이었다.

    ‘시에나 보고 싶다.’

    아까 세이지 꽃향기를 맡았을 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6년의 세월에도 시에나는 늘 한결같았다. 언제나 밝은 미소로 데이몬을 맞아 주었으며, 작은 몸으로 큰 성을 뽈뽈뽈 돌아다니면서도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매일 보고 싶은 시에나였지만 데이몬은 최근 일부러 만남을 자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갔던 게 3개월 전이던가.’

    편지는 꾸준히 썼지만, 방학이 끝난 후에는 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도저히 갈 수 없기도 했지. 데이몬은 그때의 아찔한 순간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방학을 맞이해 집에 왔건만 시에나는 운영에 바빠 데이몬과 얼굴 볼 새가 없었다. 마르바스 영지 운영뿐 아니라 약과 화장품, 롤온 사업에 이어 감자 사업까지 대박을 터뜨리는 바람에 시에나는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평민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는 약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달라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고,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화장품은 예약만으로도 완판되었다.

    데이몬을 위해 만들어 준 페퍼민트 롤온은 루이젠이 조르고 조른 끝에 테이모스 상단과 함께 판매를 시작한 지 이제 2년이 되었다.

    데이몬이 그 페퍼민트 롤온을 바르고 시험을 치러 매번 수석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슬쩍 흘리는 것만으로도 광고 효과는 엄청났다.

    테이모스 상단이 대부분의 유통을 관리하고 특허까지 따 놓아 다른 상단은 감히 유사품을 출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이의 공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살롱에는 언제나 페퍼민트 롤온 이야기가 나왔고, 거기에 대해 환상이 생긴 평민 부모들도 아이의 공부를 위해 빚을 내어 하나씩 사 주곤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시에나가 롤온의 디자인을 둘로 나누었다. 귀족들을 위한 고급스러운 금테 문양을 두른 롤온 디자인과, 평민들을 위한 심플한 디자인으로. 심플한 롤온의 경우 리필도 가능해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두 롤온의 원료는 같다고 말했지만, 귀족들은 더 비싼 롤온을 택했다. 비싸 봤자 그들의 재력에 비해서는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평민과 같은 디자인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감자 사업은 테이모스 상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몇 년의 연구 끝에 드디어 감자의 개량과 충분한 양이 공급되기 시작했으나, 그 수요는 여전히 적었다. 악마의 열매라고 불린 세월이 너무 길었기에 편견이 심했다. 감자를 오래 섭취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찝찝해했다.

    시에나가 택한 방법은 귀족들이 그 음식을 먼저 먹게 한 것이었다. 테이모스 상단에서 아카데미 식당 내의 식재료를 공급할 때 감자도 같이 끼워 넣어 공급했다.

    유행의 선두 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이몬과 카이난 일행이 감자요리를 즐겨 먹자 영애와 영식들도 쭈뼛대며 감자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냥 쪄 먹어도 맛있는 감자를 굽고 튀기고 볶았으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감자요리는 젊은 귀족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자식이 먹으니 부모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먹기 시작하자 평민들도 감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감자를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넓은 밭에 감자를 심어 놓고 허름한 울타리를 쳐 놓았다. 울타리 앞에 ‘귀족들이 먹는 감자, 훔치지 마세요’라는 조악한 문구도 적어 놓았다.

    그리고 일부러 밤에는 경비병을 세우지 않았다. 평민들은 감자를 서너 개씩 서리했고, 훔친 감자를 앞마당에 심기도 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쑥쑥 잘 자라는 감자였기에 감자 공급량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구휼을 위해 시작한 감자 농사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평민들은 덕분에 배곯을 일이 적어졌다.

    감자가 어느 정도 성공하자 시에나는 마르바스 영지에 감자 축제를 열기도 했다. 고소한 기름을 넣어 튀긴 감자칩과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해시브라운, 갓 튀긴 감자튀김에 마요네즈를 토핑하는 등 다양한 감자요리를 선보였다.

    감자 축제 외에도 롤온과 화장품, 약들을 영지에서는 시중 가격보다 저렴하게 판매했기에 마르바스 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세금을 걷지 않아도 영지에는 돈이 넘쳐났다. 더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숙박업소를 짓고 도로를 정비하자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일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마을에 정착하고 일을 하면서 돈이 돌고 돌아 모두에게 풍족하게 돌아갔다.

    몇 년 전만 해도 유령이 나올 듯 음습했던 영지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마르바스 영지는 몇 년째 봄날이었다. 전부 시에나의 무던한 노력에서 나온 성과였다. 시에나는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해 내려온 데이몬과 시에나는 오랜만에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생일이 지나 이미 성년을 맞이한 데이몬은 이미 성인이 된 시에나와 식사에 곁들여 술을 마셨다. 제법 도수가 있는 레드와인을 맛있다는 이유로 두 병이나 마신 게 화근이었다.

    저를 반짝이며 바라보는 유리구슬 같은 두 눈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두 뺨도, 오물거리며 이야기하는 붉은 입술도 예뻐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데이몬은 시에나를 벽에 밀어붙여 놓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키스에서는 달콤한 와인 맛이 났다. 정신없이 두 혀가 얽히고 시에나의 뒷머리를 받친 데이몬의 손등에서 힘줄이 돋아났다. 밑은 이미 팽팽하게 서서 아플 정도였다. 한참 서로에게 빠져 키스하던 데이몬은 시에나의 몽롱하게 흐트러진 모습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시에나 역시 흥분감에 허덕이며 데이몬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데이몬의 긴 손가락이 시에나의 크림처럼 연약한 목과 쇄골을 쓰다듬으며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한 손에 몰캉한 무언가가 잡혔다. 시에나와 데이몬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눈을 떴다. 데이몬의 손이 시에나의 가슴을 쥐고 있었다.

    서로 몇 년 동안 농밀한 입맞춤을 나누면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름이라 얇게 입은 옷 사이로 가슴의 몰캉한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당황한 시에나의 표정을 본 순간 데이몬은 즉시 손을 떼면서 제 뺨을 세게 쳤다.

    철썩.

    그 경쾌한 타격음에 시에나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꺅, 도련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시에나!”

    데이몬의 뺨이 손 모양 그대로 부풀어 오르는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시에나에게 연신 사과했다. 시에나는 곧 울면서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데이몬의 기세에 당황하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데이몬은 수십 번을 사과한 후 그대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방학은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데이몬은 그날 저녁 바로 아카데미로 떠났다. 돌아가는 내내 데이몬은 자책했다. 열두 살 몽정 이후로도 시에나는 종종 데이몬의 꿈에 나왔다.

    그녀가 꿈에 나와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데이몬은 속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일어나면 자책감에 우울해졌다. 데이몬에게 시에나는 빛이었고 구원자였다. 그런데 그런 시에나에게 욕정하다니.

    그래도 예전이라면 꿈일 뿐이라고 자위할 수나 있었지, 최근에는 시에나를 실제로 보기만 해도 서 버리는 바람에 아주 난감했다. 국가를 부르는 것도 한두 번이지 4절까지 완창하면서 겨우 가라앉혀도 시에나가 말을 거는 즉시 발기했다.

    도련님, 어디 아프세요? 라고 걱정스레 묻는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제 몸이면서도 제 몸 같지 않은 이 빌어먹을 부위를 잘라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요 이상으로 건강한 몸이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역시 정력을 줄이는 약을 먹는 게, 아니야. 부작용이 어떨지 모르잖아. 오히려 더 심해지면 어떡해?’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한 고민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데이몬은 생각을 뒤로하며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춤을 추고 있는 여자와 남자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카이난과 엘리샤였다. 카이난이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한 통은 더 큰 탓에 정중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도 너무나 잘 보였다.

