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꿈나무에게 집착 받고 있습니다-8화 (8/14)

<08>

데이몬이 떠난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시에나는 아침부터 느껴지는 입김에 겨울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년 차까지만 해도 주말과 방학은 마르바스성에서 보냈던 데이몬은, 3년 차부터는 방학 때만 오더니 점점 방문하는 빈도가 줄어들어 마지막 1년은 아예 방문을 하지 않고 있었다.

“후우….”

바쁘겠지, 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약초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로 들어서며 시에나가 종종 수도에 갈 일도 있었지만, 좀처럼 아카데미를 방문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걸까.”

분명 데이몬이 아카데미에 가기 전만 해도 산적의 메이스 앞에 뛰어들 정도로 아주 용감했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되면 될수록 겁이 앞선다. 손안에 쥔 반짝이는 은모래가 바람에 솔솔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은모래가 떨어진 자신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게 되어서 데이몬은 소홀해진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시에나는 가라앉은 기분을 애써 끌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자 밖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니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 마차는….”

분명 데이몬이 타고 있는 마차였다. 그는 언제나 저 마차를 타고 돌아오곤 했다.

“세상에.”

시에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슬리퍼에 잠옷 차림으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두근거림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미 밖에 나와 이제는 성인이 된 영주를 맞이하고 있었다.

“도련님!”

시에나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마차에 다가섰다. 마차가 멈추고, 이윽고 데이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1년 새에 더 커져 있었다. 이제는 완전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이몬의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마차 문을 열자마자 데이몬이 앞에 있는 시에나와 눈을 마주쳤다.

“…시에나.”

데이몬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시에나는 그제야 자신의 꼴이 몹시 초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너무 기뻐서 그만….”

“잠깐 비켜 줄래?”

“네, 네. 그럴게요….”

시에나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데이몬은 마차에서 내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인한 검사의 손 위에 섬섬옥수 같은 작고 하얀 손이 얹어졌다.

“여기가 마르바스성이군요.”

“그래, 많이 부족하지만 편히 지내도록 해.”

여자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도 외모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비의 날개같이 나붓하게 팔랑거리는 속눈썹 밑으로 보이는 연한 분홍색 눈동자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가느다란 몸. 보자마자 복숭아가 떠올라 입 안이 새콤해지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눈동자 색과 같은 연분홍색의 하늘하늘한 시폰으로 된 드레스 위에 하얀 모피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초라한 시에나의 모습과 비교가 되었다. 시에나가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물러나는데, 여자가 고개를 들더니 시에나를 수줍게 응시했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그냥 나를 대신해 내 일을 잠시 도와줬던 하녀야.”

“아아, 그러면 인사를….”

“됐어. 그런 건 나중에 하면 돼. 입술이 새파래.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은 그녀를 이끌고 시에나를 지나쳤다. 시에나의 얼굴이 슬픔으로 젖어 들었다.

“도련님, 잠시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나 데이몬은 시에나의 말을 무시하며 집사를 향해 말했다.

“나와 약혼할 사람이야.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잘 부탁해요.”

여자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집사를 향해 말했다. 얼떨떨해하던 집사의 광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죠.”

시에나는 울컥하며 데이몬의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도련님! 저희…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함께하기로 했잖아요.”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차가운 눈빛에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 말을 진짜로 믿었어? 내가 평민인 너랑 그렇게 될 리가 없잖아. 난 이래 봬도 황족인데.”

“어떻게,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거추장스럽게 하지 말고 저리 비켜. 씨씨, 들어가자.”

“네에….”

데이몬의 차가운 눈빛과는 다르게 씨시라고 불린 여자는 시에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더 모멸감이 들어 시에나는 차가운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그런 시에나를 두고 수군거렸다.

“멍!”

그때 어디선가 강아지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바스 영지에 강아지는 없는데. 시에나는 수풀에서 빠져나와 시에나를 향해 짖는 강아지를 보며 깜짝 놀랐다. 강아지는 시에나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 같아 시에나는 몸을 웅크리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꺄아악!”“왕!”