    흑단같은 검은 머리와 은색 실을 꼬아놓은 듯한 엘리샤의 머리칼이 멋지게 어우러졌다. 그을린 피부와 단단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에너지가 주변을 압도했지만, 엘리샤 역시 카이난에게 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행복하게 마주 보며 춤추고 있었다. 노래의 템포에 맞춰 카이난은 엘리샤의 허리를 잡고 공중에 띄웠다가 내려 주었다. 엘리샤는 사람들 중 가장 높이 올라갔다가 소리 없이 사뿐히 착지했다.

    빙글빙글 돌면서도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 바빴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들이었다. 둘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데이몬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보고 싶다.”

    시에나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세이지 꽃향기가 났을 때부터 사실,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

    시에나를 보는 순간 짙은 자기혐오에 빠질 것을 알지만 상관없었다. 그 꿀 같은 금발에 입 맞춘 후 달콤한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세월이 지날수록 갈증은 더욱 커져 갔다. 시에나를 생각할 때마다 넓어지는 바다는 이미 아득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 바다가 전부 차는 날은 앞으로 절대 없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데이몬은 결국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영식…?”

    데이몬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회장을 빠져나갔다. 춤을 마친 루이젠이 뒤에서 급히 데이몬을 불렀지만 그는 이미 복도를 달리듯이 빠르게 걷고 있었다.

    “데이몬!”

    한번 결심하자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전속력으로 달린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널 생각하면 언제나 그랬다.

    데이몬은 방으로 돌아와 짐 가방을 들고 바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워진 밤공기가 기분 좋게 폐부를 적셨다. 아카데미 앞에는 마차가 즐비했다. 무도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을 맞기 위해 대기하는 마차였다.

    데이몬은 맨 앞에 있는 마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무도회가 끝나는 한밤중까지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던 마부는 급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 아이고. 나리, 어서 오십쇼.”

    “마르바스 영지로, 삯은 충분히 챙겨 주겠네.”

    “예, 예. 그러믄요.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마차로 마르바스 영지까지 가는 건 쉽진 않지만 그만큼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다. 마부는 눈을 빛내며 말고삐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때 허겁지겁 누군가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데이몬, 혼자 가는 게 어딨어!”

    데이몬은 황당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안으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루이젠이었다. 어찌나 뛰었는지 겨울인데도 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왜 여기 있긴. 우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기로 했잖아.”

    데이몬은 절대 꺼낸 적도 없는 말을 루이젠은 잘도 주절거렸다. 한참을 어이 없다는 듯 바라보자 루이젠이 어물어물 말을 주워섬겼다.

    “거기 감자요리가 그렇게 맛있다며, 나도 한번 먹어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보내면 분명히 금방 결혼하고 애 둘 낳고 평생 그 영지에 틀어박혀서 살 것 같단 말이지. 그 전에 제수씨 얼굴도 좀 보고 와야 하지 않겠어?”

    “제수씨?”

    “…형수님.”

    당장 루이젠의 엉덩이를 걷어차 집으로 보낼까 생각했던 데이몬은 간절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어, 웃었다.”

    “아니야.”

    다시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루이젠은 헤실헤실 웃으며 그를 놀려 대었다. 결국 헤드록에 걸려 항복을 외치는 새 마차는 출발해 버렸다. 달리는 마차에서 찌그러진 샌드위치를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루이젠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음식도 제대로 못 먹었네. 다 너 때문이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이 마차에 올라탄 건 넌데.”

    “갑자기 향수 얘기를 꺼내니까 그렇지. 넌 춤도 안 출 거면서 가련한 아가씨나 유혹하고 말이야.”

    “내가 언제 유혹했다고 그래.”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넌 그 얼굴과 피지컬이 유혹이고 개연성이야. 왜 세상 다 부술 정도로 잘생긴 애가 자기 혼자서만 잘생긴 걸 몰라?”

    루이젠이 땅이 꺼져라 한숨지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자기가 잘생겼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루이젠에게 하면 펄쩍 뛰며 반박했지만.

    시에나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커진 덩치와 힘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제 다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에나가 있는 침대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자 조금 슬퍼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속내가 음흉한 건 똑같은데.

    “네가 더 잘생겼어.”

    “에휴. 말을 말자.”

    진심인데.

    데이몬은 더 이야기해 줄까 하다가 루이젠이 먼저 입을 여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 향수, 시에나 양이 바르는 향수지?”

    “…맞아.”

    더불어 시에나가 개발한 향수기도 하고. 세이지는 데이몬이 아카데미 시험을 보러 가기 전 함께 갔던 마을 축제에서 여신의 뜻을 받든 소녀 연기를 했을 때 처음 본 꽃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았던 붉은 세이지 꽃이 시에나의 금빛 실타래 같은 머리 위로 살랑살랑 내려오는 장면은 지금도 선명했다. 그 후로 시에나는 세이지 꽃에 제법 관심을 가졌는지, 가장 먼저 만든 것도 세이지 꽃이 주원료로 들어가는 향수였다.

    “넌 정말 그 꽃 좋아한다.”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세이지 꽃의 꽃말은 구원이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라질 것처럼 앙증맞고 연약하게 생긴 꽃이 어떻게 그렇게 묵직한 의미의 꽃말을 얻게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 꽃말도 꽃도 좋았다. 옹기종기 작게 모여 소담스럽게 핀 세이지 꽃은 꼭 시에나를 떠올리게 했다. 작고 연약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구원이 된다는 점에서 둘은 같았다.

    그 시에나를 이제 계속해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며시 미소 짓는 데이몬을 보며 루이젠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항상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는 냉미남이 영지에 두고 온 정인만 생각하면 천하의 바보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좋아?”

    “뭐가?”

    “시에나 양 말이야.”

    시에나라고 전에 한 번 불렀다가 3일 내내 무시당한 이후로 루이젠은 시에나의 이름 뒤에 꼭 양을 붙여 불렀다. 자기는 시에나라고 하면서, 아주 웃기는 놈이었다.

    “좋아. 정말로.”

    “그래 보인다.”

    비꼬는 말투인데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추운 마차 안에서 시에나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훈훈해졌다. 데이몬이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 여름의 바람처럼 달콤한 그대의 이름은….”

    “으엑.”

    그런 데이몬이 루이젠은 마냥 신기했다. 루이젠은 아직 사랑이 뭔지 몰랐다. 몇 번 영애들과 데이트를 한 적은 있었지만, 데이몬이나 카이난, 엘리샤와 어울리는 게 더 좋았다. 그러나 카이난과 엘리샤, 데이몬은 셋 다 사랑을 하고 있었기에 루이젠은 가끔 외로워질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루이젠은 데이몬 같은 사랑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안정적이어 보이는 카이난과는 달리 데이몬의 사랑은 어쩐지 병적인 구석이 있었다.

    데이몬의 삶의 중심은 시에나였다. 데이몬은 시에나에게 육체부터 시작해 영혼까지 샅샅이 옭아매져 있는 듯했다. 시에나가 만약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라고 하면 데이몬은 화롯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망설임 없이 뛰어들 터였다. 일반인인 루이젠은 그런 데이몬이 대단해 보이면서도, 가끔 무서웠다.

    “지금 좀 자 둬.”

    데이몬이 그에게 담요를 건네주며 말했다.

    “아직 초저녁인데?”“비포장도로 들어가기 전에 자 두는 게 나아. 덜컹거리면 못 자니까.”

    “뭐야, 왜 이렇게 상냥해. 뭐 잘못 먹었어?”

    “씁, 챙겨 줘도.”

    데이몬이 인상을 찌푸리자 루이젠이 금세 헤실대며 담요를 몸에 둘렀다.

    “좋아서 그렇지. 좋아서.”

    “…감자요리 먹고 싶다며. 도착해서 아침으로 먹으려면 지금 자 두는 게 좋아.”