강아지와 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시에나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허어억!”

시에나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등줄기 밑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꿈이었구나….”

그러니까 이건… 개꿈이라는 거지.

시에나가 어이가 없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생생하고 재미없는 꿈이 다 있담.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꿈에 시에나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계속 입을 벌리고 끙끙대었는지 목구멍이 꺼끌꺼끌했다.

“물….”

시에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에 물을 찾았다. 그러나 보지도 않고 들이켠 컵에는 고작 서너 방울만이 있을 뿐이었다. 너무 적어 삼켰는지도 모르겠는 물방울은 오히려 더 갈증이 나게 만들었다. 결국 시에나는 물통을 들고 방을 나서게 되었다.

“어둡네….”

곧 새벽이라 따로 촛불을 보충해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 넘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 시에나가 마나석 전등을 점등시켰다. 시에나가 전등을 높이 올리자, 저 먼 복도까지 전부 환하게 밝혀졌다.

“어…?”

시에나는 계단 앞에 선 검은 그림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검은 그림자가 석상처럼 굳었다.

“시에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에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도련님이셨구나. 저 놀랐잖아요. 이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시, 시에나.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꿈에서 네가… 아, 젠장.”

시에나가 다가갈수록 마나석을 넣은 전등이 데이몬의 손에 있는 것을 환하게 비추었다. 빠른 속도로 데이몬이 그것을 등 뒤로 숨겼지만, 시에나는 전부 보았다.

그러니까, 저건. 자신이 알기로는… 데이몬의….

“오밤중에 속옷은 대체 왜 들고 계신 거예요?”

시에나의 직구에 데이몬의 등에서 식은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시에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 뒤늦게 학교에서 들었던 성교육이 떠올랐다.

‘남자가 어느 정도 몸이 성숙하면 수면 중에 성적 흥분을 하는 꿈을 꾸고 사정을 하게 된다. 이는 매우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므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단다.’

끓는점을 넘어선 시에나의 얼굴이 펑 터졌다. 시에나는 자신의 입을 찰싹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요망한 입! 왜 괜히 그런 말을 해서는….

데이몬은 이제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미루어보아 시에나가 한마디만 더 하면 저 창문을 와장창 깨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 도련님. 남자의 몸이 어느 정도 성숙하면 그런 꿈을 꿀 수 있대요. 야한 꿈을 꾸는 누구나 몽정을 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이어지는 시에나의 팩트 폭력에 제대로 얻어맞은 데이몬이 혼잣말로 작게 속삭였다.

“시에나, 차라리 때려….”

성교육을 해 주었던 선생님들처럼 잘 설명시키고 안심하게 하고 싶은데 이런 일을 겪어 보는 건 시에나도 처음인지라 말도 너무 이상하게 나왔다. 둘 사이로 기묘한 침묵이 자리를 지켰다. 만난 이후로 가장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둘은 섣불리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 그럼 나 이만 가 볼게.”

“네! 네. 저도 들어가 볼게요.”

데이몬의 말에 시에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고개를 돌리며 삐걱삐걱, 뒤로 돌아 걸었다. 그런 시에나의 뒷모습을 데이몬이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씁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시에나가 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드려 매트리스를 팡팡 쳤다. 빵빵하게 차 있던 거위 털 베개에서 깃털이 고통의 비명을 토하며 조금씩 빠져나오자 시에나가 베개를 향한 가혹한 폭력을 멈추었다. 농익은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이 여전히 뜨거웠다. 온 정신이 아찔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시, 시에나.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꿈에서 네가… 아, 젠장.’

“분명 꿈에서 내가 나왔다고 했지….”

너무 놀라 생각 없이 뱉은 말이겠지만 그 말은 시에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와 박혔다. 평생 기억하게 될 것 같은 말이었다.

“내일 도련님 얼굴을 어떻게 본담….”

내일이 아카데미로 떠나는 날인데. 그를 잘 배웅할 수 있을까. 시에나는 갑자기 모든 자신감을 잃었다.

밝게 웃으며 보내 줄 생각도 했다. 그게 안 되면 조금은 훌쩍이며 낭만적인 이별을 맞는 것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일 데이몬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시에나가 베개 속으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도련님도 남자였구나….”

당연히 남자인데, 데이몬의 키가 꼬꼬마였을 때부터 함께해 와서 그런가, 그가 남자처럼 느껴지지 않았었다. 분명히 데이몬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동정과 애정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까 그 순간을 계기로 무언가가 달라졌다.

둘이 나이가 들면, 데이몬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둘은 성(性)적인 무언가를 하게 되는 걸까.

아직 가벼운 키스조차 가슴이 터질 듯이 뛰는데, 그… 어떻게 그런 짓을.

한번 상상을 시작하자 물꼬를 튼 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생각들이 튀어나왔다.

“아냐, 설레발치지 말자. 제발 생각 좀 그만해 시에나.”

시에나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상상을 멈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온몸에서 김이 났다. 시에나는 생각만으로도 녹초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휴….”

시에나의 방과 데이몬의 방에서 동시에 한숨 소리가 들렸다. 각자의 방에서 뜨거운 얼굴을 식히느라 분주한 밤이었다.

* * *

“헉.”

분명 밤을 새우다가 하늘이 옅어지는 걸 보고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상쾌했다. 흠칫 놀라 밖을 바라보니 하늘이 벌써 환했다.

“젠장.”

시에나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그대로 나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어젯밤 재수 없는 꿈이 생각이 나 받아 둔 수돗물로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꼼꼼하게 기초 화장을 했다. 나름 제일 좋은 옷까지 차려입은 후 식당에 가자 모두가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늦었습니다.”

“괜찮다. 배고플 텐데 어서 식사하게.”

공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나는 공작과 로하엘의 사이에 난 빈자리에 앉으려다 그 맞은편에 데이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를 지나쳐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앉으려고 했지만 공작이 그런 시에나를 말로 붙잡았다.

“거긴 음식이 너무 멀 텐데, 이리 앉지.”

“예?”

당황해서 삑사리가 난 시에나에게 공작은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쪽 음식은 좀 식었어. 여기에서 먹는 게 그나마 따뜻할 테니, 이리 오게나.”

공작이 의자까지 빼 주며 에스코트하자 거부할 수 없어진 시에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로 향했다. 팔과 다리가 동시에 삐걱삐걱 움직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사이에 무얼.”

공작의 배려에 시에나는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흘긋 바라본 데이몬은 정신을 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눈앞을 휘휘 저어도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나 있을까 싶었다. 뭘 먹어도 얹힐 듯한 기분에 시에나는 최대한 소화시키기 쉬운 빵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넋이 나간 듯 보였던 데이몬도 빵 바구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시에나와 손끝이 부딪쳤다. 화들짝 놀란 시에나와 데이몬이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미, 미안.”

“아니에요….”

그 민망한 분위기에 사람들이 둘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를 챌 정도였다. 시에나는 목이 멜 정도로 빵을 입 안에 욱여넣으며 오늘 아침에 짠 신선한 염소젖으로 목을 축였다.

“도련님, 짐은 다 챙기셨습니까?”

“…어?”

“짐 다 챙기셨어요?”

“짐. 아, 짐. 그래, 챙겼지.”

데이몬은 평소와 달리 말을 더듬으며 로하엘에게 답했다. 로하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더 캐묻진 않았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지 데이몬이 중앙에 있는 물통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갈증이 났던 건 시에나도 마찬가지라 물을 마시려 물통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기에 꼭 데이몬의 손이 시에나의 손등을 감싼 모양새가 되었다.

드르륵.

데이몬이 불붙은 듯 손을 떼면서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이몬?”