    데이몬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쑥스러운지 괜스레 콧잔등을 긁적였다. 딱딱하고 남에게 관심 없는 데이몬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루이젠을 살뜰하게 챙겼다. 이렇게 되기까지 루이젠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입학했을 무렵 루이젠이 마냥 밝은 빛이라면, 데이몬은 어둠을 농축시켜 놓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너무 다르면 오히려 궁금해지는 법, 데이몬이 마음에 들었던 루이젠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데이몬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루이젠에게 관심이 없었다. 데이몬은 초반 6개월까지 루이젠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머리가 좋은 데이몬이었으나 자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정보는 가차 없이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루이젠의 이름이 그에겐 그런 의미였겠지. 들판에 난 잡초처럼 몹시도 가볍고, 의미 없는 것.

    어린 루이젠에게 데이몬의 어둠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데이몬을 더 알고 싶은데 정작 그는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데이몬에게 오기가 생긴 루이젠은 끊임없이 그에게 자신의 정보를 주입시켰다.

    옆에서 보면서 느꼈던 거지만, 데이몬은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같아 보였다.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도 벅찬 탓이었을까.

    그렇지만 테이모스 후작가에서 태어난 루이젠이 어려서부터 가지지 못한 것은 없었다. 그건 후작가의 재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루이젠의 집착 때문이기도 했다. 루이젠이 집착한 지 6개월 만에 결국 데이몬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때의 루이젠은 하늘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에도 루이젠은 그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데이몬의 어둠을 알고 싶다는 이유는 사라지고, 이제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데이몬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루이젠이 노력할수록 데이몬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러나 루이젠은 그의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몰랐다.

    “데이몬.”

    “자라.”

    “이씨, 곧 잘 거야. 그냥 하나만 물어보려고.”

    “뭔데?”

    “그거…아직도 아파?”

    “뭐 말이야?”

    “그러니까…네가 나 구하러 왔다가 생긴 흉터.”

    “아니. 이젠 거의 보이지도 않는걸.”

    거짓말.

    루이젠은 담요를 얼굴까지 묻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데이몬의 팔에 흉터가 생긴 건 모두 저 때문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몬스터 때문에 데이몬과 루이젠이 5학년을 막 시작했을 때,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학생들 몇몇을 추려 몬스터 토벌에 나섰다. 루이젠은 토벌을 나간다면 한 달 치 수업을 빼 주겠다는 말에 눈이 멀어 야매로 테스트를 봐 그 일원에 끼게 되었다. 그러나 몬스터와 인간의 싸움은 생각했던 것처럼 가볍지 않았다.

    루이젠은 첫날 둔기를 든 오크를 보고 도망치다 시체를 난도질하는 자이언트 오우거와 부딪히고 말았다. 자이언트 오우거가 루이젠을 보고 입을 열자 제 이의 다섯 배는 되어 보이는 누런 이빨 수십 개가 드러났다. 루이젠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이언트 오우거의 투박한 손에 루이젠의 가엾은 머리통이 날아가기 직전 데이몬이 나섰다.

    데이몬은 날렵하게 루이젠을 엎드리게 만들며 그의 머리로 내리꽂히는 자이언트 오우거의 팔을 그대로 베어 내었다. 팔이 날아가는 고통에 자이언트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마구 흔들었다.

    그 묵직한 무기에 스피드가 더해지자 피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데이몬은 끝까지 루이젠을 지켜 냈다. 루이젠의 그의 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데이몬은 자이언트 오우거에게 거의 한쪽 팔을 내주며 오우거의 머리통 위로 올라갔다. 너덜너덜해진 팔 대신 체중을 이용해 자이언트 오우거의 뇌에 직각으로 검을 박아 넣었다. 오우거는 머리에 검이 꽂힌 채 비틀대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쿵, 쓰러졌다.

    ‘괜찮아?’

    머리가 찢어졌는지 삽시간에 피가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데이몬은 아무렇지도 않게 루이젠의 안부를 챙겼다. 제 상처가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전혀 자신의 몸을 챙기지 않았다. 그저 루이젠이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 궁금해할 뿐이었다. 루이젠은 그제야 데이몬의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저도 그런 사람의 축에 조금은 끼어 있다는 것도. 깨닫자마자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으… 으….’

    루이젠은 데이몬의 얼굴을 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 섞인 신음을 내었다. 쓱, 데이몬이 루이젠의 볼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내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나 보다. 일어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말투가 너무 다정하여, 루이젠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데이몬, 미안해….’

    ‘난 괜찮아. 일단 빠져나가는 거 먼저 생각하자.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루이젠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몬이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팔이 베여 덜렁거리면서도 데이몬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마운 은인이지만 그때는 정말 미친놈 같았다.

    현실로 돌아온 루이젠이 데이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팔은 깨끗하게 나아 있었지만 그 일은 루이젠의 가슴에 묵직한 추처럼 평생 남아 있을 테였다.

    “너 그때 왜 웃었어?”

    “언제 말이야?”

    “자이언트 오우거한테 날 구했을 때 말이야. 팔이 덜렁거리면서도 웃었잖아.”

    “아아.”

    데이몬은 잠시 그때를 회상하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네가 안 다쳤잖아.”

    “뭐?”

    “네가 안 다친 게 좋아서 웃었어.”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나는 안 다쳤지만 너는 엄청 다쳤잖아.”

    “난 상관없어. 이제는 내가 검술에 검 자도 모르는 애를 자이언트 오우거한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구해 낼 수 있다는 게 좋았던 거니까. 그리고 어차피 신관한테 치료받았는걸.”

    데이몬은 그렇게 말하며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팔을 요리조리 흔들었다. 그러나 가끔 다쳤던 팔 부위에 환상통 같은 게 오는지 잠결에 팔뚝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리는 데이몬을 본 적 있는지라 루이젠은 그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라니. 예전에는 구해 내지 못했던 걸까. 그러나 루이젠은 그 화제는 꺼내면 안 될 것 같아 조심스레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데이몬, 혹시… 날 구한 게… 나를 사랑해서 그랬던 거야?”

    “네가 사실 마차를 별로 타고 싶지 않구나?”

    “아니용. 정말 타고 싶습니다요.”

    “그럼 조용히 가자.”

    “예, 형님.”

    루이젠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데이몬은 루이젠의 허튼소리를 듣지 않으려는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마차에 기대었다. 마차가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말의 투레질 소리를 들으며 루이젠 역시 눈을 감았다. 저 멀리서 올빼미 소리 들려오는 밤이었다.

    * * *

    “시에나 님, 주무십니까?”

    “아니, 막 일어난 참이야. 무슨 일이야?”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인이 꼭두새벽부터 시에나를 불렀다. 시에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인을 맞이했다.

    “오늘도 몬스터 때문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새벽에 맨티스와 고블린들이 쳐들어와 병사들 몇몇이 부상을 입었어요.”

    “많이 다친 거야? 몇 명이나 다쳤는데?”

    “열다섯 명이 다쳤는데 그중 셋은 중태고, 나머지도 중경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 중이에요.”

    “그렇게나 많이? 밭에 갔다가 오후에 병원도 다녀와 봐야겠네. 그런데 맨티스랑 고블린이라니, 둘이 원래 협동하기도 했나?”

    “아니요.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시에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울에는 가끔 산에 사는 고블린들이 배가 고파 내려오는 경우는 있는데, 맨티스와 협동해 밭을 털어 갔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최근 이런 일이 많이 생기네. 일단 용병을 구해서 경계를 더 철저히 하자. 농작물의 피해 규모는 어떻게 돼?”

    “감자 피해가 대부분이고, 피해액은 약 200골드가량입니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래도 몬스터들이 그렇게 나왔는데 사망자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시에나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준비하는 대로 나갈게. 알려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지만 제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인을 집사로 뽑은 지 벌써 5년이 다 되어 갔다. 비밀 투표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반에 남자 사용인들은 여자가 집사를 한다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었다.

    사용인 중 여자가 70%였기에 나온 결과긴 하지만 집사를 맡은 뒤부터 제인은 시에나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며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 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해치우는 제인이 집사를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사라졌다.