공작이 그런 데이몬의 이상 반응에 놀란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시, 실례했습니다. 제가 지금 못 챙긴 짐이 생각이 나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드시길.”

데이몬은 대답도 듣지 않고 하늘하늘한 허수아비처럼 휘청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술을 마신 건 아닌지 의심이 갈 만큼 위태위태한 걸음걸이였다.

“오늘 도련님이 좀 이상하시죠?”

“네. 꼭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시에나, 너는 뭐 알고 있는 거 없니?”

“네?!”

갑자기 불똥은 시에나에게 튀었다. 시에나는 당황하며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강한 부정이 사람들의 오해를 더 사게 만들었지만, 적당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싶었던 사람들이 더 캐묻지 않아 주었다. 사람들의 센스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시에나는 반쯤 울상이 되어 포크질을 했다. 애꿎은 돼지고기가 점점 걸레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좋아….

* * *

그땐 몰랐다. 이 어색함이 데이몬이 출발하기 직전까지 갈 줄은.

시에나는 데이몬을 배웅하러 나온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데이몬의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준비는 금방 끝났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햇빛 아래 서 있는 데이몬의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시에나가 쭈뼛거리며 데이몬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공작이 그런 그녀를 앞질렀다. 시에나가 숨을 들이키며 걸음을 멈추었다.

“데이몬, 몸 조심히 잘 지내야 한다.”

“예, 숙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편지하겠습니다.”

“그래, 항상 네 곁에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데이몬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항상 곁에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혹 누군가 데이몬을 괴롭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자신이 그 뒷배가 되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정말 어지간히 데이몬이 예쁜 모양이었다.

화기애애한 그들의 곁으로 로하엘이 다가섰다. 로하엘은 스무 권도 넘는 책을 가볍게 들고 와 데이몬에게 넘겨주었다. 데이몬이 책을 받아 들면서도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다 뭐지?”

“제가 예전에 아카데미에 다닐 때 공부했던 서적들입니다. 오래되긴 했어도 교수님이나 실험에 대한 팁도 넣어 두었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맙네.”

손때 묻은 책들을 넘겨주는 데에는 적지 않은 고민이 필요했을 텐데 로하엘은 오히려 더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이번에는 아이작의 차례인지 데이몬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 아이작이 심플한 스타일의 브레이슬릿 하나를 건네주었다.

“실드와 빛 마법이 걸려 있는 브레이슬릿입니다. 어두운 곳에 가셨을 때 쓰시면 유용할 거예요.”

“신세를 졌군.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데이몬은 미안한 기색으로 아이작에게 말했다. 아이작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용하게 써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다음 방학 때는 더 고위 마법으로 바꿔 드릴게요.”

“이걸로도 충분해. 잘 쓸게.”

모두 차곡차곡 선물을 주는 탓에 시에나는 빈손인 자신이 괜스레 원망스러워졌다. 사용인들 몇몇까지 자그마한 선물을 데이몬에게 건넸다. 데이몬은 그것들을 전부 소중하게 갈무리해 품안에 넣었다.

빈손으로 나서기가 어쩐지 민망해 시에나는 결국 끝까지 나서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도 더 만들 것을. 마음이 쓰렸다.

“도련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마부가 출발을 재촉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데이몬이 누군가를 찾는 듯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시에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나오지 않았다. 데이몬이 결국 아쉬운 얼굴로 마차에 올라섰다.

“도련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자주 놀러 오시고요!”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데이몬은 마차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시에나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깟 부끄러움이 뭐라고.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디디며 사람들 사이에서 뛰쳐나갔다.

“어엇, 시에나?”

“도련님!”

시에나는 멀어지는 마차에 대고 크게 데이몬을 불렀다. 다들 깜짝 놀라 그런 시에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목이 터져라 데이몬을 부르며 달려 나간 시에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마차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시에나와 20m쯤 떨어진 곳에서 마차가 멈추기도 전,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며 데이몬이 뛰쳐나왔다.

“시에나!”

“도련님…!”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바람에 숨이 차 새빨개진 시에나의 얼굴을 본 데이몬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달리기 시작했다. 시에나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이 그 장면을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단숨에 시에나에게 달려온 데이몬이 그녀를 그대로 품에 안았다.

“어머…!”

“세상에…!”

“휘이익-!”

그들은 낭만적인 로맨스 드라마를 보는 사람처럼 설레하며 둘을 지켜보았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꽉 끌어안고 놓을 줄을 몰랐다. 데이몬에게서는 숲과 겨울의 냄새가 났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어.”

꽉 껴안은 데이몬의 목소리에는 안도가 묻어나 있었다.

“저는 드릴 게 없어서…. 괜히 나서기가 민망했어요.”

“그런 게 어딨어.”

시에나의 차가운 뺨을 감싸 안으며 데이몬이 말했다. 뺨을 가득 감싸고도 남을 만큼 데이몬의 손은 커져 있었다.

“전부 네가 만들어 준 거야.”

“…네?”

“저 선물들도, 나를 배웅하는 사람들도, 아카데미에 가게 된 나의 미래도 전부 시에나 네가 만들어 준 거야.”

한없이 진지한 데이몬의 모습에 시에나는 할말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시에나를 품안에 쏙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데이몬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네가 이미 준 것만으로도 나는 내 인생 전체를 바치고도 모자라니까.”

“도련님….”

“네가 그냥 있어주는 것 자체로도…내게는 구원이야.”

데이몬처럼 잘 말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꽉 막혀서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에나는 대답 대신 데이몬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데이몬이 벅차오르는 감정에 입술을 깨물며 시에나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금방 올게.”

“네.”

“꼭, 자주 올게.”

“…네.”

“보고 싶을 거야.”

데이몬의 진심 어린 말에 시에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쁘게 접은 눈 밑으로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저도요.”

데이몬이 시에나의 머리칼을 감싸 안으며 그녀의 이마 위에 뜨겁게 입 맞추었다. 데이몬의 입술이 차갑게 얼어 있는 시에나의 이마를 녹였다. 시에나가 데이몬을 더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안았는데도 데이몬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한참 동안 서로를 빈틈없이 안고 있던 둘이 서서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도련님, 잘 다녀오세요.”

“응. 도착하자마자 편지 쓸게.”

“네. 저도 답장할게요.”

데이몬은 천천히 마차로 향하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서 시에나를 보았다. 시에나는 그때마다 데이몬을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윽고 데이몬이 마차에 타고, 출발한 마차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시에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런 시에나의 어깨 위에 따뜻한 숄이 얹어졌다.

“할머니…?”

“이제 들어가자꾸나, 시에나. 춥다.”

할머니의 따뜻한 말에 시에나는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할머니가 고마웠다.

“집에 가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오늘은 쉬는 게 어떻겠니?”

시에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수업 들을래요. 도련님이 열심히 하시는 만큼 저도 더 열심히 해야죠.”

시에나의 기특한 말에 노파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제 들어가자.”

“네.”

시에나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문득 마차가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았다. 눈 위로 마차 바큇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고, 눈 쌓인 산 뒤에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높고 청명했다. 새파란 하늘을 마냥 바라보던 시에나가 이내 뒤돌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 * *

“야, 너 수석이라며?”

첫 수업을 마친 데이몬이 책을 챙기고 돌아가려는데 한 남자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곱슬거리는 샛노란 금발이 애교 있게 이마 위로 늘어져 있었고,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듯한 새파란 눈과 하얀 피부는 귀공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데이몬은 그를 바라보며 문득 시에나를 떠올렸다. 금을 녹인 실타래 같은 보드라운 금발과 자신을 향한 애정을 가득 담은 푸른 눈동자가 벌써 미치도록 그리웠다. 편지 써야지. 데이몬은 짐을 챙긴 뒤 그대로 뒤돌았다.

“어, 야. 야!”