    제인은 오늘처럼 항상 새벽같이 일어나 시에나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들을 간추려 전달했다. 제인의 정보는 항상 정확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발로 뛴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제인은 시에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시에나는 제인을 집사로 추천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친 시에나가 문을 나섰다. 밖에는 제인이 샌드위치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괜찮은데.”

    “안 돼요. 식사 잘하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알았어. 먹을게.”

    시에나가 말라붙어 꺼끌꺼끌한 입 안에 샌드위치를 욱여넣자 옆에서 제인이 주스도 건네주었다. 선명하고 진한 초록색. 주스의 색깔을 본 시에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윽, 맛없어 보여.”

    “건강에 좋아요.”

    뽕, 뚜껑을 따자 생채소를 간 신선한 내음이 더 진하게 났다. 시에나가 눈을 감고 꼴딱꼴딱 음료를 삼켰다. 제인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옳지, 잘하시고 계세요. 네, 조금만 더. 다 왔어요.”

    열정적인 응원에 힘을 내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시에나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뭐로 만든 거야?”

    “케일이랑 사과랑… 양배추도 들어갔고, 당근도 넣었어요.”

    먹기 전에 안 물어보길 잘했다. 시에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주스에 양배추는 좀 아니지 않을까.”

    “양배추가 속에 좋아요. 요즘 시에나 님 계속 속 쓰려 하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조합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시에나는 제인이 요리 쪽으로 가지 않은 것에 대해 새삼 감사했다.

    “그래. 생각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앞으로 세 끼 꼬박꼬박 드시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제인의 말에 대답 대신 애매한 웃음을 흘린 시에나가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경비병들이 시에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수고가 많네.”

    “시에나 님, 일찍 나가시는군요?”

    “응. 농작물 피해랑 부상자가 생겼다고 해서 상황을 한번 보려고.”

    “고생 많으십니다.”

    그렇게 말하며 경비병은 문을 열어 주었다. 아까만 해도 어두웠던 하늘이 어슴푸레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쉰 숨은 하얀 입김으로 화했다. 벌써 겨울이 왔구나.

    “시에나 님, 타시어요.”

    “응.”

    정문 앞에는 마차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시에나는 푹신한 마차에 올라타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사 넷이 앞뒤로 둘씩 붙어 마차를 호위했다. 이윽고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도련님은 잘 지내고 계시려나.”

    너무 오래 못 봤더니 산 너머의 뭉게구름조차 도련님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에는 깜짝 놀라긴 했지만….’

    도련님은 더 놀란 것 같았지. 키스하다가 시에나의 가슴에 손이 닿았을 때, 데이몬의 표정은 정말이지 볼만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시에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진하기도 하시지….”

    서로 마음을 알고 좋아한 지 6년이었다. 데이몬도 시에나도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그는 좀처럼 키스 이상의 것을 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망설이게 하는 걸까.

    ‘나는 이미 준비가 되었는데.’

    시에나 역시 데이몬과의 관계에 대해 오랜 시간 망설였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시에나는 원래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의 사람인 제가 이세계의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사실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관계를 가지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혹시 아기라도 생긴다면, 그런데 돌아가 버린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에 시에나가 생각을 흐트러트리려 고개를 휘휘 저었다.

    데이몬은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요 근래를 제외하고는 내내 금요일 수업이 끝난 뒤 바로 출발해 토요일 아침에 마르바스성에 당도했다. 달콤한 주말을 보낸 후에는 일요일 밤 밤에 느직하게 출발했다.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러지 말라 타일러도 보고 화도 내 봤지만 데이몬은 요지부동이었다.

    방학 때는 친구들과 어디 놀러 갈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런 일 없이 시에나의 곁에 꼭 붙어 그녀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중을 자처했다. 정말이지 데이몬은 밤 시중을 제외한 모든 시중을 들었다. 그때마다 시에나는 꼭 일국의 왕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꼬박 6년이었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소녀가 여자가 되는 시간에도 데이몬은 한결같았다. 그동안 시에나의 마음에는 점점 확신이 자리 잡았다. 둘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젠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다. 시에나 역시 마음 깊이 데이몬을 사랑했다. 그래서 처음이라면 데이몬이 좋았다. 세월이 지나며 단단히 자리 잡은 당연한 확신이었다.

    “다음에는 내가 확 덮쳐 버릴까.”

    “예?”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에 열중하다 보니 옆에 제인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다행히 제인은 서류를 검토하고 있어 시에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서류에 집중하는 제인을 보며 시에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가림막을 열고 말했다.

    “알았네.”

    시에나가 웃옷을 입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마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이윽고 멈춰 섰다.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시에나가 흙바닥에 발을 디뎠다.

    “세상에.”

    시에나가 숨을 들이켰다. 널찍한 밭은 생각 이상으로 참혹했다. 감자는 누군가 속을 파먹은 것처럼 훼손되어 밭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이외의 작물들 역시 참혹하게 망가져 있었는데, 그 위로 붉은 피와 초록색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밭 어딘가에서 썩은 내가 나는 듯했다.

    보고만 받았지 실제 상황은 보지 못했던 제인도 놀랐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밭 군데군데 자리 잡은 핏자국과 부러진 창 같은 전투 잔해물의 양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생각보다 교전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시에나가 사태를 수습하고 있는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시에나를 알아본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에나 님. 어서 오십시오.”

    “네, 안녕하세요. 다들 다친 곳은 없나요?”

    “네, 다친 사람들은 지금 다 병원에 있고 멀쩡한 사람들만 남아서 정리하고 있습니다요.”

    “고생이 많아요. 피해는 여기만인가요?”

    “아니요. 저 뒤쪽도 전부 전멸입니다.”

    남자 하나가 수풀 뒤의 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에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최근 몬스터의 침략이 너무 잦았다. 산맥이 있어 겨울이면 산을 타고 몬스터들이 내려온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피해가 컸던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시에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단을 파견해서 산을 수색해 보는 게 좋겠어.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에나가 바닥에 떨어진 감자를 주워 흙을 털고 상태를 살폈다. 몇 군데 멍이 들고 깨지긴 했지만 감자 자체는 잘 익어 있었다. 초겨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에나가 제인에게 물었다.

    “이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누구지?”

    “리처드와 기네스, 그리고 셋 정도 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주인가?”

    “아니요. 소작농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밭을 빌린 비용도 갚지 못하겠네.”

    시에나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작물이 다 익긴 했으니 멀쩡한 작물들은 전부 마르바스성에 매입하라고 해 줘. 나머지 손해 본 부분에 대해서는 마르바스 영지 앞으로 달아 놓고. 참, 다친 병사들에게는 치료비 전액과 충분한 위로금을 전달해 주고.”

    “그렇게 까지요? 적자가 나도 저는 몰라요.”

    제인이 불만스럽게 묻자 시에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다른 곳에서 수익이 나고 있으니 괜찮아. 우리가 언제 영주민들 세금으로 먹고살았다고. 우릴 믿고 여기 살면서 세금을 내는 이상 우리 역시 영주민들을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러지 못했으니 피해 보상은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거고.”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시에나 님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다른 영주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난 영주 아니잖아, 영주 대리지.”

    시에나가 혀를 쏙 빼물며 장난스레 말했다. 시에나는 누누이 자신이 영주 대리라고 말해 왔지만, 6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사람들은 전부 시에나가 영주라고 생각했다.

    같은 대리인이었지만 시에나는 뒷구멍으로 돈 챙기기에 급급했던 리메리오 남작과는 달랐다. 잠을 쪼개 가며 영지를 부흥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사람들의 삶의 질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학교를 세워 평민들도 양질의 교육을 받게 만들었고, 병원과 의료 보험 혜택을 만들어 평민들도 저렴한 금액에 치료받을 수 있게 했다.