그러나 남자아이는 집요하게 데이몬에게 따라붙었다. 그는 데이몬에 비해 한 뼘 정도 작았는데, 데이몬이 또래에 비해 한 뼘 반 정도 큰 걸 생각하면 작은 키는 아니었다. 그를 반쯤 투명 인간 취급하며 무심한 표정으로 복도를 걷는 데이몬의 앞을 소년이 막아섰다.

“야, 사람 말을 왜 그렇게 무시하냐?”

“비켜.”

데이몬이 귀찮아하는 게 역력히 보이는데도 그는 화난 기색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와 나랑 동갑 맞아?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지?”

오히려 감탄하며 데이몬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데이몬이 인상을 구기며 그의 손을 찰싹 쳐 냈다. 그는 아프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파!”

“무례하기 짝이 없군.”

“넌 목소리도 멋지다.”

그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데이몬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기운 빠지는 녀석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 이름은 루이젠 테이모스야, 넌?”

“알 거 없잖아.”

루이젠의 옆으로 빠져나가려는데 또다시 그가 따라붙어 데이몬에게 조잘댔다.

“사실 그건 그래. 네 이름이 궁금한 건 아니거든.”

“…….”

“그럼 뭐가 궁금한지 물어보고 싶지 않아?”

“별로.”

“네가 시험 칠 때 사실 나 옆자리에 있었다? 근데 네가 시험 보기 전에 뭔가 향수 같은 걸 발랐었잖아. 그렇지?”

시에나가 선물한 페퍼민트 롤온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데이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향이 상쾌해서 시험 보는 데 엄청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 그래서 덕분에 턱걸이로 합격할 수 있었어! 다 네 덕분이야.”

시에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줘야겠다며 데이몬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데이몬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본 루이젠이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그 바람에 콧잔등에 별처럼 박혀 있던 주근깨가 더 선명해졌다.

“그렇군.”

“그래서 아카데미 다닐 때 쓰려고 시장을 다 돌아다녔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게 없더라.”

그럴 수밖에. 그 제품은 시에나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단 하나뿐인 물건이니까. 루이젠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데이몬은 슬쩍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래. 이건 내 소중한 사람한테 선물 받은 거야.”

데이몬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강조하자 루이젠이 아쉽다는 듯 쩝, 입맛을 다셨다.

“혹시 그거 몇 개 더 만들어서 팔 생각은 없대?”

“없어.”

데이몬은 딱 잘라 대답한 후 다시 루이젠의 옆으로 비켜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데이몬의 얼굴을 한 번씩 훑으며 지나갔다. 루이젠은 포기했는지 더 따라오지 않았다. 방해받지 않고 방까지 돌아온 데이몬이 문 앞에 선 루이젠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어쩜 이런 같은 인연이! 나도 이 방인데 말이야.”

그는 열쇠로 문을 따고는 얄밉게 웃으며 안으로 쏙 들어갔다. 기숙사는 1년에 한 번씩만 방을 바꿔 준다. 그걸 제외하고는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면 협동심을 기르라는 이유로 방을 잘 바꿔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어쩐지 이번 한 해가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데이몬이 낮게 한숨지었다.

“야, 나 진짜 테이모스 가문 차남이거든?”

루이젠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데이몬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루이젠의 얼굴이 더 볼만해졌다.

“너 진짜 몰라? 대상인 가문으로 유명한 테이모스 후작가 말이야.”

“모르는데.”

“와, 너 진짜 촌에서 왔구나. 네가 입고 있는 그 교복도 우리 상단에서 유통하는 거야. 여기 있는 이 책상도, 의자도, 침대도 다 우리 상단에서 유통하는 거고.”

루이젠이 침대를 팡팡 치며 열변을 토했다. 데이몬은 그러거나 말거나 책상 앞에 서서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세상 모든 물건을 판매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테이모스 후작가에서 나고 자란 이 루이젠 테이모스 님이 그 물건을 딱, 알아봤단 말이야.”