    개발이 한창인 영지인 만큼 직업군도 몹시 다양해졌다. 농부, 상인, 선생님, 기사 등 노력 여하에 따라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소득 수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났고, 크게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귀족만큼 돈을 번 평민도 있었다. 시에나는 편견이나 차별 없이 영지에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이라면 전부 수용했고, 그 덕분에 영지의 성장은 더욱 빨라졌다. 시에나는 그것이 영주민들의 덕이라고 말했지만, 모두가 평민의 의견을 들어 주는 영주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남의 의견을 잘 수용하는 시에나였지만, 그녀는 영주민의 안전에 대해서는 유난히 고집을 부렸다. 여기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않는다는 걸 알기에 제인은 시에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분부하시는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고마워, 역시 제인이야.”

    제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시에나가 윙크를 했다. 그 해맑은 모습에 제인이 결국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식사는 감자겠네요.”

    “같이 먹어 줄 거지?”

    “이왕 먹는다면 전에 해 주셨던 그게 먹고 싶어요. 감자로 만든 튀김인데 튀김은 아닌….”

    “감자튀김인데 튀김은 아니라고? 그게 뭐지?”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도 여러 가지 요리를 해 먹은 탓에 바로 어떤 요리다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 감자를 삶아서 으깬 다음에 밀가루랑 계란, 그리고 뭐였지. 아, 빵가루를 묻힌 뒤 기름에 튀겨 먹는 음식이요.”

    “아하, 고로케 말하는 거구나. 그거 맛있지.”

    “아, 맞아요. 고로케.”

    “알았어. 주방장한테 말해 둘게.”

    “일주일 내내 고로케를 먹는다 해도 여전히 많이 남을 것 같기는 하네요….”

    제인이 넓디넓은 감자밭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초반 시에나가 감자 요리를 개발할 때 시행착오가 좀 있었는데 그때마다 함께 감자 요리를 먹어 준지라 시에나는 제인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미니 감자 축제라도 열까? 우리끼리 먹긴 좀 많긴 하잖아.”

    “그것도 괜찮겠네요. 돌아가서 예산을 짜 볼게요.”

    “그래, 병원 들렀다 바로 돌아가자.”

    “네.”

    시에나는 마차로 돌아가기 위해 밭을 가로지르다 제 신발 끈이 풀려 있는 걸 발견했다.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시에나가 끈을 묶고 있는데, 제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다.

    “시, 시에나!”

    집사가 된 이후 항상 ‘님’ 자를 붙여 왔던 제인이었다. 시에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제인의 새된 비명에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제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시에나의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뚝, 시에나의 머리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응?”

    끈적하고 불쾌한 감각에 뒤를 돌아본 시에나가 그대로 굳었다. 맨티스가 시에나의 뒤에 바싹 붙어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2m 정도의 거대한 사마귀처럼 생긴 맨티스의 단단한 턱이 시에나를 향해 쇄도했다. 시에나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흐, 흐으으….”

    따악.

    불행 중 다행으로 힘이 풀려 넘어지는 바람에 시에나는 맨티스의 첫 번째 공격을 넘길 수 있었다. 허공을 씹은 맨티스의 입에서 이빨과 이빨이 부딪히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하나가 아니었다. 낡은 단검이며 창 같은 조악한 무기를 든 고블린 떼가 사람들에게 달려왔고, 맨티스 역시 파르르 날개를 떨며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푸슛-. 누군가의 살이 터지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미 밭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아악-!”

    “도망쳐-!”

    아수라장 속에서 제인은 나름 시에나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인파에 휩쓸려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대낮에 몬스터의 습격이라니. 그것도 영지 내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시에나는 저를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맨티스의 앞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에나가 끼고 있는 반지에는 아이작이 직접 각인해준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이 들어있었지만 몬스터를 처음으로 대면해 본 시에나는 그 거대한 공포에 질려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엉금엉금 밭을 기어가는 시에나에게 맨티스가 날개를 펼치고 포르르, 다가와 입을 쩍 벌렸다.

    “시에나, 엎드려!”

    목소리가 들린 순간 시에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섬광이 눈앞에 스쳐 가나 싶더니 키에엑, 맨티스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도, 도련님?”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데이몬이었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시에나는 시기적절할 때 와준 데이몬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데이몬의 옆에는 맨티스가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 있었는데, 갈라진 몸 사이에서 초록색 체액이 콸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에나,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시에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기사들이 사람들을 동그랗게 모아 둔 채 몬스터와 대적하고 있었다. 아직 기사 서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앳된 기사 하나가 힘겹게 고블린의 도끼를 막아 내는 사이 다른 고블린이 그의 종아리를 콰직, 물었다. 고블린 하나의 전투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떼로 달려든다는 것에 있었다. 으윽, 기사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문 고블린의 목을 그대로 베어 내었다. 동료를 잃은 고블린들 서넛이 기사 하나를 에워싼 채 달려들었다. 시에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널 안고 저 무리로 들어갈 테니 실드를 켜, 시에나. 7클래스 마법이니 웬만한 몬스터들도 그 안으로 침입하지 못해.”

    “네, 네. 그럴….”

    시에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데이몬은 그녀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하다가 혀를 깨물 것 같은 빠른 속도에 시에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실드를 발동시켰다. 무형의 투명한 막이 시에나와 데이몬을 감쌌다.

    고블린이 그들을 향해 도끼를 던졌으나 실드에 의해 텅, 소리만 날 뿐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고블린이 분한 듯 끼기긱 하는 울음소리를 내었다. 데이몬은 사람들 사이에 도착하자마자 시에나를 무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시에나가 도착함과 동시에 그녀를 가장 안쪽으로 들여 보호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이 엉망이 된 제인이 시에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시에나 님! 괜찮으세요?”

    “나, 나는 괜찮아. 도련님이 시기적절하게 와 주셨어.”

    “정말 죄송해요. 제가 어떻게든 그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아니야. 사람들한테 치이는 거 봤어. 이쪽으로 왔으면 오히려 다쳤을 거야. 잘했어.”

    시에나는 침착하게 실드를 넓혔다. 주름진 막이 팽팽하게 펴지며 기사들이 있는 곳까지 감쌌다. 저클래스의 실드가 걸린 반지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7클래스 마법이 걸려 있는 반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블린과 맨티스는 실드를 깨기 위해 연신 투명한 벽에 손도끼와 창을 던졌지만 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실드 안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며 한결 수월하게 몬스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개중에서도 데이몬의 활약이 대단했다. 데이몬이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들의 몸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푸른 검기를 머금은 검이 깔끔하게 단면을 갈라 내었다.

    “키이익-!”

    맨티스는 무엇이든 으깨 버리는 단단한 턱과 기사의 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앞발, 그리고 날개를 움직일 때 잠시 사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날개를 몹시 빠르게 떨어 이동하는 거였다. 그렇지만 일반인의 동체 시력으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눈 뜨고 맨티스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숙련된 기사답게 맨티스가 사라진 순간 방향을 훑더니 다시 나타나는 맨티스의 심장에 정확히 검을 꽂아 넣었다. 심장 안에 박힌 핵이 그대로 파괴되었는지 맨티스의 눈에 생명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나도 간다-!”

    데이몬의 옆에 루이젠까지 합세했다. 루이젠은 데이몬에 비해 검 실력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센스가 있는 데다 검이 좋았다. 검에는 선명하게 타오르는 붉은 루비가 박혀 있었는데, 화염 계열 마법이 걸려 있는지 루이젠이 몬스터를 베어 낼 때마다 검에서 불길이 치솟아 몬스터를 불태웠다.

    “끼이이이익-!”

    몬스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승리가 역력해지자 기사들의 사기가 더욱 올라갔다. 데이몬은 떠나는 몬스터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끼익거리며 도망치는 몬스터들을 쫓아가 기어코 하나하나 절멸시키는 그 잔혹한 성정에 사람들이 두려움과 경외감을 담은 눈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기세에 눌려 몬스터 백여 마리 중 오십여 마리가 그의 손에 스러졌다. 숨이 끊겨 널브러진 몬스터와 숨죽인 인간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와아아아-!”