“그게 뭐?”

“그게 뭐가 아니지! 진짜 성공할 가능성이 엄청 높은 물건이라고! 너 혼자 가지기엔 너무 아까운 물건이란 말이야.”

“그래서.”

“판매 좀 하게 해 주라. 아님 나한테만 하나 팔아.”

비굴한 루이젠의 태도에도 데이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편지지를 꺼내어 펜에 잉크를 묻히고 어떤 말로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루이젠이 바닥에 엎어져 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했다.

“팔게 해 줘-. 팔자-. 같이 돈 벌자-. 응? 팔즈아-!”

데이몬은 진지하게 마법을 배울까에 대해 고민했다. 저 천둥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를 당장 다물게 할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데이몬은 주저 없이 사용했으리라.

“좀 조용히 해.”

“그럼 팔 거야?”

“아니.”

루이젠이 다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처음으로 사람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느꼈다. 도저히 편지에 집중할 수 없자 데이몬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팔… 으악!”

데이몬이 그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쿵 밀어붙였다. 처음 당해 보는 멱살잡이에 루이젠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대로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으면 좋으련만 루이젠은 아쉽게도 시에나와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벽에 맞아 뒤통수가 얼얼했는지 축 늘어진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처음으로 또래의 눈물을 본 데이몬이 화들짝 놀라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쿵, 루이젠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데이몬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는데 루이젠이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 나는 그냥 너랑 친해지고 싶고 그걸 가지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네가 이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의외로 루이젠의 입에서 나온 건 사과였다. 그러나 그렇게 징징대놓고 화낼 줄 몰랐다니. 얼마나 오냐오냐 키웠던 건지. 데이몬이 혀를 찼다.

“10분을 징징거려 놓고 몰랐다고?”

“응. 그렇지만 너도 참 대단해. 보통 1분만 징징대면 다 들어주던데.”

데이몬이 힘 빠진 목소리로 묻자 금방 기가 살아난 루이젠이 다시 그에게 쫑알거렸다.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테이모스 후작을 짤짤 흔들며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데이몬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젠 조용히 할게. 숨죽은 듯 있을게.”

퍽이나 그러겠다 싶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루이젠이 완전히 풀이 죽어서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시에나 같기도 하고 제 어린 시절 같기도 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데이몬이 결국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일단 한번 물어나 볼게.”

데이몬이 지나가는 듯 말하자 그의 표정이 이내 햇빛을 머금은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펴졌다.

“정말?”

“그래. 바쁜 사람이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진짜 고마워!”

루이젠이 데이몬을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데이몬이 기겁하며 그를 떨어뜨려 놓았다.

“대신 앞으로 나에게 뭘 원한다면 절대 징징거리지도 말고 칭얼대지도 마. 정식으로 요청하도록 해.”

“응, 알았어. 우리 그럼 악수하자.”

“악수?”

데이몬이 루이젠을 종잡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응, 악수. 친구가 된 기념으로.”

“난 네 친구 아닌데.”

“그럼 한 방을 쓰게 된 기념으로!”

루이젠은 시무룩해하지도 않고 바로 다른 이유를 댔다. 붙임성 하나는 어마어마한 녀석이었다. 데이몬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싶어 그냥 손을 잡아 주었다. 고생 한 번 해 본 적 없는 듯 희고 고운 손과 막 굳은살이 잡혀 가는 손이 마주 잡혔다.

“신난다. 우리 저녁때 몰래 빠져나가서 시장 구경 갈래? 내가 구경시켜 줄게.”

“아니.”

“왜애애, 가자아-.”

이제 막 아카데미 생활을 시작한 두 소년에게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티격태격하는 두 소년을 구경하던 찌르레기 몇 마리가 불어오는 봄바람에 앞다투어 포르르 날아갔다. 날아간 가지 끝에는 겨울을 이긴 꽃봉오리가 올라와 있었다. 3월의 어느 볕 좋은 날이었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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