    “이겼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데이몬은 숨을 고르며 차분한 눈으로 시에나를 응시했다. 그의 금안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가장 안전한 정중앙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둘 사이로 길을 터 주어 가기가 어렵진 않았다. 달려 나간 시에나가 데이몬을 와락 껴안았다. 데이몬이 어정쩡한 포즈로 시에나를 안았다.

    “시에나, 고블린 피가 묻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네 옷이 더러워지잖아.”

    이 사람이 정말…!

    시에나는 데이몬을 확 노려보았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눈빛에 깨갱하며 꼬리를 내렸다. 조금 전까지 제 몸집의 두 배는 되는 괴물을 상대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약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신 거예요? 오늘 평일이잖아요.”

    “음… 그게, 사실 나 졸업했어. 시에나.”

    데이몬은 조심스레 시에나의 눈치를 보며 사실을 말했다. 시에나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졸업이요?”

    “응.”

    “언제요?”

    “어제.”

    “…그런데 저한테는 알리지도 않으셨고요.”

    “그게, 괜히 수도까지 오는 걸로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고생이라니. 주말마다 내려오는 데이몬의 고생에 비하면 졸업하는 날 한 번 찾아가는 게 대수겠는가. 시에나는 오직 그녀 위주로 돌아가는 데이몬의 신념에 골이 아파왔다. 시에나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짐작했는지 데이몬은 주눅 든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190cm가 넘는 키에 시에나의 두 배는 되는 몸집이었지만 이럴 땐 꼭 어른의 눈치를 보는 어린아이 같았다. 데이몬이 와 준 덕분에 사태가 수습된 것도 있기에 시에나는 잔소리를 하는 대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감사해요. 덕분에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일이 얼마나 있었던 거야?”

    “네? 어떤 일이요?”

    “몬스터 습격 말이야.”

    “처음이에요.”

    “거짓말, 생각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이던걸.”

    데이몬의 날카로운 지적에 시에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몬스터 토벌 등 아카데미에 다니며 전쟁에 대한 경험을 쌓은 데이몬은 시에나의 거짓말에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이번 겨울 들어 몇 번 있었어요.”

    “얼마나 있었는데?”

    시에나는 데이몬의 걱정을 사서 하는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의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조금 줄여 말하기로 했다.

    “세 번 정도요.”

    “그런데 성 밖으로 나왔단 말이야?”

    데이몬의 눈이 뾰족해졌다. 시에나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 대리를 맡기신 건 도련님이었잖아요. 영주가 되어서 어떻게 영지민들이 다치는데 가만히 성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요?”

    “다른 사람이 다 나가도 너는 성안에 있어야지! 내가 뭐 때문에 너와 6년이나 떨어져서 아카데미에 다녔는데!”

    데이몬은 드물게도 시에나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시에나가 억울한 마음에 왈칵 성을 내려다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내리눌렀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그래.”

    데이몬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에나의 말이니 복종하는 듯했다. 당황스러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데이몬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깊은 한숨을 쉬더니 시에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꺅. 뭐 하시는 거예요, 도련님!”

    시에나가 기겁해 발버둥 쳤지만, 단단히 성장한 육체에는 티끌만큼도 방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진귀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데이몬의 살벌한 눈빛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장해물이 많아. 넘어지거나 발을 다칠 수도 있어.”

    고블린이 두고 간 무기의 파편이나 몬스터들의 시체가 있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 다 걷는 길인데 뭐가 그렇게 문제라고!

    시에나는 그렇데 소리치고 싶었으나 더 이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내려 줘요, 라고 데이몬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으나 그는 못 들은 척 시에나가 더욱 편히 안기도록 자세를 한 번 고칠 뿐이었다. 결국 시에나는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데이몬의 넓은 어깨에 새빨개진 고개를 묻고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인, 이리 와. 같이 타자.”

    “아니요… 저는 이쪽 마차를 타고 갈게요.”

    “제인, 제인?”

    마차에 탄 시에나가 제인에게 함께 타자고 손짓했으나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인은 데이몬과 루이젠이 함께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탔다. 제인이 거절 의사를 밝히자마자 데이몬은 가차 없이 마차 문을 닫았다.

    시에나가 어이가 없어 데이몬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시에나 역시 입술을 깨물며 마차 벽에 기대어 돌아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최악의 재회였다.

    * * *

    데이몬이 말없이 돌아오는 바람에 손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사는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인지라 차린 게 많이 부족합니다. 내일은 조금 더 괜찮은 식사를 낼 테니 부디 오래 묵어 주세요.”

    “아아,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온 거 맞는데요, 뭐. 저야말로 전보도 없이 급작스럽게 방문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요리가 하나같이 다 맛있어요. 감자의 본고장답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러나 루이젠은 넉살 좋게 감자 요리가 맛있다며 시에나를 칭찬했다. 시에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데이몬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탁 소리 나게 스푼을 내려놓았다. 데이몬이 그 소리에 움찔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에나가 차가운 눈빛을 보내자 데이몬은 안절부절못했다.

    이렇게 눈치 볼 거면서 대체 화는 왜 낸 건지. 데이몬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는 너무 시에나를 과보호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시에나가 아주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면 이해라도 해 보겠지만, 그녀는 데이몬보다 연상인 데다 수많은 영지민들을 몇 년간 책임져 온 사람이었다.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만큼 위험해지더라도 나서야 하는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그게 오늘이었다. 시에나는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그 밭에 가 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랬기에 시에나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데이몬에게 약속할 수 없었다.

    “식사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아카데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맛있는 식사였어요. 주방장의 실력이 정말 대단한걸요.”

    루이젠의 입에 발린 칭찬을 들으며 시에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마르바스 영지의 주방장이 가진 실력은 물론 대단하긴 하지만 내로라하는 귀족과 황족 자제들의 입맛을 맞추는 주방장보다 뛰어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젠이 그런 말을 하자 가식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호들갑 떠는 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찬이십니다. 조만간 근사한 연회를 열 테니 부디 편안하게 지내며 오래 머물러 주세요.”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 감자 요리만 먹어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워낙 감자를 좋아해서 아카데미에서도 감자 학살자라는 별명이 있었거든요.”

    루이젠의 넉살에 시에나가 결국 후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모습을 루이젠이 멍하니 바라보다 데이몬의 눈살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그리고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영지민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어요.”

    “에이, 저는 데이몬 뒤에서 한 스푼 정도 얹었을 뿐인걸요.”

    루이젠은 남의 호감을 쉽게 얻는 스타일이었다. 자유분방하면서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항상 웃는 낯이다 보니 다가가기가 쉬웠다. 루이젠은 데이몬을 앞에 두고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시에나에게 속삭이는 척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시에나 양이랑 엄청 내적 친밀감이 쌓여 있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쓸데없는 소….”

    “이 녀석이랑 6년 내내 한 방에서 살면서 저는 시에나 양 칭찬밖에 들은 적이 없어요. 오늘도 오면서 시에나 양 칭찬을 얼마나 하는지,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두 분 사이에 생긴 갈등은 어서 풀어 버리시고 해후를 나누세요.”

    “루이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당장 들어가.”

    “어이쿠, 밤새 달려와서 그런지 너무 피곤하네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네에.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시에나 양께서도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데이몬. 잘 자렴.”

    루이젠은 그 말과 동시에 총총 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떠나갔다. 폭탄을 던져 놓고 도망가는 인간을 본 기분이었다. 둘만 남은 복도에는 정적이 일었다. 새침하게 돌아서는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다급히 말을 걸었다.

    “시, 시에나.”

    “…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 * *

    응접실 소파에 앉은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손수 차를 우려 앞에 따라 주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데이몬표 차가 눈물 나게 맛있었다.

    “잘 마실게요.”

    “…화 많이 났지.”

    우아하게 차를 따르는 데이몬의 표정이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시에나는 화가 대부분 풀려 있었다. 그저 좀 어색할 뿐이었다. 데이몬 역시 흥분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차분했다.

    “아뇨.”

    “거짓말.”

    “났었는데 풀렸어요.”

    “정말…?”

    데이몬이 조금 안심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여기에 대해서는 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응. 이야기해.”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이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또 마음이 아팠다. 사실 지금의 감정 상태로는 그대로 두루뭉술 넘어갈 수 있지만, 시에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도련님은 제가 영주 대리를 그만두길 원하세요?”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졸업하시고 이제 완전히 돌아오셨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영지 내에서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러 나가는 것도 싫어하시는 것 같고요.”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난 마르바스 영지에 온 게 아니야, 시에나 너에게 돌아온 거지. 네가 그만두고 싶다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이 만족스럽다면 그냥 그대로 있어도 돼. 어떤 대답을 하던 널 응원할 거야.”

    “그런데….”

    “그렇지만 지금 영지에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문제를 해결한다고 밖에 나간다면 나는 당연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

    “저는… 영주 대리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영주민들이 위험에 빠졌는데 저 혼자만 살겠다고 나 몰라라 하는 건 솔직히 영주 대리 실격이라고 생각해요.”

    “나한텐 네 안전이 가장 큰 문제야.”

    “저는 영주민들의 안전이 가장 큰 문제예요.”

    시에나의 고집에 데이몬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데이몬은 아까처럼 버럭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머리가 아픈지 미끈한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시에나, 넌 오늘 몬스터한테 죽을 뻔했어.”

    “죽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만약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마법이 발동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없었다면 마르바스 영지에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겠죠.”

    “아이작의 마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몬스터가 출몰한다면 어쩌려고 그래.”

    “7클래스 마법으로도 막아 낼 수 없는 몬스터라면 영지 전체가 끝나지 않을까요.”

    타당한 의견에 데이몬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더듬더듬 진심을 짚어 나갔다.

    “그래도 난… 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게 싫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난….”

    “저 역시 도련님이 위험해지는 게 싫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다 큰 도련님을 집 안에만 둘 순 없잖아요. 도련님도 이제 어엿한 성인인걸요.”

    시에나의 조곤조곤한 말에 데이몬의 눈이 침울하게 젖어 들었다. 그 안쓰러운 눈빛에 시에나가 데이몬의 옆에 앉아 그를 살며시 안았다. 데이몬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시에나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몬스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건 맞아요. 그래서 곧 용병을 산에 파견할 거예요. 이유를 알면 더 안전하게 대비할 수 있겠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어. 그래도 항상 조심하도록 해. 이젠 내가 계속 붙어 있을 테니까 웬만하면 날 항상 데리고 나가고.”

    “그럴게요.”

    결국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두 손 두 발 들었다. 배시시 웃는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이 팔을 뻗어 시에나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시에나가 켁, 기침을 하자 데이몬이 급히 시에나를 놓았다. 둘의 눈이 마주했다. 위험한 순간, 유일하게 생각나던 사람. 오랜 시간, 눈만 감아도 떠오르던 사람. 그리고, 마음 저릴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

    “…보고 싶었어요.”

    “나도.”

    시에나가 조용히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더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데이몬의 손이 시에나의 뒷머리를 살며시 감쌌다.

    “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된 입맞춤이었다. 살짝살짝 입술을 건드리던 데이몬이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입술을 꽉 메운 압력에 시에나의 몸이 서서히 동했다. 데이몬 역시 마찬가지인지 시에나의 뒷머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시에나가 데이몬의 뺨을 감싸고 각도를 틀며 그에게 더 밀착했다.

    두 혀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얽혔다. 몸이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길고 달콤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떼는 순간 데이몬이 잠시 손가락을 쭉 뻗었다가 이내 다시 꽉 쥐는 것을 보게 되었다. 손등에 힘줄이 툭 불거질 정도로 세게 쥔 주먹에 데이몬이 인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에나가 그런 데이몬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자 그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시에나가 서서히 데이몬의 손을 제게 가져갔다.

    “시에나…!”

    데이몬의 금안이 크게 뜨였다. 시에나가 제 가슴에 그의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데이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에나를 응시했다.

    “저는… 준비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시에나의 목소리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처럼 결연하기 그지없었으나 데이몬과 마주 잡은 그녀의 손은 긴장감으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데이몬이 목적지를 잃은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온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

    데이몬의 목소리는 먹먹하게 갈라져 있었다. 시에나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과 동시에 데이몬이 시에나를 응접실 소파에 눕혔다. 그 행동은 다소 거칠었지만 데이몬의 커다란 손이 시에나의 뒷머리를 전부 감싸고 있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새가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데이몬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입을 맞춰 왔다. 물이 목까지 잠긴 상태로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시에나는 그의 거친 키스에 숨 쉴 틈이 없었다. 산소 부족으로 숨이 턱까지 차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 잠시만요. 숨 쉴 수가….”

    시에나가 데이몬을 겨우 밀치며 말했다. 데이몬은 술을 마신 것처럼 몽롱하게 꿈꾸는 표정이었다. 촉촉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시에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둥근 이마와 눈꺼풀 위, 코와 볼, 귓불과 턱에 정신없이 입 맞추었다. 시에나의 온 얼굴에 도장을 찍은 데이몬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아….”

    그의 입술이 목에 닿자 온몸이 민감해지며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시에나의 앓는 소리에 데이몬의 몸에 더 힘이 들어갔다. 둘은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있었다. 시에나는 허벅지 위에 닿은 데이몬의 하반신이 뜨겁게 부풀어 있는 걸 느꼈다.

    ‘이게… 그건가.’

    어떻게 생겼는지 교과서의 삽화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이었다. 시에나는 떨리는 양팔로 데이몬의 허리를 꽈악 감싸 안았다. 데이몬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앉았다.

    “아응…!”

    데이몬의 혀과 이가 시에나의 여린 살을 유린했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붉은 꽃이 피어났다.

    “꼭… 꿈을 꾸는 기분이야.”

    “꿈이라면… 일어나야 하는데?”

    시에나가 장난스레 묻자 데이몬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평생 안 일어날래.”

    데이몬이 몸을 조금 일으키고 시에나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중앙에 단추가 열다섯 개쯤 달려 단추로 열고 잠그는 스타일의 살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예쁘긴 하지만 단추로 여닫는 게 워낙 불편해 평소에는 앞에 서너 개만 열고 착의, 탈의했다.

    역시나 데이몬은 단추를 푸는 것에 고전하고 있었다. 그냥 풀어도 빡빡해 잘 풀어지지 않는 단추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풀고 있으니 잘될 리가 없었다. 3분간의 악전고투 끝에 단추 두 개를 겨우 푼 데이몬을 그대로 두어야 하나 시에나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도련님, 제가….”

    “시에나, 이거 아끼는 옷이야?”

    “아니요…. 그냥 평소에 입는 옷인데요.”

    “그럼 열 벌이든 스무 벌이든 더 좋은 걸로 새로 사 줄게.”

    투두둑, 그 말과 동시에 데이몬이 옷 중앙에 힘을 가하더니 그대로 찢어발겼다. 훤히 드러난 가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시에나가 너무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도, 도련님 지금 무슨… 읏.”

    “시간이 아까워서.”

    당황한 시에나가 무어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 데이몬이 그녀의 맨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 번도 남에게 맡겨 본 적 없는 살갗에 데이몬의 입술이 닿았다. 이상한 기분에 시에나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할 말이 입속에서 사라졌다. 데이몬은 뽀얀 젖가슴을 끊임없이 지분거리다 이내 정점에 다다랐다.

    “하응…!”

    데이몬의 입술이 그녀의 유두를 가득 감쌌다. 이상하고 저릿한 기분에 시에나의 허리가 들썩이며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흐으… 기, 기분이 이상해요….”

    “난 돌아 버릴 것 같아….”

    그게 아닌데… 시에나는 반쯤 울먹이며 데이몬이 주는 이상한 감각에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데이몬의 커다란 손안에 시에나의 젖가슴이 가득 쥐였다. 몸 안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자극이 몰아쳐 산호색 유두가 빳빳하게 부풀었다. 분홍색 유실을 입 안에 넣고 혀로 살살 굴리자 몸에 열이 올랐다. 이내 왈칵, 밑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으, 흐읏…! 자, 잠깐만요. 도련님…!”

    시에나의 외침에 데이몬이 그녀의 것을 입 안에 머금은 채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데이몬은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은 어떤 말보다 야했다. 그 야스러운 광경을 도저히 계속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시에나가 두 눈을 제 손으로 감쌌다.

    “저… 저 달거리를 시작한 것 같아요.”

    “달거리?”

    “네, 달거리요….”

    갑자기 이렇게 시작해 버릴 게 뭐람. 제가 하자고 해 놓고 이렇게 뒤로 빼는 모양새라니, 상당히 낭패스러웠다. 그렇지만 아까부터 속옷이 축축해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기에 참고 참다 말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데이몬의 이어진 말은 시에나를 더 당황스럽게 하기 충분했다.

    “달거리라니, 그게 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시에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니까 달거리는요.”

    생리? 월경? 어떤 단어로 말해도 데이몬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다. 나름대로 이 세계의 말에 맞춰 말한 건데도 모른다면, 아예 달거리 자체를 모르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난자와 정자가 어쩌고 하는 성교육을 할 수도 없고. 시에나가 울상을 지으며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여자는 한 달에 한 번 몸의 피를 정화하는 기간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죽은피가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는 거예요.”

    “피가 난다고? 어디서?!”

    데이몬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놀라 되물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시에나를 몹시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디서 나냐고요. 아, 그게요.

    시에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 밑에요.”

    “밑? 밑에 어디?”

    “그…! 그…! 거기 있잖아요!”

    데이몬은 여전히 시에나의 몸 위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이걸 왜 이 자세로 설명해야 하는 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소변보는 곳 말이야?”

    “아니요. 거기랑 비슷하긴 한데….”

    “그럼 설마….”

    “무슨 생각 하시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은데 거기도 아니에요.”

    데이몬의 설명을 촉구하는 얼굴에 고통스러워하던 시에나가 기어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도련님이 제 안으로 들어올 곳… 이요.”

    시에나는 제발 해밀턴 아카데미에서 검술과 경제학뿐 아니라 성교육도 가르쳤길 강하게 기원했다. 아니, 사실 제대로 가르쳤다면 달거리가 뭔지도 모르진 않았겠지.

    “거짓말.”

    데이몬은 완전히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에나의 말을 부정했다.

    “정말이에요.”

    “지금… 그러니까 그, 그곳에서 피가 나고 있다고?”

    “네… 아마도요.”

    “당장 의원을 불러올게.”

    데이몬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에 시에나가 기겁하며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안 돼요!”

    “안 된다고?”

    “네, 절대. 절대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부끄러워서 그래? 아픈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아, 아니요. 그렇지만 이건 보통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겪는 일이에요. 의원을 부를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밑에서 피가 나는 일이… 다 겪는 일이라고?”

    시에나가 데이몬을 배신한다 해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을 것 같았다. 데이몬은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시에나는 하얗게 불타 파스스 사라지는 제 영혼을 붙잡지도 못하고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딱 죽고만 싶었다.

    “네….”

    “어, 언제부터 그렇게 되는 거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피가 나오는 건가?”

    “아니요. 그건 아니고, 보통 가슴이 부풀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에나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마지막 달거리가 끝난 지 3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28일 주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편이라 이렇게 달라지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그리고 원래 나오는 것과는 달리 좀 미끈미끈한 것도 같고, 시작할 무렵이면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현상도 없었다.

    ‘정말 달거리가 맞긴 한 건가.’

    한 번에 밑이 너무 축축해져 달거리라 지레짐작하긴 했지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밑이 흠뻑 젖을 리가 없잖아.’

    데이몬과 키스할 때 때때로 밑에서 끈적거리는 투명한 액이 나온 적은 있지만 이렇게 홍수 난 것처럼 젖어 버린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생리가 아니고 애액이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 난리를 피웠던 것인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에나가 자신의 몸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새 데이몬은 어느새 놓았던 정신을 붙잡았는지 볼을 붉히며 순순히 그녀를 놔 주었다.

    “…몸이 아프진 않아?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라고 말하기도 전 데이몬이 시에나를 공주님처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그는 시에나를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안을 수 있는지에 대해 기술을 터득한 지 오래라 그녀는 푹신한 침대에 누운 것처럼 나른해졌다. 별거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몸이 피로했다. 시에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데이몬에게 기대었다. 데이몬이 시에나의 위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옷이 찢어졌지. 시에나는 내일 와 단추를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몬의 널찍한 품에 안겨 생각하는 사이 이미 시에나의 방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데이몬은 익숙한 자세로 시에나를 안은 채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침대에 누였다. 사람의 체온이 없는 서늘한 침대에 눕자 몸에 한기가 돌았다.

    “에취.”

    “괜찮아? 감기 걸린 거 아니야?”

    데이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바로 나가서 의원을 불러올 기세였다. 시에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잠깐 한기가 들어서 기침한 것뿐이에요.”

    그렇지만 데이몬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밤도 늦었으니 얼른 들어가 보세요.”

    만약에 정말 달거리를 시작한 거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안 됐다. 시에나가 얼른 데이몬을 내보내려고 딱 잘라 말했지만 그는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과보호하지는 않는데, 밑에서 피가 나온다는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건가.

    “저 정말 괜찮아요. 피곤하실 테니 어서 들어가서 주무세요.”

    “나 진짜 가…?”

    “네.”

    “알았어… 갈게.”

    “네, 도련님.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시에나.”

    데이몬은 시에나가 혹 말을 번복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문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에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지만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결국 쓸쓸하게 떠나갔다. 그 시무룩한 뒷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시에나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까지 야무지게 잠갔다. 철컥. 바로 화장실에 달려간 시에나가 급히 속옷을 내렸다. 시에나의 표정이 참담하게 변했다.

    “아니네….”

    속옷에는 투명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가득할 뿐, 달거리를 알리는 붉은 핏자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시에나는 바닥에 철퍽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다. 혹시나 했던 예상이 맞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아, 쪽팔려….”

    씻고 화장실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온 시에나가 침대로 푹 쓰러졌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 구르는 시에나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달거리인 줄만 알고 화들짝 놀라 반응했던 제가 바보 같았다. 그러는 한편 어떻게 이런 게 이렇게 많이 나올 수 있나 싶어 아연했다.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푸하.”

    한참을 벌게진 얼굴을 베개에 묻고 있던 시에나가 숨이 막혀와 몸을 뒤집었다. 대자로 뻗은 시에나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마르바스 깨워야 하나.”

    오늘 데이몬이 돌아왔으니 약속대로였다면 그가 잠든 새에 부르는 게 맞았다. 그러나 오늘의 일에 대해 무언가 언급한다면 시에나는 도저히 견딜 수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음에 부르자, 다음에.”

    어차피 도련님 이제 아카데미도 졸업했잖아.

    6년 동안 보며 마르바스와도 제법 정이 들었던 시에나였다. 조만간 다시 불러 이야기를 해 봐야 하긴 하겠지만 적어도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일단 자고 다시 생각하자.”

    시에나가 결심한 표정으로 혼잣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이 복잡한 머리가 조금은 정리되어 있겠지. 시에나는 흐트러진 이불을 똑바로 덮고 눈을 감았다. 고요한 달빛이 둘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요요하게 창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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